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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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라 부르는 장르는 내게 아주 먼 세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비친화적이라는 말이 조금은 더 진실한 말이 될 것 같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에 대해 예술비평의 글들을 통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영상 속 행위자들의 언어와 태도가 함축하는 의미들을 알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분석하려는 내 마음을 걷어내고 싶은 순수에 대한 막연한 동기가 작용한 터일 것이다.

 


이 책과 마주한 첫 작품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속 한 문장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보였는데, 너희에게도 보였구나.”라며, 아이의 순수한 동심에 공감을 표하는 아빠의 그 소중한 존중의 마음을 보았던 까닭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가 깃들지 않은 우주 만물의 공평함과 그 무수한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생태이론가 티모시 모턴의 하이퍼 객체가 떠올려졌다. ‘자연이라는 대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그들과 하등 차이없는 인간이 어울려 상호작용하는 객체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곳으로 이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에는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하여 벼랑위의 포뇨, 하울의 성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데, 극단적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입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저항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 세계를 저자 이서희는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내 각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속으로 유혹해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매혹적 글을 통해 몇몇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과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를 호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 미츠하(三葉)의 이름 때문이었던 듯싶은데, 그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인연과 시간이 이어주는 운명에 얽힌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을 새삼스레 불러일으킨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속 프란체스카의 22년이 흐른 날 사흘간의 사랑을 추억하는 그 깊은 그리움에 더해졌던 영향 이었던 것 같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중에서, 80


소설 속 여인의 사랑의 기억 속 그 날에 라디오에서 은은히 들려오던 음악 고엽(枯葉), Autumn Leaves이 연상되었다. 3년만큼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두 존재의 사랑 이야기와 "어느샌가 사람과 실 사이에 감정이 흐르게 된단다."처럼 객체 지향의 사유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과 인연에 대해 더욱 되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클 것이다. 이 감상글을 마치는대로 이 작품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또한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또한 너의 이름은.과 같이 객체지향의 생태적 공존의 사유 연장에 있다고 여겨졌기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미각과 요리 실력을 갖춘 생쥐 레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리 재능이 늘어나지 않는 인간과의 공영(共榮)의 스토리, 존재의 실존적 존귀함과 자기 한계의 정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는 소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이즈음의 생태이론을 선취한 탁월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인용은 저자의 안목을 가늠케 한다. 이러한 깊은 사유 속에 관계와 용기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프랑스가 자신들의 대표 애니메이션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듯 해 보인다. 어쩌면 이 책을 단순히 동심과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적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 될 수도 있겠다. 오히려 저자가 인용한 작품 속 문장들에 은은히 빛나는 사유들을 음미하고, 애니메이션을 한낱 유치한 아이들의 영상 오락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인어공주의 변형작인 벼랑위의 포뇨처럼 부분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단지 당당하고 막힘없는 태도로만 읽을 수 없는 다소 국수적 색체가 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독자들의 취향과 비판적 성향의 차이에 맡기기로 한다. 정체성과 모험과 용기, 사랑의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들이 맑게 흐르며 글쓴이의 매혹적이고 알찬 해석들이 새로운 가치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책의 표제와 같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 그들과 함께 환상의 세계를 거닐며 꿈꾸다 보면 마주하는 현실 속 삶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용기와 어떤 열정이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음에 품게 된 몇 작품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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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상은 박설호 교수의 두 논문 에른스트 블로흐의 깨달은 희망과 종교, 그리고 유토피아「『희망의 원리, 그 특성과 난제에 힘입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의 그 던적스러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패덕(悖德)을 체감할 때는 그것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뻔뻔스레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을 활보할 때이다. 세상이 순화되어 선함이 득세할 때는 대체로 그것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들이 짐짓 선을 가장하고 위선을 떨며, 세상에 섞여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순리란 것이 있다면 패악질이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 모르고 두려움없이 군림하도록 해서 그것이 이 세계에서 전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존하고 있었음을, 그것이 어떻게 온존하고 있었는지 형태와 거소(居所)와 위장되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저 폐쇄된 소수의 무리가 서로서로 썩어 들어가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지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채 있었기에 그 패악의 실상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나, 드러낼 경우 사적 이익에 혹여라도 손실이 발생할까 저어했기 때문에 수면 위로 그 패덕함이 과시되지 않았던 연유도 있을 것이다. 저열성과 탐욕과 비굴함, 무능력과 무감각, 교활함과 폭력성, 이 모든 것들이 표면화 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그것들이 함부로 휘젓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도덕적 선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검찰독재권력 아래 산자부 차관이 된 5년 전 기조실장이었던 자가 당시 내렸던 자기 결정을 근거 없었다고 버젓이 의회에서 발설하는 장면을 보라. 수면아래 자고 있던 무능력과 비열함, 무책임성과 교활함이 이 악의 시대에 수치도 모른 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것들이 세상을 호도하여 권력을 갖게 되자 가면을 벗어던지고 악덕을 보란 듯이 행사하기 시작함으로써 그것들의 부패성과 폭력성, 탐욕과 공격성, 비열함과 무능함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식별하기 어려웠던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과 그들의 행태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불의한 욕망들이 여과되지 않고 시민의 눈앞에서 시전(施展)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시민대중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확인할 수 없어 그것들이 어느 곳에,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처에서 숨어있던 것들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불과 2년 만이다. 이제 시민들은 이것들의 정체를 알았기에 때려잡는 일이 수월해졌다. 발본색원이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절망이 휩쓸고, 시련과 퇴락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환의 토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법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며, 주권자인 시민을 적대시하고, 주권의 대의 기관인 의회를 무력화하려 하며, ()의 경제를 소수 패덕의 무리를 위한 경제화하여 주머니를 채우는 탐욕을 노골화 하는가 하면, 국고의 고갈과 외교적 고립, 교역의 쇠퇴, 시민경제의 몰살, 복지역량의 말살을 향해 공권력의 사적 악용을 일상화하는 압제적이고 폭력적 무리들의 몰골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퇴행의 시간이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한 걸음 진전하기 위한 역사적 시련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1885-1977)가 말한  성취의 우울(Melancholie des Erfüllens)’, 즉 달성된 목표에서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하는 현실 변화의 촉매제 역할로서의 시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시간을 지속적으로 저것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이것들이 활보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사의 선물이겠거니 하겠다는 말이다.

