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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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에서 솔제니친에 이르는 19세기와 20세기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문호들의 작품을 음식이라는 코드로 재해석하여 당대 러시아 사회와 사람들의 정신을 조명하는 이 책은 독서가들에게 책 읽기의 또 다른 시선을 제공하여 준다. 소설과 희곡 등 문학작품 속에 투영된‘음식’, ‘먹는다’라는 소재가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의미심장한 제재였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러시아문학의 이해에 한걸음 다가선다는 느낌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2세기에 걸친 러시아의 세계사적 격변은 그대로 사람들의 삶에 녹아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중의 기본인 먹는 행위는 개인 삶의 미세한 변화는 물론 사회 상황이라고 하는 시대의 조류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19세기 전반기, 러시아에 문학다운 문학의 뿌리를 비로소 내리게 했다는 푸슈킨에게서 음식들의 요란한 나열과 비평을 보게 되는 것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에 대한 열망의 문화적 소산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20세기 초 소비에트 혁명의 무참한 시대의 식탁과 먹는 것이 ‘파스테르나크’의 ‘지바고’나, ‘솔제니친’의‘이반’으로 표상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남의 것인 서구화와 자신의 것인 슬라브적인 것의 갈등과 절충, 융화가 러시아인들에게 어떤 양상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바라보는 것은 부끄러운 근대화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우리의 역사와 견주어 흥미로운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프랑스적인 것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이고 슬라브적인 것은 촌스럽고 저렴한 것이라는 당대 러시아 지배계급의 허영과 맹목이 대문호들에게 어떠한 문화적 기호로서 수용되고 있는 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의지일 것이다. 물론 음식과 역사적, 문화적 상호성만을 해독하는 것은 아니다. 먹는것 그 자체가 지니는 본성으로서의, 인간 삶의 본질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배제되지 않은 독해이기에 더욱 매혹적인 관점이 된다.

 

그러나 ‘고골’이나 ‘체호프’의 작품 해석에 주류를 이루는 비평적 단어인‘범속성’에 대한 의미의 부정확한 정의에 기초한 해석의 연장이나,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통해 주장하는 삶의 존재론적 의의와 같은 이해에 있어서는 인문학적 논리를 벗어나 사적인 주장으로 비쳐 부분적으로 거북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범속성이라는 어휘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지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고인물, 비루함, 게으름과 같은 언어와 동등으로 의미화 하는 것과 같다. 범속성은 지극히 찬미할 수도 있는 언어이며 혹은 비난에 사용 할 수도 있는 언어이지만 그것은 전제된 상황에 종속되어 활용되는 것이지 어휘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 책은 신선한 문학적 해석을 지닌 매혹적인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유리 올레샤’의 『질투』와 같은 작품들은 폭넓은 러시아 문학의 접근을 가능케 해주고, 독자의 읽기 영역을 확장시켜주고 있으며, ‘고골’의 「옛 기질의 지주」, ‘체호프’의 「국어 선생」등 단편소설의 해석은 여기서만 맛 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된다. 어쨌든 책의 코드는 ‘먹는 것’, 음식의 자연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을 오가면서 거장들의 문학이라는 숲속에 내재된 정신과 육체, 즉 인간의 삶속을 산책한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해석은 ‘고골’의 『검찰관』, ‘곤차로프’의『오블로모프』, 그리고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들 수 있겠다. 본의 아니게 말단 관리에서 담대한 사기꾼이자 허풍꾼이 되는 ‘흘레스타코프’의 빈곤한 경험과 상상력을 표현하는 유치찬란한 음식이름의 열거, 철저한 감각의 백지상태, 고요와 무관심한 평온이 가득한 ‘오블로모프 기질’과 관련한 논쟁 가능한 삶의 범속성에 대한 비평, 고급 레스토랑과 지옥이 동의어가 되는 문학 관료들의 탐욕에 대한 작품설명은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글 쓰는 이들에게도 유용한 시사점들을 드러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예기치 않은 기쁨과 우연의 일치와 기적과 선물로 가득 찬 것”이라는 ‘파스테르나크’의 흠결 많은 대작 『닥터 지바고』 대한 이해를 토대로 혁명과 이로 인해 소외되고 소멸되는 인간의 존엄성, 참된 존재로의 복귀를 향한 고독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들은 무릇 전체주의를 동반하는 혁명의 고통스런 이면을 생각게도 한다.

