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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FBI의 앳된 수사관 ‘클라리스’가 하키 마스크가 씌워진 채 체인으로 묶여있는 연쇄살인범 ‘한니발 렉터’와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은 그 낯설고 기괴하고 음습한 분위기로 인해 기억의 저장소에서 쉽사리 끄집어 내진다. 이 장면은 서로의 신뢰를 줄다리기하며 진실을 거래하는 그 미세한 심리적 긴장을 떠올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예사로운 지능의 소유자들이 아님을 동시에 상기토록 한다.
소설 원작이나 영화 모두 독자와 관람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덕에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지식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물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성학 연구자인 ‘정희진’은 그의 책에서 정신의(醫)인 렉터의 지식의 양(量)적 측면은 결코 윤리적 선악과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며, 지식은 양이 아니라 가치라는 측면에서 검토되고 요구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그간 나는 무지(無智)를 지식의 양적 측면에만 시각을 겨누는 헛다리짚기를 연속했다는 내 무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각성만으로 충분했을 테지만 떠오른 김에 이 작품을 읽어보아야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렉터 박사는 소설 속에서 관찰과 면밀한 분석 능력을 비롯한 절대적 기억력을 지닌 정신과 의사로 묘사되고 있다. 클라리스 스탈링과 첫 대면에서 렉터는 스탈링이 사용한 스킨 크림의 이름과 향수를 뿌리지만 오늘은 뿌리지 않았음을 맞춘다. 신분증을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열 때 얼핏 맡았을 뿐이라는 렉터의 대답은 그의 찰나(刹那)적 관찰능력과 기억력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FBI 행동과학부 ‘잭 크로포드’ 부장의 명령으로 훈련생인 스탈링을 범죄자 심리 설문이라는 명목 하에 렉터의 대담자로 투입시킨 것이지만 이미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지속되고 있는 오리무중의 연쇄살인, 일명 ‘버팔로 빌’사건을 위한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한 전술이다.
살가죽이 벗겨진 채 강에 버려진 여성의 사체, 알코올 저장병에 담긴 깔끔하게 잘린 머리통,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쓴 렉터, 무심하고 일말의 죄의식도 지니지 않은 채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 등을 읽으며 어떤 문학적 감흥을 생각한다는 것이 왠지 독자 자신이 낯선 존재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아마 ‘열광하는 냉혹한 독자’라는 이 모순어가 전혀 모순이 아닌 순간을 체험한다.
소설의 제목인 ‘양들의 침묵’은 스탈링의 어린 시절 고통스런 기억, 양들의 울음소리가 깨운 임박한 죽음들로부터의 도피, 그 한시적인 완결의 의미로 이해된다. 이것은 스탈링이 연쇄살인범 버팔로 빌의 단서를 얻기 위한 두 차례의 추가적 면담에서 정보의 거래 대가로 렉터의 요구에 의해 스탈링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축적해 나간다. 스탈링의 성장기에 어린 렉터의 연민이었을까? 사실 이 소설의 커다란 흠집으로 보이는 것인데, 응급대원, 보안대원을 살해하는 방법이나 그의 처리에서 보이는 완전한 평정심은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을 발견할 수 없다. 더구나 스탈링의 첫 대면에서 옆방에 수감된 자가 스탈링을 향해 뱉어낸 추한 성적욕설에 대가로 자신의 심리적 수완을 발휘하여 바로 자살케 하는 것과 렉터의 연민은 결코 공존 가능한 감성이 아니기에 납득하는데 저항감을 느끼게 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823/pimg_7290341033529938.jpg)
소설의 중심 제재는 버팔로 빌이라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범인의 실체를 밝혀 체포하거나 사살하여 잔혹한 여성 연쇄살인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다. 이미 다수의 여성이 살해되었음에도 정부 고위층 인사나 언론의 진지한 관심이 동원되지 않은 사건이 테네시주 상원의원의 딸이 동일한 흔적을 남기고 피납되자 보이는 경찰관서, FBI, 고위층 인사들, 언론의 집중된 시선이다. 아마 작가는 이러한 기울어진 사회적 양상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실종된 상원의원의 딸이 살던 아파트를 수색하던 스탈링을 발견한 상원의원은 그녀를 도둑취급하며 모욕한다. 이때 렉터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스탈링의 말은 흥미롭다. “재수없는 상류층년. 이렇게 말하면 렉터 박사는 하층계급의 분노라며 즐거워하며 지적했을 것이다. 모유로 전해진 분노가 내면에 잠재돼 있는 탓이라며”, 스탈링은 교육과 지성, 외모면에서 상원의원 ‘마틴 루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신분이라는 계층적 권위를 수단으로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권력화된 무지이며, 주변의 질서는 이에 뇌동(雷同)한다.