 

유토피아, 이 세계의 바람직한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는 토마스 모어식 국가주의적 모델과 같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국회에서 선서를 거부하는 자가 나오면 거부하는 자에게 엄중한 범죄적 처벌을 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은 진전을 향한 걸음이 곧 유토피아의 목표다. 유토피아란 저 먼 세상에 없는 것을 향한 공상적인 허무의 시도가 아니다. 국가의 선출된 수반이 사적 탐욕을 위해 국고를 바다에 쓸어 넣으려 할 때, 이를 예산 집행의 한계와 조건 등으로 제약, 통제할 수 있는 법안과 이보다 상위의 헌법의 수정도 실행하는 것이 유토피아적 목표라 할 것이다. 희망은 항상 좌절과 실망을 전제로 한다. 만일 이러한 실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신일 뿐이다. 우린 가능성을 내재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성취한 사회가 아니다. 1989년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안주하기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한국사회의 유토피아는 시대착오적으로 진부해지고 부패하여 추락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고착되지 않고 늘 자기의 부패성을 돌아보며 진부화됨을 돌파하려는 의지이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소시민들은 현세의 목욕탕 속에서 아무런 상념없이 잠을 청한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모두 잠들면 그 사회는 비틀거리고 저 나락으로 떨어진 황폐한 거리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자신과 후손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멸을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꿈 꿀 수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의 환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행복한자는 꿈꾸지 않는다고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꿈꾸는 자는 곧잘 길을 잃기 마련이고, 자유를 의식하는 자는 부자유의 질곡을 느끼기 때문이며, 사랑을 의식하는 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핍된, 존재해야 마땅한 무엇에 대한 의식이 인간과 이 세계 속에 내재한 의향에 대한 정서이다. 오늘 우리들은 깨달은 희망’, 새로운 무엇, 우리와 우리네 사회의 잠재성과 지향성을 향해 저 무도하고 무례하며 무능력한 패거리들에 강력한 징벌을 행함으로써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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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목소리 후마니타스의 문학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김현균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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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 

