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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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지혜 -

 


이 책이 눈에 띈 가장 근원적 계기는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실천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의 우연한 마주침에 대한 언급이었고, 이어서 피터 존스의 저서 복스 포풀리10장의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평으로 촉발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존 셀라스의 이 작은 소책자는 양적 빈곤과 인간 보편에 대한 삶의 고통 처방이라는 내용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에피쿠로스는 물론 그와 사상을 같이하는 철학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실로 소중한 참고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동기에서 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서구 정신문명을 오랫동안 장악했던 기독교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무신론, 부도덕, 감각적 탐닉'을 추구하는 저열한 사상으로 매도하여 인류 사상사에서 지워버리려 했다는 학문적 반감도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연민을 강화한 것이 사실이다. 원자론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물의 우연적 결합과 출현, 죽음의 감각 부재 해석, 고통의 해방으로서 쾌락(정적인 정신적 쾌락, 평정을 의미)과 같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와 융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의 중요한 사상적 줄기를 소멸시키려 했다는 점은 정말 무서운 폭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며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기는커녕 금욕주의 사상에 가깝기까지 하다더구나 부도덕하다는 누명은 무엇에 씌운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왜곡이다

 

 

어쨌든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 고통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정(ataraxia)'이다. 배고픔, 추위, 아픔과 같은 피하고 싶어 하는 조건에서 벗어난 상태를 추구하여 만족한 상태를 목표로 하는 소박한 상태이다. 육체적 쾌락의 탐닉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관념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정신적 동요에 의한 염려와 불안을 덜어내고 삶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의 일환이랄 수도 있다. 특히 대부분의 정신적 염려가 야기하는 근심과 고통이란 당사자 자신이 자초한 내적 고통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는 쇼펜하우어의 통제 불가능한 의지와 달리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사물과 현상을 실재케 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맹목성의 의지이기에 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인간의 지성이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에피쿠로스의 고통은 개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을 달리한다. 이 개선의 가능성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러한 출발점에서 고통에 대처하여 평정심을 갖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지혜를 풀어 놓는다. 즉 평정(ataraxia)에 이르는 길을 필요에 의한 만족’, ‘우정의 중요성’, ‘자연 탐구의 필요’, ‘죽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원자론을 통해 안내한다.

 

"충분함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52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만족하는 건 불가능해. 가진 게 많을수록 욕구가 높아지거든', 많은 돈과 재산을 쌓았음에도 그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이 가진 자를 시샘하고 질투하며 불쾌를 멈추지 않는다. 이 부단한 결핍감,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그는 필요에 의한 만족을 자연스러운 필요자연스러운 불필요로 구분하여, 이를테면 잘 차려진 고급 음식과 와인, 해외 명품 브랜드의 의상과 악세사리, 고가 주택 과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필요를 넘어서는 불필요의 영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고 짜증내며 불만족의 고통을 호소하는 부단한 욕망을 지적한다.

 

 

에피쿠로스가 이렇듯 불필요한 욕망에 쉽게 사로잡히는 대다수의 운 좋은 사람들의 향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근길 손에 든 커피처럼 익숙함과 습관적 아이템으로 여기도록 된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 욕망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 절제의 요구가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소유하기 보다는 보다 큰 자족의 곳간을 발견하는 데 주의를 돌리면 보다 큰 만족을 얻으리라 주장한다.

 




"우정은 온 세상을 에워싸고 춤추며 우리 모두가 그 축복을 깨닫도록 일깨운다."

- 에피쿠로스바티칸 금언52, 본 책 72

 

 

속된 표현이 되겠지만 행복의 증진을 위해 우정을 강조한 에피쿠로스의 사유에 이르면 그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함께 함으로써 즐거워지는 단순한 기쁨, 그 자체로 소중한 정신적 쾌락이 주는 만족감의 철학은 건전한 공동체의 토대로서 공적 규칙과 규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유대감의 확산이라는 삶의 긍정성과 함께 우정의 축복이 삶의 평정을 위한 귀중한 요소임을 긍정하게 된다. 무언의 확신을 지닌 배려와 도움의 관계, 의지가 되는 친구 사이란 미래의 염려를 철수시키는 진정 귀중한 관계의 철학이라 할 것이다.

