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115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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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를 통해 사실을 재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작품을 읽는 내내 고미술품 복원가인‘훌리아’라는 여성을 화폭 속으로 매몰시킨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한 점의 15세기 플랑드르 패널화와 화가‘피터 반 호이스’라는 허구의 실존 여부를 찾으려 애썼으니 말이다. 그림 속의 체스를 두고 있는 기사와 대공(大公), 그리고 창가에 검은 옷을 입고 책을 읽는 여인, 이렇게 세 명의 인물에 내재된 은밀한 역사의 암시는 화자와 더불어 그림의 세계를 거닐게 된다.

 

경매를 위해 복원작업을 준비하던 훌리아는 화가가 그림으로 덮어버린 한 줄의 라틴어 문장을 발견한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이 의혹 가득한 문장은 화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되고 그림 속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으로, 또한 미술품에 대한 진정한 가치의 부여라는 사명까지로 발전한다. 헤어진 고미술사가를 찾아 작중 인물들의 역사적 실존 여부와 자료를 건네받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인 골동품 상인인‘세사르’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뛰어남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500 여년전 중세의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화폭에 그려진 체스판과 말들의 위치와 주인공이 된 인물들의 삶과 죽음에 얽힌 진실이 교섭하고 있으며, 체스가 인간 삶의 또 다른 상징계로 현실과 교호(交互)하는 것이다. 체스판에 투영된 삶의 생생한 진실들 속으로.

살짝 관심이 느슨해질 쯤 해서 긴장을 죄려는 듯 그림 속 인물들의 사적(史的)지식을 알려주던 옛 연인의 죽음이 알려지고, 자살과 타살을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함이 그림의 진실과 관련한 어떤 위기감을 전달한다. 사자(死者)와 관련 되어 확인되지 않는 금발의 여인, 그림이 지닌 사료적 가치의 발견으로 상승할 경매가에 따른 배후 인물들의 존재로 훌리아는 불안한 일상에 놓인다.

 

그녀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세사르는 그림의 진실과 현실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최고의 체스 전문가를 훌리아에게 소개하고, 체스꾼은 그림에 나타난 체스 말을 통해 복기를 시도한다. 화가가 숨겨놓았을 진실의 확신을 가지고. 또한 소설은 그림에 담겨진 해박한 역사의 지식으로 안내한다. 피살된 기사, 밝혀지지 않은 범인과 배후, 그리고 기사의 연인이었다는 스캔들을 지녔던 대공의 부인, 그래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기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임을. 그러나 그 애도에는 기사의 살해를 사주한 자로서의 회한, 이 불가피한 선택에 내재된 여인의 사랑과 배신의 고통스러운 양가적 감정이 배어있음을. 이것이 복선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거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이지만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방향을 여러 갈래로 분기하게 하여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 상황 모두에서 높은 서스펜스에서 풀려나질 못하게 한다.

 

그림에 새로운 사적의미가 더해지면서 경매를 둘러싼 커미셔너들, 경매시장에 내놓은 노회한 소유자와 속물적인 그의 조카들의 탐욕스런 음모와 암투가 진행되고, 옛 연인의 사인을 좇는 경찰의 어설픈 암행까지 겹치면서 그림 속 ‘흑녀’의 살인 사주는 현실의 모습과 흡사 닮은꼴을 이룬다. 체스 말의 다음 행보가 적힌 쪽지가 그림과 관련 인물들의 미래를 암시하듯 훌리아에게 전달되고 보이지 않는 인물과의 체스 대결이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죽음을 건 게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처럼 중세 예술작품의 독해와 고미술시장을 둘러싼 부르주아적 탐닉이 돋보인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지성의 흥미로움이 환상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나 현실의 인물들 모두에게서 발산되는 고뇌 역시 부르주아적 낭만과 향락으로만 가득하기에 리얼리티의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예술품의 재화적 가치,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걸작 회화의 역사적이고 미학적인 해석에 열중이었던 훌리아라는 여성이 그림과 관련하여 자신의 근친이었던 두 사람이 살해되었음에도 정작 체스 판의 흑녀를 현실에서 마주하고, 그 전략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에서 어떤 도덕적 전망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에 깊은 회의마저 품게 한다. 물론 소설은 주장하고 있다. 훌리아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세사르에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훌리아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중년 남자의 양가적 감정을 대공녀의 고뇌에 중첩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현실의 선택, 인간 앞에 놓인 이 오래된 딜레마의 멋진 승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결국 술책적 삶을 미화하고, 위선의 미덕을 칭송하는 것, 세상 전체가 비즈니스적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 물신주의의 속살을 비추려한 역설이었다고.

