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세계사 보급판 세트 (블루 커버 에디션) - 전3권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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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되어 사건 속의 주체가 되면 그것의 외연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보이게 되고, 실체의 윤곽을 보다 실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훼손을 가하려는 어떤 세력이 있다고 여겨지면 그 반대 집단에 대한 적의로 이익훼손 행위의 이면이나 관련된 사항들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만일 드러나지 않은 것에 보다 크고 장기적이며 궁극적인 이해의 부분들이 있다면, 결국 당위적 행동을 불러일으킨 훼손된 이익이라는 사건에 대한 적대적 반응은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처지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책은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이것들을 보게 한다.

 

이 책은 이처럼 관점을 서구 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서술된 세계사의 오만과 그로인한 잘못된 역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세계의 역사가 자신(유럽)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기만과 착각은 그 당사자라는 좁은 시선에 매몰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문제를 유발하는 주체로, 세계사의 반동적 존재임을 입증하게 될 뿐이라는 의미이다. 실크로드(Silk road)세계사라는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세계사를 비단길이라는 고대(B.C. 119)에 처음 열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물질과 문명, 사상과 종교가 어우러지는 교역로라는 의미의 수식어가 붙은 세계의 역사인 이유이다.

 

또한 이 어휘는 고대에 놓인 이 단일한 특정 지리를 연결하는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의 주요 자원의 중심 연결지대를 뜻하는 보다 확장된 개념을 지닌다. 인간의 접근을 가로막는 타클라마칸과 카라쿰 사막, 텐산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 파미르 고원지대를 넘어서 동과 서의 육상로를 잇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며, 이 동서를 연결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해상로로 확장되기도 하며, 세계의 패권을 확보하게 하는 세계 권력 지배의 루트(route)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크로드는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과 함께 새로운 자원 확보의 길이 생성되기도 한다.

 

책에는 총 9개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세계의 지배적 욕망이 되는 자원 -이것이 인간 혹은 물질이 되었든, 사상이나 종교가 되었든 무엇이건 - 의 변화된 지리적 루트를 보여준다. 기원 후 2000년의 역사시대에서 인류가 무엇에 현혹되고, 그 현혹을 지배하기 위해 어떠한 걸음을 걸었는지, 그것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였는지, 그 영향은 긍정적이었는지, 혹은 부정적이었는지, 21세기 오늘에 생성된 새로운 실크로드는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인류는 이러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어떤 행위가 요구되는지를 헤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변화의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 낸 계기와 그 기회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깃든 이야기들이며, 그것이 바로 지배력이라는 힘의 생성이다. 이 힘은 자원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로 이어지며, 그것은 위협과 폭력, 전쟁을 동반한 우월적 지배력의 행사의 동력이다. 이 원시적 야만성의 동력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 질서의 점유에서 어떻게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는 가에 대한 사유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원 후 8세기의 이슬람 제국들의 풍요와 그 번영이 야기한 주변부의 양상들은 흥미로운 중세 유럽의 상황들을 보여준다. 당대에 루시로 불리던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지역인 바이킹들이 번영의 중심인 페르시아에 노예를 팔아 부를 축적하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동로마를 위협하던 튀르크 종족의 하나인 하자르 족의 아시아 북부 스텝지역의 교역 거점 확보를 통한 지위 확보의 행태 등은 명맥을 유지하던 동로마 콘스탄티노플로 대변되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문명적, 군사적 취약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만 한 내용인데,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몽골의 세계 등뼈지대의 침탈이 가져온 사건이 세계 지배권을 오히려 유럽으로 전환시켰다는 아이러니이다. 몽골의 서진(西進)이 몰고 온 것은 중국과 중서부 아시아의 선진 문물의 유럽 전수와 같이 유익함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페스트를 몰고 온 경로이기도 했으니 이 질병은 당시 유럽인의 인구수를 3분의 1로 줄여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아이러니는 이 참혹한 죽음의 무도가 끝난 후, 유럽 세계는 페스트가 불러일으킨 공포와 달리 줄어 든 인구로 인해 자원 배분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 구조 작동방식의 전면적인 재구성을 낳고, 사회의 부가 이들 유럽 사회에 고르게 배분되는 효과로 이어졌으며, 이는 소득의 여유가 되어 그들 산업의 투자 가속화로 인해 산업 발전을 자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 사회의 급속한 기술의 발전의 동력이 되었으며, 시민 의회가 등장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몽고의 세계 지배권을 확장시킨 서진이 시작된 13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200년간이 오히려 주변부 유럽이 동방으로부터 오는 물질과 사상의 교역 거점을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세계의 변방이었던 유럽이 중심부로 얼굴을 드러내는 세계사적 전환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미심장한 세상의 심원한 우발성을 목격하게 한다. 아마 이 극적인 세계사의 분수령적 시기가 세계사가 유럽 중심사로 다시 조작되어 쓰여지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 빈번한 이웃들과의 그칠 줄 모르는 전쟁으로 다져진 전쟁 도구의 발전은 정말 우스꽝스런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신감은 동방이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성지의 탈환이라는 환상적 야욕으로 분출된다는 점이다. 성지를 탈환함으로써 거룩한 신앙의 회복을 이루겠다는 노골적이고 거짓투성이의 명분을 내걸고 영토 확보를 위한 출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콜롬부스라는 인간 또한 이러한 사기술에 편승해 거짓 명분을 내걸고,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 대서양으로 출항하는 것인데, 이는 인도아대륙의 풍부한 자원과 문명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루트를 찾아내기 위한 은폐된 야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은 배제된 채 서인도제도, 즉 중앙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한 창의적 탐험가로 배우고 있다. 인도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 독점함으로써 베네치아 및 제노바 등 동방과의 교역 거점을 이미 점유하고 있는 경쟁 도시국가들의 방해 없이 자원을 지배하고자하는 욕심의 행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콜롬부스가 도착한 곳은 인도의 서쪽 해안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문명적 물질도 보지 못했다. 그는 거짓 보고를 통해 풍부한 금과 은, 무진장한 보물이 있었다고 선전한다. 그의 오판과 실패야 어쨌든 이 서쪽 대서양으로의 탐험은 새 영토에 대한 환상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코르테스의 아즈텍 문명의 잔혹한 침탈과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주변부에 불과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얻는 기회로 이어졌으니 기록될만한 역사적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을 비롯한 자원은 약탈품, 그러니까 공짜로 얻은 부다. 이 넘쳐나는 부는 항상 노예를 부른다는 것을, 다시 말해 한 부분에서 다른 곳으로 부가 집중된다는 것은 빼앗긴 곳의 속박과 함께한다는 불변의 철칙을 보여준다. 부와 속박은 함께한다. 기적에 가까운 부의 증가는 에스파냐를 유럽의 강자로 만들어주고, 또한 노예무역의 지배적 위치로 인하여 쌓은 부는 교황을 조종하며 종교적 권위를 두른 맹주로 군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데,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의 유럽이란 얼마나 혹세무민하고 위선적 명분으로 종교를 뒤집어 쓸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입증한다.

