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안전가옥 앤솔로지 9
최구실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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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행위가 무릇 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무심코 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스스로 경계하고,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주의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점차 이 세계를 점령하는 인상이 짙어지고 있는 듯 하기만 하다. 대체 버젓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어떤 존재인가? 빌런(villain;악당)을 제재로 하는 이 작품집을 손에 든 이유이다.

 

인간 뇌의 신경생리학적 구조에 기댄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작품부터 오늘 AI의 첨병역할로서 현실의 모든 물리적 세계를 재구성해 인간을 디지털 세계로 모델링한 세계로 급속하게 전환시키고 있는 메타버스의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이야기하는 수정궁의 유령, 그리고 우상화된 연예인과 팬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세계의 희망, 자연의 절대 지배자로 자임하는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우주 동화로 지펴낸 치킨 게임, 마지막으로 세계의 모든 타자들을 한낱 도구로 여기는 어느 투견업자의 패악질을 그리고 있는 송곳니까지, 이들 다섯 작품은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자화상일 것이다.

작품집의 첫 편에 앞서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듯, 선과 악도 공존하며 서로의 거울 역할을 한다며, 우리는 항상 정의로운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요?”라며 인간 악()의 보편성을 당위시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있는 심연의 어두운 그림자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표현들로 인간의 악과 그릇됨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본질을 흐리멍텅하게 하여 도덕적 기회주의적 성향과 자기기만적 존재임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에는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마다 어떤 도덕적 믿음을 하고 있는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을 자연의 대상과 다른 대상들과 구분해주는 의지, 즉 도덕적 공과에 대한 개념의 선험적 능력을 지녔다는 칸트의 지적처럼, 인간은 선하고 악한 것, 옳거나 그른 것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이를 부정하게 되면 어떠한 악이나 그릇됨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할 원천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결국 인간에게 도덕성이라는 것 자체를 박탈하여 혼돈이 휩쓰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바른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빌런을 선의(善意)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나는 강한 불쾌감을 갖는다. 이러저러한 상황과 배경의 불가피성이 한 인간을 악한으로 만들었으니 그 존재에게 도덕적 처단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야릇한 논리를 내세우곤 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에는 이분법에 대한 강한 회의가 있는데, 정말 우리네 믿음에 중립적인 지대가 존재하는 가에 대해 나는 반감을 표시하게 된다. 이를테면 계급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는 본디 당파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것은 위선이요 기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모두 인정하면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는 말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나마나 한 말에 불과하다. 도덕이란 인간 의지의 선택으로 발생한 결과에 대한 규범이다.

 

김구일 작가의 단편 송곳니는 가장 직접적이고 저열한 빌런을 등장시키고 있다. 외딴 산골 지역에 투견을 길러 투견도박으로 더러운 부를 쌓는 인간의 잔악성이 진동하는 썩은 내와 함께 작품 전반을 채우고 있다. ‘수기라는 어린 소녀는 투견 우리에서 학대받고 신음하는 개들을 풀어주고 보호하기위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악의 화신인 투견업자 서재형에 대항한다.

 

읽으면서 지역의 대표자로 선출되어 행세하는 현실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 분쟁있는 호텔을 사들여 은밀히 지하층에 도박장을 운영하며, 지상에서는 지역 유지행세를 하는 인간.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악인이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모든 타자는 폭력의 대상이며, 생명을 죽이는 것에 어떤 도덕적 의식조차 없다. 악을 선택한 인간, 아니 인간에 경멸을 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모델인 존재로부터 작가는 성악설을 길어 올린다. 빌런은 단지 악한 존재이지 때론 선한 존재라는 말로 희석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내 도덕적 신념과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느껴졌기에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에 상응하는 이유있는 빌런, 즉 악행에 정당화를 부여하려는 존재를 부각시키는 최구실 작가의 샐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억으로 기능하는 뇌 세포만이 파괴되어 긍정적 신호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기만을 주제로 하는 것 같다.