 

평정에 이르고 싶다면 만물의 진정한 원리를 알아야

단순한 가정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게 된다.” - 78

 

아마 이 소박한 저술에서 특히 주목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전부 소실되어 그의 후학들의 저작으로만 확인되는 그의 대표작  자연에 관하여를 엿보는 자연 탐구의 필요성 역설에 대한 장이다.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나 시인들은 번개는 제우스가 쏘는 것이라 주장하던 시대이다. 자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미신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80)"라는 그의 선언적 문장처럼 허황된 설명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 동요, 그 근심을 떨쳐내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연 탐구에 대한 역설은 사람들에게 평정을, 즉 정신적 쾌락의 위안을 주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요구는 그의 철학을 무신론이라 낙인찍는 데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불경한 사람이란 대중이 생각하는 신들의 모습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대중의 관념을 신들에게 부과하려는 자다.(82)", 만물의 원리에 대한 피상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식, 즉 그에게 자연 탐구는 속임수로 인간에게 염려와 공포를 주입하는 나쁜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는 루크레티우스와 필로데모스의 저술로 전해지는 그의 원자론으로 이어지는데, 사물의 실재계와 현상계를 설명하는 물자체나 의지와 표상을 선취하고 있다고 여겨질 만큼 세계와 개체의 존재를 설명하는 자연 철학의 위대한 정신세계라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라틴어 시로 풀어 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권의 문장은 현대 철학과 견주어도 어떤 뒤짐도 없다.

 

무수한 원자들이 무한한 시간에 걸쳐 공허 속을 떠돌며, 각각의 질량에 의해 무수한 방식으로 충돌한다. 그렇게 원자들이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함에 따라 만들어 질 수 있는 온갖 사물이 형성된다.” -105,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187-90)

 

 

인간에게 가장 큰 부조리이자 가장 적대적인 불쾌가 죽음일 것이다.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현재의 삶과 함께 이에 따르는 모든 가능성을 앗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 일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은 뒤의 비()존재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불치병의 고통을 능가한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감각의 부재. 다시 말해서 쾌락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으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존재 상태를 인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비존재라 말할 수도 없는데 대체 무얼 두려워한다는 것이냐는 주장이다. 한편 생의 양적 연장에 대해 "무한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98)"라며, 단 하루에도 영원에서와 똑같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포스트 휴먼,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을 주장하는 기술자들과 그 윤리적 논쟁의 하나의 화두가 되어도 손색이 없는 사유라 할 것이다.

 

이성적 이해와 감정적 거부감이 충돌하는 인간의 인식으로서는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무의미한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으로 삶을 낭비하며, 평정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에피쿠로스의 이 철학적 처방들은 삶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데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는 단초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고 짧은 철학적 지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맥락들을 더욱 알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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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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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요리하고, 함께 침대로 간다.

이런 반복된 동형성과 일상적 제식(制式)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삶에 속한다.”

출처: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사냥꾼, 목동, 비평가, 187, 열린책들

 

 

인간으로 불리는 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을 하는 까닭은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삶의 행복감을 높이려는 성찰적 노력일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고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를테면 축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개를 키우고, 벗들과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도, 경제적 부를 늘려주는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들은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삶이란 특별한 외적 목표를 지니지 않는 것, 칸트가 예술의 본질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말한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목적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강제성 없는 자기실현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같이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일을 할 때, 즉 자발적 동기를 지닌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삶의 기술(art)’이 아닐까? 이 책 만인의 인문학부제의 표현처럼 인문학을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이라 한 것 또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개미처럼 늘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의 수많은 다양성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우리는 여기에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물과 구별되는 그 차별성이 무엇인지,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자, 시인들로부터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마르크스, 프로이드,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에 이르는 현대의 무수한 이론과 문학작품, 담론들에 이르는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별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311) 인 이유이다. 바로 인문학은 근원적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살아갈 의미를 공급해 주는 원천이란 것이다.