 

아마 주변부중의 주변부였던 여전히 별 볼일 없던 섬나라 잉글랜드가 에스파냐와 벌이는 전쟁의 결과처럼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될 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튀르크에 의한 함락으로 동로마라는 고대와 중세 유럽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유럽, 잉글랜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잉글랜드의 부상(浮上)은 어쩌면 인류사의 비극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유럽의 역사라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부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약탈적 종족들이었다는 것이 옳은 해독일 것이다.

 

이웃 도시들과의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을 통한 약탈, 지배권의 독점을 위한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으며, 그것은 이들의 행태 저변을 이루는 탐욕스런 야만성이다. 이들 착취 문명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라 부르며 마치 옛 영화가 있었던 주인공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세계사의 주변부였던 유럽은 이 때 비로소 처음으로 세계의 중심에 낯을 들이민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표현처럼 그냥 네상스(Naissance;탄생)’라 부르는 것이 진실한 언어일 것이다.

 

16세기 이후 이 책의 역사 기술은 더욱 신랄한 언어들로 바뀐다. 잉글랜드가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함에 따라 세계사는 약탈 이데올로기에 의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도둑놈 눈에는 모든 것이 도둑질의 대상이요, 타인 모두가 도둑놈으로만 보이는 것이라고 하는 말처럼, 잉글랜드의 관점에서는 자신 외의 모든 국가는 약탈의 대상이요, 적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 말은 상상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이들이 저지른 모든 역사의 증거가 그렇다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의 시기에 이르는 이 책의 서술은 잉글랜드를 비롯한 후진 유럽 국가들의 세계를 향한 탐욕과 약탈의 역사이다. 서로 증오하고 배신하며 죽이는 역사, 타인과 타지역을 유린하고 수탈하며 기만하는 배신의 역사, 이로 인해 골 깊은 불신에 매몰되어 불안을 지우기 위해 폭력과 전쟁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역사를 보여준다. 동방의 자원 거점지역과 산유국들의 독차지를 위한 양차대전의 은폐된 동기들, 믿지 못해 영혼 없는 동맹을 맺고,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불신의 불안으로 뒤통수를 치고 상대를 향해 침략을 서슴지 않는 영국을 비롯한 독일, 러시아 등 이들 유럽국의 행태는 식민지 수탈과 제국주의의 혐오스러운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오늘에 이어지는 세계 질서의 뿌리에 도사린 속성을 보여준다.

 

왜 이슬람 국가들이 모여있는 서아시아와 발칸, 크림 반도에 있는 동유럽 국가들이 혼돈에 허우적대는지 그들에게 쌓인 세계에 대한 불신의 근원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영국, 러시아, 미국, 세 강국이 2차 대전 중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필로 죽죽 그어 댄 남의 나라 영토의 분할과 지배권 할양이 초래한 불의한 힘의 남용이다. 주인있는 남의 나라 자원을 마치 무주공산의 자원처럼 수탈하는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의 행태나,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저항하면 위협과 폭력, 전쟁을 불사하고, 해당 산유국들의 군주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영합하면서 그들 국가와 인민들을 빈곤의 나락에서 신음하게 하는 것은 이들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이 대외 명분으로 내세우는 민주화 및 건전한 사회적 안정화라는 허울 좋은 위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등, 이들 국가들이 서방국가들에 반기를 들어 올리고 그들의 어떤 말에도 불신을 보이는 것은 근대 수백 년 동안 이뤄진 이들의 기만과 배신, 착취와 수탈이 초래한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영국의 페르시아(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꾼 것이 1972년이다)로부터의 지배력 후퇴와 미국으로의 힘의 불가피한 이전은 영국에 대한 이들 산유국의 증오와 혐오의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의 일례라 할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을 보이던 이 이슬람 지대가 근본주의적 종교 지대로 변화한 것은 이러한 유럽 제국주의의 오랜 기간의 기만과 수탈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쥐어짤 수 있는 부의 밑바닥까지 훑어가며 저지르는 그 잔혹성은 오늘날 유럽의 우월적 부의 중심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실패가 야기한 근래의 상황이나 이라크 침공의 거짓 명분, 지금도 이란에 취해진 금수조치와 금융거래 정지로 인한 미국과의 갈등에 도사리고 있는 제국주의적 추악한 이기적 탐욕의 뿌리를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위선과 기만정책은 한국도 예외 지대가 아님은 물론이다. 2000년간의 역사 시대를 한 마디로 논하라한다면 아시아 대륙의 등뼈를 지배하기 위한 쟁탈의 역사라 할 것이다.

 

실크로드, 동서를 잇는 루트에 위치하여 물질과 사상과 종교가 모여들던 곳, 풍요와 번영으로 화려한 문명이 꽃 피던 곳, 이들 중서부 아시아 지역의 거점 지역을 차지하려는, 또한 그들을 복속하고 점령하기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역사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도달하면서 제국주의 유럽 중심의 시대는 저물고, 그들의 말처럼 필연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재조정하는 정책을 세워야 하며, “2040년까지는 전환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절제된 예측의 시대가 도래 했다.

