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해를 시작하며 '죽음의 집'이라는 이 어두운 제목을 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산 자들 삶의 성찰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각성이 야기한 요청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다만 이 작품의 배경인 서(西) 시베리아 유형지라는 특수한 공간에 갇힌 인간의 기록이기에 여느 산 자들의 언어와는 다른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발에 찬 족쇄처럼 인간의 행위가 엄격하게 강제된 곳이기에 '인간의 삶'이란 것을 보다 절실하고 넓게 사유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 이 소설은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삶을 향한 지독한 향수를 지닌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된 후 17년이 지난 41세에 출간한 소설이다. 농노제와 검열제 폐지를 주장하던 사회주의 그룹에 가담한 죄로 시베리아 옴스끄지방에서 1850년부터 4년간의 유형생활이 그에게 선사한 운명의 산물이랄 수도 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짐작되는 작중 화자인 '알렉산드르 빼뜨로비치 고란치꼬프'의 입을 빌어 "견딜 수 없는 우수, 극도의 정신적 고독이 없었다면 (...) 자신에 대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435)"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듯이, 보다 깊은 인간과 삶을 이해하는 부활을 예비한 죽음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250명 남짓한 절도, 사기 등 잡범들, 살인범, 정치범 등 온갖 기결수들과 미결수들을 감금하고 있는 옥사는 '죽음의 집'이다. 잔혹한 신체적 형벌과 고된 노역뿐 아니라 질병과 폭력이 지배하는 시베리아 허허벌판에 격리되어 수용된 죄수들에게 이것보다 적절한 이름도 없겠지만, 이러한 실재하는 죽음의 근접성뿐만 아니라 감옥 바깥의 세상, 인간의 자유가 거니는 세상이라는 간절한 희구의 도래를 위한 불가피한 고통에 종속된 유예된 시공간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1. 인간 관찰기

 

소설은 죄수에 행해지는 형벌들이 인간의 영혼에 끼치는 해악과 제도적 역기능에 대한 고찰이며, 격리 폐쇄된 공간 속에 있는 인간들의 생존적 행태로 발현되는 심리 분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증오와 금지된 향락에 대한 욕망과 무서운 경솔함을 부추기기"만 하는 강제 노역,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며 표면적 목적만 달성할 뿐"인 독방제도, 억제된 사생활 위반에 가해지는 각종 체형과 태형에 도사린 신체의 자본화라는 인격 말살 등이 죄수들의 감방 내 생존을 위한 각양의 은밀한 거래와 축적의 행태와 조응하며 고독과 공허감, 무력감이라는 박탈된 삶을 통과해내는 인간들을 그려낸다.

 

아마 이 작품은 수많은 인간 개체들의 다종다양의 심리적, 행태적 관찰기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인간의 양면성 혹은 복합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이를테면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고 타인의 목을 베어버리는 자가 자신의 태형을 앞두고는 공포로 몸을 떨며 기가 죽는 인간이 있는가하면, 복수의 욕망과 예정된 단일한 목적 달성이외의 욕망은 사라져 어떤 종류의 고통과 형벌조차도 무시하는 인간을 보기도 한다. 타자에 무심한 인간일수록 자기 연민에 극성을 떨곤 한다. 자신에게 닥치면 더없이 큰 문제로 인식되어 증오를 뿜어대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편 감방 내 은밀한 술 거래로 부자가 되어 수하에 죄수들을 거느리는 자와 조수가 되어 이들의 명령을 오로지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자들의 행태적 거래의 모습에서 고용과 피고용자 사이의 가혹함과 무자비함, 착취하고 가능하면 여분의 것까지도 갈취하는 구조의 형성에 도사린 힘의 불모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죄수들이 동료들 앞에서 뽐내고 우쭐대는 것, 그 허세의 이면에 있는 심리이다. 이 거드름과 오만과 헛된 망상은 자신들이 타인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유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확신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와 인생의 요원하기만 한 환영의 표출로서 단지 억눌린 개성의 드러냄일 뿐이라고 관대하게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그 부정성의 근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모름지기 피와 권세는 인간을 눈 멀게 하는 법이다. 거만과 방종이 심해지고 급기야 (...) 비정상적인 현상도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 이런 현상에 무관심한 사회는 이미 그 기초가 위협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11

 

소설의 화자인 귀족 출신의 죄수가 겪는 자기 성찰은 이 같은 동료 죄수들과 이들의 감시자인 소령과 형리의 심리와 행태의 관찰과 분석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을 억누르고 빼앗으려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오직 규칙과 법을 들이미는 자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이해의 능력도 부재함을 발견하고, 급기야는 채찍으로 때리는 권세에 맛들여 인간의 육체와 피, 영혼을 지배하고, 더 할 수 없는 모욕으로 죄수들을 멸시할 수 있는 권력에 도취된 자들의 병적 포악함에서 또 다른 인간 본성을 보기도 한다. 죄수를 때리기 전에 느껴지는 묘한 흥분 상태, 그 쾌락적 즐거움이 권력자라는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왜곡된 인간 본성에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의 시선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아마 연례 행사처럼 베풀어지는 비좁은 목욕탕에 아래위로 포개져 한 바가지의 물에 몸을 씻는 죄수들의 벗은 몸에 드러난 매 맞은 등허리와, 빡빡 깍은 머리가 어른거리는 지옥 같은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한 죄수의 광기어린 아리아의 울림이다. 이 묘사는 동료 인간에 대한 쓰라린 연민이며,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공감이며, 타인의 절대 고독과 고통에 대한 연대감이다. 화자는 귀족으로서 체형의 경험이 없다. 그는 동료들에게 감히 묻는다. <아픈가?>, <아프지요, 타는 느낌이 들어요, 불처럼. 마치 뜨거운 불로 등을 지지는 것 같습니다.> 4백대 5백대로도 사람을 죽이는 채찍 체형은 3천대로 동료 죄수들을 기어이 죽이기까지 한다.