 

사실 책은 먹는다는 것의 사색을 통한 존재론 적 삶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에 대한 해석이고, 이에 대한 특히 범속성에 대한 비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식 쾌락주의 비판을 기초로 하여 음식과 섹스의 권력과 지배 욕구라는 폭력성을 지적하고, 먹는다는 것의 문화화, 즉 미학화, 의식화와 같은 군더더기인 과잉의 악덕에 대한 이야기도 쏠쏠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먹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은 범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녀모두 진정한 생생한 관심사는 모두 먹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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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나 좀 구해줘 -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꼭 알아야 할 51가지 심리 법칙
폴커 키츠 & 마누엘 투쉬 지음, 김희상 옮김 / 갤리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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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왜 필요할까? 만일 ‘나 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과연 ‘심리(心理)’, 즉 마음이라 일컫는 사람의 내면 읽기가 구태여 필요하겠는가 라는 점이다. 사람은 관계의 동물,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고 그 타인들과 더불어 살기에, 바로 그(그녀)들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심리는 이 단어가 오늘의 의미이기 이전부터 사람의 생존을 위한 필수 자질로서 터 잡았을 것이다.

 

저 사람과 상대하기 위해, 저 상황을 마주할 때, 저 사람이 하는 말의 속뜻은 등등에 대해서 내 마음의 상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처럼 상대가 존재하기에 심리에 대한 해독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혹은 그들과 그 상황으로 인해 야기된 결과의 현상이 내게 주는 다양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라는 의식과 잠재의식, 알 수 없는 심연의 무의식을 작동시키는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앎의 욕구는 사람들의 당연한 관심사일 밖에 없다.

 

이처럼 심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에 의미를 갖는다. 상대가 없는 나만의 심리 읽기는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거나 타인을 배제한 채 자기에게만 집중한 자기중심주의, 다시말해 에고이스트 또는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소통이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심리에 대한 이해는 관계를 기초로 한 사람의 세상에서 슬기롭게 사는 지혜가 된다. 타인의 심리, 그리고 나의 심리, 사람이란 동종(同種)이 지니는 본질로서의 심리적 기제를 아는 것은 바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정해주고, 왜곡이나 오류, 부조화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심리학의 무수한 이론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 빈번하게 마주하는 일상의 상황들을 50여개로 범주화하여 심리적 본질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 귀인오류, 사회적 상승비교, 호수효과, 단순노출효과, 상호성의 원리, 리액턴스효과, 방관자효과, 조명효과 등의 사람의 심리적 본질로 소개되고 이것들이 사람의 행동을 어떻게 지배하고 통제하는지를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고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1. 사람의 마음은 자기중심적 오류로 향한다.

 

타인의 감정을 알려고 하지도, 또는 무시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공감(Empathy)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일상의 주변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하다면 그 냉랭한 기운으로 삶은 살벌한 격투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사실 오늘 이 사회의 많은 현상들이 이미 지독한 격전장인 것을 보면 우리사회에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그 하나는 기본적 귀인오류라는 선입견을 진리로 단정짓는 오류이다. 내가 성공하면 능력이고, 타인이 성공하면 운이며, 내가하면 로맨스이고 타인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마음 말이다. 이건 또 하나의 심리적 오류인 호수효과라 불리는 우월감 환상과도 관련을 갖는다. 자신은 타인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어렵거나 궃은일에서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내빼는 특성을 보인다.

 

바로 자기중심적인 심리에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애(自己愛)로는 훌쩍이지만 타인의 고통에는 냉혹함이나 멸시를 보낸다. 타인의 의견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의 목소리에는 경청을 요구한다. 나는 항상 옳지만 타인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현실과 충돌하는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를 왜곡하고 미화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킨다. 아마 TV속 심야 토론프로그램의 인물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에고이스트들로 넘쳐나는 한국사회,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타인은 적대시하고 멸시하는 사회, 그것의 중심에는 이렇듯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 매몰된 넘쳐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자기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심리적으로 성숙한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니 말이다. 그래서 책속의 또 다른 이론들은 삶의 슬기로서의 심리적 현상들을 통해 즐겁고 기쁘거나 숭고한 가치를 향한 제안들로도 가득 차 있다.

