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와 집시 창비교양문고 46
D. H. 로렌스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중편분량의 이 소설에서 ‘D.H.로렌스’의 잘 알려진 작품들 - 『아들과 연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목사의 딸들』- 의 수많은 잉태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독자로서 예기치 않은 수확이라 할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씬시어’였던 여인으로 지칭되는 바람난 여자, 그녀의 남편인 목사와 아들을 바라보는 노파의 교활한 여성적 권력,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목사의 두 딸 ‘이베트’와 ‘루씰’등에서 옹졸하고 편협한 습관을 무지하게 휘두르는 쾨쾨하게 썩은 내 나는 중산층의 위선에 대한 집요한 저항과 반란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사회가 배태(胚胎)하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방해하는 본원에는 바로 이 양가적인 ‘중산층 의식’이 지닌 이기심이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차에, 이 위선의 역겨움을 꿰뚫고 삶의 문제적 주제임을 포착한 작가의 선견에 경외와 공감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의 시작부터 뻐근하다.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 아내를 잃어버린 목사와 이를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온전히 행사하려는 목사의 늙은 어머니, 고모‘씨시’의 벌레 먹은 마음 등 간교하게 자신들을 신성화한 가면 쓴 인간들의 설명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짐짓 하찮은 중산계급의 관습적 권위로 치장한 그들의 내면은 추악한 오물로 가득 차 있을 뿐임을.

스위스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스물한 살, 열아홉 살의 어엿한 숙녀가 되어 고향의 목사관으로 돌아 온 루씰과 이베트를 기다리는 것이라곤 이렇게 상식이라고, 관습이라고 못 박아 놓은 편견의 그늘에 앉아있는 병든 내면의 인간들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그녀들 주위 사람들의 삶의 의식이라 해서 중산계급의 이 틀에 박힌 인식의 지리멸렬함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청혼과 추파가 그녀들의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그 편협과 위선의 틀 속에서 어떠한 마음의 동요, 사랑, 활력을 찾지 못한다.

 

 

쾌활함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미덕으로 한 이베트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찾아 든다. 마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 남자의 과감한 시선에 그녀는 자신의 내면이 온통 사로잡히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시선에 압도당한 자신의 영혼을. 그리곤 예비역 대령과 재혼하여 마을의 별장에서 꾸밈없이 신혼을 만끽하는 포쎄트 부인의 삶에 내재된 자유의 건강성에 매료된다. 간교와 추악과 편협이란 이기심을 숨긴 채 효성, 아량, 배려, 경건을 내세우는 외면의 역겨움과는 너무도 다른 이들의 생명력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목사는 이베트의 이러한 친교활동에 젊은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의 환영을 투사하곤 그들과 단교하지 않으면 정신병수용소에 보낼 수 있음을 위협한다. 온화함으로 치장된 외면의 가면이 흘러내리고 구린내 나는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몰두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생명성을 갈아먹는 당대 중산계층의 인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위선적 습관들이다. 삶을 왜곡시키고 병들게 하는 이중성, 옹색함 들의 면면들을. 결국 눈이 먼 채 경건함 뒤에 교활함을 감추고 목사관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는 노파를 홍수로 쓸어버림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이베트의 수호자가 되어 그녀를 홍수에서 구해내는 집시의 홍수와의 사투, 그리고 저체온으로 떨고 있는 그녀를 구원함으로써 계층적 몰이해의 편협성을 무너뜨리고 생명력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베트에게 날아든 편지의 하단에 비로소 “아가씨의 충성스러운 조우 보즈웰”이라고 적힌 집시의 이름 한 문장이 왜곡된 삶의 관습을 모두 바로잡아 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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