 

2. 민중의 숭고한 갈망, 정의, 자유...

 

유일하게 감옥 외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죄수들, 증오와 적대감으로, 억압과 유폐(幽閉)된 장소로부터의 고립감, 사라져버린 희망에서 오는 우울감을 떨쳐내고 성스러울 정도로 공손함과 세심함으로 구원을 향한 경건함에 젖어든다. 욕설과 조롱, 혐오를 일삼던 죄수들이 먼저 기꺼이 공손하게 성탄절 축하 인사를 하며 타자를 맞는다. 가난한 자들이 마지막 남은 한 푼을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은 그 어떤 화사한 선물보다 진심을 표현한다. 불평도 시기심도 사라진 그들에게서 숭고한 정신을 향한 인간의 내적 본질을 발견한다.

 

성탄절 행사의 일환으로 죄수들의 행위에 사사로운 트집으로 방해하던 소령이 그들의 연극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이들이 감옥에서 펼치는 민중 연극에 모여든 지역의 시민들이 빽빽이 들어 찬 공간의 장면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던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살피게 한다. 죄수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지고 눌려졌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 놀라운 그들의 정신세계와 숭고한 갈망, 절로 표출되는 정의감은 활기와 존경의 감응으로 비좁은 감옥을 채운다. 빈약한 무대장치지만 관객은 상상력으로 결여를 채우는 것에 동의하며, 부자유와 힘겨운 운명 속에 쓸모없이 파멸해가는 배우 죄수들에 대한 동류 인간으로서의 경의가 흐른다.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도 자기 식대로 인위적인 순교 속에서 출구를 찾아냈다. (...) 단지 고난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악의 없이 소령에게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389

 

인간은 어떤 목적과 그 목적을 향한 지향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살아갈 수 없다. 절망에 빠지게 하는 희망 없는 불가능에 휩싸인 공간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들은 저마다의 구원을 향한 출구의 모색일 뿐이라고 화자는 해석한다. 인간 정신에 대한 섬세한 화자의 이해는 이처럼 개체들의 고유한 삶에 대한 존중의 시선, 인간에 대한 집요하고 너그러운 정신에 기초한다.

 

그것은 삶의 자유로운 구현을 향한 너무도 본질적인 추구라는 점에서, 또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원죄의 업보라는 측면에서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라 묻는 것은 죄와 벌의 상보성에 대한 도덕적 물음을 낳는다. 자유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본질적 표현, 삶을 절망시키는 것에 대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입장(환경+운명)' 바꿔 생각해봐!'라는 윤리적 질문이기도 할 것 같다. 출옥, 화자의 발목에서 족쇄가 떨어져 나갈 때 "죽음으로부터의 부활(457)"을 외치는 장면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깊이로 다가온다. 인간 심리와 도덕적 성찰로 그득한 이 소설은 인간 나에 관한 자성을 넘어 타인을 그것이 아닌 동류 인간으로, 차별 없는 윤리적 동등성의 인간으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프카와 가족, 아버지의 집에서 낯선 자 되기 가족특강 시리즈 6
오선민 지음 / 북튜브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래 그림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가장의 근심에서 설명되고 있는 '오드라덱(odradek)'이라 불리는 형상을 그려 본 이미지다.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형상의 핵심은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 아무런 목적도 없는 존재!, 통제나 지배가 불가능한 그 무엇,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불안을 느끼고, 근심을 초래한다. 목적이 따로 없으니 경우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 75, 2'성스러운 흡혈가족 이야기' 중 인용된 이미지 재인용



아마 카프카가 그의 소설에서 시종 말하려 했던 것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 삶에 어떤 고정된 척도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카프카는 법, 질서, 삶의 척도로서의 아버지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에 비로소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적응한다는 오이디푸스적 발상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그물로 처진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삶, 삶을 실현하는 감각을 바꾸는 일에, 어떤 규율이나 명분에 구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꿈꾸었을 뿐이다.

 

그러고보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Anti-Oedipus)'를 카프카가 선취했던 것 같다. 들뢰즈가 '"아이는 엄마,아빠를 엄마와 아빠로 본 적이 없다."라며 "무의식이 문명인인 인간의 전유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욕망-기계'"라고 표현했던 '분열자의 산책'을 이미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K', 실종자'카알 로스만'이 세상의 익숙한 시선들을 찢어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족적 경험 이전의 것으로 인간 존재를 해방 시켰던 들뢰즈와 같이 더 이상 아버지를 권위를 부여받고 군림하는 규율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 카프카의 소설 속 아들들의 시선은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이들에게 가족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근원지로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각양각색의 사회적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무수한 길이 있음을 안내하지 않았는가?

