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단상은 창작과 비평2021 겨울호(통권 194)에 게재된 식인 자본주의 부상이라는 제하의 낸시 프레이저와 마르띤 모스께라의 대담 내용에 대한 소회임을 밝혀둡니다.

 


정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칼 마르크스'의 사회적 인과성은 경제적 토대로부터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토대-상부구조(base-superstructure)'에서 경제적 토대에 비경제적 배경 조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시스템을 주장한다. 자본주의란 경제적 토대만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적 하위 시스템과 그 가능성의 필수적 배경조건인 "사회적 재생산, 비인간 자연, 공공재화 등등(369)"과의 관계성을 사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A. 자본주의 토대 개념의 확장 필요

 

이 필수적 배경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식적 경제 바깥에서 새로운 세대를 낳고, 돌보고, 사회화하고, 교육하는 일과 같이 경제적 토대에 편입되지 못한 이 비경제적 조건은 의심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토대이다. 이것이 부재하다면 사회적 재생산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코로나19'비인간 자연'이라는 비경제적 조건이 전체 경제 시스템을 얼마나 수축시켰는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회의를 얼마나 불러 일으켰는지에 대한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같이 배재하였던 생태적 기능 장애가 자본주의 경제와의 인과적 역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자연 같은 비경제적 영역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야말로 본디 자본주의적 특성아닌가?라고. 따라서 이러한 하위 시스템은 자본주의 토대에서 배제하여도 언제든 마음대로 사용,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이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370)"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비경제적 조건들을 의지대로 굴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적 재생산의 시간성은 자본주의 토대아래 있지 않은 것(371)"처럼 이들의 능력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자본은 개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하고 자본의 가치를 스스로 확장하도록 동기화되어 있어 '자본 의지'를 관철한다. 그리고 자본 배경 조건을 이 의지에 의해 변경시키고 말테지만 역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경제적 토대에서 소외된 개별 인간과 비인간 자연이 자본 의지의 작동을 제어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B. 자본주의 위기를 이해하는 방식

 

지구 온난화, 생태위기는 이미 오랜 기간 조짐을 드러내왔을뿐아니라 생생하게 감지되고 있는 실상임에도 자본주의는 그 토대인 비경제적 필수 조건을 외면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 감각되는 것에만 미봉책으로 나서곤 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총체적 위기로 감지하지 않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토대확장 이론은 바로 이 지점을 시정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돌봄 노동의 실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요 노동시간과 에너지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임금을 잡아먹는 것을 우리들이 목격하게 하였다. 부유계층(의사들의 정부의 의료 공공정책에 대한 반항)에 제압당해 시민을 향한 중대 정책이 좌절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기도 했다. 거버넌스 위기다!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을 가하게 될 것(373)"이다. 위기는 '발전적 위기''획기적 위기'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발전적 위기란 특정한 축적 체계나 단계에 국한하여 현안 위기에 대한 문제 해결이라는 땜질식 처방의 이해이며, 획기적 위기란 모든 단계와 총체적 현실 자체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어 시스템이 위기의 경향을 품고 있다는 관점이다.

 

전 지구로 확산된 미국 발 금융대란이 발생하자 파생금융 상품에 대한 무분별성이라는 특정 문제만이 원인이라 보고 잠정적 문제 해결을 끝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작금의 행태이다. 결코 근본적 모순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축적과 이윤추구를 향한 강박적 욕망이라는 무분별한 자본 의지만이 작동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파국적 위기를 겁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견되는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의 요청이며, 획기적 위기 인식으로의 전환 요구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가치법칙을 폐지하고, 착취와 탈취를 종식시키며, 민주적 계획과 시장간 의 관계를 재발명할 수 있다. 한편 서로 적대하는 독재자들, 전 지구적 권위 체제하의 막대한 사회적 퇴행을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들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사회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위기 지속의 가능 속에서 살아 갈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노동권, 녹색 환경 운동가들, 돌봄과 젠더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권위주의적 기득권에 맞서는 이들이 연대해야 한다. 모두 자본주의 필수 배경인 토대이다. 다양한 이해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로 규합하는 정치적 과제를 위해 모여야 한다. 전체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 포퓰리즘은 이미 보수 우파가 선점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성격은 전혀 같지 않은 상태로서.

 

C.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누가 가졌는가?

