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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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곱 작가의 작품마다 뿜어내는 그 고유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이토록 풍부하게 소설의 맛을 느끼게 해 준적이 언제였던가를 생각게 할 만큼 뿌듯한 읽기였음을 먼저 말하고 싶다. ‘강화길은 화자의 말에 현혹되었다가 그 대립하는 사실의 존재에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가하면,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은 촘촘히 박혀있는 그 거북한 인간들의 무심함이 정말 무구하게 술회되어 일상의 작은 언행들에 있어서도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언어와 인간행위에 깃든 상징과 의미의 집요한 설명을 통해 인간의 관계적, 사회적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가하면 한강의 작별은 경계적 존재의 시선이라는 차마 정의하고 있지 못했던 지각의 한 부분을 일깨운다.

 

어떤 사건, 대상을 바라보며 인식하고 이해하는 태도, 자질, 방법과 같은 시선이란 아마 이처럼 무진장하며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시선은 거북하고 나아가 불쾌감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가하면, 긍정적 교감으로 공감과 반성적 사유 혹은 사유의 지평을 넓히도록 하는 것이 있다. 수상작 및 후보작 등 7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 선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바른 소리를 하고 지식을 풍성히 담아내고 있어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함을 내포하고 있는지, 아니 그 표현된 발언이 타자, 즉 자기 아닌 다른 인간, 이 세계를 향한 체험된 성심의 것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린다. 간접적으로 획득된 이론화된 지식에 의존하여 마치 역사의 시간, 세상을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자기 신념만을 강화한 언설들은 거짓스럽고, 허식(虛飾)으로만 여겨지는 탓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느끼는 내 탓이다. 타자성이 멸실된 존재가 타자성을 얘기하는 기묘한 서걱거림, 마치 사람과의 접촉 경험이라고는 일체 없는 존재의 주절거림에 저항을 갖는 내 감정의 문제로 잠시 치워두자. 이 선집 대다수의 작품이 내게 적극적인 교감의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 충만감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강화길의 은 작은 농촌마을 초등학교 교사인 김미영이란 인물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불안과 불온한 무엇의 현실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으니 아무튼 내 인식의 편향성이란! 하며 겸연쩍은 내심의 미소를 지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해외파견 근무로 아이를 돌봐줄 시어머니와 함께하기 위해 선택한 시골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생활의 실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다섯 살 어린 딸아이에게서 사투리와 그릇된 언어의 사용을 발견하게 되고, 가르치는 아이들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이장의 손자인 용권의 폭력에 대진이란 아이가 주눅든 것으로 여겨지고, 대진의 할머니인 미자네를 방문하여 진상을 헤아리려 하지만 반감어린 말만 되돌아온다. “선생님, 이상하시네요. 왜 자꾸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러세요.” 김미영의 시점이 아닌 사실의 시점을 각성하게 하는 소소한 장치들이 흩뿌려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이 뭐에요? 라고 물었을 때, “악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이라는 답변이 그녀에게 되울리기까지. 그녀는 문자 그대로 손, 손님(guest)이었을 뿐, 어디서 흘러들어오는 썩은 내,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리기까지,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고 되뇌기까지.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내부의 심연이 균열되는 걸 최후로 확인하는 눈을 가진 데런의 현실과 기억, 꿈을 오가며 여성, 동성애자가 겪어내야 하는 세상의 무심한 시선이 지닌 야만적 무지, 그 폭력적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디엔이 물었고 데런은 그렇다고, 거북이처럼 숨을 곳이 생긴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인식에 도사린 타자의 시선은 두려운 무엇이다.