 

사실 18세기부터 출현한 핵가족 중심의 스위트홈이라는 낭만적 허상이 자본주의 욕망을 지탱하는 축으로 작동해왔음을 지적하는 것은 이제 진부한 이해가 되어버렸으며, 화폐에 대한 탐욕과 위선을 덮어주던 '가족'이라는 대의로 포장된 도덕의 효력도 이젠 거의 소진된 형국이다보니 근대 가족주의에 매달리는 퇴행적 진술은 언어의 불필요한 남용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카프카가 "어떤 원인도 목적도 없는 글쓰기"를 통해 바로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로 상징되는 당대의 속물주의와 민족주의에 맞서는 문학형식으로 주장한 것이야말로 바로 그 어떠한 근대 가족주의의 비판적 지성을 넘어서는 탁월함일 것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형식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는 물질적 구색 밖에는 안 될 거라는 것..." - 21

 

가족주의가 발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나가는 직업을 갖고 착하고 예쁜 아내(돈 잘 버는 남편)와 토끼같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삶, 이러한 관계를 건실하게 끌고나가는 교육 잘 받은 성인 남성(여성)-30"으로 키워내는 것, 지배문화에 영합하고 주류계층의 취향으로 도배시키는 것에 열중하는 것, 이러한 삶의 태도를 주입시키는 것에 온통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 카프카는 이런 삶의 태도를 참을 수 없어 했었던 것 같다.

 

이 속물주의에는 현실부정론과 준비론, 즉 미래를 위해 현실을 희생시키고 언젠가 도래할 행복을 기대하며 사는 삶, 목표지상과 현실부정의 음습한 냄새가 가득하다. 자본주의의 축적논리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 근대 핵가족의 이기주의가 완전히 닮아있지 않은가? 인간의 삶이 "무리들이 칭송하는 아이콘만 좇게 될 때" 그 얼마나 살벌한가? 삶의 다양성을 축소시켜 쪼그라들어 편협해진 욕망의 기이함에 매달려 주둥아리와 온 몸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 허겁지겁하는 괴물들의 투쟁장으로 인간 삶을 축소시키는 중심에 가족이라는 이름의 위선적 규정이 있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재칼과 아랍인은 오늘의 인간들에 대한 적나라한 초상일 것이다.

 

인간 ''를 규정할 수 있는가? 어쩌면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고정된 척도에 매달려 있으니 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는 늘 다른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어떤 인간도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며 살 수 없다, 만일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러저러한 것들을 갖추고 있어야 해."라며 어떤 경험들을 필수로 간주하게 되면 남는 건 불안뿐일 것이다. 이걸 주워 담는 틀인 우리시대의 '가족'은 이 책의 표현처럼 "성스러운 흡혈가족"이라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네, 김기사네, 이들 핵가족의 일그러진 표상, 바로 그것.

 

척도를 계속 바꾸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감각의 변화를 도모한 갑충-그레고리, 사는 방법을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보는 실험을 하는 실종자의 카알 로스만, 삶에 어떠한 고정 척도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무궁한 변화를 시도하는 K가 바로 오드라덱이다. ‘넌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이 천박한 우라질 현실부정의 속물성을 벗어나 목적없는 존재, 무수한 다양성의 길을 걷고자 할 때 우리네 세상은 타자와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고 생명의 플랫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축조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카프카를 통하여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을 갖는 것", 그럼으로써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터전의 토대를 놓고 있다. 또한 카프카의 원인도 목적도 없는 소설들의 형식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로와 태도로부터 개인 각자의 삶에 대한 시선을 스스로 묻고 답하는 사유의 실마리를 갖도록 이끌어주기도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정 그러한 것인가를 , 그 상식이라는 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숭배 애도 적대 -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천정환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이 아니라면 산 자들은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 낼 방법이 별로 없는데,

죽음이 만연해 있어 무감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낸다.” -머리말에서

 

 

이 머리말은 오늘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인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마음의 레짐(regime; 인간의 상호관계를 이끄는 가치, 규범의 총합)’에 대한 문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저항의 노력 후에 어느 만큼의 성취를 인식하게 됨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인간 해방 이념의 실종과 함께 착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사회의 전망(143)”또한 상실했다.

 

이제 인간 유일의 주체적 사유 방식의 원천은 자기계발 따위의 경영학적 신자유주의적 속물성, 즉 경제성과 효율성을 지닌 인간외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성에 압도되어있다. 이러한 레짐의 변화는 타자와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성과주의라는 시간의 기획성에 종속시키는 주체들로 들끓게 만들었다. 대중을 이루는 각 개인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죽음, 하물며 자살이야 일시적 호기심으로서의 쾌락으로 금방 소비되는 스펙터클 이상이 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도덕적 무감증(無感症)을 넘어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잔인성과 무자비한 적대감을 내뿜기까지 한다. 우리는 동료 인간의 죽음이 말하는 것에서 그 어떠한 도덕적 언어도 그것이 환기하려하는 의미에 대한 각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 천정환은 이 사회가 이러한 죽음을 이용하는 두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그 죽음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고립화시켜 마치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지상의 삶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죽음이 야기한 죄의식과 안타까움을 자기연민과 뒤섞어 이용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인간 동료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못하고 한낱 병적 수준의 욕구만을 드러내게 되었을까?