꼴불견인 세상의 흔한 일면이다. 스탈링과 크로포드를 시기한 렉터를 수감하고 있는 볼티모어 정신질환 범죄자 수감소장 칠턴은 도청장치를 통해 스탈링과 렉터의 대담을 엿듣고는 자신의 영예와 부를 위해 상원의원과 렉터의 직접 면담을 주선하며 사건을 미궁으로 치닫게 한다. FBI의 수사를 중지시키고 직접 자신의 딸을 구출해내겠다는 어미의 심정을 이용한 기만적인 장난에 이용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흔해빠진 교훈이랄 것이 있는데, 인간은 어떤 일이든 자신의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일이 될 때 냉정하고 객관적인 지위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전문 집단의 노력과 역량을 폄훼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 할 때 그 결과는 대개는 실패요, 좌절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꽤나 다양한 기관이 등장하여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든 무수한 집단들과의 협력과 공조가 뒤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버려진 사체의 목에서 발견된 번데기의 특성을 규정하기 위해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곤충학자들이 밤을 새워 규명하고, 범죄 용의자를 추출하기 위해 사적 자유의 보장을 위해 마련된 보안상 차단된 병원 기록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두 자연스레 기꺼이 협조하지 않는다. 어디서든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 보호를 내세우며 경각에 달린 사람의 목숨 앞에서도 자기 권리의 우선을 내새우곤 한다. 그 알량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주춤거리기 일쑤다. 어쩌면 인간의 영원한 누추함일 것만 같다.
이제 다시 돌아와 지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소설은 두 측면의 윤리적 방향을 달린다. 렉터의 지식은 결코 선의에 의해서 활용되지 않는다. 반면 스탈링의 지식은 선을 지향하고 타인의 이해와 공감을 향하고 있다. 지식의 양 측면에서 렉터 박사의 그것이 스탈링에 비해 월등하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가치변화에 소용되지 않으며 자기 쾌락과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는 실제 범인인 “‘제임 검’을 클라리스에게 어떤 방법으로 내줄지 생각 중이었고...” 에서처럼, 버팔로 빌의 실체를 놓고서도 자기 안위, 수감 조건의 완화 등을 거래 조건으로 내세운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이 양적으로 부족해서 인간답지 못한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석박사가 넘쳐나고,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허접하고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식, 앎이란 가치 지향적인 것이며, 그 양은 사실 그다지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여기서 지식을 오용하는, 반(反)사회적으로 이용하는 자들과 사례를 너절하게 열거하는 낭비는 하지 않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렉터가 클라리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발견한 하나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맺는다.
“당신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축복처럼 침묵하겠지.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은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 ....
'어쩌면 같은 별들을 지향하고' 있을 테니.” -502쪽
클라리스의 삶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교감과 예견을 표시하고는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을 거라며 어떤 지적 동지애를 나타낸다. 결단코 같은 별을 지향하고 있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의 작가는 지식을 양적 측면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지식이란 본래 당파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은 선한 가치를 지향할 때 그 의미가 존중되는 것일 게다. 여름 날 나기에는 이처럼 냉혹한 독서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