 

또한 밤마다 귀신소리처럼 들리던 소리의 출처를 찾던 수리기사의 여자 혼자 사는데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라는 말이 더 무섭다듯이 편협하게 고착된 사람들의 언행은 이미 그자체로 폭력적이다. “만약 꿈에서 깨지 않았다면 그자들에게 죽은 자신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도록 요구 받았을까라는 데런의 한 조각 기억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지니지 못하는 나와 우리들의 외곬을 발견하게 된다. 무릇 우리 인간 개체는 물론 세계는 변화한다. 그것의 물질적, 정신적 진보가 되었든 퇴보가 되었든 말이다. 다른 것, 그 이질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개체와 체제는 무너진다. 그것은 수용과 배려, 이해의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약자, 소수자에 대한 우리네 앎이 더없이 깊고 넓어지기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중략)...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김혜진의 단편 동네 사람의 마지막 문장이다. 추측과 오해로 버무려진 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야기하는 불쾌감과 두려움이다. 동네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개, 여자는 운전 중 쌓여있는 파지와 부딪는 느낌을 받는다. 황급히 내려 할머니와 개의 상태를 일별한다. 다친데 없다는 반응을 돌려받았으며, 혹시라도 하며 오 만원을 건넸다고 같이 사는 여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편견과 왜곡의 확산과 축적으로 부풀려진다. 할머니는 개가 다쳐 일을 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입막음용으로 푼돈을 건네는 것으로 무마하려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당시 목격자로 파악되는 베이커리 사장, 건너편 부동산 주인, 미용실 아줌마는 사실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여자의 잘못된 처사라고 머리를 돌린다. 그들에게는 두 여자가 함께 살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발산하는 왜곡된 인식이 진실일 뿐이다. 지나친 호기심, 관음증화된 폭력성에 대한 사유가 깃들 여지가 없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폐지 줍는 할머니의 안전을 보살핀다는 미명하에 주민자치회봉사단의 일원이라는 대학생은 말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들어 그녀들에 대해서 알만한 것은 다 안다고 소리친다. 그녀들의 무엇을 모두 안다는 것일까?

 

싸구려 연민에 의탁하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또 다른 약자를 폄훼하고 비난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익명성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성 소수자와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그릇된 호기심이라는 편협한 인식의 괴물에 대해서 오늘, 우리네의 일상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게 한다.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언어의 향연이다. 소설의 제재(題材)는 널리 잘 알려진 소돔의 멸망과 롯과 그 가족의 구원에 관한 일화이다. 작품은 신의 인간 구원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교훈과는 무관하다. 단지 일화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인용될 뿐, 즉 언어가 의미하는 실체를 규명하는 탐사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의지와 욕망의 본체를 사유하는 작업일 것이다.

 

소설의 단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도 이 작품이 천착(穿鑿)하고 있는 언어 해석의 집요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돔에 온 두 나그네는 자신의 집에 묵을 것을 제안하는 롯의 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만 마침내 그의 성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이들 이방인에 대해 거친 부정의 의사를 보인다. 소돔의 집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외친다. “오늘밤 너의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데리고 나오너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재미를 좀 봐야겠다.”

 

여기서 소설은 개인은 없고 무리만 있으며”, “다만 외지인을 욕보이려는 비이성적 열기로 가득 차 있음을 해독해낸다. 그리곤 왜 하려는 지에 대한 아무 말도 없으므로 집단적으로, 관성에 따라, 오랫동안 되풀이된 행동들이기에 동기와 타당성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것은 의식화된 신념이며, 종종 인간의 비정상적인 행동들에 동기를 제공하는 신념체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국 이들은 의식 없는, 반성을 모르는 순수한 몸뚱이, 순수한 욕망 기계라는 것이다. 언뜻 태극기를 뒤흔들며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심화하는 집단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풀어내는 인문학적 성찰은 지성의 만찬, 허겁지겁 맛보기에 급급할 만큼 맛나다.

 

두 나그네는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데, “우리는 이곳을 멸하려고 왔습니다. ...(중략)... 그대의 식구가 여기에 더 있습니까? 그들을 다 성 밖 산으로 데리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롯은 꾸물거리며 저기 작은 성으로 가면 제가 안전할 것입니다.”라며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갈 것에 저항한다. 도시가 주는 즐거움에 길들여진 자, 20년을 살았어도 그를 완전한 소돔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차별과 악덕과 문란함의 그늘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도시의 풍요로움과 화려함, 도시가 내뿜는 매혹을 버릴 수 없었음을 읽어낸다. ‘흡수되어 있는 자, 악취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자에게 냄새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은 자에게는 위협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농담으로 들릴 뿐이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우리네를 침식시키고 있는 욕망의 얼굴, 균형을 잃어 일그러진 우리네의 모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로만 보이는 그들의 부패한 욕망과 몽매성이 맴돈다.