- 13, 시간이 말하다에서

 

인간 시간의 흐름을 마치 지배권력의 절대 사회가 당연했다는 듯 써진 것들이 역사라고 뻔뻔함을 드러내는 세계에서 포착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뭇 사람들의 지난 시간 속의 삶의 이야기들을 역사의 실재로 재배치하려는 시도는 부인되고 외면되기 일쑤다. 대개 이러한 소외된 이야기들은 인간의 그늘진 측면들로 지배질서와 불화와 충동의 실재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비극적 역사를 서사시적으로 역술한 대작 불의 기억3부작으로 시민대중을 위한 정치와 역사기술의 전범을 보여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독특한 역사서다. (마침 '불의 기억' 3부작을 마무리하는 '거울들'도 재출간 된 모양이다.)

 

이 책은 어떤 연대기적 기술 방식이나 인물, 사건을 중심으로 결말을 향한 연속성을 지닌 서술 방식과 같은 기성의 역사서술 양식을 파괴한다. 저자는 지배 권력에 의해 그저 침묵이 강요되거나 관심 밖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목소리를 잃었던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 이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통해 인간 사회의 병폐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형형색색 333개의 이야기로 짠 한 폭의 우아한 천이되어 휘날린다. 모두가 보고 알아차리도록.

 

다섯 번째 이야기인 발자국은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는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한 쌍의 남녀가 아프리카 대초원을 걸어간다. 그 때 화산이 재를 뿜고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존했다. 손상되지 않고 남겨진 발자국은 이브와 아담이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이브가 걸음을 멈추고 혼자 몇 걸음 걸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후 이브는 함께 걷던 길로 돌아왔다. 이 얘기는 오래된 인류의 흔적으로 의심의 본래적인 표지를 남겼음을 전달하려 한다. 이 의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진실을 위해 결코 의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큰 뇌조이야기에 이르면 마녀와 부엉이가 사는 아스투리아스 너도밤나무 숲의 어둠 속에서 수컷 큰 뇌조와 암컷이 카니발의 흥겨운 춤판을 벌이고 있다 . 이 축제와 짝짓기 춤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이 눈멀고 귀먹는다는 것을 아는사냥꾼들은 큰 뇌조를 쉽사리 잡아들인다. 스펙터클을 이용한 우민화(愚民化) 술책은 지배권력의 오랜 전술이고 지금 한국의 극우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교활하고 천박하지만 꽤 실효성 있는 방법이다. 언제나 많은 대중들이 각성되지 않기 때문임을 너무도 잘 아는 까닭이다. 이처럼 갈레아노는 천천히 우화적 이야기 한 꼭지 한 꼭지를 진전시키며 목소리 없는 자들의 실재적 시간 여행을 가속화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은 20세기 이래 단 한순간도 식은 적이 없다. 이야기 보상에서 과테말라의 한 소년은 너무도 궁핍해서 물건을 훔치고 본드를 흡입하며 헐리우드 스타를 꿈꾼다. 소년은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없는 고국을 떠나 경찰의 삼엄한 눈을 피해 목숨을 건 국경을 넘어선다.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소년은 미() 해병대에 입대하고 이라크에서 전사한다. 2003년 어느 날 누이 엔그라시아는 제복차림의 남자들을 맞는다. 동생이 죽었음을, 전쟁에서 침략군의 첫 전사자가 되었음을. 미국은 소년을 시민으로 만들고 그의 관에 성조기를 두름으로써 군장(軍葬)의 예를 베푼다. 미국이 그에게 약속했던 보상으로서. 국민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과테말라 정권과 탐욕스러운 미국의 책임인가? 누가 이 소년의 삶을 함부로 처리할 권한을 주었을까? 소년은 아군의 포격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실제 사건으로의 역사이다. 책은 이렇게 은폐된 실상을 고발하는 대변(代辯)의 목록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어지는 물의 주인들이야기와 쌍을 이루며 민영화된 기간산업의 악질적 폐해와 문화적 후진성을 고발하는데, 수구 우익집단은 권력을 차지하기만하면 국민의 필수적 삶의 근간이 되는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열을 올린다. 자신들의 주머니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태초에는 개미허리가 가늘지 않았다고 한다. 개미는 몸통이 둥글고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하느님이 세상에 물을 적시는 것을 깜빡해서 개미에게 도움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화가 난 하느님은 손가락으로 개미의 배를 쥐어짰다. 이리하여 7대양과 강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20세기 말 볼리비아에 물 전쟁이 일어났다. 수도사업이 민영화되어 미국 기업 벡텔이 물 공급을 거머쥐자 수도요금을 세 배 인상했다. 공동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볼리비아 우파정권은 민중에게 발포했다. 사망자와 수감자가 속출하고 폭동은 2개월간 계속되었다. 마지막 공세에서 민중은 민영화되었던 물의 권리를 되찾았다. 코차밤바와 라파스의 민영화로 인한 시민폭동은 한국 사회에 뉴스로 전해지지 않는다. 기득권집단인 언론권력은 이 민영화로 배를 불릴 수 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것은 뉴스로 선택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민은 진실의 역사로부터 차단된다. 이것이 역사다.