 

책은 이러한 노력, 즉 인문학을 연결 기술로서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인간 이해의 경험 확장, 나아가 존재의 관용으로서 문학(시학)을 풀어가는 만인의 시학, 그리고 시각의 확대를 통한 무한 소유의 가능성을 대중화하는 현대 문명에서부터 이분법이라는 타자 불관용의 배제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이르는 만인의 인문학, 그리고 인간 욕망이란 특수한 역사적 현상임을 지적함으로써 인식 지평의 확장을 격려하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3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실로 (...)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다.

그런데 이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 - 27쪽에서


연결의 능력, 인간에 불이 있듯, 나무에도 불이 있다. 비벼 보자.” (그러면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만물과 그 현상들을 연결 짓는 능력을 변별성으로 지닌다고 이해한다. 이 연결성이 곧 서사(narrative; 라틴어로 이야기를 뜻하는 narrare), 이야기이고, 인생살이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자 하는 추구의 서사(31)라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이같이 이미 추상적 정신을 자극하는 연결의 기술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상상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기서 에둘러 말하는 의미의 간접화가 즐거움의 한 생산방식임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은유(metaphore)'일 것이다. ’사랑은 장미와 같은 문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장미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두 단어의 결합이 어째서 성립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관계없는 두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문학 작품, 특히 시()의 문장들은 결코 수월치 않다. 왜 이런 독해 능력을 많은 이들이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능력의 고도화는 현실 인식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수단(60)임을 우리의 교육이 도외시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결국 인문학적 소양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교육 현실이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한 편협성, 다시 말해 알량하게 알고 있는 정해진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다 보니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혐오와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되는 현상에 도사린 본질의 하나일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 은폐성, 기만성을 꿰뚫는 인식의 수단으로서 역설이나, 모순되는 진술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진리의 순간을 포착하게 하는 아이러니 등 인간의 진실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을 지원할 도구인 인문학으로서의 시학(문학)을 이 사회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이야기로 지탱되는 사회인가를 읽어내는 일(92)이라 했다. 문학에는 인간의 약함과 강함, 허영과 꿈과 욕망, 패배와 고통, 사랑과 배반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연결의 능력, 그 상상력은 곧 언어 능력의 고도화이며, 문학이고, 존재 관용의 윤리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아닌 것의 위치로 자리를 이동시켜 생각할 줄 알고...” -133쪽에서


‘J.S.은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 자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관점으로만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문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의 위치로 이동하는, 위치 교환, 관점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 또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상상력을 삶의 영구 자본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한계 조건인 유한성에 오류 가능성유약성을 더해 세 가지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삶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들을 화해시키고 결합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관용이 지배하는 팽팽한 갈등과 배척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몇 가지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자기모순에 대한 신비로울 정도의 도덕 불감증을 지닌 여주인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성공만이 최고의 도덕률이 된 오늘의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의 이야기라 하여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사기, 위장결혼, 절도를 서슴지 않는 몰 플란더즈은 거짓말과 복화술에 능수능란하다. 이것은 소리와 의미를 철저히 분리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배들이 하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네들이 뱉어 낸 소리에는 시민들이 아는 의미가 결코 담겨 있지 않다.

 

둘째는 언론 매체의 단순한 현상 표피적 진단이라는 선정성과 자기 탐욕적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사적 변동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도 하며 보지 않으려하는 지적 나태함(150), 즉 무지라는 인문학적 통찰력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고작 거짓이나 의도적 악의로 그득한, 아무런 사회적 성찰도 없는 그래서 문제적 사회 현상을 보는 눈이 없는 매체를 보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 갈등의 촉발과 심화, 혐오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불의만 넘실댄다.