 


한강의 작별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전에는 난처하다의 설명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처신하기 곤란한 지경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 인간의 몸이 눈이 뭉쳐진 형체로 바뀌어 있으니 수긍할 수 있는 상황인식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 단지 처신하기 곤란하기만 한 것인가? 그녀의 심장부근은 녹아 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옆구리는 부서져 한쪽이 기울기 시작했는데도?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인 아이와의 포옹에도, 눈을 감아도 절대 해치지 않을 연인의 입맞춤에 녹아내리는 것임에도? 그래서 이 연약한 표현이 가슴을 울려댄다. 절대적 소멸의 지경에 임박했음에도 난처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녀, 아니 이 세계의 많은 존재자들이 결국 할 수 있는 자기표현이란 것이 이처럼 취약하다는 것이 너무 아프다. 아픔을 전달하려는 언어의 궁핍성이 더욱 인간 존재를 억압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삶이라는 곤궁함을 버텨내야 하는 여자, 그녀의 시선을 채웠던 것, 그녀를 학습시켜온 세상은 가해학생 부모들로부터의 합의금으로 대체되었던 오빠의 죽음, 극소수의 정규직과 대다수의 인턴으로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그녀 직장 사장이 마치 인간을 생명 없는 사물로 인식하는 물질화, 도구화된 무엇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사물화는 오늘 더욱 급진적인 속도로 치닫고 있다.

 

눈사람이 된 여자는 묻는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는가?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수상작 심사평은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소설의 서사적 육체를 통해서 아름답게 재현한 작품이라고 쓰고 있다. ‘소설의 서사적 육체눈사람이 된 인간인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어인 존재와 소멸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말하는 사이’, 혹은 심사평에서의 경계는 진정 어디일까? 과연 미분화한다고 존재와 소멸이 분별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 눈과 입술이 녹으면...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다.”

우리가 사물화되는 순간 우리는 그저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그 어느 곳에도 의탁할 수 없는, 이미 의지의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지금 세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은 눈사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집요하게 요구되는 수단화되고 물질적 대상화에 흡수되어야 그나마 존재의 짧은 형태를 지속할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결국 제아무리 아름답게 그려질지라도 연약하고 취약하며 어쩔 수 없는 난처함만이 남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우화적 아름다움이란 그저 허구이고 환상일 뿐이지 않은가?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그 절대적 신뢰를 사랑이라 말하는 여자는 오히려 타자성을 상실한, 이 세계의 존재들이 거니는 그 회색지대의 곤경에서 회복되어야 할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냥 끝이다.”는 결코 미학적 의도가 아닐 것이다.

 

정이현의 언니는 대학 중어중문학과 조교이자 대학원생이었던 인회라는 여성에 대한 영선의 기억 술회다. 다정다감하고 후배들에 대한 배려와 감사를 잊지 않던 선배언니의 제안으로 담당 교수가 던져놓은 중국어교재를 함께 번역 정리하게 된다. 인회 언니는 진지하고 엄숙하게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는 사람이다. 그녀의 열정과 빼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책은 교수에 완성되어 전달된다.

 