 

포퓰리즘은 대중 선동적이라는 의미를 씌우는 이들이 누구인가? 우파가 선점한 포퓰리즘과 구분되는 좌파 포퓰리즘은 절대 필요하다. 우파는 인간 집단을 삼분하여 대중적 우위를 점하려 한다. 피 빨아먹는 엘리트, 기생하는 하층 집단.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선량한 사람들로 나누어 적들을 특징적이고 실체적 용어로 정체성 정치를 벌인다. 예를들어 실업급여 수급자를 비난하기 위해 '게으른 실업자', 퀴어 집단을 분열시키기 위해 '동성애 음모집단'으로 부르는 식이다. 낙인을 찍어 경계에서 배제하는 악의적 포퓰리즘 정치이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방대한 다수인 인민 대중과 이들로부터 막대한 부를 빼앗아 축적하는 소수의 과두 기득권 집단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취한다. 즉 시스템 내의 역할이라는 기능적 정의를 통해 사회적 진실에 접근하는 포퓰리즘이다. "누가 누구의 목을 밟고 있는지 사회적 위계 지도가 분명해 질 것(378)"이다. 우파의 정체성주의 포퓰리즘은 집단과 계층을 분열시켜 자기 기득권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좌파가 우파의 포퓰리즘과 싸우기 위해서는 투쟁과정에서 시스템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조작되고 사용되고 있으며, 그 영향이 어떻게 파급되어 대중적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해 교육시킬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계급투쟁을 확장하여 '경계투쟁'을 주장했다. 투쟁이 그저 잉여가치의 분배방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네 삶의 문법을 결정하는 가'의 물음이었다. "자연, 공공재, 규제 역량, 정치적이라 간주하는 법 형식을 둘러싼 투쟁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 핵심을 둘러싼 투쟁(383)"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에서 자본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일례로써 법인세 감면 법안의 입법 제의가 있었다고 하자.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누가 삶의 문법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하고. "이 질문이 정치적 의제에서 은밀히 제거되고 몰래 자본과 축적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맡겨(384)"진다면 악당에게 총칼을 쥐어주는 것 아닌가? 경계투쟁이란 사회적 문법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헤게모니 선점의 싸움인 것이다. 연대해야 한다. 삶의 문법을 만드는 이들은 방대한 대중이어야 한다. 자기 집단을 분열시키는 세력을 지지해서는 진정 악당들을 꺾을 수 없다. 논쟁적인 이 담론은 오늘 우리 대중들에게 포스트 자본주의, 민주적 생태 사회주의를 향한 새로운 체제를 사유케 하는 귀중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참조: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

 

미국 뉴스쿨 정치철학 교수인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자본주의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생존조건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전망 하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재앙에 명명한 개념이다.   국역본은 <좌파의 길>로 번역되어 2023. 2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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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럽 선언 - 만국의 시민이여, 연대하라
콜린 크라우치 지음, 박상준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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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시민권은 체제의 자비로움이 베푼 것이 아니다. 인간적 삶, 사회가 필요로 하기에 성취된 것이다.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 소득(시민 소득)은 시민권의 정당한 자격이지 복지 동냥이 아닌 것이다." - 106~107쪽 발췌 인용

 

바로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기본소득의 지급 여부와 관련하여 논쟁적 갈등이 첨예하다. 수구집단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기본소득을 자신들이 베풀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의 지적처럼 '복지 동냥'이라 이해하는 이러한 착오적 망상에는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훼손의 저의가 스며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선언하려는 '사회적 유럽'으로의 복귀를 막고 있는 이기심과 혐오에 터 잡은 탐욕의 민낯이다.

 

'사회적 유럽'이란 "급진적 재발명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복지국가 전략 강화(16)"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걸 시장(市場)의 논리로, 즉 시장이 인간사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교리를 신봉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사리사욕에 집착하고 분배 요구를 외면하며 불평등 증가를 기업가 정신의 보상이라고 까지 하는 반동적 수구성으로 퇴화하는 세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이다.