 

이야기 친척들아메리카를 구원한 것으로 묘사되는(물론 서구 제국주의 관점이다) 어떤 사건(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오백주년 기념으로 행해진 1992년 멕시코 남동부를 방문한 가톨릭 사제와 원주민의 대화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하라고 한다. 원주민들은 말한다.   옥수수를 내버려둬 옥수수 밭이 슬퍼한다고.”, 그리고  불이 잘 타지 않는다고 불을 때려 함부로 다뤘음을.”,  “ 정글 칼을 휘두르며 오솔길을 더럽혔음을”,  “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음을 고해한다. 사제는 모세의 목록에 나오지 않는 이런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1520년 사제 라스카사스는 서구의 신대륙 발견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았다.   ‘끔찍한 착취와 살인의 역사로 규정했다. 그것은 불과 50년 만에 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서인도제도의 인디언을 멸종시킨 인류 최대의 참담한 인종학살이라 정의했다. 역사의 진실을 호도하는 이 기이한 500주년 행사의 후안무치가 인간의 진면목이라면 글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약술하며 책의 감상을 맺어야겠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인 수레와 기계를 움직이는 바퀴를 누가 발명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를 작동시키는 바퀴를 발명한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기원전 115년에 태어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라는 것이다. 바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정치를 이끈 그 크라수스 맞다. 그는 시장의 활력은 재화 및 용역의 수요와 공급의 밀고 당기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순환법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로마에 최초로 회사를 창설했다. 인류 최초의 사설 소방회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불을 지르고 화재를 진압하는 대가로 수입을 올렸다, 사업은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다. 지배권력의 역사는 이를 선구자라 부른다.

 

오늘날 롤 모델이라 부르는 것은 또 어떨까? 학용품 도난과 사고에 대비해 동급생들에게 보험에 들게 하고, 합리적 이율로 급우들에게 돈을 빌려준 열 살 소년을 모범적 기업가요 천재 소년이라 부른다. 정말 개 웃기는 수작들이지 않은가? 스페인 인터넷 포털 서비스 최대 업체인 스타미디어 창설자의 이야기다. 언론이 이 자의 성공담을 집중조명하며 그의 모범을 쫓을 것을 말하는 세상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 말을 독점한 자들의 이 경박함과 치졸함이 역사에 짙은 어둠을 드리운다.

 

여기 이 책의 영혼이라 할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 세계를 직조해낸 이 책, 진실의 역사를 갈음하기로 한다.  생명의 나무는 거꾸로 자란다고 한다. 몸통과 가지는 아래쪽을 향하고 뿌리는 위쪽으로 자란다. 우듬지는 땅으로 가라앉고 뿌리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나무는 열매가 아니라 기원을 제공한다고.  가장 내밀한 것을 땅 속에 감추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그것들을 악천후에 드러냄으로써 맨살의 뿌리가 세상 풍파에 맞서기를.  그것이 바로 삶이라 생명의 나무가 말한다고. 드러나지 않은 작은 목소리들을 무기화(武器化) 함으로써 갈레아노는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목소리로 변환하고자 한다.