 

자원의 지배와 그 거점지역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빛나는 통찰을 통해 탁월한 교훈을 읽도록 촉구한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오래된 변증법적 전환, 즉 노예의 주인 됨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보여줌이며, 단기적 이익 앞에 사라진 도래할 장기적 상황의 끔찍함에 눈을 감았던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행태로 발견케 되는 폭력의 야만성과 자멸성, 그리고 종교와 전쟁과 상업의 관련성과 그 불가분한 동반적 교류 및 진퇴의 양상들, 인간의 부 축적과 노예라는 인간 상품 거래의 상관성 등 무궁무진한 역사적 진실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국제 질서, 국가 간의 외교 근간에 놓여있는 비밀과 그 은폐된 위선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질서의 시대에 어떤 선택이 유효할 것인지를 숙고하게 해주기도 한다. 지금 아시아의 등뼈 지대가 다시 부흥하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르네상스다. 새롭게 복원되는 실크로드,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뿌리, 그 연원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들은 이제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주변부에 여전히 머물러 있을 것인지, 중심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와 실천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는 최적의 역사서가 되어 줄 것이다.

 

주의 깊은 통찰과 예리한 역사 비평의 시선이 우아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서술되어 읽는 이가 지루할 틈이 없는 저술이다. 숨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두툼한 이 역사서를 손에서 놓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세 책으로 분권된 판본이길 망정이지 합본된 책이었다면 잠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외교, 통상산업, 국방 분야의 관리들과 정치인들, 지혜를 쫓는 청장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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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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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책의 내용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리뷰어의 판단이 개입되어 

저자의 의도에 대한 비(非)의도적 오독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 자본주의는 무수한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모순을 시정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의 제도적 질서를 이 문제 많은 자본주의에게 헤게모니를 쥐어주기까지 하고 그 어떠한 대응이나 탈취를 위한 기획이나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접근 경로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짚는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위 고전적 경제논리에 입각한 이해에 전념하다보니 그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에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자본주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이고 오늘에까지 일반적이고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사적소유, 시장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이라는 단일 특성으로 바라보는 한 결코 자본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질서”,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라는 단일 특성이 아니며, 경제에서 분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작동의 근간인 -경제’(경제외적)기둥 - 생태자연, 돌봄 등 재생산, 법을 비롯한 국가 권력, 수탈 영역 - 을 포함하는 은폐된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는 자본주의의 어떠한 측면에 대해서도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라는 것이다. 각 요소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요소에 제아무리 처방전을 내봐야 고쳐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환상을 실재라고 승인하는 조금은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같은 말은 법률차원의 자유와 시공간적 자유라는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키며, 자본가에 종속적이고, 시공간적 구속을 받는 임금노동자임을 지워버린다. 또한 자본의 목적인 자기축적, 즉 자기자본의 확장이라는 고유충동을 부정한다. 때문에 발생한 잉여의 사회적 할당이 시장에 맡겨져 노동자 등 사회적 복리와는 무관하게 아주 자의적으로 배분되어 불평등을 내재적으로 보유하는 도착적 특성이 마치 없는 듯 행동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조화)이라는 시장에 대한 환상, 자유노동이라는 환상...,게다가 자본가가 축적하는 잉여는 노동 생산의 이윤만이 아니라 비경제 요소를 무상 또는 해당가치에 훨씬 모자라는 저가로 사용하여 얻는 거의 수탈에 가까운 공짜 이익까지 더해져 사실 자본가의 축적은 더 큰 규모로 이뤄진다.

 

바로 이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이 무임승차하면서 한 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자기 축적에 전념함으로써 야기되는 전방위적인 사회적 폐해의 요소들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전경이 아닌 배경으로 밀쳐지고 분리되어 눈앞에서 치워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내는 것이다. 내적 모순으로 인류를 신음하게 하는 헤게모니를 쥔 자본을 시정할 수 있는 대항 질서(대항 헤게모니 연대)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자본을 경제라는 범주에 특정함으로써 경제 이외의 것들과는 무관한 듯 설명하며 배제한 것, 그러나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토대로 하여야 하는 것 말이다. 자기 축적을 위한 근본적 요소임에도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을 하지 않으려는 요소들. 낸시 프레이저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생태 자연, 공적권력과 정치, 그리고 착취와 수탈, 크게 네 가지로 분류 정리하고 있다.

 

노동이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입되려면 노동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위해 무수한 요인들을 필요로 한다. 정서적 신체적 돌봄, 가사, 육아, 학교, 다음세대를 낳고 사회화하는 일, 공동체 구축, 사회적 협력을 뒷받침하는 가치 지평의 가르침 등등 사회적 유대와 공동인식 유지를 위해 기여하는 일군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비경제 요소의 하나이다.

 

이들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자본의 생산 세계에서 분리되어 개별적인 사적 가정의 영역으로 유폐되고,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라는 중차대한 진실을 가려버린다.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분리되어 재생산은 젠더화되고 여성의 차지가 되어왔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은 이것들마저 상품화하여 여성을 대거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에 충원한다. 이것은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그것과 다시금 얽히는데, 착취와 수탈의 요소라는 노동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여성이 일하는 여성 대신에 저가의 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가난한 여성의 가정은 돌봄의 사각지대화 되어 서발턴을 고착화시킨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공짜로 먹어치우며, 이 비용을 사회에 전가한다. 자본 축적, 즉 잉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것에 비용을 치루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불화라는 자본주의 위기, 내적 모순을 드러낸다.

 

생태자연이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가장 파렴치한 뻔뻔함의 하나일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무한히 회복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전제 하에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분할하여 자연은 무상 이용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선인데, 경제는 가치 발생의 창조적 인간 행동의 장()이지만, 쉽고 무한히 보충할 수 있는 자연은 가치 없는 영역이라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만이자 왜곡인데, 생태 자연은 자본 생산의 필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자본의 생산, 자본주의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 이용하고 그 부담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이 또한 사회에 전가되고,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 일컫는 오리무중의 모호한 지대로 자취를 감춘다.

 

공적 권력과 정치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 경계를 오르내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 특성을 지닌다. 자본은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규제를 폐지하고, 조세의 감면과 탈세를 추구한다. 즉 탈정치를 주장하지만, 자기 확장, 자본축적에 장애가 되는 것을 파괴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권력과 정치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 내용의 실행과 분쟁을 심판하고, 노동자 저항을 진압하며, 질서를 보장하고, 이견을 관리하는 국가권력은 시장 교환이라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원초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요구하며 작금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방임을 지향한다.

