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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5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허구를 통해 사실을 재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을까? 작품을 읽는 내내 고미술품 복원가인‘훌리아’라는 여성을 화폭 속으로 매몰시킨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는 한 점의 15세기 플랑드르 패널화와 화가‘피터 반 호이스’라는 허구의 실존 여부를 찾으려 애썼으니 말이다. 그림 속의 체스를 두고 있는 기사와 대공(大公), 그리고 창가에 검은 옷을 입고 책을 읽는 여인, 이렇게 세 명의 인물에 내재된 은밀한 역사의 암시는 화자와 더불어 그림의 세계를 거닐게 된다.
경매를 위해 복원작업을 준비하던 훌리아는 화가가 그림으로 덮어버린 한 줄의 라틴어 문장을 발견한다.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 이 의혹 가득한 문장은 화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되고 그림 속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로부터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으로, 또한 미술품에 대한 진정한 가치의 부여라는 사명까지로 발전한다. 헤어진 고미술사가를 찾아 작중 인물들의 역사적 실존 여부와 자료를 건네받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같은 보호자인 골동품 상인인‘세사르’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뛰어남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500 여년전 중세의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화폭에 그려진 체스판과 말들의 위치와 주인공이 된 인물들의 삶과 죽음에 얽힌 진실이 교섭하고 있으며, 체스가 인간 삶의 또 다른 상징계로 현실과 교호(交互)하는 것이다. 체스판에 투영된 삶의 생생한 진실들 속으로.
살짝 관심이 느슨해질 쯤 해서 긴장을 죄려는 듯 그림 속 인물들의 사적(史的)지식을 알려주던 옛 연인의 죽음이 알려지고, 자살과 타살을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함이 그림의 진실과 관련한 어떤 위기감을 전달한다. 사자(死者)와 관련 되어 확인되지 않는 금발의 여인, 그림이 지닌 사료적 가치의 발견으로 상승할 경매가에 따른 배후 인물들의 존재로 훌리아는 불안한 일상에 놓인다.
그녀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세사르는 그림의 진실과 현실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최고의 체스 전문가를 훌리아에게 소개하고, 체스꾼은 그림에 나타난 체스 말을 통해 복기를 시도한다. 화가가 숨겨놓았을 진실의 확신을 가지고. 또한 소설은 그림에 담겨진 해박한 역사의 지식으로 안내한다. 피살된 기사, 밝혀지지 않은 범인과 배후, 그리고 기사의 연인이었다는 스캔들을 지녔던 대공의 부인, 그래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기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임을. 그러나 그 애도에는 기사의 살해를 사주한 자로서의 회한, 이 불가피한 선택에 내재된 여인의 사랑과 배신의 고통스러운 양가적 감정이 배어있음을. 이것이 복선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거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이지만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방향을 여러 갈래로 분기하게 하여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 상황 모두에서 높은 서스펜스에서 풀려나질 못하게 한다.
그림에 새로운 사적의미가 더해지면서 경매를 둘러싼 커미셔너들, 경매시장에 내놓은 노회한 소유자와 속물적인 그의 조카들의 탐욕스런 음모와 암투가 진행되고, 옛 연인의 사인을 좇는 경찰의 어설픈 암행까지 겹치면서 그림 속 ‘흑녀’의 살인 사주는 현실의 모습과 흡사 닮은꼴을 이룬다. 체스 말의 다음 행보가 적힌 쪽지가 그림과 관련 인물들의 미래를 암시하듯 훌리아에게 전달되고 보이지 않는 인물과의 체스 대결이 현실과의 경계를 허물고 죽음을 건 게임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처럼 중세 예술작품의 독해와 고미술시장을 둘러싼 부르주아적 탐닉이 돋보인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지성의 흥미로움이 환상적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그림 속 인물들이나 현실의 인물들 모두에게서 발산되는 고뇌 역시 부르주아적 낭만과 향락으로만 가득하기에 리얼리티의 취약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예술품의 재화적 가치,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걸작 회화의 역사적이고 미학적인 해석에 열중이었던 훌리아라는 여성이 그림과 관련하여 자신의 근친이었던 두 사람이 살해되었음에도 정작 체스 판의 흑녀를 현실에서 마주하고, 그 전략적 의미와 현실적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에서 어떤 도덕적 전망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에 깊은 회의마저 품게 한다. 물론 소설은 주장하고 있다. 훌리아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세사르에게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훌리아에 대한 이성적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중년 남자의 양가적 감정을 대공녀의 고뇌에 중첩시키는 것이다. 사랑과 현실의 선택, 인간 앞에 놓인 이 오래된 딜레마의 멋진 승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결국 술책적 삶을 미화하고, 위선의 미덕을 칭송하는 것, 세상 전체가 비즈니스적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 물신주의의 속살을 비추려한 역설이었다고.
이러한 혹평이 가능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가공의 걸작 회화를 탄생시키고, 이것을 풍부한 미술사적 상상력에 담아 쏟아내는 미학적 해석은 가히 탁월하며, 더구나 그림 속 체스의 장면이 현실의 전략적 행동으로 되살아나면서 삶의 투쟁과 위선, 사랑과 죽음의 의미로 이행되는 환유(換喩)적 기법은 기발함 그것이라 하겠다. 암시와 트릭, 복선마저 그 임무를 드러내지 않고 마지막 행으로 이끄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또한 압권임을 실토치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