 

이러한 혹평이 가능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가공의 걸작 회화를 탄생시키고, 이것을 풍부한 미술사적 상상력에 담아 쏟아내는 미학적 해석은 가히 탁월하며, 더구나 그림 속 체스의 장면이 현실의 전략적 행동으로 되살아나면서 삶의 투쟁과 위선, 사랑과 죽음의 의미로 이행되는 환유(換喩)적 기법은 기발함 그것이라 하겠다. 암시와 트릭, 복선마저 그 임무를 드러내지 않고 마지막 행으로 이끄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또한 압권임을 실토치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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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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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음, 본 리뷰는 귀하의 독서 재미를 박탈할 수 있습니다]

 

이치라는 것이 있다. 당연히 세상의 순리가 자기 자리에 맞게 들어서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곰곰 생각해보면 터무니 없는 독선이 보인다.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그 순리라는 것이 그 만큼 늘어난다. 그 순리에 대한 믿음은 충돌하고 이내 갈등하게 된다. 내가 당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당위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경우' 또한 이와 같은 용법을 지닌 말이 아닐까. '사람이 경우가 없어'라고 상대를 비방하는 표현에는 다분히 주관적인 자신의 분별력과 이치에 대한 거슬림의 감정이 있다. 그러나 상대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에 어떠한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기준에 작용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도덕 원칙으로서의 정의일까? 아니면 단순히 감정적 불쾌를 나타내는 질투나 시기심, 혹은 무례함이나 불합리성, 균형감의 파괴에 대한 불만일까? 이미 <고백>이라는 걸출한 작품에서 변질된 자기애라는 인간의 내면에 괴물화된 이기심의 형태들을 깊이있게 투영하였듯이 비록 돈독한 신뢰관계로 인간 상호간의 심리적 교량이 있을것이라는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월하는 또다른 형식의 자기애라는 인간 심리와 마주하게 된다. 아마 이것의 실체를 작가는 경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하니 애초에 이 주관적 판단을 전제로하는 심리적 행동은 펼연적으로 오류를 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보육원과 아동보호시설에 맡겨진 두 여자 아이들은 성장하여 우연히 보육시설의 봉사활동을 하다 서로의 처지를 알게되고 우정을 쌓는다. 그리곤 파란 리본과 함께 맡겨진 사연을 나누고 그 리본의 반을 잘라 요코, 그리고 하루미, 두 여성은 새로운 가족이상의 의미를 교환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재가 되어 지방의원의 아내가 된 요코에 의해 <파란하늘 리본>이라는 제목의 동화집으로 출간되고,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른다. 신문사 기자가 된 하루미는 사전 허락없이 자신의 사연을 출간한 요코의 이유있는 사죄를 허물없이 보듬고 대중적 지지를 보내준다. 그러나 지방의원의 아내이자 유명동화작가가 되어 분주한 날을 보내던 요코를 시샘하듯 불온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의 어린 아들 유타가 유괴되고 비밀을 공개조건으로 아이를 살려주겠다는 협박장이 선거 사무실로 날아든다.

 

이의 원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지방의원인 남편의 비서인 아키라는 여성, 후원회장인 아키의 아버지인 고토, 남편의 부정선거 자금의혹을 고발했던 내부자인 남편의 오랜 지기, 요코의 결혼을 여전히 마땅치 않아하는 시어머니 등등이 얽혀 의혹자는 점차 확대되고, 사건은 남편의 부정선거 자금의 비밀을 밝히라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거듭 날아든 협박장은 점차 요코쪽으로 방향을 겨눈다. 요코는 아이의 무사한 귀환을 위해 자신의 출신에 얽힌 모든 진실을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기위해 그녀는 자신의 출생시기와 보육원에 맡겨지던 시절과 일치하는 한 살인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자취를 좇고, 의혹의 여인을 알아낸다. 모든 정황적 증거는 그녀가 살인자의 딸임을 가리킨다. 그리곤 유명 TV프로그램의 인터뷰 방송에 초대되고, 자신이 30여년전 살인사건 가해자의 딸임을 밝히고 자식으로서 피해자와 그 유족에게 사죄와 책임을 다할 것임을 호소한다.