 

이미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이미 영역간, 그 경계의 자의적 융통성으로 인해 불의와 부패성이라는 위기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은 이러한 정치적 비용, 공공재의 비용에 대한 어떠한 책임과 부담을 지니려 하지 않는다. 이 역시 공짜이고 무임승차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불평등과 불화의 문제인 것은 그 내적구조의 태생성이 지닌 반()민주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행태, 공공기관 및 그 자산의 민간 매각. 건보료를 비롯한 국민연금 등의 인상이라는 공적 부담의 회피, 대기업 조세감면, 금리의 폭발적인 인상 등은 민주주의 정치의 조건을 파괴한다.

 

금리 인상이 자본의 파렴치한 무한축적의 동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무엇에 견줘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자본이 사회와 자연의 부를 빨아들이는 일은 부채가 한다. 자본은 즉각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자본을 통해 대중을 훈육한다. 금리 인상은 부채상환에 압박을 받는 사적 개인의 몫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계에 선 많은 이들을 빈곤계층의 나락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자본은 자기 축적을 확보한다. 여기에 정치권력은 막대한 떡고물을 받기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지원한다.

 

이러한 실태를 여기에 모두 열거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가 될 듯하여 자제토록 한다. 자본은 외형적으로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얽혀있다. 분리함으로써 자본은 이 비경제 요소인 국가권력, 공공재의 이용을 위한 아무런 비용도 부담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사회질서는 그 윤리적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다. 이 질서의 혼란이 야기한 복구비용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대중의 몫이 된다. 그것은 시간의 고통, 재정적 고통, 삶의 견딤이라는 정서적, 육체적 고통, 민주주의의 정치적 지향성이라 사회 윤리적 비용의 부담이다.

 


네 번째 요소인 착취와 수탈은 역사적, 지역적 시간에 따라 형태적 형상이 변화되어 온 비경제 요소이다. ‘착취란 국가가 정해 놓은 법아래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 잉여분을 통한 자본 축적을 말하는 것이며, ‘수탈이란 법이 보호하지 않는 영역의 노동, 즉 가계의 생계가 불가능 할 정도의 임금 또는 무상으로 빼앗는 잉여를 통한 자본축적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그 경계를 변경하며 인종주의와 주변부 지역(예로서 식민지 또는 이에 준하는 포스트 식민국가 등 제3 국가 등)으로부터의 강탈에서부터 현재의 플랫폼노동이나 이 밖의 임시직 노동을 비롯한 새로운 인클로저(물의 상품화를 위한 토지 수용, 식물의 소유권화, 터미네이터 씨앗 등)로 인한 박탈로부터 챙기는 공짜 잉여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준다.

 

이들에게는 사회안정 보험의 수혜도 받지 못하고, 착취 노동자로부터도 경멸받으며,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빼앗기며 아무 발언권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수탈 대상 계층과 지역민은 제도화된 사회질서의 변경에 그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한다. 택배노동자, (음식) 배달 노동자, 경비 노동자 등 긱(geek)노동 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폭행과 불이익의 수용이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비경제 요소들은 결코 그 요소 자체의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불의가 아니다. 이들은 상호 엮여있는데, 이것들에 대한 자체적 요인만으로 문제 해결을 해보았자 미봉책이거나 시늉에 불과한 꼴이 되고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적으로 곪아가기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남성중심 사회를 그 어떤 중심도 아닌 기회 평등과 공정을 외치며 여성의 일자리 진출을 하나의 전형적 모델로 등장시켰다. 소위 맞벌이 가족이라는 해방 지향 운동으로 보이지만 시장주의자들이 환호하고 나선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는데 아주 유용한 프로파간다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시장 자본주의와 공모하며,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특권을 지닌 여성이 가난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유례없는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공짜 재생산 비용의 비난을 회피하고, 마치 존재하는 문제가 아닌 듯 책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일 요소의 문제로 접근하면 다른 파생적 문제를 낳는 비경제 요소의 상호 엮임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착취와 수탈의 영역과 협력해야 하며,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경계에 대해, 또한 생태자연의 영역과 연대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성과의 연대 문제가 아니라 비경제 요소 상호간의 연대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잠자리를 함께하며 문제를 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하는 집단의 행동도 또한 신자유주의의 놀음에 동참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외치는 불가능한 접근으로 자본주의의 축적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에 해방이라는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는 역할을 해 온 것이 페미니즘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질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여 인민대중이 일어날 때 페미니즘과 현재의 좌파, 인종주의는 거부되는 형국을 불러 올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분열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분열된 대중은 결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지향하는 추악한 자본 축적의 동기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회 정의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그럴듯한 해결은 새로운 왜곡의 시작을 알려 줄 뿐이다. 이의 역사적 실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겠다. 낸시 프레이저의 목소리(이 책cannibal capitalism)를 참조하시라는 조언으로 갈음하여야겠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극우화된 현재의 권력은 자본의 충실한 충복들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자본축적의 동기로 가득한 대기업의 출자 기업들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확장을 방해하는 요소와 세력은 살해하여야 하는 대상 일뿐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자본가의 미디어 매체들이 바보같은 이 정권을 기를 쓰고 지원사격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음해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당위적 현상이 노골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뻔뻔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와 구조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이슈가 무엇인가? 대기업 조세 감면과 공기업 매각, 공적 부담 장치들의 파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주변부의 부를 빨아들이기 위한 금리인상과 각종 공공요금의 무한 증가를 통한 자본 확장의 지원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의 해체 등 반민주주의, 반여성주의, 반생태주의, 반노동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저항하는 인간은 누구라도 때려잡겠다고 을러대고 있지 않는가? 이 모두는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가 지닌 뿌리깊은 내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비경제 요소를 외면하고 소외시켜 은폐하는 것이다.


맺는 말


책은 18~19세기의 중상주의-자본주의, 19세기~20세기 초의 식민주의-자본주의, 20세기 경제공황과 세계대전 이후의 국가주의-자본주의,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의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비경제 요소와 경제와의 경계를 어떻게 이전 은폐하며 봉합하여 지속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착취와 계급갈등을 가리기 위해 스위트 홈을 창안하여 남성 중심의 생산 경제와 여성 중심의 가정이라는 비경제로 분리하여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이에 여성주의가 대두되자 이에 기생하여 맞벌이 가족을 이상화하며 경계를 이동시키고, 급기야 부채를 통한 착취와 수탈의 지대를 만들어 주변부의 부까지 빨아들이는 자본의 민낯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은 이처럼 경제와 비경제의 경계를 변경하며 은폐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화폐가 곧 권력의 표상이 된 세상이다.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거나 적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 없음의 이 상징은 곧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며, 제도질서에서 제외되고, 결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발언권이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의 본성을 4D로 설명하고 있다. ‘분할(division)+의존(dependency)+책임회피(disavowal)=불안정화(destabilization)’,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자연과 경제를 분리하며, 경제와 수탈을 분할하며, 재생산과 생산을 분리하며 자본은 분리된 것에 등을 돌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회피된 것들, 돌봄, 생태계, 수탈대상의 노동, 정의로운 정치에 기생하고 이를 이용하면서도 비용부담도, 그 어떤 책임도 회피하면서 오직 파괴하고 사회와 인간을 고통의 신음으로 몰아넣는다.

