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상은 박설호 교수의 두 논문 에른스트 블로흐의 깨달은 희망과 종교, 그리고 유토피아「『희망의 원리, 그 특성과 난제에 힘입어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의 그 던적스러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 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패덕(悖德)을 체감할 때는 그것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뻔뻔스레 민낯을 드러내고 세상을 활보할 때이다. 세상이 순화되어 선함이 득세할 때는 대체로 그것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들이 짐짓 선을 가장하고 위선을 떨며, 세상에 섞여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순리란 것이 있다면 패악질이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가면이 벗겨진 줄 모르고 두려움없이 군림하도록 해서 그것이 이 세계에서 전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온존하고 있었음을, 그것이 어떻게 온존하고 있었는지 형태와 거소(居所)와 위장되었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저 폐쇄된 소수의 무리가 서로서로 썩어 들어가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지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 채 있었기에 그 패악의 실상이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거나, 드러낼 경우 사적 이익에 혹여라도 손실이 발생할까 저어했기 때문에 수면 위로 그 패덕함이 과시되지 않았던 연유도 있을 것이다. 저열성과 탐욕과 비굴함, 무능력과 무감각, 교활함과 폭력성, 이 모든 것들이 표면화 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그것들이 함부로 휘젓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도덕적 선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검찰독재권력 아래 산자부 차관이 된 5년 전 기조실장이었던 자가 당시 내렸던 자기 결정을 근거 없었다고 버젓이 의회에서 발설하는 장면을 보라. 수면아래 자고 있던 무능력과 비열함, 무책임성과 교활함이 이 악의 시대에 수치도 모른 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것들이 세상을 호도하여 권력을 갖게 되자 가면을 벗어던지고 악덕을 보란 듯이 행사하기 시작함으로써 그것들의 부패성과 폭력성, 탐욕과 공격성, 비열함과 무능함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식별하기 어려웠던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과 그들의 행태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불의한 욕망들이 여과되지 않고 시민의 눈앞에서 시전(施展)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시민대중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확인할 수 없어 그것들이 어느 곳에, 어떻게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처에서 숨어있던 것들이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불과 2년 만이다. 이제 시민들은 이것들의 정체를 알았기에 때려잡는 일이 수월해졌다. 발본색원이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절망이 휩쓸고, 시련과 퇴락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환의 토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법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하며, 주권자인 시민을 적대시하고, 주권의 대의 기관인 의회를 무력화하려 하며, ()의 경제를 소수 패덕의 무리를 위한 경제화하여 주머니를 채우는 탐욕을 노골화 하는가 하면, 국고의 고갈과 외교적 고립, 교역의 쇠퇴, 시민경제의 몰살, 복지역량의 말살을 향해 공권력의 사적 악용을 일상화하는 압제적이고 폭력적 무리들의 몰골을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퇴행의 시간이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한 걸음 진전하기 위한 역사적 시련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1885-1977)가 말한  성취의 우울(Melancholie des Erfüllens)’, 즉 달성된 목표에서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하는 현실 변화의 촉매제 역할로서의 시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 시간을 지속적으로 저것들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다만, 이것들이 활보하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실체를 확인 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사의 선물이겠거니 하겠다는 말이다.

 

유토피아, 이 세계의 바람직한 이상 사회를 향한 의지는 토마스 모어식 국가주의적 모델과 같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국회에서 선서를 거부하는 자가 나오면 거부하는 자에게 엄중한 범죄적 처벌을 가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과 같은 작은 진전을 향한 걸음이 곧 유토피아의 목표다. 유토피아란 저 먼 세상에 없는 것을 향한 공상적인 허무의 시도가 아니다. 국가의 선출된 수반이 사적 탐욕을 위해 국고를 바다에 쓸어 넣으려 할 때, 이를 예산 집행의 한계와 조건 등으로 제약, 통제할 수 있는 법안과 이보다 상위의 헌법의 수정도 실행하는 것이 유토피아적 목표라 할 것이다. 희망은 항상 좌절과 실망을 전제로 한다. 만일 이러한 실망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확신일 뿐이다. 우린 가능성을 내재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성취한 사회가 아니다. 1989년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안주하기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한국사회의 유토피아는 시대착오적으로 진부해지고 부패하여 추락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고착되지 않고 늘 자기의 부패성을 돌아보며 진부화됨을 돌파하려는 의지이다. 한국사회 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소시민들은 현세의 목욕탕 속에서 아무런 상념없이 잠을 청한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모두 잠들면 그 사회는 비틀거리고 저 나락으로 떨어진 황폐한 거리에서 서성거려야 하는 자신과 후손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멸을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꿈 꿀 수 있다. 희망이란 언제나 현재의 환멸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행복한자는 꿈꾸지 않는다고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꿈꾸는 자는 곧잘 길을 잃기 마련이고, 자유를 의식하는 자는 부자유의 질곡을 느끼기 때문이며, 사랑을 의식하는 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핍된, 존재해야 마땅한 무엇에 대한 의식이 인간과 이 세계 속에 내재한 의향에 대한 정서이다. 오늘 우리들은 깨달은 희망’, 새로운 무엇, 우리와 우리네 사회의 잠재성과 지향성을 향해 저 무도하고 무례하며 무능력한 패거리들에 강력한 징벌을 행함으로써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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