 

 

어쩌면 이 책은 바로 이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적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죽음에 보내는 시선인 숭배와 애도, 그리고 적대의 감정에 은폐된 실체를 파헤친다. 그 파헤침의 작업은 숨어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 감수성을 깨어내고 복원시키고자 하는 노력일 터이다. 그것은 열사(烈士)들의 시대로 부를만한 80~90년대 학생과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대라는 2000년대에 발생하는 무자비한 정치 폭력에 의한 죽음, 즉 정치적 타살이라 부를 수 있는 자살과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증오와 복수의 적대가 기획한 죽음들, 그리고 여성 연예인들의 자살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지닌 잔인성의 체제가 야기한 죽음들의 성찰이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어두운 힘은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다.

이 힘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다.“ -8

 

 

A. 열사(烈士)를 양산하던 폭력사회

 

 

80~90년대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자살은 정치적 타살이라 함에 주저치 않으련다. 80년 광주민중항쟁, 87년 시민민주항쟁, 91년 민주투쟁 등을 비롯하여 71년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서부터 헤아릴 수 없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저항하다 어떻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40)”이라는 절망적 심리 상태에 몰렸던 긴급하고도 절박한 상태의 토로였다.

 

당대의 시민 대중은 이들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동료 인간을 기념하고 기려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의 언어(45)”로 그들을 열사(烈士)‘로 부르며 자신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달랬다. 즉 이들의 죽음이 시민을 각성하게 하는 도덕적 각성의 추동력이었음이다. 또한 이 도덕적 책무감의 언어는 일반 자살과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복잡다단한 시민적 양심, 죄의식이 시민 대중에 폭넓게 수용되고 확산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인식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효율성, 경제성에 점령된 2000년대 이후의 사회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70년대 기업주들과 공권력이 일하기 싫어 소란을 피운 깡패(69)”라 악선전하던 퇴행의 언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212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자살, 명확한 사회적 타살사건임에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언론 미디어는 잠잠하기만 했다. 다시금 쌍용자동차 노동자 23명의 죽음이 뜻있는 작가들의 르포로 발표되고서야 미약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조중동 수구 언론기업들은 고작 강성 노조가 노사관계에 해악을 끼쳤다는 악의적 비난의 기사를 게재하며 선동질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미 경제적 인간의 가능성 이외의 인간을 생각지 못하는 인간들의 사회는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상실을 떠올리지 못한다. 사회 관계망 전체가 성과주의에 식민화(144)”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능력과 표상을 배분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144

 

지금의 한국 사람들이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진정 무엇일까? 공정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과주의, 능력주의라는 효율과 경제적 이익, 힘을 지닌 자리로서의 권력 아닌가? 사회 전반의 의식에 속속들이 스며있는 인식의 부패성에 대한 성찰 없음 아니겠는가?


 



B. 억압과 배제 그리고 보복의 정치 참살

 

이 사회에는 강력한 특권과 주류집단의 동맹이 있다. 검찰, 언론, 정당 권력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지배하며 그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지원하지 않는 타자는 삶이라는 지상의 영역에서 쫓아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속물 권력 절정의 표상이랄 수 있는 2009년 이명박, 오세훈은 폭력 진압으로 용산 재개발 철거민을 극악한 저항에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는 변으로 참살을 정당화 했다. 이 엘리트의식에 장악된 권위주의적 수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독점에 방해되는 것에는 오로지 혐오와 적대감만을 투사한다.

 

2009430일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대검찰청으로 소환한 날이다. 당시 조사를 지휘하던 자가 박근혜 정권의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다. 이 정치검찰은 언론에 조사내용을 흘림으로써 조롱하고 모욕한다. 이 지배권력 동맹은 상고출신의 필부 외양을 지닌(180)” 사람에 대한 혐오와 반감, 그리고 공포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모두 같은 대학 출신의 동문들로 이루어진 이들 간교하고 힘센 한국 지배계급 동맹(181)”은 그 경박함과 무례로, 씻기지 않는 모욕으로 정치적 타살을 아주 무감하게 자행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버젓한 민낯이다.

 

이후 한국의 지배동맹은 시민적 자발 조문행사를 촛불시위를 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공권력을 이용해 조문을 방해하고, 분향소 주변 추모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근처에 얼씬하는 사람은 잠재적 반정부 시위대로 간주하여 적대적으로 체포하는 무자비함을 감행했다. 이러한 지배권력 동맹인 언론, 사법(검찰), 수구정당이 강력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특권 집단이면서 오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끊임없이 친노, 친문의 감정정치를 비루한 언어들로 조롱(195)하고 폄훼하며 부도덕성을 감추지도 않고 파렴치함을 행사한다.

 

노동자 출신의 진보 정치인 노회찬이 자살한 다음날 <조선일보>는 그의 죽음 기사 옆에 지면을 가득 채운 환호하는 야구 선수 사진을 실음으로써 죽음마저도 조롱했다.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 삶과 죽음에 대한 무지, 인간성과 언어 빈곤의 발로(216)”이다. 위악과 관종의 정신 상태, 무자비한 진영논리와 타인을 향한 적대만이 넘실댄다. <뉴욕타임스>노무현의 죽음이 정치 보복에 의한 것이며, 증오와 죽음의 정치가 확대 반복(173)”되리라고 썼다.