 

책은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은폐한 내적 결함을 감춰둔 장소들에 예리한 빛줄기를 드리워 노출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단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질서라면, 새로운 질서를 우리들은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것들을 단 번에 치유할 체제란 불가능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계급주의를 청산하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분배의 공정성을 확보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는 경제, 즉 생산과 시장 교환시스템만이 아니라고 했다. 무임승차하고 돈 한 푼 내지 않는 비경제의 토대에 선 질서 체계이다. 젠더와 성, 인종적(확대하여 지역화되고 부채화된 노동),민족적 억압, 정치적 지배에 대한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경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비경제 영역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지, 효율성과 성장을 내세우는 자본의 요구를 압도하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기획해 낼 것인지 등 지금까지 자본의 배경에 머물렀던 것을 전경으로 세우기 위한 제도 설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주적 과정을 통한 결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경제에 중심을 둔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사회주의를 상상한다. 새로운 제도 질서로서의 사회 창안을. 아마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생태적이며, 보다 평등한 성과 이질성의 극복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영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교과서를 읽는다면 나는 단연코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Cannibal Capitalism: 식인(카니발)이라는 표현을 은유라 설명했지만 사실은 의미 자체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 무리를 제도화 한 것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중심메뉴는 바로 우리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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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더헤드 수확자 시리즈 2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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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나의 부모이기는 하나, 갈수록 나는 인류를 내가 안고 있는 아기로 보게 된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팔에 안겨 있는 아기는 걸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종()은 성장할 수 없다. 인류에게 그런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

 

 

시리즈 1편이 죽음이 정복된 세계의 유일한 죽음 배급자인 수확자의 육성과 그 윤리적 자질과 도덕성을 비롯한 기예들을 통해 수확자들의 세계를 그려내며, 불사(不死)의 존재가 된 인간들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권한에 도사린 권력의 문제로 인간성의 문을 열었다면, 2선더헤드는 이러한 배경의 토대가 된 세계의 질서이자 조정자이며 권위자이자 협력자인 인류 지식의 총합체인 선더헤드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의심과 실망, 인간 세계에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유일한 예외지역인 수확령의 구성원들인 인간들의 구제불능의 한계를 사려 깊은 언어로 우아하게 지펴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인간성이라는 어휘에 들러붙은 윤리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피해 갈 도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선더헤드는 특전지역이란 장소를 설정하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행동실험을 통해 인간 본성과 능력의 변화를 실행하려한다. 일반 시민 사회는 선더헤드의 조정과 지원, 통제 하에 삶의 쾌적이 최적화된 유토피아지만, 불사가 보장된 평이하고 지루한 삶의 시간에 염증을 지닌 인간들의 사회적 반항이 존재한다. 그러한 자들을 불미자라 부르며, 선더헤드는 인간 개체내의 각종 나노봇을 이용하여 도덕적 균형을 조정하지만, 바로 예외로 정해진 특전지역은 이들의 범죄적 행위의 도피처로 활용된다.

 

이제 소위 인간성이라는 이 괴물적 성향은 부패한 수확령에서 일반시민사회로 확장되어 상호 긴밀하게 그 고장난 양심들이 탐욕스럽게 연결되고, 인간사회는 다시금 최악의 지옥으로 돌진한다. 인간성에 도사린 어리석음은 진부하지만 이런 것이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냄비 속의 랍스터처럼, 점진적 부패에 대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간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와 비열함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자신과 신념이 다른 존재에 대한 음험하고 악랄한 폭력이 불미자의 욕망과 결합하여 도덕적 고결함을 주장하는 수확자 퀴리, 아나스타냐등 윤리적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다. 한편 이와달리 수학자 선택에서 탈락한 로언은 수확자 루시퍼가 되어 부패한 수확자들의 목숨을 불법적으로 거두며 수확령을 신성한 영역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이 행위가 제아무리 정의롭다 할지언정 불법적이며, 이 수확행위가 오염된 수확령을 개선하는 데 거의 효과가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열된 집단의 갈등과 혐오, 적대의 골만 깊어 질 뿐이다.

 

소설의 매 장면의 말미나 시작부에는 이러한 인간 사회에 대한 선더헤드의 입장이 따르고 있는데, 선더헤드가 인지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번뜩인다. 그가 예외로 두기로 한 영역, 즉 자율적 공간에 대한 회한의 목소리다. 그는 말한다. 자유와 허용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 허용은 위험하다. 나를 창조한 종()이 이제까지 마주한 것 중 가장 위험한 것일 터이다.” 그는 인간에게 자신이 통제하지 않을 예외지대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 허용은 강자가 저지른 죄악이 약자의 탓으로 전가되며 책임을 외면하는 허용이고, 자신들의 야심을 위해서 타자를 향해 쏟아내는 증오와 혐오의 동원이라는 허용, 즉 자의적인 권력 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불편한 진실은 인간들이 모두 여기에 탐닉한다는 사실이다. 인간 사회는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썩어간다. 실수하지 않는 선더헤드는 단언한다. 허용은 자유의 부풀어오른 시체이다.”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엄청 큰 대목이다.

 

자유를 지껄이지만 정작 이 자유는 자신의 부도덕성과 무관심의 허용이며, 책임으로부터의 회피와 전가라는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구를 위한 허용이지 않은가? 작금의 검찰정권이 외치는 자유란 이처럼 썩은 내 진동하는 자유의 부패한 사체인 허용이라는 위험천만한 괴물이다. 잠시 소설을 벗어났다. 정복된 죽음, 즉 생명의 복원술은 죽은 인간을 살려낸다.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은 육신을 완전히 태우거나 녹여 없애 재생과 복원이 불가능케 하는 불과 산성용액, 사체를 찾을 수 없는 심해의 영원한 수장(水葬), 고기밥으로 던져주어 재생가능성의 원재료를 완전 제거하는 것뿐이다.