 

저자가 몸소 겪었거나 들었으며, 오랜 발품으로 수집한 이야기들이다.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들 이야기를 엮어 인간을,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정의한다. 재미와 예리한 통찰이 버무려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치밀한 미학이 엿보이는 전통적 범주를 파괴한 새로운 역사서이자 정치서이며 문학서라 해도 될 것 같다. 작은 이야기들로 세상의 진실을 엿보게 하는 맛깔스러운 시간의 목소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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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 3부작 완결판 거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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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 관념 속 역사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김지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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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각 속에 내전(內戰;civil war)'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 때 그것을 내전이라 부를까? 바로 그 어떤 의미에 대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가능한 것일까? 유사한 현상에 붙이는 단어로 소요, 봉기, 폭동, 반란, 민란, 혁명, 내란 등등이 있다. 내전과 이 유사한 명명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구별하는 명확한 의미의 경계나 정의가 과연 존재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법적, 사회학적 규명이 이 책의 의의(意義)가 될 것 이다.

 

어떤 개념어를 두고 한 영토 경계 내의 통치 권력을 차지한 소수 권력집단과 다수의 시민집단은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해당 단어를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뜻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투어 온 것이 역사의 한 궤적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근한 예()가 검찰독재권력의 수장인 자가 뱉어내는 정의(justice)라는 개념어에서 드러난다. 정의라는 말에 대해 대다수 시민들은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간과되곤 하는 평등적 정의로써 공존과 공생, 공유의 윤리를 확산, 정립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통치권력을 장악한 이 불의한 권력은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라는 의미에서 이 개념어를 정의한다. 기득권의 항구 유지를 위한 비례적 정의를 통한 격차의 확보가 곧 正意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백하게 보였던 하나의 개념어 定意에서조차 그 뜻은 극단적으로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결국 의미화 권력을 다투고 벌어지는 개념어 전쟁이 인간의 역사에서는 그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책 내전(civil war)'은 이러한 첨예한 의미화의 역사적 현장을 탐사하며 21세기 오늘, 왜 이 단어의 표준적 정의의 마련이 중대한 것인가를 논의한다.

 

내전이라 번역되는 'Civil War'전쟁(戰爭)이라는 적대적 행위와 동일한 정체의 경계 안에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의~ 또는 동료의~’라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단어가 결합한 모순어법의 기이한 단어. 어제의 가족, 친지, 이웃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 그악스런 행위에 내전이라 명명한 기원을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이에 앞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전역에 퍼진 일종의 질병으로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스타시스(stasis)’는 친족 및 동족 간 분쟁으로서 내분이었음에도,  "공통의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통일체인 중앙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 시민권 관념이 부재했으므로 시민간의 전쟁이란 있을 수 없었다는 점에 기초한다. 이 고대사회의 내전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이후 근대적 의미의 내전에 이르는 기본 정의로서 시민권이라는 동일 정체성의 경계 내 주권적 주체간의 다툼에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로마인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그치지 않는 동족간의 분란에 대해 합당한 이름을 붙이고자 했는데, 그것은 단일 정치 공동체 경계 내에서 벌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당사자가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하며, 한 쪽은 공동체를 관리할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닌 전쟁으로서 이것을 '벨룸 키빌레(bellum civile)', 'civil war(내전)'라 명명했다.  로마가 창안한 이 모순으로 가득한 재앙(災殃)적 반복을 문명화의 근본적 구조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유럽인들은 내전을 문명권의 특징적 표지로 이해하여 문명화된다는 것은 곧 내전을 치를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로마식 내전 개념은 17~8세기 유럽 역사 내 많은 다툼의 토대로 사용되었는데, 이에따른 논의의 활성화로 내전은 역사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제에서 경쟁적 논쟁의 개념이 되었다.  내전은 되풀이되고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역사학적 이해로부터 엄밀한 정의의 틀 내에 한정하여 법적 절차에 따라 규제하려는 법학의 노력, 전 지구적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회학의 연구 등 그 개념적 논의는 확장 되었다.