영선이 2학년이 되어 학과 교재로 단체 구입된 책은 인회언니와 함께했던 바로 그것이지만, 저자의 감사의 글은 물론 책 어디에도 구인회라는 언니의 이름은 없다. 더구나 언니는 담당 교수로부터 학위논문이 거절되는 것은 물론 여타 교수로부터의 논문심사조차 배제되기에 이르고 학교로부터 내쳐지기까지 한다. 전문대를 나온 독학사 출신이라는 딱지, 독학사 따위가 언감생심 석사학위는, 학력 세탁이구만, 사라지지 않는 연고주의와 구별짓기 의식의 천박성이 아마 가장 극심한 곳 중의 하나가 대학집단 일 것이다. 정말 하찮고 의미를 부여하기조차 역겨운 것에 집착하는 사회. 일인 시위를 하는 인회의 손을 잡는 영선의 따뜻한 온기가 있어 기억하게 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앞서 미루었던 단편,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의 소감으로 7인의 작품선집에 대한 독서 후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60,70년대의 소위 체제 종속적이며 권력 지향적 인간들이 극성을 부리던 개발시대의 한국사회와 한국인을 오사카 만국박람회 안내원으로 참가했던 한 여대생의 시선을 통해 조롱하고 폄훼하며 자조하는 비판적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선에서 나는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기술과 비판만 경쟁하는 자기상실의 바짝 메마른 지식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떤 방관자적이며 일방통행적 시선 같은것, 그리고 그 시선을 관리하는 권력 지향성까지, 모두(冒頭)에서 말했던 타자성 없음의 서걱거림, 그 불편함의 실체가 이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출처: 문학과지성사 소설보다-,여름’ P162)에서 작가가 말했던 글을 찾아보았다즉각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란 사실 대부분 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있는 반응에 불과하다.” 라는 구절이다. , ‘감정이란 사회체제에 종속 지배되어 있으니 비판적 사유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마땅한 것이므로 이성적 시선만으로 족하다는 믿음일 것이다. 아마 이 감정의 배제가 내겐 타자성, 접촉이라는 시원적 교감의 상실로 여겨졌는지 모르겠다. 감정을 잃어버린 지식이 타자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세계를 읽는 진정 다채로운 시선들을 접할 수 있었던 맛스런 이 작품선집의 즐거운 기억을 위해 천하고 서툰 소회를 서둘러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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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을 읽다 - 빅데이터로 본 우리 마음의 궤적
배영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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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들어가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빅데이터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마음과 사회변화를 읽으려는 노력이다.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개개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선호하고, 공적 담론이나 여론의 향방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트위터 블로그등 SNS, 언론기사를 통해 의미를 추출해 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소개되고 있는 특정 현상을 상징하는 언어와 빈도높게 출현하는 연관어들 전반에 대한 소감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파편화와 개인화가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상실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으며, 문제를 외부에서 찾으려하는 우리네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떠나지 않는다.

 

소개되고 있는 대표적인 주제어는 혐오갑질’, ‘비혼’, ‘불안’, ‘혼밥과 같은 어휘들일 것이다. 이들 언어들은 대개 문제의 원인을 타자, 외부를 가리키고 있다.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어, ‘아닌 쪽에 손가락질 하며 폄훼하고 비난하며 미움과 꺼림, 증오, 분노의 감정을 쏟아낸다.

 

2006년에서 2016년까지 10년간 한 일간지에 혐오관련 기사가 1639건이었다고 한다. 06~11년에는 주로 소각장, 납골당과 같은 혐오시설과 관련하여 등장하던 단어가 11~16년에는 소수자, 개똥녀,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장애인과 같은 사람 혐오의 감정어로 변화했다고 한다. 혐오란 즐거움, 기쁨, 슬픔, 아픔과 같이 나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타자화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타자에 대한 부정적 대상화가 급증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갑질기사가 2013년부터 우리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데, 이러한 행위가 새삼스럽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평등성과 정의감 성숙, SNS와 같은 매체의 다양성 증가가 수면아래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타자성에 묘한 충돌이 엿보인다. 약자, 소수자인 타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과 타자의 물질화, 대상화라는 감정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부터 백화점 모녀의 주차관리원(경비원) 무릎 꿇린 사건, 공관병 부당노동 강요사건 등 한동안 미디어의 중심을 차지하던 갑질 사건들에서 우리 모두는 공모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게 된다. 더구나 핵심 연관어가 부인’ (장성부인, 회장 부인, 국회의원 부인...)이라는 점이나, 피해자가 운전기사, 경비원, 가맹점원(편의점 등)이라는 것도 오늘 우리네의 가치관을 점령하고 있는 의식을 반추해볼 대목이다.