 

기상천외한 완벽한 타자의 제거, 암살 행위와 수확령에 개입할 수 없는 선더헤드의 일반 시민을 이용한 합법적 개입이 인간성의 자멸을 억제시키려 하지만, 이 모호한 방식의 암시에 의한 시민의 도덕적 개입은 불가항력이다. 아마도 2편은 인간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은 결코 지혜와 양심과 연민이 다스리는 세계와는 한참이나 멀다는 증거로 가득 채우려 했던 것만 같다. 지배와 군림,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는 궁극적 쾌락의 추구를 향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선더헤드의 계산처럼 내가 없을 경우 인류가 스스로 멸종을 초래할 가능성은 96.8%에 달한다. 인류를 인류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인류는 단언코 인류에게 멸망한다.

 

노골적이고 뻔뻔하며, 부패와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해악과 파탄의 막장드라마를 보이는 권력의 행위에 사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선사시대 폭도들이 돌멩이를 휘두른 이후 늘 인간은 복잡한 문제에 수월한 희생양을 찾는 것이 취미였으며, 자신들의 가학적 성향을 정당화하는 데 세치 혀를 놀리는 재주를 습득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를 아예 보지 않으려는 인간들은 이처럼 선사시대 이후 늘 있어왔다. 문제는 이것이다. 이들이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의 걱정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그 소중하다는 감각자체를 훼손하려하는 데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행위가 즐거움, 쾌락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 즉 인간성이란 본디 그러한 것이니, 그것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주장이 소설 속 <신질서>라 칭하는 더없이 수구적인 부류들의 신념이다. 자기 편익의 증대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공리주의적 이 믿음이 세상을 휩쓸 때, 아슬아슬하게 자멸의 경계를 걷고 있는 인간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고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말미에 선더헤드의 의미심장한 발설이 있다. 이 리뷰의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이다. 제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지 않는 인류에게 교훈을 주지 않는다면 내 실수가 되리라. 그리고 나는 실수하지 않는다. 는 선언이다. 선더헤드가 모든 시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든 세계에 울려 퍼지는 대공명, 대진동의 표상이, 불미자에게만 표시되던 붉은 등이 전 인류에게 깜박거린다. 이 대공명의 시그널은 인류에 대한 불신이다. 3편으로 부지런히 달려간다. 종소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 울리는 것일까? 인류는 스스로 인간성에 내재된 괴물성을 기꺼이 폐쇄시킬 수 있는 것인가? 작가가 도달하는 그 인류의 향방이 너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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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수확자 시리즈 1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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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후로 넘어서는 문턱을 건너고 나면, 인간성은 사라지고 경박성의 시대,

유희와 조롱의 시대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행해지는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뱅상 데콩브(Vicent Descombes), Modern French PhilosophyP31에서

 

 

인간의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궁극(窮極)으로 향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알 수 없음, 그 두려움이라는 생()의 한계가 부여하는 간절함이 인간 문명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무능력을 떨쳐내기 위해, 그 궁극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사실 이 장광설은 케케묵은 얘기이겠지만 오랫동안 반복하며 집요하게 묻는 이유는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여전히 없기 때문이다. 즉 인간 그 누구도 필멸(必滅)을 피해 갈 수 없는 까닭이다.

 

닐 셔스터먼의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해결된 세상의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타자에 의한 사고와 사건에 의한 죽음, 그리고 자살과 자연사()가 만연하던 사망 시대는 종결되고 누구도 죽지 않는 시대다. 초지능 선더헤드가 지구 모든 지역의 국가행정체제를 해산하고 인간 세계를 통제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 세계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알려져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인간에게 고통, 질병, 노화, 죽음은 없다. 체내 나노봇에 의한 치유와 치료, 재생술로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선더헤드에 의한 직업과 부의 배분이 평등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지는 쾌적한 세계, 새롭게 쫓을 물음이 없는 세계이다. 프랑스 철학자 뱅상 데콩브의 말처럼 모든 것이 조금의 의미도 갖지 못하는 세계이다.


앎의 영역이 제아무리 정복될지라도 인간 본성이 암약할 수 있는 지대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항시 예외와 위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종()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의미를 잃어버리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 그림인 낫(scythe)을 든 낯선 복식을 한 인간, 이들이 바로 예외의 존재자이다.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의 불사(不死)의 존재들이 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인간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합법적 재량이 주어진 유일한 존재자. ‘수확자라 부른다.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삭을 줍듯 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즉 수확하는 것이다. 인류의 쾌적한 공존을 위하여 수확자는 중요한 사회적 봉사자로서 성스러운 임무로 이해하도록 교육된다. 문명의 성장은 완료되었고, 인간 존재에 대해 더 해독할 것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다른 인간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는 세계, 그러니 모두 똑같이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제 변화는 없다. 아이러니는 죽음을 완전히 이긴 세계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수확자는 바로 이 죽음을 독점한 자들이며, 죽음의 유일한 배급자다.”

 

이것이 이 작품의 근간이다. 수확자들은 인구에 비례하여 우월한 도덕성과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연민을 지닌 인간을 선택하여 오랜 수습훈련 기간을 통해 수확자들의 연례회의인 콘클라베에서 최종 선정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를 빼 놓을 수 없겠다. 시간적 진행방식의 물 흐르듯한 통상적 이야기 서술방식에 더해, <수확 일기>라는 수확자가 의무적으로 매일 기록하게 되어있는 수확자의 일기가 자칫 가벼워 질 수 있는 담론에 진중한 철학적 무게를 부여하며 소설의 서사에 균형을 잡는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일에 대한 고뇌, 이를테면 고결한 수확자인 퀴리는 때로 내 직업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지면, 나는 죽음을 정복하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애도한다.”고 쓴다. 이와 달리 거둘 수 있는 생명의 수량을 배당하는 한계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는 수확자의 일기도 있다. 독자는 생명을 거두는 이들의 성향에 매혹되어 다시금 인간이란, 인간성이란 대체 무엇인지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수확자 시리즈의 첫 편인 이 작품은 세계의 법령이자 인간 행동의 주제자인 선더헤드의 통제 예외지대인 수확령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선더헤드는 인류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힐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순수한 정의, 순수한 헌신의 존재로서 인류를 위해 일하는 지성체다. 이러한 존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영위되는 지대가 수확령이다.