 

2. 그와 그녀의 마음을 얻는 법들

 

개체로서의 사람은 분명 다르다. 그(그녀)들의 마음이 다른 것은 그와 그녀들의 숫자만큼 다양할 것이다. 다른 경험과 지식, 다른 환경, 또한 다른 신체구조와 유전형질 등 다름이 오히려 진실이며 진리일 것이다. 그러니 갈등은, 즉 어떤 목적이나 다른 목적이 달성되지 않게끔 막는 것으로 한 체계 안에서 서로 다른 목적들이 충돌하는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말해 갈등 그 자체는 중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갈등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상태가 문제이고, 이것이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 어떤 지경이라고 부르는 것에까지 치닫게 된다.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다름의 의미를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입이 아니라 귀”라고 한다. 해결책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말을 적극적으로 경청하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물론 어렵다.‘경청’은 곧 내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존중과 배려, 이해와 공감의 성숙한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마음을 얻는 법이 이렇게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끌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빈번하게 눈에 띄도록 하는 것, 이것을 단순노출효과라고 한단다. 검증된 심리이론이란다. 그나 그녀에게, 혹은 직장상사에게 자신의 친절하고 우호적인 모습의 노출을 반복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상호성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뒤에서 성품이나 아름다움, 능력을 칭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 말은 상대의 귀에 들어가고 그나 그녀는 호감을 송신한다는 것이다. 정말 쉬워 보인다. 그런데 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인지...

 

반면에 심리적 효과를 역으로 실행해보는 방법도 있다. 리액턴스효과로 하지 못하게 하면 더욱 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사람의 심리이다. ‘그 초콜릿 먹지마!’ 그러면 더 먹고 싶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보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그 초콜릿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 먹지 말라고 했던 이의 금지했던 심경이 시들해지고 획득이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란 이렇게도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것이다. 그러나 말과 감성이 어긋나는 상대로서 남자와 여자는 커다란 간극을 지닌다. 재밌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말한다. “따뜻한 커피 마실래요, 차를 드릴까요?” , 그러자 남자는 느닷없이 “섹스!”라고 답한다. 코드가 빗나갔다. 여자는 그저 친절함과 우호를 보인 것이지만, 남자는 ‘뜨거운 것’을 권하는 여성에게 관능을 암시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솔직한 대화가 감성의 간극을 좁히는데 최고라는 것이다. “ 그 뜨거운 것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소?”라고 말이다. 재치와 진의를 모두 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와 닮은 사람을 선택하란다. 결코 다른 사람과는 오래 살 수 없단다. 이를 ‘사회적 호모가미(Homogamy)’라고 하는데, 서로 달라서는 이혼하지만 닮아서 이혼한 사람을 본 적 있느냐고.

 