 

A. 코로나 팬데믹이 알려준 교훈들 - 인간사회의 상호의존성

 

COVID-19가 지구촌을 휩쓸며 우리에게 인상 깊은 현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줬다. 이 재앙적 전염병이 창궐하자 "경시받고 심지어 혐오와 경멸을 당하던 간병인, 쓰레기 수거인, 보안 요원, 배달 기사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맡은 중요한 역할(15)"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가치를 시장에서의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질서의 부도덕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또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한 미국,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본, 브라질 등이 방역에 실패한 주요 국가였으며, 시장이 모든 걸 지배케 한 결과로 방호 장구, 인공호흡기, 기타 의료 제재에 대한 대량 수요 조달의 실패는 물론 진단과 병상 연계의 혼란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무참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곤 강력한 국경, 자급자족 사회로의 회귀 등 인종적 계급적 차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협력과 공유를 위한 요청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백신 투입이 이루어지고 집단 면역 형성의 시기가 가까워오자 다시금 재분배 정의, 노동및 인권에 대한 제고, 지구 온난화 등 환경 대처 조치 등을 언제였더냐는 식으로 내던져 버리고 수익성(성장) 논리를 앞세워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 감면 정책을 흔들기 시작하고 있다. "소비자, 노동자, 일반 대중의 이익을 자신들 주주를 위한 이윤 우선의 정언명령에 종속시켜야 한다(24)"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을 구체화할 선택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들 중 하나에 서 있다." - 서문 중에서

 

COVID-19가 인간 사회의 상호의존이라는 가치를 각성케 하였음에도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인간 협력 영역의 확장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구성원 간(계층 간)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며 반()평등주의와 계급()주의와 인종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이 보수주의와 반평등주의의 냉소적 동맹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수구세력은 인간 행동의 매우 강력한 동기인 이기심과 혐오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 옹호함으로써 대중을 효과적으로 흔들어 대고 있다. 오늘 우리 일반 대중들은 선택의 갈림 길에 있다. 선린 의식과 상호의존성의 가치, 불평등 해소의 절박감인지, 아니면 사회적 배제의 강화, 시장 이익의 극대화를 향한 경쟁과 탈규제가 초래하는 극단적 양극화의 세계인지를.

 

"Better together, Hope not hate (함께하면 더 좋고, 혐오가 아닌 희망으로)"

 

B. '사회적'이라는 의미 - 복지 국가 전략을 위해서

 

이 책의 표제인 유럽을 수식하고 있는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복지 국가 전략'으로서의 의미임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새길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EU)1993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조약 사회적 장(Social Chapter)에서 "사회적 유럽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20171117EU의 대표기관인 유럽위원회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유럽 사회권 기둥(European Pillar of Social Rights)'으로 "기회 균등, 노동 시장 평등 접근, 공정 노동 조건, 사회 보장 등" 사회적 기본원칙을 선언 했으며, EU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는 다시금 포용과 협력의 사회적 유럽 건설을 확인하였다.

 

이렇듯 책의 표제인 '사회적 유럽'이란 표현은 이미 유럽연합 회원국(EU)들에게는 그네들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합의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오늘 거듭 선언하는 이유는 이들 앞선 조약과 선언을 거부하고 포퓰리즘에 의한 퇴행적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는 인간적 삶이 들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기심과 혐오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의 도덕적 합의가 부정되는 세계는 인간 삶의 걷잡을 수 없는 파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이 선언의 실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들은 어느 정책 집단에 투표를 해야 하나? 무엇이 진정 국민 대중의 삶을 위한 선택이어야 할까?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방해하는, 즉 경제 권력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되는 것과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도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의 제거를 통해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 될 수 있으리라 역설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인종, 계급주의로서의 차별과 배제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를 인간적 삶을 파괴하는 두 망령(유령)으로 지목하고, 그 실천 방안으로 세계화의 개혁, 금융 자본의 규제, 물질적 불평등 감소를 위한 노동자들의 안전한 삶에 대한 요구와 조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과 같이 한국 사회 역시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된 친()시장 성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현상들 또한 그리 다르지 않기에 오늘 한국의 시민 대중에게 이들 실천 과제의 설명은 중대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C. 멈출 수 없는 시장 확대와 세계화 추구, 그리고 공공성의 내재화를 위해

 