 

셋째는 문화적 지연, 즉 변화의 속도와 관성 사이의 현저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행태들이다. 아마 한국사회의 관념적 계급 사회에 대한 명저로 꼽히는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양반(兩班)에서 지적한 한국사회의 수구화된 지역과 집단의 특성으로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망상이 횡행하는 것은 가열된 학력 경쟁, 혈연과 연고주의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폐해의 근인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이들 집단 구성원은 집단주의, 혈연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권력 추수주의, 배타성, 권위주의...등으로 표출되어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공영역적 문제들 앞에서 놀랄 정도로 무관심과 냉담, 마비증세(156)를 보인다고 토로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것에만 열심히 머리를 파묻는,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맴도는 이러한 편협성이란 문화의 비판적 자기성찰이 부재(158)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된 일면의 지적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질투의 감정이 뿜어내는 공연한 갈등(고통)의 야기, 감동 죽이기 연습을 강요하는 감동 포기 종용의 사회 양상, 사람 밑에 사람 있고, 돈 밑에 사람 있고, 권력 밑에 사람 있는 인식의 부패와 이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의 부패가 만연한, 환대 윤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오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기도 하다. 끊임없이 경비원에 대한 갑질 폭언과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부패라 자성해야 함을 확인케 하고 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실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한다. 명백한 것에 질문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내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시학(詩學)(책머리, 5)이라 정의한다.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 총합으로서의 인문학으로, 우리들이 의미의 위기를 겪을 때 의미 공급원을 만들어 내는 귀중한 지혜의 보고가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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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 엘리트 북스 홍신 엘리트 북스 121
톨스토이 지음, 최원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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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장황한 불륜 스토리와 더불어 농촌 귀족 레빈과 그 주변 인물들로 표상되는 문명적 전환기를 마주한 인간들의 사상적 혼란과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겪게 되는 혐오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구원과 속죄의 여정으로 읽게 된다.  (*이 감상 글은  1,2권 통합 리뷰입니다.) 





1. 불륜의 탐사 (1~4)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사유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시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1850년대의 러시아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적 전환기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전환기에 야기되는 가치관, 이념, 제도와 체제의 혼란이 등장인물들의 삶의 실체적 모습에 투영되어 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귀족 중심 사회의 점진적 쇠퇴, 여성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 전근대적 농노제에서 자유농의 부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태동 등 당대의 분위기가 작품의 저변에 흐르며,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환희를 사랑과 증오, 유대와 혐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진부하다 할 만큼 평이한 소설의 첫 문장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한 가정의 저마다 다른 이유를 탐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동기는 분명 다르다. 인간의 인지 능력, 지식의 축적 정도에서부터 취향이나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일 것이다. 도입부는 오블론스키로 불리는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외도로 위기에 내몰린 가정을 다루고 있다. 아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돌리)는 이혼을 결심하지만 시누이 안나 카레니나의 위로와 중재로 이 가정의 균열은 봉합되고 위태로운 안정상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작가 톨스토이가 남자의 외도에 관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 점은 시대성을 넘어서지 못한 톨스토이의 한계라고 정리하는 것으로 족하겠다. 다만, 톨스토이의 변명은 안나의 입을 빌려 올케 돌리를 설득하는 다음의 문장 이라 할 것이다. 안나는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정한 짓을 할지언정 자기의 가정이나 아내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

그런 사람들은 그런 류의 여자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선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에요.

그런 남자들은 가정과 그런 여자들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선을 긋고 있는 거예.(1-118)”

 

그러면서 안나는 돌리에게 묻는다. ‘마음속에 오빠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오빠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남아 있다면 오빠를 용서해줘요라고. 또한 오빠가 벌인 일은 그의 진심이 아니기에 자신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을 톨스토이의 남자의 외도에 대한 변명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안나의 이 남성 관점의 변론은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완벽하게 그 반대의 언어를 말한다.

 

정사(情事)를 나눈 후 연인 브론스키를 향해 안나는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저에겐 당신밖에 없어요. 그걸 잊지 말아 주세요(1-239).”라며, 돌리를 향해 말했던 가족의 신성성을 묻어버린다. 그녀에게 이미 남편도 아들도 없다. 오직 육체적 욕망을 채워주는, 물론 안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긴 하지만 브론스키만이 있다.