3. 심리의 이해는 사회의 소통을 증진한다.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곧 배려이고 공감일 것이다. 그리고 내 심리, 사람의 본질적 심리를 아는 것은 겸허이고 호의이며 삶의 지혜일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인지 부조화의 실체, 이기주의가 아닌 에고이즘으로의 매몰, 자기중심주의로 인해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데 혼자 쩔쩔매는 조명효과처럼 사람들의 심리는 곧 세상이고 관계성이며 삶의 모양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타인을 자신의 수단이나 도구, 경쟁자, 적대자로 보는 시선에 길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린 지극히 불완전한 심리와 육신을 가지고 있다. 변화맹이 그렇고 섬광기억이 그렇다. 방관자효과가 그렇고 동조현상이 또한 그렇다. 우린 누구보다 우월하지도 않다. 우린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현혹되고 오류를 저지른다. 자신의 내면으로만 들어가 공감과 소통을 상실한 사람이란 유아적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사회의 갈등은 줄어들고 소통은 원활해져 모두가 살기 좋다고 외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심리학은 우리의 그릇된 심리를 바로잡아준다. 정신위생(Mental Healthy)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언어가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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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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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롄커’의 이후 작품들은 모두 이 소설이란 샘터에서 길어온 것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사회주의 혁명이 휩쓸어 버린 사회의 잔해로 남겨진 텅 비어버린 인간들의 상처 난 심장과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울먹임이 서려있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그렇고, 전체주의 중국의 일그러진 자가당착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사서(四書)』가 또한 그렇다. 사적 욕망과 혁명언어’의 혼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이 망각되는 시대에 대한 창백한 문장들의 뿌리, 아니 근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유연성과 부드러움, 경직과 부동의 공고함이라는 일견 모순적 연결어인 소설의 제목인‘물처럼 단단하게’에서 이미 위험한 결합을 보게 된다면 억견이 될까? 이 은유적 언어는 사랑과 혁명, 무기력과 성적 발기라는 교묘한 집합의 표현이기도 하며, 아슬아슬한 경계와 흥분, 두려움이 교차하는 극적 필연을 연상케 한다. 인간 본성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문화혁명의 강압적이고 인공적인 폭력성의 대비이기도 한 이 문장은 궁극적으로 ‘단단함’이 ‘물처럼’ 이루어져야 함에 대한 희구이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인민해방군에서 전역하고 혁명의 일꾼으로 사회주의 문화혁명의 실천가가 되고자하는‘가오 아이쥔’은 귀향한다. 고향 마을은 정주학의 창시자이자 성리학의 거두인 정이(程頤), 정호(程顥) 형제의 후손들인 정(程)씨 문중의 후손들로 이루어져 유교의 봉건정신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이쥔은 바로 이러한 봉건잔재인 청(程)씨들의 패방과 사당을 파괴하는 길만이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마을의 촌장인 장인 청씨에게 박색인 딸과의 혼인 약조인 마을 서기(書記)직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더욱 혁명에 대한 열의를 다짐한다. 한편 도시에서 청씨 가문에 시집 온 시골마을에서 보기 드문 미색을 갖춘‘샤홍메이’라는 여성역시 마오쩌뚱(毛澤東)의 문화혁명에 열광적이며, 마을의 혁명 동참을 요구하다 청씨에게 조롱과 치욕적인 취급을 받았음을 전해 듣는다.

 

아이쥔은 곧 미색과 혁명의 열의에 찬 샤홍메이에게 매료되고, 혁명은 그녀와의 사랑이 결합된 행위가 된다. 이윽고 샤홍메이는 아이쥔의 열정에 적극 동조하고 지지하는 혁명동지가 되고, 또한 연인이 된다. 두 사람의 사랑, 이들의 육체적 탐닉은 혁명의 불씨이며, 혁명의 동력이기에 혁명과 분리할 수 없는 실체적 요건이 된다. 그러나 자칫 밀애(密愛)가 드러나면 혁명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이들의 성애(性愛)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것이어야 하고, 마음껏 타오르기에는 제한적인 한계를 내재한다. 드디어 아이쥔은 샤홍메이의 지지와 마을 청년, 노동자들을 향한 치밀한 선전과 설득을 통해 촌마을의 작은 혁명에 성공한다. 이제 촌에서 현으로, 현에서 성으로 혁명 일꾼으로서의 영역과 지위를 높여가고자 하지만 전통적 기득 세력의 은밀한 방해와 음모의 장애에 부딪치곤 한다.

 

아이쥔에게 혁명의 장애는 곧 제거하고 거꾸러뜨려야 하는 적대자일 뿐이다. 자신의 행로를 막아서는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혁명의 무대를 넓혀나가는 맹목이 그를 장악한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샤홍메이와의 사랑이 결합된 행위이며, 그래서 그녀와의 온전한 결합은 혁명의 완벽한 실현을 향한 필요조건이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집으로부터 500여 미터에 이르는 여자의 집을 향해 2년여에 걸쳐 땅굴을 파내고, 마침내 두 사람은 연결된 지하 땅굴에서 혁명과 사랑의 온전한 결합을 만끽한다. 자유로운 교성과, 완전한 시선의 탐닉....