 

    

 

 

비혼은 우리네 사회 전반의 미래를 우울하게 하는 언어다. ‘미혼이 아니고 비혼이란다. 자발적 결혼 포기, 혹은 지향하는 삶의 기준이 변화했음을 알리는 신조어다. 빈도가 높은 주요 연관어가 여성인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행복, 반려동물, 저출산이 뒤를 잇는 언어인 것은 곤혹감을 느끼게 한다. 2014년에서 2017년 사이 산부인과는 3.7% 줄고, 동물병원은 13.8%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10년 만에 년간 혼인건수는 33만 건에서 28만 건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우리의 사회 구조적 - 경제적 여건, 사회적 진출, 임신과 양육의 불안한 환경 등과 같은 - 강압이 작동한다.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시하겠다는 여성의 변화된 가치관이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앞서 타자와 함께하는 그 정서적 교환의 고귀한 가치를 언젠가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되는 것은 왜일까? 인간과의 접촉을 반려동물로 대체하는 우리들과 우리사회에 대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관계에 대한 부담과 그 피로를 크게 느끼고 있다. 어쩌면 타자를 대상화는 학습에 훈련된 우리들이기에 타자에 대한 저항이 더욱 커진 것은 아닐까? 밟고 서야할 대상,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 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상으로만 가르쳐온 기성세대들, 기득권자들이 종용한 결과가 이토록 피폐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듦을 결정하는 것은 지적 능력이나 경제적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관계란 바로 상실해가는 타자성(otherness)의 증식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밥도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의 언어로 보인다. 나홀로족, 혹은 자발적 아웃사이더(아싸)로 불리는 이 조어도 관계의 피로에 연유하는 것일 게다. SNS상에서도 금요일과 토요일, 즉 사회생활의 피로감에서 벗어나는 주말에 빈도 높게 등장한다고 한다. 인간관계, 타자와의 관계가 이토록 고통스런 사회라는 것은 그것이 과연 인간 개인의 내재적 문제인지, 사회적, 외부적 문제인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만 같다. 유아시절부터 습관화시키는 타자에 대한 이해의 바로잡음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정감과 배려의 대상으로서 말이다.

 

책이 소개하는 주제어가 물론 이들만은 아니다. ‘적폐에서 출산’, ‘추석과 설’, ‘가짜뉴스’, ‘더위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사회의 일상적 모습을 담고 있는 무수한 단어들이 열거, 추적되고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로 활용된 SNS상의 언어, 정보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요구하는 온라인상의 정보 확산은 시선을 끈다. 그 첫 예는 더위와 관련하여 전기요금 누진제부과에 대한 문제제기와 제도변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인데, 더위가 언급되고 관련 트위터 게시물이 증가한다고 한다. 그리곤 관련 기사량이 증가하고 누진제 관련 언론 기사가 등장하고, 트위터에 리트윗되면 정보 공유가 확산되어 사회적 이슈가 생성되기 시작하며, 이어 근거가 되는 사회적 인물이나 사건을 발판으로 여론 형성의 단계와 공감 채널이 증가한다. 이로인한 학습효과증대로 인해 제도변화 요구가 시작된다고 한다. SNS의 긍정적 정보 확산의 예이다.

 

반면에 이처럼 전파와 확산이 빠르고 쉽다는 SNS의 특성이 악용되는 부정적 파급도 있다. 가짜뉴스가 그것인데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기사 형태의 거짓, 왜곡 정보의 생산, 유포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개인과 집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동조현상이랄 수 있는 타인의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려는 사회적 폭포효과,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더욱 편향된 정보를 심화시켜 자신들만의 기존 신념을 강화시켜 사회갈등을 극단화시킨다는 집단극화현상이 있다. 다수의 무비판적 공유와 소비는 사회적 건강성을 심각하게 파괴한다.

 

빅데이터를 통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현상을 성찰한 이 책이 오늘 우리네의 지금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자각, 숙고하며 변화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우리네의 사유와 행위의 시간은 어디쯤에 있을까라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데 맞춤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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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달아오른 보드라운 피부에
닿지도 않고서 사람의 도리를 설명하는 당신 쓸쓸하지 않나요?”

 

 

 

감각 표상을 통해서
문학 텍스트를 재검토하다.

 

감각(촉각, 시각, 청각, 후각)이 문학과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사회권력(제도)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책,『감각의 근대 - 소리, 신체, 표상』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하기와라 사쿠타로, 미시마 유키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이르는 일본 근대문학 작품을 통해 서양에서 이식되기 시작했던 감각의 통제와 균질화들을 통찰한다. 

