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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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뱉어낸 말이나 실행에 옮긴 행위에 대한 정당화에 능숙하다. 이건 어떤 지식의 축적이나 외부 정보, 지식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생존 본능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특히 그릇되어 타인을 비롯한 세계에 많은 손상을 끼쳤음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입증이 어려운 것일수록 그 정당화가 잘못된 믿음에 근거했다거나, 의도된 오직 이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토록 자기 정당화란 난공불락의 심리적 방어벽인 것 같다.

 

이 소설은 이중 스파이’, 즉 자신이 소속된 정보기관과 상대 기관인 양쪽으로부터 알아낸 첩보를 이용하여 정보화된 보고를 하는, 자신의 실체를 꽁꽁 숨긴 채 이중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첩보원을 색출하는 이야기다. 정당화라는 말에는 죄의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자신의 발언과 행위에 제기된 비난과 혐의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화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 사이의 대화, 즉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오랜 기간 이중 스파이로 암약해 온 존재를 찾아내기도 어려울뿐더러 찾아냈을지언정 죄를 자인(自認)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란 예상이 가능해진다.

 

서커스(영국 정보부)에서 해임된 스마일리는 옛 상사인 레이콘의 저택에 안내되어 서커스와 러시아 정보부 양쪽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는 요원 타르에게 한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러시아 첩보원의 포섭과 이의 승인을 요청하는 긴급 전언이 무시되었던 것과 이와 함께 당해 해당 정보가 러시아 정보부에 누설된 정황이다. 이로 인해 타르는 영국 정보원으로서 거의 성공한 성과가 누군가에 의해 좌절된 것에 의혹을 전하는 것이다.

 

레이콘은 서커스 내부의 진실 조사를 은밀히 수행해 줄 것을 스마일리에게 요구한다. 사실 이중스파이의 실체에 접근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복잡해 보이는 연결 관계, 중간 중간 삽입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과 관련 사건의 역할 등은 진부함에도 재미의 요소로서 충분히 서사적 소임을 다하고 있다. 아마 실제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작가의 경험이 녹아있어 그 디테일이 주는 현실감 때문일 것이다. 테임 닥터(세뇌요원)니 래그맨(연락책)이니 베이비시터(경계요원)니 하는 정보 요원이 사용함직한 은어들은 또한 분명 독자의 즐거움을 돕는다.

 

소설의 결말에 가서야 알게되는 스마일리의 아내에 대한 배반적 감정, 동료 요원인 빌 헤이든과 아내 앤과의 불륜 관계로 야기된 고통에 내재된 슬픔과 연민은 자신이 한 인물을 직시하는 것을 훼방하는 요인이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까라는 물음이 오직 자신의 처신으로만 향했을 때의 어둠 속의 풀어지지 않는 매듭이었음을,

 

레이콘과 장관의 밀명 하에 거대한 실패를 몰고 온 서커스의 수장이었던 컨트롤의 마지막 작전에 얽힌 과정을 복기한다. ‘컨트롤에 반감을 품고 있던 올러라인을 비롯한 빌 헤이든’, ‘블랜드‘, ’토비 이스터헤이스등 서커스의 현재 최고위직 요원들의 신상에서부터 예산의 사용과 그 시기, 각종 행정문서, 당직 일지, 해외 출장 일정, 영국 주재 러시아 정보국 요원의 행적 등등으로부터 시간상의 모순, 잘려진 일지와 명령자, 실패한 마지막 작전의 희생자가 된 동료의 상황 기록은 하나의 인물로 향한다.

 

컨트롤은 말년에 서커스 내부의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스마일리를 보호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출장으로 보내 작전에 개입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리고는 외곽 요원인 짐 프리도를 전향하려는 체코의 장군을 수송하는 작전에 파견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커스 내부의 이중 스파이에 의해 기획된 함정이었기에 짐은 총을 맞아 체포되고 작전은 외교적 갈등을 촉발하는 대실패로 종료된다.