 

수확자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 단지 도덕성과 공감 능력에 의해 수확자라는 인간들에 의해 선발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타인의 생명을 거두는 독점적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또한 이들에게는 죽음 면제권도 있다. 타인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관장하는 그야말로 신이 사라진 시대의 신이다. 이런 존재들이 지녀야 할 도덕성이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인간의 역사는 인간들이 사회체를 만들면 항상 위계구조를 우선 만들어낸다고 한다. 위계구조란 구성원에 수직적 계급이 주어지고 이에따른 권력이 동반된다. 또한 인간들의 모임이란 너절한 자기 이익을 위한 논쟁을 벌이고 세력을 키우며, 권력을 향한 암투가 전부이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인간성의 적나라함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펼쳐지기에 익숙한 인간적 실상임에도 그 낯익음 때문에 더욱 이야기는 독자의 정신을 휘어 잡는다.

 

살해하기를 극도로 혐오하며 싫어하는 인간만이 수확자의 기본적 자질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모순을 떠안고 있다. 타인을 규칙적으로 할당량의 범위 내에서 죽여야 하는 수확자가 그 일을 싫어해야만 한다는 가치의 충돌, 아마 고결함이란 이러한 해결 불가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신념에 대한 곤혹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시트라로언이라는 열여섯 살 아이들은 페러데이라는 수확자의 지목에 의해 수습생이 된다. 생명을 거두어야 하는 대상을 선정하는 일부터 그 대상을 수확하는 구체적 도구와 방법까지 도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또한 수확하는 일이 권력의 행사이거나 살해의 즐거움, 쾌락적 이벤트로 변질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에 철저함을 실천하는 일을 배운다.

 

시트라와 로언은 일 년의 수습 기간동안 연간 세 번 개최되는 수확자들의 회의인 콘클라베에 참여하여 테스트를 받게 된다. 수많은 수확자들 앞에서 일종의 자질 검정을 받는 것이다. 생명을 거두는 일의 신성함, 그 지엄한 도덕적 요구에 대해 이러한 도덕은 사망시대에 지닌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보수적 퇴행이라 비난하는 일군의 수확자 무리가 있다. 이를 대표하는 고더드 라는 수확자는 주장한다.   수확은 상징적이어야 한다. ...필멸성에 메어두기 위해서,  지금 가장 숭고한 소명이 한때는 범죄로 여겨졌다는 사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라며 인간 살해에 도덕적 기준을 들이미는 것을 위선이라 조롱한다.

 

페러데이와 고더드는 수확자의 소명에 대해 이처럼 대척점에 서 있다. 고더드는 수확행위를 왜 즐겨서 안 되는가 하고 묻는다. 어차피 일 아닌가? 인류의 무한한 삶을 돕기위한 신성한 일을 하는데 그 행위자가 그 일을 축제화하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비()도덕적인 발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무한한 삶이 보장된 인간들이지만 우발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제시, 각인(刻印) 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삶의 동력,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망 시대(필멸 시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죽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억척스레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하겠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사의 존재로 비록 인간은 바뀌었으나, 인간의 행위, 본성은 변화하지 않는다. 수확자의 십계명, 수확자에 대한 엄중한 금기와 계율이지만 그 틈새, 편의적 해석은 언제나 가능하다. 콘클라베는 두 수습생을 훈육하는 고결한 수확자 패러데이를 시기하는 세력의 주장으로 인해 두 수습생 중 한 명의 선정과 선정되지 못한 수습생은 즉시 목숨을 거두어야 한다고 의결하고, 페러데이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불의한 싸움에 내몰리는 결의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시트라와 로언은 각기 다른 수확자의 수습생이 되어 불가피한 대결에 내몰린다. 아마 수확자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 해도 될 것이다. 조직 범죄자 양성소 같은 로언에 대한 고더드의 강도 높은 살인 병기로의 훈련과 수확자 퀴리에 의한 시트라에 대한 고결한 도덕적 훈육은 대비되어 각기 다른 환경 속의 인간 변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수확령은 자신들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역할의 수행을 위해 선더헤드의 통제 밖에 있다는 점이다. 선더헤드는 수확자들과 수확령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선더헤드가 그네들의 행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류 사회를 위한 숭고한 약속의 이행을 지키기 위함이다. 외부(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불간섭은 수확령의 부패성을 키운다. 계율의 위반, 더러운 것들의 합종연횡(合從連橫), 대규모로 집행되는 수확, 컬트(cult)화된 수확자 집단의 범죄조직화 등 죽음을 판돈으로 한 세력 싸움이 과연 볼 만하다.

 

또한 선더헤드로부터의 이 독립과 배제는 선더헤드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확령 내부의 불의에 의해 위기에 빠지거나, 피살되더라도 선더헤드가 개입하지 않기에 범죄는 더 극성을 부린다. 완벽한 지성체의 통제가 미칠 수 없는 지대, 즉 무법지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름하여 자율’,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수확이라는 신성한 언어는 살인이라는 적나라한 의미를 되찾는다. 수확자는 곧 살인병기로 둔갑하는 세계이다. 두 명의 수습생은 예정대로 한 명의 수확자로 선정되고 한 명은 탈락한다. 그러나 이 선정과 탈락은 수확자들의 세계, 수확령에 의미심장한 파장을 몰고 올 것 같다. 더구나 부패의 온상이 되고 순수하게 인간 살해의 특수 면허 집단화되는 수확령에 선더헤드가 어떠한 명목으로든, 그 초지능의 지성이 개입할 것만 같다.  ‘인간적이라는 이 해묵은 휴머니즘이라는 괴물의 탈은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일까?

 

1편은 이렇게 끝 맺는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보다 더 지독한 적이 있을까? ....수확령의 양심이 고장나고, 그 자리를 특권에 대한 탐욕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다. ....부패하고 비열한 수확자들을 찾아서...불로 끝장내는 누군가...그를 수확자 루시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2선더헤드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간과 초지능과의 협력이 펼쳐질까? 아니면 유희와 조롱만이 쇼처럼 펼쳐지는 스텍타클한 이벤트가 점령한 쾌락의 제물(祭物)놀이 세계가 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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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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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희(cannibalism:人身供犧),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신체를 먹는 의례다.