 

안나의 세계엔 이미 남편도 아이도 없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남편에게 모든 걸 밝히고 둘이 떠나겠다고 말할 경우 남편의 반응을 추정하는 다음의 말은 이미 돌리에게 오블론스키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이는 정치가다운 태도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겠지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스캔들을 없애겠다고 말예요. ...그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니까요. 그것도 무서운 기계예요. 특히 화가 날 때에는.(1-301)” 구조적 당위성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에 비유되고, 여기에 사악함을 덧씌운다. 이 말에는 남편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대한 성찰 또한 존재치 않다는 점이다.

 

브론스키와 그의 사촌인 남성 편력으로 소문난 베트시 공작부인을 만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던 안나에게 남편이 도착하자 그녀의 거짓 영혼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필 이런 때에 온담, 자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여보, 오늘 밤은 주무시고 가시겠지요?”, “이제부터 우리 같이 가기로 해요.(1-323)”라는 기만적 언어를 발설한다. 알렉세이 카레닌은 이러한 기만적 언행을 감지하지 못하는 맹추가 아니다. 아마 총 8부작인 소설에서 브론스키가 말과 함께 넘어지는 경마 대회 장면은 이 불륜 이야기의 가장 결정적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의 시선이 빼곡한 곳에서 홀로 걱정의 탄성을 부르짖으며 주저앉는 안나의 행위는 어떤 확정된 상황을 예정한다.

 

안나라는 여인의 정말의 속셈은 무엇일까? 정부(情夫) 브론스키와 함께하는, 자기 욕망을 언제든 성취할 수 있는 독립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도 카레닌 부인이라는 명예의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 세료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어머니인 자신의 사랑을 놓을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이것은 단지 자기기만이다.

 

자신이 카레닌을 벗어나고자 은연히 암시했을 때 브론스키가 보호자가 되겠다고 확신을 주었다면 그와 단 둘이 떠나려했음을 상기하는 장면처럼 그녀에게 아들은 자기 신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브론스키가 경마대회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이미 안나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하필 이런 때에 왔다며 남편의 방문을 혐오하면서도 남편의 건강을 말하며 위선을 떨던 여인은 가히 불륜이라는 가증스런 욕망 덩어리라 해도 부족할 듯싶다.

 

경마장에서의 공개적인 불륜의 확신을 주는 행위에 대한 남편의 완곡한 경고성 발언이 주어지자 이에 즉각적으로 혐오와 조롱의 언사를 행하며, 급기야 자신의 부정을 남편에게 고백한다. 아니 선언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될 것 같다. 너는 나의 브론스키와의 관계,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어떠한 간섭이나 요구도 하지 말라는 적대의 언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지속하여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브론스키와의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혼인의 구속에 몸부림치며,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면서도, 귀족 사회에 자신의 불륜이라는 추함이 공식화되는 것은 수용치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남편의 공식적인 승인, 카레닌의 아무런 보복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불륜을 정상화하고 싶은 욕망이다.

 

카레닌의 입장을 보자. 그는 부정을 선언하듯이 통고한 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세상 사람들이 이 소문을 모르고 있는 한, 나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는 한 난 모른 체할 작정이요....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할 경우엔 나는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에 적합한 방법을 강구할 것이오.(1-498)” 불륜의 사실이 세상에 직접 사실로서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표면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부연한다. 당신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정숙한 아내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을 것이오.(1-499)”

 

카레닌은 불륜 이전의 아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를 기계라고 멸시하는 것은 정부에 매몰된 여인이 으레 갖게 되는 증오의 언어이지 이것이 카레닌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는 없다. 그는 고위 정치 관료다. 자신의 정치적 과업에서 성취를 얻어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랄 수 있다. 안나는 그가 사랑이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을 빌려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 성사에는 남자가 이미 쌓아 놓은 고위 정치 관료라는 명망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사랑이라는 낭만적 관계, 육체적 욕망의 실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랑이 사회적 지위가 제공하는 안락과 명망보다 소중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늙은 남자와의 결혼관계를 무용화 시키겠다는 주장을 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마침내 이혼을 결심하고, 모스크바로 고뇌어린 짧은 여행을 도모하지만, 안나로부터 죽음의 고통에 처해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의 집으로 돌아와 달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안나의 전갈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면 아내의 죽음이 도래하여 마침내 이 고통스러운 위협의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안나라는 여인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으며 산욕열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게 되자 남편을 간곡히 찾았다는 것과, 도착한 남편에게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며 구구절절 용서를 빌며 참회하는 장면이다.

