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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 관념 속 역사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김지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평점 :
우리의 생각 속에 ‘내전(內戰;civil war)'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 때 그것을 내전이라 부를까? 바로 그 ’어떤 의미‘에 대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가능한 것일까? 유사한 현상에 붙이는 단어로 소요, 봉기, 폭동, 반란, 민란, 혁명, 내란 등등이 있다. 내전과 이 유사한 명명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구별하는 명확한 의미의 경계나 정의가 과연 존재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법적, 사회학적 규명이 이 책의 의의(意義)가 될 것 이다.
어떤 개념어를 두고 한 영토 경계 내의 통치 권력을 차지한 소수 권력집단과 다수의 시민집단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해당 단어를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뜻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투어 온 것이 역사의 한 궤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근한 예(例)가 검찰독재권력의 수장인 자가 뱉어내는 정의(justice)라는 개념어에서 드러난다. 정의라는 말에 대해 대다수 시민들은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간과되곤 하는 평등적 정의로써 공존과 공생, 공유의 윤리를 확산, 정립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통치권력을 장악한 이 불의한 권력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어를 정의한다. 즉 ‘기득권의 항구 유지를 위한 비례적 정의를 통한 격차의 확보’가 곧 正意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백하게 보였던 하나의 개념어 定意에서조차 그 뜻은 극단적으로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결국 의미화 권력을 다투고 벌어지는 개념어 전쟁이 인간의 역사에서는 그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책 ‘내전(civil war)'은 이러한 첨예한 의미화의 역사적 현장을 탐사하며 21세기 오늘, 왜 이 단어의 표준적 정의의 마련이 중대한 것인가를 논의한다.
‘내전’이라 번역되는 'Civil War'는 전쟁(戰爭)이라는 적대적 행위와 동일한 정체의 경계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의~ 또는 동료의~’라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단어가 결합한 모순어법의 기이한 단어다. 어제의 가족, 친지, 이웃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 그악스런 행위에 내전이라 명명한 기원을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이에 앞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전역에 퍼진 일종의 질병”으로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스타시스(stasis)’는 친족 및 동족 간 분쟁으로서 내분이었음에도, "공통의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통일체인 중앙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고 “시민권 관념이 부재”했으므로 시민간의 전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점에 기초한다. 이 고대사회의 내전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후 근대적 의미의 내전에 이르는 기본 정의로서 ‘시민권’이라는 동일 정체성의 경계 내 주권적 주체간의 다툼에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그치지 않는 동족간의 분란에 대해 합당한 이름을 붙이고자 했는데, 그것은 “단일 정치 공동체 경계 내에서 벌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당사자가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하며, 한 쪽은 공동체를 관리할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닌 전쟁으로서 이것을 '벨룸 키빌레(bellum civile)', 즉 'civil war(내전)'라 명명했다. 로마가 창안한 이 모순으로 가득한 재앙(災殃)적 반복을 ‘문명화의 근본적 구조’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유럽인들은 내전을 문명권의 특징적 표지로 이해하여 문명화된다는 것은 곧 내전을 치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로마식 내전 개념은 17~8세기 유럽 역사 내 많은 다툼의 토대로 사용되었는데, 이에따른 논의의 활성화로 내전은 역사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제에서 경쟁적 논쟁의 개념이 되었다. 내전은 되풀이되고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역사학적 이해로부터 엄밀한 정의의 틀 내에 한정하여 법적 절차에 따라 규제하려는 법학의 노력,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회학의 연구 등 그 개념적 논의는 확장 되었다.
오늘 한국 정치사회의 실체적 측면에서 주목케 하는 역사적 장면이 있는데, 영국 시민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역사학파들간의 논란이 있는 1649년 영국 국왕 찰스 1세와 시민의회가 각자 주권적 권위를 주장하며 벌인, 소위 코먼웰스(Common wealth, 국가) 내부에서 시민에 맞선 전쟁이 주는 정의의 문제이다. 의회는 ‘중대 반역죄’를 내용으로 국왕을 기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현 국가가 누리는 자유를 완전히 전복시키려 했고, (...) 전제적이고 압제적 정부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던” 점과, “이러한 계획을 관철시키려고 동원했던 모든 악덕 이외에도 이 모든 일을 불과 검을 이용해 행했으며, 의회와 국가에 맞서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도록”해, “나라가 계속 병들어가며, 국고가 고갈되고, 무역이 쇠퇴하는 한편...“등 그 전횡의 내용이 계속된다.