 

소설은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미래를 펼쳐가던 그녀에게 과거의 진실을 구태여 알게하고 행복을 박탈하려는 유괴범의 저의는 무엇일까? 하고. 대체 범인은 요코에게 어떤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의 정체를 마주하는 순간 아~하는 자조적인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일까? 무언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삶의 질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인간의 본원적인 '경우'의 원칙은 대체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희생자일 뿐인 버려진 아이였던 요코에게 불행의 진실을 알게하는 것이 경우를 지키겠다는 도덕적 혹은 감정적 미덕을 지키는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사람의 심연을 지배하는 의식의 요구는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곤혹스러운 자문을 하게한다. 경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 경우의 배경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나토 가나에의 인간의 자기애에 기초하는 또 하나의 세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우린 타인의 행복에 무심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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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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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성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저임금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빈곤의 늪을 사회구조적으로 파헤친 유명한 저술『노동의 배신』 의 한국판 번안이라고 해야 할까? 집필자에겐 이러한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결코 폄하하려는 의미에서의 진술이 아니다. 한국의 현실이 신자유주의 선봉국인 미국의 노동생태계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닮은꼴이기에 떠오른 생각에서 일뿐이다.

사회의 불평등 성향이 짙어질수록, 또한 대중의 상상력이 퇴화할수록 빈민의 존재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되곤 한다. 이렇게 그 존재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보니 자연 이러한 상황을 사회구조적으로 고민하려는 시도가 어렵게 되고 만다.

 

그래서 돼지농장, 꽃게잡이, 공장노동의 현장에 자기 육체와 삶의 현실을 오로지 바치는 체험의 수기는 이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던 실체들의 진실을 비로소 보이는 것으로 말해주는 숭고함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 고발은 가난, 빈곤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속살을 보여준다. 가진 자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몽매함과 이기심을 얹어 빈곤을 의지의 결핍으로 치부하는 것의 무지와 오류를 밝히는 작업으로서.

빈곤을 왜곡하려는 가진 자들의 몰염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치질 않는다. 보수언론은 틈틈이 복지의 보편적 확대정책에 각종의 흠집을 내기위해 발악을 하면서 수십조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개인적 부를 축재한 재벌의 탐욕을 지키려고 혼신을 다한다. 점차 가난이 대중화되고 빈곤이 만성적이 되어감에도 이 그릇된 구조의 근본적 틀을 다시 잡으려는 시도는 어디에서도 가능치 못하게 봉쇄되고, 어느 노인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아니라 ‘反사회주의’가 바로 한국의 이데올로기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의 진실 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체험의 일화들은 한결같이 육체가 무너져 내릴 정도로 노동을 해도, 정신이 손상을 입을만큼 고통을 받으며 일을 해도 먹고살기가 더욱 힘겨워지며, 노동을 할수록 가난해지는 이 사회의 실상이다. 이 노동자들에겐 삶에 여가다운 여가를 즐길 시간도 돈도 허락되지 않기에 그들이 헛된 지출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명장치를 유지하기만 하는데도 이러하니 이것이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럼에도 사회를 위해 책임의식이라곤 한 번도 지녀본 적 없는 자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게으르고 의존적인 계층이라고 매도한다.

 

이 같이 이미 열심히 일해도 가난해지는 구조가 정착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우기는 세력들을 보면 이 사회에 뿌리내린 저임금 노동의 현실은 아마도 당대에는 사라질 수 없지 않을까하는 절망적 관망까지 하게 한다. 만성적 빈곤으로부터 헤어 날 수 없게 구조화된 저임 노동시장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은 그래서 권력이 왜곡시켜버린 이 부정적 구조를 가능한 시급히 교정하라는 안타까운 구조신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어서는 위험하다는 신호 말이다.