 

오늘 한국 정치사회의 실체적 측면에서 주목케 하는 역사적 장면이 있는데, 영국 시민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역사학파들간의 논란이 있는 1649년 영국 국왕 찰스 1세와 시민의회가 각자 주권적 권위를 주장하며 벌인, 소위 코먼웰스(Common wealth, 국가) 내부에서 시민에 맞선 전쟁이 주는 정의의 문제이다. 의회는 중대 반역죄를 내용으로 국왕을 기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현 국가가 누리는 자유를 완전히 전복시키려 했고, (...) 전제적이고 압제적 정부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던점과, 이러한 계획을 관철시키려고 동원했던 모든 악덕 이외에도 이 모든 일을 불과 검을 이용해 행했으며, 의회와 국가에 맞서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도록, 나라가 계속 병들어가며, 국고가 고갈되고, 무역이 쇠퇴하는 한편...“등 그 전횡의 내용이 계속된다.

 

이 사건은 누가 반란자인가 하는 문제에서 주권의 권위를 시민 의회가 지니고 있음의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찰스 1세가 벌인 전쟁을 내란이라 정의함으로써, 국왕이 자신의 신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것은 주권적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즉 반란에 직면한 쪽이 의회였다는 점에서 1649년 영국 의회가 합법적이고 정의상 주권적 권력의 대표였음을 선언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국민 주권의 대의기관으로서 선출된 입법기관인 국회를 능멸하는 행위는 곧 반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중대한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민이 세우고 그 외의 그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권위를 파괴하며, 인민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여 실제로 전쟁 상태를 야기하는 것은 반란이 된다. 통치자의 공권력 불법 사용은 곧 인민의 저항권을 정당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헌법학자들이 대통령의 통수권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겠으나 현재 벌어지는 한국정치의 난맥상은 현 통치자에 대한 반란죄를 충분히 검토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세심히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전쟁상태를 야기한다는 의미는 무력 화기를 동원한 물질적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 자체가 언제나 덜 치명적인 수단으로 치르는 내전의 형태이기에 조금 수사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자살에 이르게 하는 탐욕과 공격적 정치적 적대 행위 일반이 내전의 표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내전의 의미화를 둘러싼 정의의 변화를 열거한다. 1580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1861년 미국(남북전쟁)내전, 1991년 유고슬라비아 분리 독립 운동 등 수많은 여러 형태의 전쟁 성격을 규명하고, 이러한 전쟁들에 내전이라는 의미의 명명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사실 내전을 엄밀히 정의하려는 시도는 시민의(civil)’전쟁(war)’이라는 두 단어 자체에 부과된 개별 속성만으로도 논쟁적 개념이듯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육군 야전교범에 정해놓은 내전은 동일 국가 내 파벌 간 벌어진 전쟁이며, 교전 당사자들은 영토를 점유하고 있어야 하며, 대외적 인정을 받은 제 기능을 하는 정부가 존재해야하고, 주요 군사작전에 동원되는 식별 가능한 정규군대를 보유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류법은 오늘날 비대칭전을 벌이는 무수한 분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특수하고 아주 드문 경우의 내전(미국 남북전쟁 같은)에만 들어맞는다.

 

