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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해가 지다 ㅣ AALA문학총서 4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글누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시인은 인생은‘끊임없이 준비하는 과정’이라 말했고, 어떤 사상가는 ‘선택의 과정’이라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삶을 충실하게 하려는 이들을 위한 조언으로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삶이란 고되고 어려운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준비하는 것을 잊거나 소홀하면 인생이 기다리는 것은 좌절과 절망의 고통이라는 것이고, 그릇된 길의 선택은 그대로 자기 몫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여도, 하지 않아도 인생의 고뇌란 것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모순이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카뮈가 말한 삶의 부조리일 것이다. 인생이란 이성(理性)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결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것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관통하던 생각이다. 아등바등하며 보다 우월한 삶의 조건을 성취하려는 몸부림, 그 과정에서 상실하는 것들, 지나치는 것들에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삶의 가치들이 있음을. 한여름 강처럼 흐르는 모래사막 위로 번지는 석양의 노을이 인생에서 무엇인지를. 그래서인지‘ 夏日落(하일락)’, 여름 해가 지다라는 소설의 원제(原題)는 대자연의 장관 앞에 외소하게 서있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군상들의 상징적 인물이 소설 속 중대장‘자오린’ 이고, 지도원 ‘가오바오신’이 되어 그들의 작은 무대를 배경으로 삶의 패러독스를 열연한다.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중국군 자오와 가오는 중대장과 지도원이 되어 후방 연대 1개 중대의 지휘관으로, 정신공작 지도원으로 공생한다. 자오는 부대대장이 되어 벽지의 농촌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도시의 호구를 갖게 하는 것이고 가오는 교도원으로 진급하여 권력의 상층부로 가는 것이 꿈이다. 또한 농촌 출신의 자오, 도시 엘리트 출신인 가오는 이렇게 저마다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인생이란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이, 이들의 영내에서 한 정의 자동소총 분실사고가 발생하고 이것이 불이익이 될 것을 예감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회수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혹여 불만을 가질 만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일종의 자아비판으로서 서로 자신들의 과오를 밝히는데 이것은 상대에게 순수치 못한 빌미를 제공한다. 이 와중에 열일곱 살 어린 병사‘샤를뤄(夏日落)’가 분실된 총으로 자살한다. 이제 한낱 총기 도난사건은 숨길 수 없는 사건으로 확대되고 급기야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책임을 상대의 과실로 넘길 구실을 찾는다. 끈끈했던 전쟁 동료의 우정이 질시와 반목이 되어 대립한다.
사건 진상 조사팀은 이들에 관한 처리가 결정될 때까지 두 사람을 구금실에서 동거하게 한다. 하나의 공간에 선 두 사람, 이들이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농민이 도시의 호구를 갖게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군대의 경력이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신분상승의 유일한 창구임을, 도시와 농촌의 그 엄청난 계급적 격차와 삶의 조건에서의 간극이란 현실을 쏟아 놓는다. 작가의 초기작인 이 작품이 그의 이후 작품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사서』『딩씨 마을의 꿈』- 에서 나타나는 사회 비판의식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왜곡된 현실의 중국 공산주의의 부패와 허위를 수면위에 드러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본질은 이것에 있지 않다. 서로 말 없이 보내던 구금실의 두 사람은 생각에 잠기고, 자신들 과거의 기억을 비롯한 자아, 자기 내면과 마주한다. 도시의 호구란, 진급이란, 내게 무엇인가라고.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이혼까지 한 여인 ‘왕후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오, 폭탄에 맞아 자신을 덮친 소대장의 피가 낭자한 잘린 머리의 꿈에 시달리는 가오, 그들에게 질시와 반목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미친 듯이 싸워대던 중국과 베트남의 두 정상이 화해와 협력의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삶이란 준비하는 과정도, 선택의 과정도 아닌 것이다. 그저 살아내는 것이지 않은가? 거기에 그 어떠한 정의와 수식도 초라해지고 만다. 샤를뤄가 말한 여름해가 지는 그 장관 아래서 인간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은 곧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