 


소설은 오랜 첩보원 생활로 인한 자기희생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기대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수장인 컨트롤을 몰아내고 권력과 그에 따른 몫을 차지하려는 순전한 이기심들의 모의였음을 드러낸다. 해외 요원으로 떠돌다 서커스 본부에 들어왔으나 이렇다 할 실권을 가진 보직에 임명되지 못한 인물들은 명예에 응당한 돈과 직위를 욕망한다. 올러라인을 포함한 4인방은 러시아에 대한 시사성 높은 정보를 내놓으며 요원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컨트롤을 정보에서 배제할 모의를 숙성시켜 나간다. 두더지(mole:이중 스파이의 은어)의 실체가 밝혀질 것에 대한 조바심은 이들의 계획을 정확하고 빠르게 관철시킨다.

 

이들의 목소리는 창밖의 현실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누군가 자신들의 양심을 긁는다면 아랑곳하지 않고 재규어 차를 타고 다니겠다는 것, 즉 실리를 쫓는 것에 어떠한 윤리적 구속도 차버리겠다는 선언이다. 명예를 지향하는 자는 기사작위를 얻고, 돈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돈이 주어진다. 그리고 비밀 무대에 숨어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쥐락펴락 싸움을 붙이며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 이 소설이 냉전 시기의 한 가운데인 1974년 발표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국가, 국민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 불온한 이유들이 된다. 그렇다고 오늘과 그리 멀리 떨어진 한 시기의 낭만적 배설(排泄)만은 아니다. 이러한 양태가 지금 이 사회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의 동기에 표준이라는 게 있는지 의심스러운 생각을 하는 스마일리를 읽으면서, 인간들이 내건 그럴듯한 명분들, 즉 정당화란 결국 사소하고 야비한 것으로 위축되는 꼴을 목격하게 된다. 양 쪽 정보의 비중을 가늠하며 두 세계를 농락하던 자는 규명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남겨준다. 엇나간 대화와 의사소통 불가능성에 따른 상실감, 인간들 사이에 믿음과 사랑이란 것이 진정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그것이 단지 망상에 불과한 것인지와 같은 회한어린 물음을 던지는 까닭이다.

 

1991년 작가가 남긴 작품 후기의 한 마디는 작품 도처에 넓게 깔려있었음에도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차별과 소외의 이야기다. 조국과 몸담고 있던 정보기관을 배신했던 4인방을 비롯한 요원들의 면면이다. 영국, 옥스퍼드로 대변되는 명문, 귀족, 엘리트 이외의 네덜란드, 체코, 폴란드, 아시아의 국가들로 상징되는 인종적 배제, 즉 사회계층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이들에 대한 차별 인식과 그 차원을 같이하여 은유되고 있는 국가의 무의식에 노정되는 이데올로기의 실패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마일리의 아내인 앤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무수한 남자와 불륜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것은 정보기관인 서커스와 함께 자기 이익, 쾌락에 따라 지조없이 움직이는 불온한 정치적 윤리성을 은연히 암시한다. 이것은 정보부야말로 정치적 건강도를 보여주는 척도이며, 국가의 무의식을 실제로 표현하는 기관이라는 스마일리의 말에 가닿는다.

 

오늘 한국 사회는 국가정보원의 과거 기록을 털어내며 정치 보복에 혈안이 된 현 검찰정국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극히 불건강한 정치적 사태이며, 이들의 무의식에 새겨진 것이 오직 보복이라는 부도덕한 폭력성에 집착하고 있음의 반증일 것이다. 오늘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외교적, 경제적으로 첨예해진 세계에서 자국 정책의 우위를 위한 정보 지원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치중하고 있다.

 

반면 이 사회는 내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보복하는 기반으로 위축시키는 퇴행을 일삼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시대의 실상을 허구화한 이 작품이 50년이 지나 21세기 한국 사회에 반복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꽤나 우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일으킨다. 소설은 단순한 첩보 스릴러물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내밀한 관찰기록이며, 국가 기구, 정치 조직에 대한 냉정한 풍자이다. 여느 스파이 소설과 달리 예외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장르의 범주를 뛰어넘는 걸작 문학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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