인류 역사 내내 정의해온 당대 지성들의 내전 정의들을 살펴보다보면 한결같이 시대적, 당파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확히 어떤 특징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인류사회는 합의된 바 없으며, 특정 분쟁을 어떤 틀에 맞춰 일률적으로 적용(사회적, 정치적, 법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다. 이처럼 정치적 해석에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명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어떤 원칙적 정의와 본질적 요소의 규명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환경에 도달해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내전 자체가 점차 형식상 국경을 초월해서 벌어질 뿐 아니라, 영향 측면에서도 전 지구적이기 때문이다. 소위 국제적 내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세계 전쟁은 마치 혁명에 따른 결과이자 전 지구에 걸쳐서 폭위를 떨치는 일종의 내전처럼 보이는데...”라고 썼다. 오늘날의 전쟁은 모두 지구적 내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국가적 테러리즘의 발흥, ()전쟁 수준의 폭력의 일상화, 비정규전의 급증, 대리전의 양상 등 좀 더 유연한 전쟁 개념의 고안과 같은 상황의 변화로 내전 범위의 한계가 풀려 그 범위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영토 경계 내 시민간의 전쟁이라는 정치적 정의의 함의로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조치를 촉발할 수 있는 법적 함의가 내포되었기에 근본속성의 설정은 더욱 중대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제연합과 산하전문기구에서 집행하는 인도적 지원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개입을 야기하는 국제전, 지구적 내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쟁에 내전이라는 딱지를 부착할지의 여부에 따라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부되기에 정확한 정의의 제시에 대한 압박이 증대하고 있다.

 

내전이라는 명칭 자체는 고대 로마의 명명 이래 그 명칭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통치권의 불의와 부패가 지속적으로 자행될 때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민의 봉기를 단순히 폭동이나 소요, 내란이라는 범죄적 행위로 일축하여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내전이라는 정당한 의미를 은폐하게 된다. 반면 진압되거나 맹렬히 비난받았을 폭력의 유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왜곡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내전으로 불릴 경우 이를 수행하는 전투요원을 국제법은 보호할 의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명명된다면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외부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고 분명 모호하고 정치적 영향이 섞여들기는 하겠지만 올바른, 정당한 세력을 위해 지원토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내전은 이처럼 상당히 논쟁적인 개념이지만 인도주의적 규제를 추동하는 자극으로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언명함으로써 하나의 중대한 개념주체어로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내전을 규정하는 모든 정의는 필연적으로 상황적 맥락을 반영하는 서로 대립적인 단어다. 결국 문제는 어디서부터 대립되는 이해가 발생했는지, 각각의 이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체험한 경험으로부터 그 이해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제 내전은 동일 정체를 가진 영토 경계내의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무력 충돌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시공간이 확장되어 지구화 내전이라 불리고, 언제나 덜 치명적 수단으로 치러지는 정치 자체도 내전의 한 형태로 인식되는 세계가 되어있다.

 

결국 내전의 복잡 미묘한 정의에 집착하기보다 내전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이 용어가 제시하는 무수한 의미들을 어떻게 줄이고 가다듬어 다루기 용이한 수준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내전은 인류가 모면하기 어려운 유산(流産)임에 분명하다. 경쟁심, 탐욕, 공격성, 자신의 창자에 스스로 검을 꽂는 인류의 운명을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해내는 일을 뜻한다. 때문에 무엇으로 인해 그 대상이 특색을 갖는지 알고 나면 그 대상의 양식(樣式)과 나타나는 연속성과 차이를 인지 할 수 있게 되며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통상 통치권을 지닌 기존 정부는 내전을 늘 반란이나 폭동이라 부르려 하고, 저항행위가 실패할 때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저항에서 승리한 측은 자신들이 벌인 투쟁을 혁명이라 부른다. 혁명가와 반역자는 없다. 다만 동료 시민간의 내전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극렬한 내전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주권자인 다수 시민의 정의에 반하는 소수 검찰독재권력의 불의에 맞선

하나의 개념을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을 써 내려간 이 저술은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동족간의 전쟁에 대한 이해를 제고시켜 준다. 그 전쟁을 줄이고 사라지게 하기 위한 요인들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분명 사유하고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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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이시다 센 지음, 서하나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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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생각의 말로 포장되기 시작하면 글의 작위성으로 청결함을 잃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한 것은 이 낯선 일본 중견 소설가의 글들이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몸과 언어, 아니 무엇이 이야기하고 춤추는지와 무관하게 함께 어울려 꾸밈없는 한 여인의 사계절 삶의 모습이 잔잔히 흐르는 스물두 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새 더불어 투명해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이시다 센(石田 千)’의 글들은 만지고 듣고 춤추는 관능의 언어들이 숨 쉰다.