 

혁명과 공존의 영역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은 이처럼 지하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지상의 세계가 아닌 지하의 세계에서만 그 영역은 교집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혁명가(歌)의 열광적 선율이 진동할 때에만 아이쥔의 육체는 ‘물처럼 단단해’지는 것이다. 인간과 혁명의 결합이 비로소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소설은 아이쥔에게 땅굴을 파게하면서 이미 죽음을 향한 암시를, 아이쥔과 샤홍메이의 지하에서 펼쳐지는 열락(悅樂)에서 문화혁명이라는 것의 본질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그래서 두 혁명가는 잔혹한 혁명의 행로에서 그네들 사랑의 결합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리라는 것을.

 

비단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혁명만이 인간 개인의 본성을 압살하는 것은 아니다. 항시 혁명이란 기치아래 수행되는 전복에는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의 복종과 이에 수반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폭력성이 정당화되곤 한다. 여기서 그 존재를 부인당하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파괴는 당대의 인간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생존과 죽음의 양분법, 물처럼 단단하기는 지하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적(赤)색(공산주의)과 황(黃)색(성:性)의 기만적인 금기를 깨뜨리고 훼손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존엄성을 끊임없이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옌롄커의 작가적 시선은 그 회복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지점에 있기에 더욱 간절하게 보이기만 한다. 인간에게서 사랑이란 본질적 요소를 박탈하는 것이 그 무엇으로 가능하겠는가? 옌롄커 소설의 중심인 금기에 대한 도전의 뿌리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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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방파제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란 옮김 / 새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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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연인』백인소녀, 쉬잔, 그리고 뒤라스

 

하나의 소설이 그것만으로 온전히 읽혀지지 않을 만큼 아득한 것이었다면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후 작가의 또 하나의 소설,『연인』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된 느낌을 가졌으니, 두 작품은 서로의 틈새를 메워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물들이 완벽하게 중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 외상을 남긴 광기어린 가족의 기억, 소소한 소재들이 연결시켜주는 외연의 확장으로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진의를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태평양의 방파제』는 식민지에 이주해 사는 프랑스인 가족, 어머니, 오빠 조제프, 그리고 열일곱 살 소녀 쉬잔, 그리고 쉬잔의 연인 무슈 조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인물들에게 이름이 주어져 있다. 아마 뒤라스의 초기작으로서 소설의 허구성을 위한 치장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연인』에서는 굳이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백인소녀인 나, 어머니, 작은오빠, 나의 연인인 중국인 남자 그가 있다. 의도적으로 자전적 작품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작품 속의 가족들과 쉬잔이자 백인소녀는 작가 뒤라스를 배제하고 읽을 수가 없으며, 이것은 곧 실존 인물에 대한 탐구, 혹은 정신분석적 탐색이란 묘한 흥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소설의 제재들

 

식민지 토지관리국이라는 점령국의 약탈적 탐욕이 자국민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만큼 부패해 있으며, 남편을 여윈 여인이 자식들과 살기 위한 방편으로 구입한 토지는 바닷물에 침수되는 곳이다. 농작의무 불이행시 환수한다는 조건을 달고 농작할 수 없는 토지를 판매하는 것이다. 부패한 토지국 관리는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의 재산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착취하여 배를 불린다. 여기에 저항하듯이 여인은 방파제를 쌓지만 태풍에 여지없이 방파제는 허물어지고, 바닷물이 넘실대는 토지에서 농작은 불가능하게 된다. 관리(官吏)는 의무 불이행으로 환수를 위협하고, 여인은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의 도움으로 이들을 쫒아낸다. 결국 ‘방파제’는 조제프와 쉬잔의 어머니인 여인에겐 생존, 삶의 궁극(窮極)인 것이다.

 

이것은 이 가족의 모든 것으로 이해되지만 점차 어머니 광기, 생존을 버티는 공허함임을 조제프와 쉬잔은 이해하게 된다. 가난이 고착화된 가족, 어머니는 딸 쉬잔에게 관심을 보이는 외소한 청년, 부잣집 아들인 무슈 조를 자신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수단화하려 한다. 쉬잔은 자신의 여체(女體)가 유용한 도구임을 깨닫고 어머니의 뜻에 부응한다. 남자는 쉬잔을 소유하기 위해 물질로 보답하고, 축음기, 그리고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에 넣는다. 다이아몬드의 처분 자금으로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도약을 예견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금액임을 알게 된다.