 

오늘, 말(언어)의 협소한 의미로 점점 소통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되기만 한다.  구체적이며 체험적인 구심적 감각인 촉각(접촉)이 아닌 고작 시각적, 청각적인 원심적 감각에 전념케하여 사적인 신체조차 조작되고 통제관리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비교문학의 차원에서 이 책은 우리의 근대문학은 물론 작금의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그 풍성한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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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파시즘 - 민주주의적 폭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버트럼 그로스 지음, 김승진 옮김 / 현암사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자유의 모양새를 유지하는 복종만큼 완벽한 복종은 없다.

의지력 자체를 사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내 젊은 대학시절은 꽤나 우울한 세상이었다. 18년에 걸친 독재자의 죽음이 있었고, 곧 이어 또 다른 군인에 의한 쿠데타로 독재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였으니, 매양 거리에 나서 백골단이라 불리는 폭력 경찰진압대의 곤봉에 두들겨 맞으며, 그들이 쏘아대는 최루가스에 시달리는 나날이었으니 말이다. 군부 파쇼정권과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론 개발가들인 소위 지식엘리트라 자처하는 어용(御用)집단의 파렴치는 민주와 자유의 파괴에 저항하는 민중을 잠재우기 위한 억압과 압제의 폭력을 그칠 줄 모르고 행사하던 극악한 시절이었다. 이런 내게 파시즘은 잔악한 폭력과 동의어로 새겨져 있다.

 

역사의 시간은 흘러 민주화된 정권이 들어섰지만 파쇼정권에 기생하거나 득세했던 기득권 세력들은 여전히 권력을 잃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부의 축적과 권력의 항상적 유지를 위해 민중의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침해는 물론 부의 착취에 이르기까지 교활함과 21세기의 세련된 기술들과 같은 지적 수단을 동원하여 거침없는 행보를 한다. 그리고 오늘, 전 지구적 차원의 자본주의는 놀라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첨예하게 양극화된 부의 최상층부에 집중되어있는 거대하게 축적된 재화의 힘을 통해 예전의 거칠고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보다 많이, 영구히 축적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을 사용할 줄 안다.

 

1. 친절한 파시즘이란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가히 예술적 경지에 이른 기득권 세력들의 전체주의화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민중의 깨어난 시선을 촉구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잠식되고 있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협소화, 나아가 사회적 소외와 노예화에 이르는 끔찍한 세상을 마주하지 않기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외치는 책이기도 하다.

1980년에 출간된 전체주의화되고 있는 현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과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위대한 저작이 이제야 국역되어 소개된 것은 많은 아쉬움을 일깨운다.

 

이 안타까움은 오직 탐욕스럽게 개인의 재화 축적과 권력의 향유에만 몰두했던 10년 남짓의 사회적 퇴행기간에 대한 박탈감 때문이다.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 모양새를 하고 기득권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보상과 인센티브, 위계의 상승과 같은 자아 부풀리기를 통해 조용히 스며들어 예속과 잃어가는 자유를 인식하지 못하는 압제 사회로의 점진적인 이전을 추진했던 거대기업-정치권력 집단의 친절한 가면 뒤의 민낯을 때늦게 보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친절한 파시즘이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위장된 채 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어 복속시키는 혹독한 부-권력의 체제이다.

 

기득권의 항구화에 도전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불온한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를 빨갱이’, 혹은 종북세력’, ‘좌파라는 상징어를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적대감을 표현한다. 사회의 모든 정치경제적 의사 결정은 최상층의 울트라 리치(최고의 부-권력 계층)가 한다. 그리고 이들을 떠받치며 상층부에 머물려면 누가 비용을 댈지를 잘 알아 모시고, 울트라 리치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실현시키는 실용적, 실질적, 실증적 면에 통달한 소위 지식엘리트에 진입하여야 한다. ‘울트라 리치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서자유와 보상을 누릴 수 있다. -권력의 최상층과 상층의 기득권은 이렇게 구성된다.