크라우치는 세계화를 중단하고 국경을 걸어 잠그자거나 시장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시장 억제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 범위의 적극적 확대라는 세계화를 추구하며,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주장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미 드러났듯이 시장 자체만으로 인간 삶, 사회 안전망에 뚤려 있는 수많은 틈을 메꾸지 못하기에 공공 정책으로서 기반시설(운송망-물리적인 것, 직업 훈련-인간적인 것)과 효율적 규제의 리드가 필요하며, 적극적 정책 개발을 통해 세계화를 인간의 통제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상충하는듯 보이는 시장 규제와 광범위한 시장 추구를 통한 경제의 효율적 작동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마 이를 위한 실천 방안으로써 "기술적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논의 과제로 격상되어 제안"되는 '표준 설정'은 시장 범위의 효율적 규제와 시장 우위확보를 동시에 아우르는 돋보이는 안목이라 하겠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술 표준으로 시장 우위 선점을 경쟁한다.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국제 표준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기의 규범이 시장 규칙이 됨으로서 지배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 설정'은 여기에 내부 품질 표준, 노동 환경 품질 표준을 추가하여 더 강력한 표준 설정 제도를 국제 규범화하자는 것이다. 표준 설정 자체에 인간 삶의 안정성과 환경 보호 규제가 내재되어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에 억제와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다. 이러한 권위를 지닌 표준 설정은 기업이 규제에 취약하지 않게 되며, 표준 달성을 위한 가격 상승은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등 상품, 서비스 생산의 새로운 가치 창출의 기회를 이끌기도 한다. 해양 환경 규제에 따라 디젤 추진 선박에서 LNG추진 선박으로 선박건조 주문이 이동함에 따라 기술을 선점한 한국조선업체가 시장 지배자가 된 것이나. 내연기관에서 전기 배터리로 이전하는 자동차 설계, 제조부문의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이의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에 더해 표준 설정은 규제가 낮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산업투자를 억제 할 수 있으며, 산업 노동자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즉 확장된 상품, 서비스 표준 설정은 부정적 제재가 아니라 시장이 결여하고 있던 공공성을 내재시켜 차원 높은 시장 제도가 될 수 있다.

 

"이기심과 배제의 호소들은 단순하고 쉽지만 어둡고 사나운 목적지로 이어질 뿐이다. 협력과 포용에 대한 요구들은 더 부담되지만,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궁극적인 보상을 가져다준다." -125

 

COVID 팬데믹은 배제와 차별,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능력주의라는 허구적 발상에 뿌리박고 도덕적 외피를 입은 가치는 불평등의 정상화라는 기이한 현상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2 기계시대로의 급속한 진행은 플랫폼 노동과 같은 합법적 노동착취의 토대가 되고, 노동자들은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노동 형태로 내몰릴 뿐이다. 그마저도 많은 일자리의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처럼 극단적 취약 상태에 노출된 불안정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을 때 사회는 이들에게 더욱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사회가 마땅히 취할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 집단은 실업수당 지급자격을 까다롭게 하여 그 규모를 줄이려고 친기업적인 황색신문들을 동원한 프로파간다로 왜곡, 보편적 복지의 취지에 역행하려한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노동 현장은 월 단위 계약에서 최장 1년 계약을 통해 쉬운 고용과 해고라는 노동수급의 유연성만이 활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5년 내 3회 이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업급여 수급을 제한한다는 발상은 1년에도 수차례 일자리에서 퇴출당하여야 하는 열악한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악행이 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약삭빠르고 게을러빠진 인간들이란 굴레를 씌우는 자본축적의 탐욕에 눈 먼 자들의 편협성은 폭력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기심과 배제와 혐오의 세계가 아니라 포용과 협력, 모든 인간이 좋은 삶을 함께하는 세계를 위한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시민 대중의 몫이다. 지배 기득권자의 시선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적 시선, 수많은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을 때, '사회적' 가치가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다. 시장도, 세계화도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바로 그 길을 밟아나가게 해주는 안내자이자 조언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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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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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책은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에 능숙한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를 반추하며 오늘날 소통의 흐름을 차단하여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교착상태에 빠뜨리는 사고의 양극화를그 필연적 독단성을 반성케 하고진실 파악 불능의 능력을 회복시키려 하는 노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흥미로운 논제들로 빼곡하여 읽는 즐거움도 만끽하게 하지만 지성과 어리석음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양상을 지켜보는 지적 성취도 만만치 않은 지성사적 만찬이라 해도 지나친 수사가 아닐 것이다.