 

식민지, 방파제, 육체, 다이아몬드, 이들은 착취와 폭력, 관능과 무능함의 언어이다.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삶이란 공허와 낙심, 피폐와 상처만이 남는다. 이러한 소설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암담하기만 한 이들의 현실을 뚫고 조제프와 쉬잔이라는 두 젊은 영혼들의 미래를 향한 탈주의 꿈틀거림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네들의 운명 앞에 선 길이 평범치는 않아 보인다.

 

2. 소설『연인』과 함께

 

『태평양의 방파제』에서 굳이 쉬잔의‘연인(戀人; L'Amant)’을‘무슈 조’라 하겠지만 사실 쉬잔의 입장에서는 연인이랄 수 없다. 애초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구원할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상대에 불과하며, 쉬잔은 욕실의 문틈으로 잠깐씩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자를 자신에게 묶어둔다. 결국 다이아몬드를 얻어내는 것으로 이들의 연인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소설『연인』의 열다섯 살 반의 백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와의 연인 관계는 이처럼 기만적이지 않다.

 

물론 메콩강을 건너는 나룻배 위에 옅은 화장을 하고 헐렁한 원피스에 남성용 중절모를 쓴 원주민 사이에 선 백인 소녀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기사가 있는 고급승용차에서 내려 다가온 중국인 남자의 수줍은 접근을 헤아리고 그의 차에 서슴없이 오르는 것은 쉬잔의 의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백인소녀 나는 그에게 육체를 무기로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의 욕망에 이끌려 가진 최초의 관계에서 육체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열락의 감각을 깨닫게 되며, 남자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의 존재를 자문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쉬잔이 얻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연상시키듯 백인소녀의 손가락에도 슬쩍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여줌으로써 댓가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연인』은 『태평양의 방파제』의 쉬잔의 삶을 더욱 구체화시켜 보여주지만, 그녀와 오빠와의 관계도 보충해 드러낸다. 『태평양의 방파제』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큰 오빠의 존재는 엄마와 함께 광기와 에고이스트, 폭력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에게 어떠한 동정이나 연민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혐오와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반면에 둘째 오빠는 쉬잔이 못내 걱정하고 아끼던 사랑하는 오빠 조제프의 모습과 일치한다. 다만 『연인』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할 뿐이다. 쉬잔이자 백인소녀인 뒤라스의 오랜 상처가 무엇이고 그녀의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린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엄마에게 배척된 작은 오빠, 조제프와 백인소녀 쉬잔, 두 남매의 상처와 고독의 배경, 그네들의 아린 성장기의 고통이 도처에서 배어나와 뒤라스 문장의 근원, 실체를 목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갖는다.

 

3. 뒤라스의 사랑

 

위의 두 작품, 즉 뒤라스의 소설 속 분신인 쉬잔과 백인소녀 나는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 여체에 대한 자각의 성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오빠 조제프를 통해 바라보는 성적 편력은 그녀에게 육체, 성(性)의 궁극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가져다주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기만적 목적으로 대했던 무슈 조의 갈망하는 시선에서 자신의 육체적 가치를 인식하였다면 오빠의 친구인 동네청년 아고스티를 따라가 자신의 처녀성을 단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어주는 것처럼 자신의 여성성으로서의 육체를 다분히 이타적인 대상으로, 혹은 수단으로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연인』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육체가 단지 수단으로서의 매력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비로소 그녀는 몸으로부터 전달되는 소중한 감각들을 느끼고, 그것이 갈망이 되고 또한 사랑과 다르지 않음으로 확신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락이 죽음과 같음을 이해하는 건 ‘조르주 바타이유와 친교를 가졌던 뒤라스로선 견고한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임종하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십 년 연하의 연인‘얀 앙드레아’와의 대화로 꾸며진 『이게 다예요』에서 “행복하다는 감정, 얼마쯤 죽어있는 느낌”, 또는 “예전에도 지금도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건 사랑이지, 죽음(la mort)과 사랑(l'amort)”이란 문장에서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은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면 억측일까?

