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이야기하다, 언어와 춤추다
이시다 센 지음, 서하나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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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생각의 말로 포장되기 시작하면 글의 작위성으로 청결함을 잃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한 것은 이 낯선 일본 중견 소설가의 글들이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몸과 언어, 아니 무엇이 이야기하고 춤추는지와 무관하게 함께 어울려 꾸밈없는 한 여인의 사계절 삶의 모습이 잔잔히 흐르는 스물두 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새 더불어 투명해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이시다 센(石田 千)’의 글들은 만지고 듣고 춤추는 관능의 언어들이 숨 쉰다.

 

이 글을 읽게 된 동기는 책의 머리말 격으로 써진 한 문장의 글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몸에 몇 개의 씨앗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나그네의 몸에 딱 달라붙은 씨앗은 바다를 건너고 그네와 함께한 오랜 삶의 여행조차 잊어갈 무렵 작은 정원에 자그마한 꽃이 핀다.” 그 활짝 핀 꽃은 추억이라는 여행의 기억들을 품고 있을 게다. 항구 마을에서 부른 멜로디, 즐거웠던 술집의 활기, 만났던 이들의 그리운 얼굴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씨앗의 언어들이다.

 


눈을 떴더니 명치에 물거품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도록,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난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매일을 붙잡고 싶은 당치도 않은 소망이라며 단념한다. 그녀는 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에는 천만가지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래서 만지고 감쌌던 이러저런 것을 글로 남기고 싶어 발버둥 치는지 모르겠다고. 홀로 향하는 아득히 먼 생이 다할 때 까지 이 여행을 지속하겠노라고.

 

글들은 해맑고 빛이 투과할 만큼 투명하다. 그리고 말 앞에 그 어떤 형용이 없어 정갈하고 깨끗한 느낌에 내 몸과 마음도 글을 닮아 햇빛이 통과하는 듯하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등지고 들려오는 소리로 동작을 읽을 줄 안다. 고요할 때 눈보다 귀가 더 잘 본다며, 그녀는 등의 시력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내 등시력은 남아있을까?

 

글에는 사랑도 가득히 실려 있는데, 감기 걸려 홀로 뒹굴며 좋아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으니, 얼른 빨리 낫고 싶다.”며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언어를 그 어떤 술책도 없이 발설하고, 당신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문자에 대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예의 바르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 꿈에까지 찾아갔다니 참 한심하다.”, 수줍은 사랑의 밀어를 말하는 중년의 그녀가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가하면 뜨겁게 달군 철 프라이팬에 고기를 집어넣고 지글지글 굽는 듯한 과분함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며 다시 불을 붙이기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좋아하던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마음이 식어 실망하는 일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마흔 중턱의 나이가 되면 자신이 얼마나 자주 마음이 식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이 식어 아무렇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는 슬픔이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이 에세이에는 좋아하게 된 문장들도 수두룩한데, 할머니의 유골을 흙으로 돌려보내던 기억에서 연유한 글인데, 새벽녘의 길은 이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어두움, 깊은 잠이 들면 흙과 동화된다. 진짜 집은 차갑고 좋은 냄새가 난다. 이후에도 흙이 말끔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이 문장이 고단한 삶의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던 까닭일 것이다.

 

【 「기다리다(まつ), 93쪽에서


글들은 슬픔과 신산한 외로움이 한 겹 흐르고 있음에도 더없이 맑은 미소를 떠나지 않게 하는데, 아코디언의 주름상자처럼 점점 길쭉하게 늘어났던 상냥한 이의 부드럽고 따뜻한 쓰다듬음에 히죽히죽 웃음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는 그 진솔한 몸의 언어가 내 모난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술 취한 여자가 연인과 엉켜 있는 모습이 좀 좋았다며, 나도 중년 여성이니 다른 사람이 하는 방식을 잘 보아둔다고 할 때 절로 그 거짓없는 마음에 빙그레 공감하며 내심의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살아있음에 언제부턴가 미덥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흔일곱 여성, 이시다 센의 글은 서툴지만 그런 기분을 토닥이고 다스리는 내면의 고백들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는 달리는 것의 반대는 걷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닌 식는 것이구나.”라며, 그걸 깨달았을 때, (....) 더 울었다.”고 쓴다. 글들은 마치 행복의 증거처럼 목소리 없는 풍경들로 가득해서 힘을 빼고 오감을 잠시 한쪽에 내려놓은 안락함에 빠지게도 한다. 그녀의 들리지 않는 파장을 느끼며 작위가 미치지 않는 곳을 더듬어가는 것만으로 충만한 그런 시간이 되어주는 글이다. 고향 정원에 핀 꽃이 들려주는 나른한 꿈결같은 몸의 언어에 취하게 하는 청결한 글이다. 읽는 이의 마음도 어느덧 추억의 이미지들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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