체스의 말(장기 의 卒에 상당)이 한 칸씩 움직여 상대측의 마지막 선에 도달하면 여왕적 지위를 갖게된다는 저자의 바람을 온전히 담은‘퀴닝(Queening)'과 같은 획기적 전환은 아니더라도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고 그를 통해 성실한 한걸음이 쌓이면 보다 나은 삶, 희망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땅의 저임금 노동현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는 노동자들의 의지의 결여가 아니라 희망을 지닐 수 없게 만드는, 희망의 결핍을 강요하는 왜곡된 구조임을 선언하는 저자의 수고에 지지를 보내게 된다. 빈곤 지수가 매년 나아지는 그런 사회를 위해 새 정권은 MB정권의 탐욕스런 부자정치와는 다른 행보를 할 것이라 억지스런 기대를 가져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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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와 집시 창비교양문고 46
D. H. 로렌스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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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편분량의 이 소설에서 ‘D.H.로렌스’의 잘 알려진 작품들 -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목사의 딸들』- 의 수많은 잉태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독자로서 예기치 않은 수확이라 할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씬시어’였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바람난 여자, 그녀의 남편인 목사와 아들을 바라보는 노파의 교활한 여성적 권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목사의 두 딸 ‘이베트’와 ‘루씰’등에서 옹졸하고 편협한 습관을 무지하게 휘두르는 쾨쾨하게 썩은 내 나는 중산층의 위선에 대한 집요한 저항과 반란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사회가 배태(胚胎)하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방해하는 본원에는 바로 이 양가적인 ‘중산층 의식’이 지닌 이기심이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차에, 이 위선의 역겨움을 꿰뚫고 삶의 문제적 주제임을 포착한 작가의 선견에 경외와 공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뻐근하다.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 아내를 잃어버린 목사와 이를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온전히 행사하려는 목사의 늙은 어머니, 고모‘씨시’의 벌레 먹은 마음 등 간교하게 자신들을 신성화한 가면 쓴 인간들의 설명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짐짓 하찮은 중산계급의 관습적 권위로 치장한 그들의 내면은 추악한 오물로 가득 차 있을 뿐임을.

스위스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 열아홉 살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고향의 목사관으로 돌아 온 루씰과 이베트를 기다리는 것이라곤 이렇게 상식이라고, 관습이라고 못 박아 놓은 편견의 그늘에 앉아있는 병든 내면의 인간들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그녀들 주위 사람들의 삶의 의식이라 해서 중산계급의 이 틀에 박힌 인식의 지리멸렬함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청혼과 추파가 그녀들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그 편협과 위선의 틀 속에서 어떠한 마음의 동요, 사랑, 활력을 찾지 못한다.

 

 