"멍청이들은 (...) 지혜를 가졌다고 믿지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약점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지식은 그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며 이로움을 주는 망각의 영역으로 물러나야 한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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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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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고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들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방법이라며 거장 '존 스타인벡'은 캘리포니아의 작은 해안 마을 '캐너리 로'"창녀, 뚜쟁이, 도박꾼, 개자식들(7)"이자, "성자와 천사와 거룩한 사람들(8)"인 어차피 뜻은 마찬가지인 인물들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을 시작하는 첫 쪽의 문장부터 이 마을의 인상을 아주 쿨(cool)한 시선으로 써내려가며 배배틀린 독자의 마음을 붙들어 맨다. "()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탤지어이고, "이며,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는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인 마을이다. 첫 장을 이렇게 장황하게 옮겨 쓰는 이유는 이보다 소설의 배경을 잘 묘사할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규정하는 것들의 경계에 아슬하게 걸쳐있는 인간들, 도둑, 악당, 부랑자라는 낙인이 찍힌 인간들은 세상이 놓은 덫과 독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하며 올가미를 건너 뛸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세상의 광기가 풀어놓은 이것들로 인해 자연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소설은 바로 이들에게, 이 쓸데없는 잡년놈들에게 사랑의 자비로운 시선을 듬뿍 안긴다. 잡놈의 우두머리인 맥과 그의 패거리인 헤이즐, 에디, 휴이, 존스, 그리고 게이, 그리고 매음굴 '도라 플러드'이자 식당 '베어 플래그'의 사장인 잡년 도라와 그녀의 여자들에게.

 

어느날 '리청식료품점' 외상 최고 기록자인 어분(漁粉) 창고의 소유자인 호러스는 자신의 빚 탕감 조건으로 창고를 리청에게 넘긴 후 자살한다. "악하게 균형 잡힌, 그러나 선에 의해 허공에 매달린 상태를 유지(22)"할 줄 아는 중국인 리청의 속셈이 이룬 성과다. 낡아빠진 허름한 창고 인수의 소문은 득달같이 맥 패거리에게 전달되고 맥은 리청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들어가 살아야겠음을 요구한다.

 


거절했을 경우에 닥칠 막대한 손해를 방지하고 이 거친 부랑자들의 요구를 승낙할 명분을 만들어 제시한다. 받을 수 없음을 알면서 월 5달러의 임대료를 제시하고 양 당사자의 체면을 지키는 명목상의 계약을 체결한다. 맥은 정당한 계약을 하여 창고 사용 권리를 얻고 리청은 무상이 아닌 유상 계약이라는 대외적 체면을 지킨다. 이 현명한 거래는 두 사람에게 만족을 선사한다. 이제 무대는 어분 창고, 명명의 유래가 모호한 일명 '팰리스 플롭하우스 앤드그릴'은 맥 패거리의 거점이 된다.

 

캐너리 로라는 우주 중심을 공전하며, 저마다의 궤도를 자전하는 거점들의 지도를 그려봐야 할 것 같다. 각종 육상, 해양 동물들, 방부처리된 보존 생물들을 판매하는 '웨스턴 생물학 연구소'에서 도로 건너 대각선에 리청 식료품점이 있으며, 그 우측에 도라 플러드가, 좌측에 공터로 불리지만 공터 아닌 곳(버려진 보일러, 파이프에 인간들이 살고 있기에)이 있으며, 맥 패거리의 거주 창고가 있다.

 

웨스턴생물학 연구소의 유일한 연구원인 ''은 이들 경계인들의 "허무맹랑한 소리도 귀 기울여 듣고 지혜로 바꾸어 주는" 인물이다. 이 우주의 '철학과 예술의 원천'인 셈이다. 통조림공장에서 낡아 공터에 버린 거대한 보일러는 옆에 놓인 또 다른 거대한 파이프를 부랑자들의 침소로 세놓아 살아가는 부부의 옹색한 살림집이다.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보일러 석탄 투입구 속의 넓은 공간이 그네들의 거소다. 창문 없는 이 녹슨 쇠떵어리 공간에 예쁜 커튼을 꿈꾸는 아내의 이룰 수 없는 환상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남자가 있다.

 

한편 법에 어긋나게 살기에 법을 두 배로 지켜야 하는, 때문에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도라는 그녀의 뻔뻔스럽고 더러운 죄의 값으로 몬터레이 기부금 가운데 최고액을 부담한다. 이런 연유로 경계 내 추악한 세계에 비하면 도라 플러드는 오히려 "견실하고 고결한 클럽"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자전하는 주요 행성이 얼추 소개된 것 같다.

 

"정말이지 닥에게 뭔가 좋은 일을 좀 해줘야 하는데." -42

 

소설은 이들 행성이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인력에 의해 돌아 갈 수밖에 없는 궤도 탓에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엉뚱함이 빚어내는 존재의 무력감과 고통 속에서 인간의 보잘것없는 만족감과 행복한 웃음을 길어낸다. 그것은 아주 짙은 향수(鄕愁)와 연민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깃든 시선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발단은 캐너리 로의 행성 모두가 연구소 닥에 대해 지니고 있는 부채감에서 비롯된 은혜 갚음의 의식이랄 수 있다.