 

 

C. 잔인성이 장악한 한국의 사회 현상 - 여성 연예인의 죽음

 

최진실, 장자연, 설리, 구하라...,박지선, 이들은 모두 사회적 잔인성이 행한 타살, 자살이란 형식에 의해 사망한 여성 연예인들이다.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들, 한국 사회가 이러한 위악성이 만연한 도덕적 불감증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란 여성 무명 연예인을 돈과 술수로 파괴했던 간악한 자들, 인간 소비의 잔인한 집단 행위(267)”에 가담한 악인들은 많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공고하게 구축된 지배 동맹(언론, 검찰)의 일원들이었기에 애초에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삶의 적나라한 공개를 감수해야했던 이들 연예인의 죽음은 죽어서도 선정적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흥행성과 이익에 몰두하는 언론 미디어는 관성화되고 무뎌진 도덕적 감각으로 무장하곤 열정적으로 대중의 소비를 부추기며, 타자에 대한 관음적 평가에 놀랍도록 냉정하고 폭력적인 취향에 젖은 대중들은 맞장구치듯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그리곤 잊혀 진다. 이윤과 쾌락 추구를 향한 브레이크 없는 이 냉혹한 잔인성(147)”은 대체 어디서 분출되고 있는 것인가? 나인가? 너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윤리 의식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이것으로부터 우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D. 결어 - 애도와 연민의 확장, 인간성 회복을 위해

 

OECD 회원국 중 독보적인 1위의 자살율을 영광스런 타이틀처럼 고수하는 나라, 이 사회는 옆 자리의 동료가 죽어도, 이웃의 자녀가 죽어도, 하물며 사회를 향한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사회 정치적 타살에도 무심과 외면, 혐오와 경멸, 조롱과 모욕의 시선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너무 만연해서 그런 것인가? 일회적, 피상적, 형식적 찰나의 호기심과 함께 증발되어 버린다. 그런데 왜 이 만연한 죽음의 현상을 교정하려 들지 않을까?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수준 낮은 풍자로 조롱하며 낄낄거리는 수구 정당 의원들의 부패한 도덕성에서부터 죽음에도 조롱과 조리돌림의 악플을 매다는 패덕(悖德)의 관심종자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성찰성과 도덕적 제약을 상실한 듯하다. 이 사회적 잔인성을 향해 배려와 존중의 문화를 외쳐본들 공허한 울림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참담한 인간들이 되었을까? 너무도 만연해진 죽음들로 무감해진 것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미흡하다.

 

열사들의 죽음, 대통령의 죽음을 숭배하며 애도하는 것에 그 누가 시비하겠는가? 그러나 시비를 넘어 조롱과 혐오의 적대를 보내기까지 한다. 대중들은 2009523일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못 지켜줘서 미안합니다며 죄의식과 안타까움, 회한의 애도를 발하기 시작했다. 아마 순수한 인간적 연민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 애도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소환하는 행태들을 보게 되고, 이는 반대 진영이 다시금 폄훼하고 경멸하는 빌미가 되어 한 인간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저열한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또한 인지자본주의의 과잉 확장,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정신과 육체노동의 간극 확대는 노동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가속화하고 이제 노동자의 죽음 따위는 더 이상 말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 가치가 물화되며 죽음 역시 그것(it)이라는 혐오의 대상으로만 얘기 될 뿐이다. 정당하게 말해져야 하고, 애도되어야 할 죽음들이 말해질 수 없는 세상이 되도록 조장하는 집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바로잡는 것은 인간의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방지법의 제정과 같은 제도적 실행이 될 수도 있으며, 언론에 대한 인권 보호 보도 지침의 엄격한 준수의 요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검찰과 사법 권력의 철저한 개혁이기도 하며, 악플 문화에 대한 적절한 기술적, 법률적 대응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회를 무참하게 지배해온 지배동맹의 해체, 기득권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 대중의 강력한 연대이다. 정작 시민 대중의 70~80%를 대변하는 아무런 단체도, 정당도 없는 오늘의 형국이야말로 시급한 시민적 과제이다. 제도와 입법이 시민 대중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구조적 부패성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을 척결 할 수 있다. 이것이 실현 될 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있는 죽음을 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각성이다. 그래야 적대하는 골 깊은 갈등이 무의미해지는 지대를 우리는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의 죽음을 잔뜩 머금은 작금의 권력 정치에 우리의 삶을 담보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장악한 사회적 타살의 실체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시민의 잠든 도덕 인식을 깨어나게 하는 사회적, 정치학적 고투이자, 스러져간 동료 인간들에 대한 애도이며 시민대중을 향한 위로이다. 오늘의 우리들과 사회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거울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군중과 권력, 2010년 바다출판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2009년 창비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죽음의 스펙터클, 2016년 반비 

수전 손택(Susan Sontag)타인의 고통, 2007년 이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베스 / 양심을 지닌 아킬레스 주제들(THEMEN) 시리즈 5
폴 A. 캔터 지음, 권오숙 옮김 / 에디투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네들은 그렇게 복음화 되었는가? (Are you so gospell'd)" - 3185

 

 

이 문장은 왕을 시해하고 다시금 왕권에 위협이 되는 동료 귀족 뱅쿠오(Banguo)’를 살해하기위한 암살단을 앞에 두고 '맥베스(Macbeth)'가 묻는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집중 연구해 온 문학비평가인 버지니아영문학 교수인 A. 켄터는 이 장면을 작품 전체를 이끄는 정신세계라 주장한다.