 

그런데 소수의 기득권 상층부가 항구화하기 위해서는 중하층의 기득권 세력을 이용해 절대 다수인 민중을 통제 관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관리자급 관료집단, 고급장교급 군인집단, 중견, 대기업의 임원급 간부....등등 중하급 기득권 집단에 상층부로의 위계이동이라는 작은 통로와 울트라 리치의 이익실현 이바지에 대한 보상과 인센티브로 세력을 구축한다. 여기에 소속되지 못한 뜨내기들조차 자신들이 기득권 계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태극기를 흔들며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부-권력의 상층부에 맹목적인 충성을 불태운다. 획일화되고 극도로 편협한 사고로 우민화된 이 계층들은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하급 전위대원들의 모습이 중첩된다.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자인 체하지만 실상은 법치의 원칙을 뒤흔들어 태극기를 모욕한다.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는 친절한 파시스트의 하수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2. 세련된 오늘의 파시스트 - 구조적 폭력의 비가시성

 

-권력의 최고계층은 기득권 세력의 이 같은 유지와 병행하여 다수의 민중에게 역시 당근을 던진다. 각양각종의 복지자금, 후원, 자원봉사기금으로 빈곤을 유지할 정도만큼의 선심을 쓴다. 이제 멍청한 보수 골통들을 제외하고 세련되고 지적인 보수 인물들은 이러한 복지정책이 최상층의 기득권, 즉 자신들에게 이익이라는 것을 안다. 참여정부의 뒤를 이어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 기득권 세력의 정점에 있던 이명박 정권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종합편성채널이라는 TV방송사를 대기업들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울트라 리치의 이익을 더욱 제고하고, 최상층 기득권 세력인 자신들의 정당화를 대변할 창구를 전혀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고 획득하는 최고의 수단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매체는 민중에게 새로운 예속의 질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슬며시 습관화시키는 기막힌 도구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들은 음식의 질펀한 관능적 세계를 펼치고, 드라마의 절반이상은 폭력적인 세계의 모습과 부의 권력화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을 은연중에 종용한다. 컬트와 광기, 노골성과 적나라함에 열광하는 야만의 세계를 판타지화한다.

 

소비자 광고는 끊임없는 계획적 구식화를 통한 신제품 소비를 북돋운다. “충족되는 필요가 소비자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축적을 추구하는 울트라 리치의 필요임을 소비자 민중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가치관, 신념, 태도에 영향을 미쳐 새로운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낙후된 구시대적 견해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부풀려진 자아와 오를 수 있으리라는 지위의 추구에 현혹되어 기득권에 충성한다. 모두에 인용한 장 자크 루소의 말이 입증되는 현실이다.

 

아마 이렇듯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비가시적이기에, 버트럼 그로스는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2부인 친절한 파시즘이라는 유령은 그래서 독자인 우리들에게 11개의 장()에 걸쳐 고전적인 파시즘의 거친 폭력성을 띠지 않으며 서서히 민중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해가며 최상의 기득권 세력인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확장하는 오늘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현상들과 유형들을 적시하고 있다.

 

민주적 장치들을 겉 장식으로 하며 세련되게 민주주의를 훼손하는지, 나아가 반기득권적 대통령을 무력화시키는 거대기업들의 연대를 통한 국가경제의 농락은 물론 예방적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득권 세력들의 행태를 생생하게 볼 수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저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논파한 눈웃음 지으며 뱉어내는 정중함과 자선의 이면에 축적된 구조적 폭력이라는 비가시적, 근본적 폭력성을 떠올리게 된다.

 

통상 겉으로 드러난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은 비가시적 폭력을 상징적 폭력구조적 폭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상징적 폭력이란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것으로 언어가 의미세계를 대상에 부과하는 형식이며, 구조적 폭력이란 경제, 정치체가 정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파국적 결과이다. 즉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어서 정상을 혼란시킴으로서 두드러지게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과 달리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바로 친절한 파시즘의 본질에 가닿는다.

 

버트럼 그로스가 책에서 인용하는 조지 오웰1984에 등장하는 신어(新語) 정책처럼 대중통제의 방편으로 언어를 훼손시키는 미래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을 빗대어 오늘날의 신화, 전문용어, 직설화법이라는 삼중언어의 현상을 통찰해 내는 것은 지젝의 상징적 폭력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바벨탑을 계속 세워 바벨탑 사이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득권의 효율적인 전략이다. 이렇게 대다수의 반기득권 집단인 민중들은 자신들이 획일화된 전체주의 세계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기득권의 세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무기력과 불가능성에 굴복하여 그 제한된 범주, 즉 기득권이 세워놓은 질서에 열중하는 것이 곧 성취요 성공이라 맹신한다.

