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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나일지도 몰라 - 지친 나에게 권하는 애니메이션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4년 7월
평점 :
애니메이션이라 부르는 장르는 내게 아주 먼 세계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비친화적이라는 말이 조금은 더 진실한 말이 될 것 같다. 물론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에 대해 예술비평의 글들을 통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영상 속 행위자들의 언어와 태도가 함축하는 의미들을 알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분석하려는 내 마음을 걷어내고 싶은 순수에 대한 막연한 동기가 작용한 터일 것이다.
이 책과 마주한 첫 작품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 속 한 문장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보였는데, 너희에게도 보였구나.”라며, 아이의 순수한 동심에 공감을 표하는 아빠의 그 소중한 존중의 마음을 보았던 까닭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중심주의가 깃들지 않은 우주 만물의 공평함과 그 무수한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말이다. 생태이론가 티모시 모턴의 ‘하이퍼 객체’가 떠올려졌다. ‘자연’이라는 대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그들과 하등 차이없는 인간이 어울려 상호작용하는 객체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곳으로 이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에는 《이웃집 토토로》를 비롯하여 《벼랑위의 포뇨》, 《하울의 성》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들이 몇 편 수록되어 있는데, 극단적이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입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저항과 희망을 말하는 작품 세계를 저자 이서희는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내 각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속으로 유혹해내고 있다.
나는 이러한 매혹적 글을 통해 몇몇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는데,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과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를 호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 미츠하(三葉)의 이름 때문이었던 듯싶은데, 그것은 “시간이 만들어낸 인연과 시간이 이어주는 운명”에 얽힌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을 새삼스레 불러일으킨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 프란체스카의 22년이 흐른 날 사흘간의 사랑을 추억하는 그 깊은 그리움에 더해졌던 영향 이었던 것 같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중에서, 80쪽】
소설 속 여인의 사랑의 기억 속 그 날에 라디오에서 은은히 들려오던 음악 《고엽(枯葉), Autumn Leaves》이 연상되었다. 3년만큼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사는 두 존재의 사랑 이야기와 "어느샌가 사람과 실 사이에 감정이 흐르게 된단다."처럼 객체 지향의 사유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과 인연에 대해 더욱 되돌아보게 했던 이유가 클 것이다. 이 감상글을 마치는대로 이 작품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또한 브레드 버드의 《라따뚜이》 또한 《너의 이름은.》과 같이 객체지향의 생태적 공존의 사유 연장에 있다고 여겨졌기에 더욱 호감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미각과 요리 실력을 갖춘 생쥐 레미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리 재능이 늘어나지 않는 인간과의 공영(共榮)의 스토리, 존재의 실존적 존귀함과 자기 한계의 정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목소리는 소위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이즈음의 생태이론을 선취한 탁월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샤르트르의 인용은 저자의 안목을 가늠케 한다. 이러한 깊은 사유 속에 관계와 용기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프랑스가 자신들의 대표 애니메이션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듯 해 보인다. 어쩌면 이 책을 단순히 동심과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위한 기념적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 될 수도 있겠다. 오히려 저자가 인용한 작품 속 문장들에 은은히 빛나는 사유들을 음미하고, 애니메이션을 한낱 유치한 아이들의 영상 오락물로 치부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인어공주》 의 변형작인 《벼랑위의 포뇨》처럼 부분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단지 “당당하고 막힘없는 태도”로만 읽을 수 없는 다소 국수적 색체가 짙은 작품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독자들의 취향과 비판적 성향의 차이에 맡기기로 한다. 정체성과 모험과 용기, 사랑의 애니메이션 속 이야기들이 맑게 흐르며 글쓴이의 매혹적이고 알찬 해석들이 새로운 가치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책의 표제와 같이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 그들과 함께 환상의 세계를 거닐며 꿈꾸다 보면 마주하는 현실 속 삶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용기와 어떤 열정이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음에 품게 된 몇 작품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