 

이 극은 위대한 전사들의 사회가 기독교화 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들, 복음화된 스코틀랜드라는 엄청난 역사적 변화의 와중에 있는 나라의 인간정신의 비극적 갈등에 주목했던 셰익스피어의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반란군을 제압하고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던 맥베스와 뱅쿠오는 불현 듯 나타난 마녀들의 예언을 듣게 되는데, 뱅쿠오를 향한 다음과 같은 예언이 맥베스를 괴롭힌 것이다. 왕이 되지는 못하나 후손이 왕이 되리.(1367)”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이 작품을 소환하여 읽게 되는 동기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 또한 국제 지정학적 위협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직면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의 시기에 놓여있지 않은가?

 

찬탈한 왕위를 불안정하게 할 요소인 뱅코를 제거하기위해 암살단원들에게 온유와 자애로움의 기독교 정신이 혹여 이들의 행동을 저해하는 일이 발생할까를 우려하여 새로운 정신에 대한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암살자들은 이에 대해 저희들도 인간(사내)입니다라고 답하지만 맥베스는 인간을 개에 비유하여 서열화한다. 하운드, 그레이하운드, 잡종개, 스파니엘, 똥개, 늑대개가 모두 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듯이 말일세.(3195)” 옛 전사들의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잔인한 폭력성을 고결한 영웅적 가치로서, 인내와 평화를 가르치는 기독교는 천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비극 맥베스는 이처럼 영웅적 전사의 가치관과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 사이에서 갈등(16)”하는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낀 인간들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13장의 마녀들과 맥베스의 조우는 한 인간의 영혼을 적시는 결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맥베스를 환영하라! 왕이 되실 분이시다.(1350)” 이 예언적 계시(啓示)는 맥베스의 모든 행위의 기초가 된다. 이미 왕 던컨을 살해하여 왕이 되었으니 예언은 실행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의 정신세계를 자극하는 것은 기독교의 절대주의 정신이다. 완벽함을 이루고 불멸 영생하는 삶의 성취다. 맥베스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지극히 피상적이며 예전과 새로운 것의 나쁜 결합 총체라 할 수 있다.

 

왕을 살해하였을 때 시종들의 기도와 함께 마지막 아멘을 말할 때 맥베스는 이를 이교도의 주문정도로 여기는 것인데, 기독교에서 취할 수 있는 은혜만을 얻고 부과되는 도덕적 요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 놈이 하나님,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라고 하니 다른 놈이 아멘 하더군. (...) 나는 아멘이라고 말하지 못했소.(2224)” 새로운 정신으로서 기독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이 장면은 자신이 주최한 궁정연회에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뱅쿠오의 유령을 보았을 때, 전사들의 야만적 영웅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기독교 정신에 대한 혐오의 방백을 주절거린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채로 품위를 지녔던 이교도 시절과 달리 그것들이 다시 일어나 나를 내 의자에서 밀쳐 내는구나.(3481)”


 



이교도의 영웅적 허영심이라는 가치를 놓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이를 경멸한다. 기독교에서 배운 영원성에 대한 찬양이다. 맥베스에게 새로운 정신세계의 통합이 굴절되어 내면화되는 것인데, 바람직한 결합의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교도의 일시성이라는 가치에 경멸을 보내면서 자기 안위와 안전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이는 영웅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기독교 환경이 그에게 이미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왕을 살해하고 난 후의 독백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그의 서거로 성공을 낚을 수만 있다면, 이 한방이 전부이고 (...) 내세의 삶은 신경 쓰지 않겠다(177)”. 역설적이게도 내세에 대한 삶을 배제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에 이미 반()기독교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 이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분열을 의미한다, 기독교를 경멸하면서 기독교도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생각해보라.

 

행동을 주저하게 하는, 그리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마주하지 못하는, 즉 양심과 싸우는 이전의 영웅 전사는 사라지고 심리적 깊이가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내세를 부정하면서 내세의 영원한 삶, 완벽하고 무한한 만족적 삶을 그는 이승에서 누리고 싶어 한다. 이 새로운 감정에 터 잡은 소망은 절대행동이라는 사유 없는 즉각적 행동의 실천, 기계적 양상으로 치닫게 한다. 침해당하는 안전 욕구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맥베스는 마녀를 찾아 나서 운명의 예언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는 어둠의 도구인 반()기독교적 존재인 마녀, 달리 표현하면 지상의 일들은 더 높은 차원의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97)”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기 운명은 미리 정해진 바에 의하여 실행된다는 믿음은 지상의 도덕이나 양심, 연민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손바닥의 왕()자처럼 초자연적 신비의 세계에 의존하는 순간, 자제력은 무용해지며 그 어떤 짓도 행할 수 있게 된다. 하늘의 뜻이 자기편이라는 이 맹목적 믿음(狂信)은 잔인성과 폭력성의 무한한 증가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선의의 가면을 쓰고 사악한 의도를 숨기며, 대리인들을 통해 작업하는 은밀한 행동(99)“, 오늘의 말로하면 공작 정치를 통해 양심의 가책을 피하면서 악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양심으로 균열이 생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무의식적 파렴치는 더욱 극단적인 욕망의 노예로 한 인간을 종속시킨다. 14장의 방백은 이의 실체를 보여준다.