 

3. , 우리, 민중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 모든 기득권적 질서라는 부-권력 네트워크의 부당성과 예견되는 불합리와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공고하게 이루어진 이들의 커넥션을 끊어내는 것은 그 복잡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불가능에 가깝게 보이기만 한다. 결국 민주주의의 얼굴을 한 기득계층의 점진적인 과두 권력 사회의 유령들을 파괴하고 민중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기 위한 절대적이고 기막힌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무력하게 다가올 역사적 미래에 순응하며 제 살 길을 찾는 것, 기득권적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안달하며, ‘올더스 헉슬리가 예견했던 멋진 신세계의 자유와 행복이 교환된 전체주의 계급사회, 그 디스토피아로의 발걸음만이 가능한 것일까? 최상층의 기득권세력들의 의사결정, 다시말해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담론들에 무관심한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일까?

 

책의 3, ‘진정한 민주주의는 유령, 친절한 파시즘이라는 구조적, 상징적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시민적 자세와 태도, 인식에 대한 제언을 담고 있다. 결정적인 방법론이란 없다. 다만 우리는 기득권에 훼손되고 휘둘리지 않는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친절한 파시즘의 냄새가 우리 후각을 자극하고, 이미 파시즘이 도래했다고 외치는 것부터가 시작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문학작품에는 이처럼 거대권력 네트워크의 부정과 불의를 민중에게 알리는 호루라기 부는 소설이 있다. 소설가 공지영도가니에서 그리곤 근작인 해리에서 친절한 파시즘이 뿜어내는 악취,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파괴하는 기득권 네트워크를 향해 지속적으로 경고음을 울린다. 그저 한 사람부터 깨어나기 시작하면 된다. 반지성주의가 넘쳐난다. 무관심과 무지가 찬양되는 대중매체의 불온성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익숙해지고 자신들의 자유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미지근한 물이 든 비이커에서 유영하는 개구리가 점진적으로 달구어지는 열을 인지했을 때는 너무 늦은 것처럼.

 

바로 지금 부-권력의 끈끈한 커넥션을 지닌 어떤 언론 매체를 보더라도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기사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의로 선택한 한 신문의 제목 기사들을 추려보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경제정책인 협력 이익 공유제에 대해서는 기업판 최저임금제 우려”, 미국의 일개 컨설팅업체의 국가경쟁력 예견표를 인용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의 모든 것인 양 한국만 국가전략 안 보인다”, 청년 일자리 예산에 대해서는 생색내기 공염불”, 현 경제정책에는 유연한 노동시장 정책이 없다고 비난하면서(기업 해고자유를 말함) “40년 전 유럽좌파의 실패를 뒤따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반기득권 정부 정책기조를 비난하고 있다. 하나의 신문 전체가 이처럼 거대 -권력의 기득권 이익에 봉사하는 기사로 도배되어있다. 이것이 우리사회에서의 친절한 파시즘의 얼굴이다.

 

아마 이 역작은 오늘, 우리 대중들에게 정작 깨어나야 할 지성과 인식이 무엇인지 깨우쳐 줄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미래 자손들이 마음껏 그네들의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며 그 어떤 불의한 세상의 폭력에 방치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각성하는 참 기회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마 407반기득권적 대통령 무력화 시키는 법에 이르면 1980년에 출간된 이 저술이 놀라우리만큼 2018년 한국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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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인형의 집에서

 

 

결혼과 성 역할을 둘러싼 허위와 기만을 폭로함으로써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상을 위해 다시금 소환되었다.

    

 

오는 11월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3막으로 구성된 인형의 집이 연극무대에 오른다.

희곡의 줄거리는 널리 잘 알려져 있듯이 남편에 종속된 존재로만 여겨졌던 가정주부인 노라

한 인간으로서 홀로 서기위해 집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페미니즘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민음사에서 예술의 전당 에디션으로 출간 예정된

인형의 집21세기 지금 입센의 메시지를 환기하는 의미 있는 기회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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