쾌활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한 이베트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 든다. 마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 남자의 과감한 시선에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온통 사로잡히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 압도당한 자신의 영혼을. 그리곤 예비역 대령과 재혼하여 마을의 별장에서 꾸밈없이 신혼을 만끽하는 포쎄트 부인의 삶에 내재된 자유의 건강성에 매료된다. 간교와 추악과 편협이란 이기심을 숨긴 채 효성, 아량, 배려, 경건을 내세우는 외면의 역겨움과는 너무도 다른 이들의 생명력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목사는 이베트의 이러한 친교활동에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의 환영을 투사하곤 그들과 단교하지 않으면 정신병수용소에 보낼 수 있음을 위협한다. 온화함으로 치장된 외면의 가면이 흘러내리고 구린내 나는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몰두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생명성을 갈아먹는 당대 중산계층의 인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위선적 습관들이다. 삶을 왜곡시키고 병들게 하는 이중성, 옹색함 들의 면면들을. 결국 눈이 먼 채 경건함 뒤에 교활함을 감추고 목사관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는 노파를 홍수로 쓸어버림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이베트의 수호자가 되어 그녀를 홍수에서 구해내는 집시의 홍수와의 사투, 그리고 저체온으로 떨고 있는 그녀를 구원함으로써 계층적 몰이해의 편협성을 무너뜨리고 생명력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베트에게 날아든 편지의 하단에 비로소 “아가씨의 충성스러운 조우 보즈웰”이라고 적힌 집시의 이름 한 문장이 왜곡된 삶의 관습을 모두 바로잡아 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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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해가 지다 AALA문학총서 4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글누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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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인생은‘끊임없이 준비하는 과정’이라 말했고, 어떤 사상가는 ‘선택의 과정’이라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삶을 충실하게 하려는 이들을 위한 조언으로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삶이란 고되고 어려운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준비하는 것을 잊거나 소홀하면 인생이 기다리는 것은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라는 것이고, 그릇된 길의 선택은 그대로 자기 몫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여도, 하지 않아도 인생의 고뇌란 것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모순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카뮈가 말한 삶의 부조리일 것이다. 인생이란 이성(理性)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결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것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관통하던 생각이다. 아등바등하며 보다 우월한 삶의 조건을 성취하려는 몸부림, 그 과정에서 상실하는 것들, 지나치는 것들에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가치들이 있음을. 한여름 강처럼 흐르는 모래사막 위로 번지는 석양의 노을이 인생에서 무엇인지를. 그래서인지‘ 夏日落(하일락)’, 여름 해가 지다라는 소설의 원제(原題)는 대자연의 장관 앞에 외소하게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군상들의 상징적 인물이 소설 속 중대장‘자오린’ 이고, 지도원 ‘가오바오신’이 되어 그들의 작은 무대를 배경으로 삶의 패러독스를 열연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중국군 자오와 가오는 중대장과 지도원이 되어 후방 연대 1개 중대의 지휘관으로, 정신공작 지도원으로 공생한다. 자오는 부대대장이 되어 벽지의 농촌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도시의 호구를 갖게 하는 것이고 가오는 교도원으로 진급하여 권력의 상층부로 가는 것이 꿈이다. 또한 농촌 출신의 자오, 도시 엘리트 출신인 가오는 이렇게 저마다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인생이란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이들의 영내에서 한 정의 자동소총 분실사고가 발생하고 이것이 불이익이 될 것을 예감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회수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혹여 불만을 가질 만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일종의 자아비판으로서 서로 자신들의 과오를 밝히는데 이것은 상대에게 순수치 못한 빌미를 제공한다. 이 와중에 열일곱 살 어린 병사‘샤를뤄(夏日落)’가 분실된 총으로 자살한다. 이제 한낱 총기 도난사건은 숨길 수 없는 사건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책임을 상대의 과실로 넘길 구실을 찾는다. 끈끈했던 전쟁 동료의 우정이 질시와 반목이 되어 대립한다.

 

사건 진상 조사팀은 이들에 관한 처리가 결정될 때까지 두 사람을 구금실에서 동거하게 한다. 하나의 공간에 선 두 사람, 이들이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농민이 도시의 호구를 갖게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군대의 경력이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유일한 창구임을, 도시와 농촌의 그 엄청난 계급적 격차와 삶의 조건에서의 간극이란 현실을 쏟아 놓는다. 작가의 초기작인 이 작품이 그의 이후 작품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사서』『딩씨 마을의 꿈』- 에서 나타나는 사회 비판의식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왜곡된 현실의 중국 공산주의의 부패와 허위를 수면위에 드러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본질은 이것에 있지 않다. 서로 말 없이 보내던 구금실의 두 사람은 생각에 잠기고, 자신들 과거의 기억을 비롯한 자아, 자기 내면과 마주한다. 도시의 호구란, 진급이란, 내게 무엇인가라고.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이혼까지 한 여인 ‘왕후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오, 폭탄에 맞아 자신을 덮친 소대장의 피가 낭자한 잘린 머리의 꿈에 시달리는 가오, 그들에게 질시와 반목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미친 듯이 싸워대던 중국과 베트남의 두 정상이 화해와 협력의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삶이란 준비하는 과정도, 선택의 과정도 아닌 것이다. 그저 살아내는 것이지 않은가? 거기에 그 어떠한 정의와 수식도 초라해지고 만다. 샤를뤄가 말한 여름해가 지는 그 장관 아래서 인간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곧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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