 

별들이여 너의 빛을 감추어라! 그 빛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을 보지 않도록 / 눈이여, 손이 하는 짓을 보지 말지어다. 그러지 아니하면 눈은 손이 행한 걸 보기 두려워 할 것이다.”   - 1450~53

 

 

이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무절제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온 세상이 조각나 온 천지가 고통을 겪는 것(3216)”이 낫겠다든가,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의명분도 다 양보할 것(34135)”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자기 욕망에 제동을 거는 것은 모두 제압하고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이미 초자연적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오만함은 지상의 모든 것이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잔인성과 포악함, 무관심과 부정, 부인, 외면으로 표출된다.

 

이를 치유하는 법에 대한 비상한 대사가 등장하는데, 몽유병에 시달리며 분열적 증세로 죽어가는 맥베스 부인을 본 전의(典醫)가 진단하는 말이다. 자연에 어긋난 행동은 비정상적인 고통을 낳는 법이라며 의사보다는 신()의 도움이 필요(5174)”하다는 것이다. 물론 맥베스는 이 같은 자연의 힘에 기초한 의사에게 경멸의 폭언을 내뱉는다. 자연의 힘 위에 있다고 믿는 자로서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에게 귀결될 것은 마녀들의 예언이다. 거대한 숲이 언덕 위까지 올라오는 사건이나 여인의 몸에서 출생하지 않은 이가 아니고서는 결코 맥베스는 쓰러지지 않으리라는 예언을 자기 욕망의 귀로만 듣는 것이다. 이 예언의 본질을 생각지 못함으로써 파멸한다.

 

스코틀랜드의 이 전사의 비극은 오늘의 인간 사회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시한다. 역사적 전환기란 갈등, 충돌하는 정신세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 또한 수구 기득권과 새로운 민주적 가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시민을 개로 표현하는 인물이 타인을 종속, 굴복시키는 힘으로서의 통치권만을 탐하려한다. 한껏 영웅주의의 포만감에 휩싸여 주변의 고통과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곧 폭력과 잔인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자기 파멸의 길이다. 맥베스란 인간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직시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히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다


【민음사 2021.12.10 간행 알라딘 특별에디션, 셰익스피어 비극 세트-햄릿,오셀로,맥베스,리어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시몬 베유 지음, 이종영 옮김 / 리시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라는 두 편의 평설로 묶여있습니다. 초월적 신비로서 은총을 말하는 '시몬 베유'의 종교적 이상주의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조를 규정하는 체계를 오로지 힘의 관계로만, 힘이 전부인 양 간주하기 시작한 지금 이 세계에 대한 비판적 환기의 글이라는 점에서 이 두 평설은 힘이 야기하는 인간 삶에서의 본질적 모순을 각성하게 돕고 있는 탁월한 주장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1. 마르크스 유물론의 곡해

 

우선 초월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푸르동에 경도되어있던 시몬 베유의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론인 마르크스주의적 독트린은 존재하는가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19세기 물리학을 이해하는 세몬 베유의 관점은 마르크스가 "부동의 사물을 다루듯 사람을 연구(70)"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원자의 심리적 등가물'로 이해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리학적 과학주의에 토대를 둔 과학적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베유는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결정론적 원자론을 비판하고 비결정론적 원자론으로서 '마주침의 유물론'은 굴종하지 않는 유물론이라는 것을.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이같은 "천박한 과학주의를 덧씌웠다(70)"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자 '강신주'가 그의 역작인 철학 VS 실천에서 마르크스주의로 포장한 엥겔스의 왜곡을 비난했듯 시몬 베유 또한 "지적으로 열등했던 엥겔스가 불모의 것으로 만들었음(70)"을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베유는 이 유물론자 마르크스는 인간을, ()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물질로 바라 볼 수밖에 없음으로서 맹목적 인 힘, 필연성에 종속시켜, 존재 자체가 선의 추구인 인간 삶과 본질적 모순을 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질처럼 힘의 관계를 인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순간 악마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기 철학을 '인간주의''자연주의'라고 불렀습니다.(강신주 , 철학 VS 실천』 「정치철학 3453쪽 참조) 신이나 세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신비주의자인 푸르동이나 시몬 베유와 같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압체제인 '(권력)'을 대상화하여 저항하는 '대상적 활동'을 긍정하는 철저한 인간주의자였습니다.

 

시몬 베유는 이것을 전도하여 왜곡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누구보다 힘의 속성을 깊이 읽고 있었으며, 곡해된 낡아빠진 유물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감각-운동' 을 반복을 하는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각을 통해 물결의 특이점들과 결합하는 존재로서 말이죠. 또한 '들뢰즈'차이와 반복에서 얘기하듯 다른 것,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으로서의 유기체, 다양한 기호들을 발산하는 인간을 말한 것입니다. 힘의 굴레, 그 적대적 한계성을 비판하려한 시몬 베유의 의지가 비뚤어진 자기애로 흘러간 듯싶습니다. 다만 '힘의 굴레'를 역설하기 위한 베유의 열정적 의도를 알기에는 충분한 비평이라 하고 싶습니다.