 

"사회적으로 맥 패거리는 경계를 넘어버렸다." - 190

 

닥을 위한 파티를 구상한 맥 패거리는 파티비용 마련을 위해 닥으로부터 개구리 마리당 5센트를 받기로 하고 개구리 잡이를 나선다. 사실 이 구실이 진정 누구를 위한 여정인지는 이 거래 관계의 해괴함에서 이미 드러난다. 이것은 의인화된 개구리들의 심리를 공포의 에피소드로 묘사한, 다분히 비유적 의미를 지닌 개구리 포획작업 장면과 오버랩된다. "이성을 잃고 버둥거리는 개구리들, 겁먹고 환멸에 빠진 개구리들, 개구리 역사상 최대의 참극(131)"...이 벌어진다. 잡은 개구리는 리청의 재빠른 셈과 어울려 술과 햄과 샌드위치로 바뀌고, 닥이 없는 연구소에 진입한 맥 패거리는 난장판으로 파손된 연구소를 닥에게 남겨놓을 뿐이다. 드디어 맥 패거리는 세상이 깔아놓은 덫과 독을 밟았다. 이들에게 돌아 올 것은 사회적 낙인, 사회적 추방, 분노다. 몬터레이는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은 고립과 철저한 소외에 젖어든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다 병자야. 속이 안 좋고 영혼이 안 좋아. 하지만 맥 패거리는 건강하고 또 묘하게 깨끗해. (...) 자기들 욕구에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마음대로 충족시키지." -192

 

머리를 숙이고 팰리스 플롭하우스에 나란히 앉아 연구소를 바라보고 있는 맥 패거리들을 정의하는 닥의 목소리다. 아마 소설이 독자에게 발설하고자 하는 이 세계의 비의(秘義)일 것이다. 우리들의 세계가 존경하는 미덕들(친절, 관용, 이해와 공감 등등)은 실패에 따르는 언어이며, 정작 혐오하는 것들(탐욕, 비열, 자기중심, 이기심 등등)은 성공의 특징들이다. 표면으로는 미덕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것들은 혐오의 결과물들이다. 닥의 믿음에 화답하듯이 맥 패거리는 몬터레이의 모든 것을 난도질해버릴 것 같은 광기 속에서 "덕이고 자비이며 미"의 존재자로 나선다.

 

닥이 무심하게 뱉은 가짜 생일은 캐너리 로라는 우주의 묵시적인 화합의 파티, 이 작은 우주의 성인인 ''을 위한 보은의 행사로 준비된다. 그러나 정작 파티의 진행이나 구성 등 본질에 대한 계획은 전무한 파티다. 파티는 어차피 계획과 의도에 따르지 않음을 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드디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타 오르고,사랑이 울려 퍼지고, 손님들은 조용히 앉아 각자 자신의 내부를 향할 때, 닥은 "황금빛 기쁜 슬픔"을 느끼며 맑은 저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사랑을, 하나의 영혼을 얘기하는 'E.파위스 매서스'가 옮긴 검은 금잔화가 낭독된다. 도라 플러드의 그녀들, 리청, 맥 패거리들, 몬터레이의 경계인들에게 달콤한 슬픔의 유대가 전달되고 이들에게 기쁨의 미소가 빛나고 있을 때, 창녀를 찾는 이 세계의 규정 속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이 들이닥친다. 성자와 천사와 창녀와 개자식들이란 인간의 동일한 속성이 아니겠는가. 초라하고 소외되어 작아진 이들이 발산하는 지혜와 재치 속에서 시린 인간적 본질을 캐내어 정말 오래된 감수성을 깨워대는 작품이다. 파티가 끝나고 침구에 누워 닥이 읽는 책 속의 이 마지막 시 구절들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알지 못할 아릿한 슬픔으로 마음을 가라앉힌다. 내가 아끼게 될 문학 작품으로 오래도록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큰 잔치에서 녹색 잔과 금색 잔을 들어올리며

삶의 뜨거운 맛을 보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네.

사라져버린 짧은 순간이지만 그래도

나의 여인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희디흰 영원의 빛을 내 눈 가득 담았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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