 

김샐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변이 뇌세포를 가진 존재이고, 자신의 뇌세포를 연구하여,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세상의 인간들에게 고통을 지우고 정상적 삶의 존재로 회복시키려는 기억소거협회연구책임자다. 여기에 옛 동창생인 최은수가 연구원으로 입사하지만 김샐리는 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 최은수는 미국 유학시절 김샐리의 신경과학의 발견을 읽게되고, 최샐리가 되어 트라우마 증폭세포의 기습적 증식이란 논문을 써낸다. 두 인물의 성격과 행위를 바라보며 독자는 영구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이타적 행동만을 하는 김샐리와 인간의 고통을 실감하며 사는 최샐리를 통해 인간다운 삶이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된다.

 

샐리야..., 내 이름 기억나?” 김샐리는 최샐리의 물음에 고개를 내젖는다. 뻥 뚫린 기억, 쪼그라든 뇌의 어설픈 기억, 그 긍정의 기억만 하는 뇌, 매양 행복하기만 한 인간의 이타적 삶이란 것이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행복이겠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이것은 이에 저항하는 빌런 최샐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하며 도덕적 회색지대를 드러내려한다. 이러한 경우 두 인물 중 진짜 빌런은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만일 행복 만능의 이타적 존재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맹점이 지닌 인간적 존엄성의 결여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두 인 물 모두 빌런이라 할 도리밖에 없다. 결국 빌런에 대한 연민, 그 동기의 도덕성을 가지고 논의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즉 동기가 애초에 그릇된 것이라면 모두 부도덕하다는 칸트의 도덕논리에 이른다. 결과주의냐, 동기주의냐는 여전히 고달픈 인간 의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딜레마를 상정하고 도덕적 상대성을 주장하지만 도덕은 시대가 지니는 상황적 의식을 배제하지 못한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 한결같은 진리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빌런을 정의하려는, 도덕논리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단지 정서적 갈등의 문제일 뿐인 것 아닐까?

 

김상원 작가의 수정궁의 유령은 희망찬 미래 세계라는 메타버스, 가상의 공간 속 인간들의 분신이야말로 정신’, 그 자체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며, 그 선점을 선전하는 디지털 세계에 잠재된 문제들을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한 여성이 고글을 쓴 채 미친 듯 춤을 추면 사지와 몸통과 머리가 뒤틀린 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추리물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실재하는 인간은 본체로 불리고, 가상공간의 아바타는 실재처럼 설명된다.

 

본체가 사망한 아바타의 아이템이나 리플레이 영상까지 상업적 자산으로 거래되는 오직 경제적 효율만 존재하는 비정한 공간이다. 아바타와 실존하는 인간을 살해하는, 즉 가상의 이미지가 본체를 살해하는 괴물화된 디지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세계를 마치 유토피아처럼, 전통적 지식들의 세계를 전복하며 인간 욕망이 평등화된 세계를 주장하지만 실제, 현실이란 소수의 플랫폼 소유주와 돈을 추구하는 정보기술 독점자들의 추한 세계의 디지털화로의 이전일 뿐임을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머와 재치넘치는 문장들과 메타버스 세계에 넘쳐나는 쾌락과 도덕적 부패의 근원을 탐색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달리 작가의 우세계는 희망과 엄성용 작가의 치킨 게임 또한 빌런이란 제재에 부합하고 있지만 서사의 축을 이루는 제재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우세계...는 남자 영화배우 스타의 팬카페 구성원인 여성들의 시기와 질투, 소유 욕망의 진부한 다툼과 이를 이용하는 배우의 탐욕적 이해의 놀이에 대한 비극적 전경이다. 치킨 게임또한 흔한 자연의 지배자로 우뚝 선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돌연변이로서 인간지능을 초월하는 슈퍼 닭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 호모데우스를 농락한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류를 빌런이라 칭함으로써 빌런이란 의미를 지워버린다. 인간의 도덕적 경계를 범주화하는 용어가 대상의 전체에 미치면 실제로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은 돋보인다. 즉 뛰어난 서사의 구성적 역량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재미만큼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너무 투명해서 마치 킬링타임용 영화 한 편을 본 인상과 유사한 기분이다. 아무튼 독특한 표제를 한 이 작품집은 요즘 범람하는 회색지대의 인간들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 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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