 

안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카레닌은 이러한 안나의 변화에 대해 연민과 용서의 마음으로 전환하여 극진한 간호와 함께 부부로서의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자 안나는 남편과의 마주침 자체를 불쾌함, 혐오스러움으로 인식하며 한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죽음만이 이 상태로부터의 구원이라며 오빠 오블론스키에게 하소연한다.

 

여동생을 위해 오블론스키는 카레닌에게 안나를 해방시켜줄 것을 완곡하게 부탁하고, 카레닌은 결국 안나와의 이혼을 승낙한다. 그러나 안나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는데,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브론스키와의 결합만을 욕망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안나는 아들과 남편을 저버리고 브론스키와 갓 낳은 딸과 해외로 떠나버린다. 안나는 그녀 자신의 이익을 완전하게 성취한 것이다. 고위관료 아내의 신분과 귀족의 평판도 잃어버리지 않고 욕망의 대상인 연인 브론스키를 마음껏 만끽하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카레닌과의 결혼은 실수였다고 부르짖으며 세상이 불륜이라 칭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안나의 이 성취가 과연 행복의 지속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독립된 인간이 될 권리, 이게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구속된 것(1-603)”이 당대의 여성이라 주장하는 페스초프라는 인물이 오블론스키의 저택 만찬에서 하는 말은 시대성이 내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제약을 넘어서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안나의 행위를 이러한 시대성의 돌파라 해석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이해한다. 결혼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의 파괴할 수 있는 제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카레닌과 이룩한 가정을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안나의 일방적인 배신 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위선이다.

 

당시 러시아의 이혼 법은 이혼 후에 여성은 정부(情婦)는 될 수 있었으나 정식 혼인관계를 새로이 얻을 수 없었으며, 귀족 사회의 관습 또한 불륜의 당사자인 귀족은 그 세계에서 더 이상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지성을 갖춘 귀족 여성인 안나가 이러한 법적, 관습적 제도를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충분한 지적 이해 속에서 안나는 불륜을 선택했으며, 이를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위한 이해, 즉 불륜에 대한 완전한 방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카레닌은 안나의 삶의 복귀를 위해 합법적 남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은 욕망의 대상과 함께 날아가버린다. 끊임없이 자기 구속의 명분으로 삼던 아들 세료자는 버려두고서.

 



 

2. 전환기 러시아 그리고 인간 구원 (5~8)

 


불륜의 히로인(heroine)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도피와 연인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 자기 연민의 불가항력적 귀결에 이르는 장면들은 당대 여성들, 특히 사교계로 대변되는 귀족 여성들의 사회적 위선과 자기 한계를 노출한다. 작가 톨스토이의 시선은 지극히 기독교적 순결주의의 도덕성에 천착하고 있어 소설 도입부를 장식했던 오블론스키 백작의 외도로 이혼의 위기를 가졌던 돌리의 안나에 대한 관념적 공감과 달리 그 행위의 원인이 된 사람을 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2-292)”고 반감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안나 또한 시대성이 지닌 여성의 굴레를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사랑이라는 열정에 몰입하여 연인의 신체와 정신을 견고하게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귀족 사회 및 남성적 시선에 포획된 언어를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하여 역겹고 추잡스럽고 몰인정한 계집(2-192)”이라는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자기 혐오는 곧 자기 연민의 다른 표현이다.