 

이 글을 읽게 된 동기는 책의 머리말 격으로 써진 한 문장의 글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몸에 몇 개의 씨앗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나그네의 몸에 딱 달라붙은 씨앗은 바다를 건너고 그네와 함께한 오랜 삶의 여행조차 잊어갈 무렵 작은 정원에 자그마한 꽃이 핀다.” 그 활짝 핀 꽃은 추억이라는 여행의 기억들을 품고 있을 게다. 항구 마을에서 부른 멜로디, 즐거웠던 술집의 활기, 만났던 이들의 그리운 얼굴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씨앗의 언어들이다.

 


눈을 떴더니 명치에 물거품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도록,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난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매일을 붙잡고 싶은 당치도 않은 소망이라며 단념한다. 그녀는 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에는 천만가지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래서 만지고 감쌌던 이러저런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 발버둥 치는지 모르겠다고. 홀로 향하는 아득히 먼 생이 다할 때 까지 이 여행을 지속하겠노라고.

 

글들은 해맑고 빛이 투과할 만큼 투명하다. 그리고 말 앞에 그 어떤 형용이 없어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에 내 몸과 마음도 글을 닮아 햇빛이 통과하는 듯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등지고 들려오는 소리로 동작을 읽을 줄 안다. 고요할 때 눈보다 귀가 더 잘 본다며, 그녀는 등의 시력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내 등시력은 남아있을까?

 

글에는 사랑도 가득히 실려 있는데, 감기 걸려 홀로 뒹굴며 좋아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으니, 얼른 빨리 낫고 싶다.”며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언어를 그 어떤 술책도 없이 발설하고,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문자에 대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예의 바르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 꿈에까지 찾아갔다니 참 한심하다.”, 수줍은 사랑의 밀어를 말하는 중년의 그녀가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가하면 뜨겁게 달군 철 프라이팬에 고기를 집어넣고 지글지글 굽는 듯한 과분함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다시 불을 붙이기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마음이 식어 실망하는 일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마흔 중턱의 나이가 되면 자신이 얼마나 자주 마음이 식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이 식어 아무렇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는 슬픔이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이 에세이에는 좋아하게 된 문장들도 수두룩한데, 할머니의 유골을 흙으로 돌려보내던 기억에서 연유한 글인데, 새벽녘의 길은 이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어두움, 깊은 잠이 들면 흙과 동화된다. 진짜 집은 차갑고 좋은 냄새가 난다. 이후에도 흙이 말끔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이 문장이 고단한 삶의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던 까닭일 것이다.

 

【 「기다리다(まつ), 93쪽에서


글들은 슬픔과 신산한 외로움이 한 겹 흐르고 있음에도 더없이 맑은 미소를 떠나지 않게 하는데, 아코디언의 주름상자처럼 점점 길쭉하게 늘어났던 상냥한 이의 부드럽고 따뜻한 쓰다듬음에 히죽히죽 웃음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는 그 진솔한 몸의 언어가 내 모난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술 취한 여자가 연인과 엉켜 있는 모습이 좀 좋았다며, 나도 중년 여성이니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을 잘 보아둔다고 할 때 절로 그 거짓없는 마음에 빙그레 공감하며 내심의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살아있음에 언제부턴가 미덥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흔일곱 여성, 이시다 센의 글은 서툴지만 그런 기분을 토닥이고 다스리는 내면의 고백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달리는 것의 반대는 걷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닌 식는 것이구나.”라며, 그걸 깨달았을 때, (....) 더 울었다.”고 쓴다. 글들은 마치 행복의 증거처럼 목소리 없는 풍경들로 가득해서 힘을 빼고 오감을 잠시 한쪽에 내려놓은 안락함에 빠지게도 한다. 그녀의 들리지 않는 파장을 느끼며 작위가 미치지 않는 곳을 더듬어가는 것만으로 충만한 그런 시간이 되어주는 글이다. 고향 정원에 핀 꽃이 들려주는 나른한 꿈결같은 몸의 언어에 취하게 하는 청결한 글이다. 읽는 이의 마음도 어느덧 추억의 이미지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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