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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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하학적인 작품의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추상이 이내 구체적으로, 아니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추리문학에 리얼리즘을 지펴낸 작가의 역량 덕택이다. 그래서 거창하게 그의 소설에‘사회파’란 수식이 따라다니는 터일 것이다. 점을 촘촘히 이으면 선이 되듯이 흩어져있는 정황을 연결하면 거대한 네트워크, 어떤 사회적 연결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동기와 결과의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끈질긴 인내와 노력을 요구한다. 소설은 이처럼 무관한 점들을 이어 선을 그리는 작업이다. 그 점들의 연관관계를.

 

1. 추리의 구조

 

아마 이렇듯 무심한 ‘점’들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무심성의 가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것들의, 혹은 그 연결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의 관련성과 가능성이 수면위에 드러나는 순간 아~하고 경탄의 외마디가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그런 감동의 견인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완전범죄’다. 정황적 증거조차도 오리무중이고, 직감과 추정에 의한 용의자의 행선 추적에서도 아무런 흠결을 찾아 낼 수 없는 완벽함만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 무결점의 완전성이 오히려 범죄적임을 감지하는 경찰의 직관이 소설을 끌어가야 할 정도이다. 분명 범죄로 여겨지지만 범죄로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건, 그리고 확신되는 용의자이지만 사건에 연결시킬 어떠한 빈틈이나 실책도 발견되지 않는 그런 사건이 있다. 바로 이것에 도전하는 것이 이 소설이고, 독자를 흥분시키는 요소이다.

 

큐슈의 한 해변가에 정사(情死)로 추정되는 나란히 누운 연인의 죽음이 뉴스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어 단순한 정사로 판단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목격이 예사롭지 않다. 무수한 선로에 들고나는 열차가 쉴새없는 역에서 건너편 기차의 사람을 명확하게 발견하는 것은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소설의 추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범죄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가 있다. 그 용의자는 사건이 일어나던 날, 사건 현장인 일본의 남단인 큐슈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인 북부 홋카이도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이처럼 용의자의 증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임새 있게 맞추어져 있다. 이제 독자들은 소설 속 수사관과 함께 이 완벽한 알리바이들의 오류를 밝혀내는 데 동참해야만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은 더 이상 흥미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사건의 범인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누군지는 이미 독자들이 알아버린 상태로 시작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곤 용의자가 갖추어 놓은 무흠결(無欠缺)의 증거들, 알리바이를 하나씩 파괴해 나가는 작업이다.

 

도저히 깨뜨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완벽한 알리바이들을 깨어나가는 쏠쏠한 재미의 대단함이야말로 이 작품 최고의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각종 트릭들마저도 작중(作中) 수사관의 입을 통해 발설될 정도이고 보면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알리바이의 견고한 조성에 대한 작가가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런 것들을 깨부수는 재미이니 오죽 희열이겠는가. 그런데, ‘알리파이 파괴’라는 추리문학의 이 막강한 테크닉에 리얼리즘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현실 속 우리들의 사회와 삶 속으로 파고든다.

 

2. ‘상식의 맹점’을 지닌 현실 사회

 

이제 안개 속에 흩어진 점들이 선으로 연결된다. 관청가의 고급 주점과 여급, 그곳에 드나드는 단골 고객인 중년의 사업가, 말기 폐환자로 요양지에서 소설을 읽고 수필을 쓰며 소일하는 그의 아내, 정부 한 부처((OO省)에서 실무의 잔뼈가 굵은 실무관료와 그의 상급자들..., 소설이 산만하게 뿌려놓은 이러한 배경들이 하나의 알리바이가 파괴될 때마다 하나의 선이 되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사건의 출발점인‘정사(情死)’란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마감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니 여기에 범죄적 시선을 메어두기란 비상식적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한다. 아마 이 소설의, 작가의 관심은 작품의 중심구조인 알리바이의 파괴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지닌 이 상식이란 것의 파괴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이해인가를 말하려는 데 있다 해도 무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식이 지닌 맹점을 보여주고 그것의 깨뜨림이 바로 지금의 우리 보통 사람들이 지속해야 할 사회적 책무임을 인식케 하는 치밀한 기획임인 것이다.

 

신문의 지면과 방송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들, 특히 정부 및 여타 국가기관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등의 뇌물수수를 비롯한 각종의 부정하고 부패한 사건 소식이 연일 잇닿는다. 그래서 감사원 결과가 발표되고, 검찰이 일선에 등장하여 엄중한 수사 방침을 말하지만, 매양 사람들이 수긍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한 결과만으로 흐지부지 종료되거나, 말단이나 중간실무자급의 적당한 희생양을 구속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 현실의 리얼리티를 반영하고자 한 것인지, 용의자의 정교한 모든 알리바이를 무너뜨려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아무런 증거도 확보한 것은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추정과 정황의 확신만을 하게 되었을 뿐 법적 증거라 할 수 있는 물증은 확보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부처(OO省) 과장대리의 정사로 부정사건에 연루되었던 해당 부처의 상급자들은 오히려 승진하여 더욱 확고한 권력층이 되었다는 소문만을 전한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이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것들의 실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는 모두 자살인가? 다수가 좇고 인정하면 옳은 것인가?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건가?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무수한 욕망의 산물들은 과연 정당한 것들인가? 우리들이 인정한 상식 중 엄청나게 많은 것들은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 것이며, 나아가 부정당하기 까지 한 것일 수 있다. 우린 이 상식의 맹점으로 인해 다수의 실패라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 상식의 파괴라는 다수의 특권을 우리들 스스로 되돌아보는 고통을 수용하지 않는 이상 사회의 건강성이나 정의는 공염불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처럼 현실을 비틀어대는 양 현실적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실체적 의미에서 영원한 미제(未濟) 사건에 머물고 마는 것인데, 정사는 자살이란 대중의 상식이란 눈높이에 맞추면 당연히 범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뛰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작가의 조치이며, 작품의 완성도는 급작스럽게 높아지고, 주제의식은 실천적 철학에 가닿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독특한 추리구조 양식에 매혹되어 책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적 현실과 이성의 무능지대라는 의외의 호소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대단한 작가를 만났고, 흥미롭고 시사성 높은 주제의 작품을 만났음에 흡족한 즐거움을 숨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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