 

한편 이와 달리 안나로부터 배신당한 카레닌의 경우에는 아내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언제까지나 자기라는 존재 때문에 아내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도록 해준(2-115)” 결과가 절망감과 슬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경멸받는 고독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연민의 공감으로 나타나고, 나아가서 리디아 공작부인이라는 귀족 사교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성으로부터 사랑과 연민을 받는, 즉 사회적 권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지 않으며, 종교적 구원, 하느님의 고상한 관용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카레닌의 안나에 대한 죄의 물음이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하던 안나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그 불의의 자식에 대한 배려의 수치스런 기억과 회한이 그를 괴롭히는 중에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법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혼하는 법이 다를까?(2-137)”라는 본질적 자문을 하는 것이다. 관념적 이상과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성의 충돌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징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성의 역할과 인식에 대한 아주 소박한 변화의 징후는 농촌 귀족 레빈의 아내인 키티 레비나의 사랑의 지혜로 현현되는데, 형 니콜라이의 임박한 죽음을 대하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두려움 없는 의연함의 지혜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여성, 아이, 농민 등 평민은 복속되어야 하며, 그들에겐 지혜란 것이 없다는 믿음의 미세한 균열이다. 그는 농노제에서 소작농, 임금 및 수확배분 등 다양한 농업 경영 방식으로의 이전에서 부대끼는 당대 농부들의 게으름, 새로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아 나간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은 당대 러시아가 봉착한 정치적, 경제적 양상들의 다양한 전시장이 되어준다.

 

작가는 레빈에게 작품의 축으로서 삶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안기지만, 니콜라이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존재의 지속 가능성, 이로 인한 삶의 의미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의 구함은 한 농부의 신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라는 우연한 언어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되며 조금은 답답한 고루함을 이어나간다. 사실 오늘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는 레빈의 형으로 상징되는 지식 엘리트, 즉 당대 인텔리겐차의 오만한 무지와의 치열한 논쟁에 있다.

 

크림반도로 불리는 세르비아, 터키 지역의 전쟁에 동족인 슬라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는 의용군대에 대한 찬반의 문제이다. 전쟁 참여의 명분은 다분히 자의성을 지닌다. 학자인 형 코즈니세프는 주장한다. 슬라브 민족이 이교의 사라센 인 멍에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도들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처럼 동포의 고난에 민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러나 레빈은 이를 반박한다.

 

러시아인이 왜 갑자기 슬라브의 동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더구나 편리할 때마다 사용하는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 막연한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자기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표명해야 할 사건으로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민중의 의지 운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반론이다. 무고한 터키인을 살해하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이의이다.

 

여기에 신문이라는 신문은 다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 실재 진실의 목소리는 물론 아무것도 얻어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신문 즉, 여론을 조성하는 이 인위적 매체의 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레빈은 신문과 민중의 의지라는 언어를 이용하여 복수와 살인의 사상을 대표할 권리를 인렐리겐차가 가지고 있다는 데 결코 동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에 그대로 이식해도 아무런 손상도 없는 담론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상업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의 언론 미디어는 이미 공정한 지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엘리트 지배계급이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나 관심이 있으며, 더구나 전쟁의 선포나 참전의 결정을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은 이제 애국심과 같은 정체성을 획책하는 저열한 악의에 결코 공감을 얻기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우둔, 지혜의 속임수에 대한 레빈의 갈파와 함께 자신의 내적 충동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조건을 초월한 진리 발견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고작 생존경쟁이요, 욕망 만족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증오의 법칙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이성이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발견할 리가 없다(2-565)”는 레빈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반()합리주의 세계관과 많이 닮아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들이 근거 없는 의지를 이해하려 할 때 과연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구원, 영혼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만 유일한 길일까? 그렇다면 치욕과 불명예로 몸부림치다 열차에 뛰어든 안나의 행위는 죽음에 의한 구원의 의식인가? 아니면 원죄, 불륜의 속죄인가? 나는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우둔함에 머물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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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사리 물리치지 못하는 까닭에 책의 유혹은 여전히 그리고 즉흥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뽐내는 선전 문구에 이젠 멈추어야 한다던 다짐을 잊게 하기 일쑤이다.

 

불륜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구원 문제를 우회하여 넌지시 도덕성을 촉구하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읽다가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하던 농촌 귀족 레빈때문에, 혹은 기독교에 의해 쾌락주의 누명을 쓰고 고귀한 사상이 자칫 묻혀버릴 뻔 했던 에피쿠로스가 눈에 밟히던 중 마침 출간된 '존 셀라스'의 엑기스 같은 책을 저버리지 못하는 식이다.