 

뒤라스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죽음의 망령은 육체의 지고한 쾌락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가장 사랑한 소설이라고 유언처럼 남긴 소설이 바로 이 『태평양의 방파제』이고 보면, 빠져나가고만 싶어했던 어린 시절, 그러나 가족의 사랑과 숨결이 온통 배어있는 그 시절의 기억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던 것일 게다. 고요한 저녁나절 낮게 소리 내어 읽으면 감동이 배가 될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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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떠난 자리
김만권 지음 / 그린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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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정치가 눌러 앉았던 적도 없으니 떠났다는 표현은 한국사회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 아닐까? 어쨌든 비어버린 그 공허함, 부재의 아쉬움만은 충분히 전달된다. 모 작가의 소설이 너무 정치를 지향한다고 비난하던 뉴라이트의 정말 지나치게 무식한 행동대원의 말처럼 정치는 시민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인식이 뿌리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투표행사를 위한 선거이외에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관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정치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이다 보니 시민사회에 정치가 존재할리 만무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정치와는 무관했던 시민들이 선거 날 투표하는 내용이 무지(無知)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투표, 소위 대의민주제하에서의 비민주적이고 시민의식이 부재하는 정치의 비극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한국인의 투표는 결코 정치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오직 지연과 혈연, 지역적이며 경제적 소망이었을 뿐이다. 물론 양식(政治的 良識)있는 사람들의 투표가 존재하긴 하지만 무지의 인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 이렇게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단 이번 대선의 결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거를 보며 내 주변의 이들은 입을 모으곤 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돼’라고. 또한‘저 지역 좀 봐, 뻑 하면 노동쟁의를 벌이고 공권력에 무참히 당하면서도 그 주체에 다시 투표하잖아’ 결국 민주적 형식행위로서 전락하고 굳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 같다. 깨어나려 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정적이고 자기들끼리만 매번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아무런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진보, 유토피아의 상실을 설명하는 저자의 열변은 아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 안타깝고 아쉽다.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진보는 자기의 정체성은 물론 스스로 민주적 근간을 훼손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가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염원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듯이 한진중공업 해고근로자를 응원하던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시민들처럼 ‘자유’란 이미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체화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있으며, 또한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그 참뜻을 깊이 응원하는 시민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회의를 멈출 수가 없다. 이들에 대한 자유의 침해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다수의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믿음은 몇 가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정치는 기성의 소수 제도정치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이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정이기에 지금까지 외면했던 시민의 깨어남을 위해 식견있는 기성의 정치인들은 시민참여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시민들 또한 정치극장을 팔짱끼고 관람만 하는 수동적이고 무지한 자세를 탈피하고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 게릴라”로서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방법론으로 진정 퇴행하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되살리려 한다면 진보세력은 분파적 신념에 매몰되지 말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연대’, 즉 시민의 정치 참여는 물론 자유주의를 비롯한 혁신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용기를 말한다.

 

이러한 제안을 위해 한국사회의 정치 현실이 삶의 목적을 생존으로 바꾸어 놓은 국가 중심의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천민자본주의에 연장에서 해독하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존의 모델이 아니라 생존의 모델로 전락하면서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의 토대라는 기본을 잃어버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는 상반되는 집단에 투표하는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당연한 귀결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 옳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시민의 결핍”이 현실인 사회, 경제적 이해득실에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정치적 자유인이 되도록 깨어나게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적 무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의 열정인 유토피아의 상실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경제적 번영과 생존에만 매달린 시민들에게 동등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곧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정이며 소통의 시작임을 어떻게 깨우치게 한다는 말인가? 한국사회가 진정한 자유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의 정체가 안정되는 사회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만의 대화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번 18대 대선의 선거처럼 말이다. 쳇바퀴처럼 돌기만하는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지혜가 깨어있는 시민들보다 결코 깨어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능동적인 시민정치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들은 기성 정치의 혐오로 정치에서 철수한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던 도망한 시민들이 되돌아와야 할 중대한 시사와 용기를 제공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못한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롭지 않다는 이해만큼 중요한 인식은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분명 수구정권의 5년을 통과하면서 너무도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퇴행을 목격해 왔음에도, 다시금 5년을 연장시켰다. 이 절망의 나락에서 시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되찾는 방법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인식을 자기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가에 대한 지속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그들이 읽어 주었으면, 그리고 변화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 시민들이며,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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