 




2. 놀라운 공평함의 미학 일리아드(Iliade)에 대하여 ; 힘과 영혼 관계의 대서사시

 

이제 힘을 주제로 한 서사시로서 그리스 정신의 최고라 찬미한 시몬 베유의 첫 번째 평설인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를 보아야겠습니다. 짧지만 강력한 이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또는 일리아스(Iliade)를 전쟁 영웅의 찬가로, 그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예찬으로 이해했던 저의 편협한 독서의 이해를 벗어나 폭력, 근원으로서의 힘에 내재한 자기 굴레의 한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글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힘의 의지를 주장한 니체와 베유가 한 자리에서 대담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을 해보게도 되는 양단의 상념을 갖게되는 비평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힘에 도취해 분별을 망각한 저 정신적 유아상태의 인물과 그 주변의 기회주의적 정치배들의 행태를 보면서 호메로스가 통찰한 '힘의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다음과 같은 힘의 효과를 꿰뚫는 시선입니다. "힘과 접촉하면, 힘의 불가피한 효과 아래 놓이고, 접촉하는 모든 것의 입을 막거나 귀를 멀게 해버리는 효과(47)"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속성은 지금 대선 정국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영혼들을 점령하고, 충동에 불과한 눈먼 힘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벌이는 흡사 전쟁과 같은 폭력적 언어의 무참한 난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요.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가 시종 힘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려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8)"이죠. 힘은 문자그대로 사람을 사물로 만듭니다. 아킬레우스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고 전차 끝에 끌려가는 헥토르의 시신을 우리는 떠 올릴 수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끊임없이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하며 힘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지요. 거기에는 영웅도, 영광도, 그 어떤 불멸성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하나의 물질만이 쓰라리게 남지요. 힘이란 그런 것이랍니다.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 사람을 시체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엔 아무도 없습니다."

- 9

 

힘은 그 자체로 파멸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소유했거나 그렇다고 믿는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꼭 그만큼 힘에 도취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정 영원한 힘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힘 앞에 무릎을 꿇게되죠.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도, 하물며 한 때 트로이아의 적장자였던 헥토르도 왕 프리아모스도 모두 힘 앞에 고개를 떨굽니다. 무적의 오만한 아킬레우스도 아가멤논에게 여인을 빼앗기며 모욕과 무력한 고통을 주는 능욕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고작 며칠 뒤에 아가멤논 역시 헥토르에게 치욕의 두려움으로 몸을 떱니다. 서사시의 전개 내내 이같은 힘의 교대적 이동이 시소처럼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이들은 힘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불균형한 힘들의 균형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걸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주변을 돌아보는 역량을 가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호메로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엄밀성, 미덕의 배움'이라는 네메시스(응보의 여신)적 징벌이 등장합니다.즉 힘의 남용에 대한 처단이라는 균형의 명상들이죠. 결국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승자나 패자가 아닙니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기쁨도 순간일 뿐이지요, 토로이아를 멸망시킨 아가멤논의 아카이오족의 기쁨 역시 찰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힘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힘이라는 위세는 약자에 대한 방약한 무관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무관심은 전염성이 강해 위세의 정치집단은 힘이라는 과잉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곤 합니다. 힘의 절제된 사용은 인간적 속성을 넘어서려는 미덕을 지녀야만 벗어날 수 있는 거랍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무릅쓴 용맹한 전사입니다. 그는 살려는 열망을 스스로 지워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앞의 적군에 관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코 자신의 심정을 넘어서지 못하니 다른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깃들 여지가 없습니다. 호메로스의 모든 전사들이 이런 역량이 없어요.

 

그래서 일리아드(Iliade)에는 힘만이 넘실댑니다. 결국 호메로스는 전쟁의 최종적 비밀은 눈먼 힘과 그 앞의 수동적 물질화한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충동일 뿐이라 드러냅니다. 힘과 사물화의 단조로운 그림뿐이죠. 이 서시시의 분위기는 내내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파괴된 것에 대한 아픔, 전투에 희생되는 자들의 고통을 누구하나 소외됨 없이 감추지 않고 드러냅니다. , 폭력이 소멸시키고 파괴한 것들에 대한 비통함에 대한 절절한 체감을 요구합니다. 승자와 패자도 모두 똑같은 자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아마 이 서사시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토로이아도 그리스의 누구도 힘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도 이 힘의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죠. 그렇다고 호메로스는 이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힘에의 종속, 물질에의 종속이라는 필멸의 이러한 속성에서 인간의 영혼이 갖춰야 할 미덕이 무엇인가?라고. 차가운 잔혹함 속에서 드러나는 이 힘은 사용하는 자나 이로인해 고통받는 자 모두 재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적 처참성에 이 같은 감수성으로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타자에 대한 동정심,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는 이를 통해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울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힘의 제국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61)"고 말이죠. 오늘 우리는 과연 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적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몬 베유의 이 마지막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영혼에게 숙고할 이유를 웅변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는 영혼을 복원해 낼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들은 사회에 만연한 이 힘의 위세가 보이는 오만과 무도함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힘, 권력의 교체만을 부르짖는 힘의 소유만을 탐하려는 인간과 그 무리들이 태생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