이 사건은 누가 반란자인가 하는 문제에서 주권의 권위를 시민 의회가 지니고 있음의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찰스 1세가 벌인 전쟁을 내란이라 정의함으로써, 국왕이 자신의 신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것은 주권적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즉 반란에 직면한 쪽이 의회였다는 점에서 1649년 영국 의회가 합법적이고 정의상 주권적 권력의 대표였음을 선언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민 주권의 대의기관으로서 선출된 입법기관인 국회를 능멸하는 행위는 곧 반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중대한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민이 세우고 그 외의 그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권위를 파괴하며, 인민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여 실제로 전쟁 상태를 야기하는 것”은 반란이 된다. 즉 통치자의 공권력 불법 사용은 곧 인민의 저항권을 정당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헌법학자들이 대통령의 통수권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겠으나 현재 벌어지는 한국정치의 난맥상은 현 통치자에 대한 반란죄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세심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전쟁상태를 야기한다는 의미는 무력 화기를 동원한 물질적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 자체가 언제나 덜 치명적인 수단으로 치르는 내전의 형태”이기에 조금 수사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자살에 이르게 하는 탐욕과 공격적 정치적 적대 행위 일반이 내전의 표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내전’의 의미화를 둘러싼 정의의 변화를 열거한다. 158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1861년 미국(남북전쟁)내전, 1991년 유고슬라비아 분리 독립 운동 등 수많은 여러 형태의 전쟁 성격을 규명하고, 이러한 전쟁들에 내전이라는 의미의 명명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사실 내전을 엄밀히 정의하려는 시도는 ‘시민의(civil)’와 ‘전쟁(war)’이라는 두 단어 자체에 부과된 개별 속성만으로도 논쟁적 개념이듯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미(美)육군 야전교범에 정해놓은 내전은 “동일 국가 내 파벌 간 벌어진 전쟁이며, 교전 당사자들은 영토를 점유하고 있어야 하며, 대외적 인정을 받은 제 기능을 하는 정부가 존재해야하고, 주요 군사작전에 동원되는 식별 가능한 정규군대를 보유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법은 오늘날 비대칭전을 벌이는 무수한 분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특수하고 아주 드문 경우의 내전(미국 남북전쟁 같은)에만 들어맞는다.
인류 역사 내내 정의해온 당대 지성들의 내전 정의들을 살펴보다보면 한결같이 시대적, 당파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확히 어떤 특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인류사회는 합의된 바 없으며, 특정 분쟁을 어떤 틀에 맞춰 일률적으로 적용(사회적, 정치적, 법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다. 이처럼 정치적 해석에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명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어떤 원칙적 정의와 본질적 요소의 규명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환경에 도달해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전 자체가 점차 형식상 국경을 초월해서 벌어질 뿐 아니라, 영향 측면에서도 전 지구적이기 때문이다. 소위 ‘국제적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세계 전쟁은 마치 혁명에 따른 결과이자 전 지구에 걸쳐서 폭위를 떨치는 일종의 내전처럼 보이는데...”라고 썼다. 즉 오늘날의 전쟁은 모두 ‘지구적 내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국가적 테러리즘의 발흥, 준(準)전쟁 수준의 폭력의 일상화, 비정규전의 급증, 대리전의 양상 등 좀 더 유연한 전쟁 개념의 고안과 같은 상황의 변화로 내전 범위의 한계가 풀려 그 범위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영토 경계 내 시민간의 전쟁이라는 정치적 정의의 함의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조치를 촉발할 수 있는 법적 함의가 내포되었기에 근본속성의 설정은 더욱 중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제연합과 산하전문기구에서 집행하는 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개입을 야기하는 국제전, 지구적 내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쟁에 내전이라는 딱지를 부착할지의 여부에 따라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부되기에 정확한 정의의 제시에 대한 압박이 증대하고 있다.
내전이라는 명칭 자체는 고대 로마의 명명 이래 그 명칭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통치권의 불의와 부패가 지속적으로 자행될 때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의 봉기를 단순히 폭동이나 소요, 내란이라는 범죄적 행위로 일축하여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내전이라는 정당한 의미를 은폐하게 된다. 반면 진압되거나 맹렬히 비난받았을 폭력의 유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왜곡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내전으로 불릴 경우 이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을 국제법은 보호할 의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명명된다면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외부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고 분명 모호하고 정치적 영향이 섞여들기는 하겠지만 올바른, 정당한 세력을 위해 지원토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내전은 이처럼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이지만 인도주의적 규제를 추동하는 자극으로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언명함으로써 하나의 중대한 개념주체어로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내전을 규정하는 모든 정의는 필연적으로 상황적 맥락을 반영하는 서로 대립적인 단어다. 결국 문제는 어디서부터 대립되는 이해가 발생했는지, 각각의 이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그 이해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정체를 가진 영토 경계내의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무력 충돌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시공간이 확장되어 지구화 내전이라 불리고, 언제나 덜 치명적 수단으로 치러지는 정치 자체도 내전의 한 형태로 인식되는 세계가 되어있다.
결국 내전의 복잡 미묘한 정의에 집착하기보다 내전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이 용어가 제시하는 무수한 의미들을 어떻게 줄이고 가다듬어 다루기 용이한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내전은 인류가 모면하기 어려운 유산(流産)임에 분명하다. 경쟁심, 탐욕, 공격성, “자신의 창자에 스스로 검을 꽂는” 인류의 운명을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해내는 일을 뜻한다. 때문에 무엇으로 인해 그 대상이 특색을 갖는지 알고 나면 그 대상의 양식(樣式)과 나타나는 연속성과 차이를 인지 할 수 있게 되며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통상 통치권을 지닌 기존 정부는 내전을 늘 반란이나 폭동이라 부르려 하고, 저항행위가 실패할 때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저항에서 승리한 측은 자신들이 벌인 투쟁을 혁명이라 부른다. 혁명가와 반역자는 없다. 다만 동료 시민간의 내전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극렬한 내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주권자인 다수 시민의 정의에 반하는 소수 검찰독재권력의 불의에 맞선.
하나의 개념을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을 써 내려간 이 저술은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동족간의 전쟁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준다. 그 전쟁을 줄이고 사라지게 하기 위한 요인들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분명 사유하고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