 

퀴어가 대중적 이해를 획득함에 따라 새삼스레 부상하는 '미시마 유키오'금색(禁色)은 그의 군국주의자로서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에 대한 호기심을 물리치기 어려워 구입하는가하면, '매들린 밀러'의 소설은 단지 화려한 장정과 '아킬레우스'의 현대적 해석은 어떤 것일까 하며 현혹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노리나 허츠고립의 시대는 저자의 대중을 향해 내뱉는 유창한 설득의 언변에 매료되어 있던 차에 무조건적인 지적 신뢰가 통하였으며,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는 상처 받고 이방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울림을 뒤늦게 찾기도 했다. 아마도 공감의 감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내 처지와 상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인리히 호프만'더벅머리 아이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판 역시 스치듯 언급되던 역사서 모퉁이의 어느 한 문장이 떠올라 다행스럽게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고 있어 구입을 미룰 수 없었던 책이라고 판단했다. 타셴에서 출간하는 책의 그 촘촘한 밀도의 구성에 매료되었던 기억으로 20세기 사진 예술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의 압축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매혹이 결합된 구매 욕심이었던 듯싶다.

 

이렇게 2월 한 달 구입한 책을 정리하면서 구입의 무수한 정당화의 변명을 하고, 책 마다 에 내 인상과 느낌을 기록해두는 의미를 기술해 본다. 이젠 그만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책을 향한 욕심이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해 할 뿐이다. 이 책들은 또 어떤 책을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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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05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는 많아도 많아도, 해롭지 않은 것이 ˝책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탑 보기만 해도, 덩달아 기분이 업됩니다

필리아 2022-03-05 15:38   좋아요 1 | URL
쌓인 책들 중 정리해버릴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몇 개월마다 하면서 탑을 줄여나가는데 다시금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책에도 어떤 의지가 있는 듯 싶어요. 언젠가 제 욕심이 수그러들면 함께 책 영역도 사라지겠지요. 유쾌한 주말 시간 되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밝힐 불빛이 없어 세상이 이렇게 어둡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이러한 시선에 그리 관대하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정말 불빛이 없어 한국 사회가 어두운 것인가?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도시의 밤 거리도 대낮처럼 밝지 않은가?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오늘 사람들이 반딧불을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불 정도로 충분히 어두운 곳에 사람들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불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어둠을 내치고 몰아내는 불빛만 있는 세상이어서

그 밝은 불빛 탓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정작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어둠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밝은 대낮 같은 세상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으니 빛 타령을 하며 본질을 외면한 주장들을 넘치도록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시인 장혜령은 보고 발견하고 그리고 깨우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어둠이 있어야 한다고 산문집 『사랑의 잔상들』 에 쓰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어둠은 커녕 온통 빛의 홍수이고,

잠깐의 단절도 참지 못하는 고독이 부재하는 시간을 잘 사는 삶이라고 까지 떠들다보니

막상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피상적 무사유의 언어들만이

넘실 댈 까닭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은 영화라는 이미지를 위해 어둠의 장막을 내리고,

꿈을 꾸기 위해서는 잠의 어둠에 잠겨야 한다.

글의 진정한 함의, 그 이면의 사유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고독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밝은 빛만 내리 쏟아지는 세계는 위장과 가면들, 과시와 무사유가 점령한다.

아무것도 꿈 꾸지 못하고, 적나라한 그 무엇도 내비치지 못한다.

눈 감고 저 깊은 사유의 언어를 끌어 올릴 겨를을 가지지 못한,

이런 시간을 견뎌낸 언어를 지니지 못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세계를 차지한다.

디지털 혁명의 세계? 광소자가 빛나는 그 환한 가상의 공간은 생명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아무런 사유의 자리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점점 어둠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는 의지처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는 마음에게

어둠과 고독이라는 존재의 지혜를 선물해야 한다.

빛이 찬연한 곳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보이지 않으며,

그 어떤 고통의 사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의 공간으로 가야지만 이들의 모습과 상황이 보인다.

빛 속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어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우린 어둠의 권력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어둠을 되찾아야 꿈도, 소망도, 사랑도, 사람들도 발견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어둠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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