제 배를 채우기 위해 타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 생활터전, 생태계의 피와 살을

다 빨아먹어 버리는 우로보로스가 자본주의 사회질서다.

- 낸시 프레이저, cannibal capitalism에서

 

 

연기 나는 흑요석 검은 거울의 신,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 용서를 알지 못하는, 지옥도 초월하는 전투의 신, 이 옛 멕시코 신화의 은유는 소설의 밑바닥을 흐르며, 인간 욕망의 어두운 영토를 독보적인 서사로 비추어 내고 있다. 자유시장 원리가 지배하는 홉스식 자연 상태, 즉   피로 피를 씻고 그 피를 신에 바치는시장 지배권의 전쟁, 마약 자본주의, 피의 자본주의, 주술 자본주의, 식인 자본주의, 그 걸신들린 실체들의 이야기를 디테일한 신화적 지식과 탄탄한 구조로 직조해내고 있다.

 

소설의 서사를 조망한다면 멕시코 북서부 지역을 지배하던 마약밀매 카르텔인 네 형제가 이끄는 카사솔라스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신흥 카르텔인 도고 카르텔에 의해 참혹하게 몰살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일한 생존자인 셋째인 발미로 카사솔라스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도고 가르텔을 피해 보복을 준비 할 수 있는 은신지역을 향한 호주,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도주의 행적은 여느 소설 작품의 중심 서사를 뛰어넘는 흥미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정도는 사소한 시작에 불과할 만큼 전개 될수록 전환되는 장면마다 상상 초월의 숨을 멎게 하는 이 세계의 어두운 저 밑바닥들을 불러내 독자의 면전에 들이댄다.


 



보복을 위한 중간 기착지인 인도네시아에서, 붕괴한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였던 발미로의 행적과 함께 그를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장기를 불법으로 적출하는 일본인 백 앨리(back alley;뒷골목)’ 닥터인 스에나가 미치쓰구와의 엮임이다. 이 새로운 인간과의 만남은 자본주의의 맹목적 지향성인 자기 확장’, 다시 말해 공식 경제에서 추방된 비공식 회색지대로 향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 축적 전략의 가장 적나라한 판본이다. 자본주의 DNA에 각인된 그 도착성,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신종 비즈니스는 초클로(아동의 심장)라는 산지(産地)가 한정된 희소적 자원인 품질 보증된 일본산() 아동 심장을 밀거래하는 것이다.

 

일본산 아동심장, 돈 많은 수증자 부모의 바이오센티멘털리티(생물학적 감상)는 심장 주인의 내력에 대한 품질을 기대한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성장한 아이의 심장이기를. 발미로는 야쿠자가 아동복지 목적으로 설립한 위장조직을 통해 무()호적 아동들을 은닉된 장소에서 양육하며, 수요에 따라 살아있는 아이의 심장을 적출, 공급한다. 1회 이식거래에 한화 65억 원에 달하는 거대한 뉴-비즈니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윤 높은 독점 시장에는 경쟁자가 출현하기 마련이고, 동업자는 분배율로 전쟁을 벌인다.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 실리콘밸리 IT기업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

 

이 문장처럼 선명한 실체의 고백이자 끔찍한 자본주의의 극명한 선언도 없으리라. 독점이 부딪칠 때 피를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다. 소설의 많은 지면이 시장 지배를 위한 소수의 암살단, 즉 폭력 조직 양성의 과정과 그들의 무자비한 잔인성이 길러지는 의식(儀式)의 묘사에 할당되어 있는데, 바로 아스테카의 인신공희, 희생제물이 가져오는 증오와 살의의 소용돌이를 거두어오는 열광과 환희의 구역질 날 정도의 충만한 인간 살해 행위다. 경쟁 조직의 리더로부터 산 채로 심장을 적출하는 저주 받은 정화의 의례 행위, 피의 제사는 심장 밀거래와 병행하며 자본주의 자체가 지닌 그칠 줄 모르는 축적의 본질을 빗댄다.

 

나는 폐쇄조직에 대해 여러 지면에서 그 부패성과 잔인성의 자연적 발화를 지적하곤 했는데, 발미르가 자신의 수하 조직을 단단히 묶는 유대 조성의 묘사들은 그 끈끈한 연대 의식이 어떻게 싹트는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 잔인성과 무감각한 살인의 행위들은 생략하는 것이 좋겠다. 발미로는 인디헤나(인디오)였던 할머니 리비르타드로부터 어린 시절 형제들과 함께 귀 기울였던 아스테카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를 향한 희생제의, 영광스러운 옛 아스테카의 발흥을 위한 의식을 통해 살육 기계인 암살자를 길러낸다.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멕시코 출신의 어머니와 야쿠자 말단 보스였던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혼혈 아동인 히지카타 코시모(일명 엘 파티블로‘; 단두대)’라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살림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약물에 중독되어 아이를 방치한 채 자기연민과 쾌락에 절어 사는 어머니, 아이는 인간에 대한 감정, 세상에 대한 이해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 살해자로 소년원 재소(在所) 생활 끝에 조각에 대한 손재주로 장식 칼을 만드는 공방의 선택 덕에 출감한다. 2M4Cm의 거대한 몸집,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일본인, 스페인어를 말할 줄 아는 이방인, 그는 발미로(가명 엘 코시네로)에 의해 최고의 암살자로 키워진다.

 

코시네로는 파티블로(코시모)를 엘 차보(아가)로 부른다.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끈끈하게 엮이고, 코시네로는 아스테카의 신화,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해 들려준다. 테스카틀리포카, 검은 아스테카의 거울, 인간이 알 수 없는 흑요석 거울에 대해서. 죽음의 각인이 찍혀있는 주술, 꿈과 환상의 그 절대적인 제의의 의미에 대해서. 아이는 묻는다. 왜 위대한 최고의 신이 고작 거울인가요?

 

이 물음은 어쩌면 발미로(엘 코시네로)가 맹신하는 피의 희생제의가 지닌, 또한 식인자본주의가 지닌 한계를 모르는 탐욕, 피의 경쟁을 부르는, 그 반복되는 증오와 살의에 대한 정곡(正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소설 내용의 누설자가 되는 것은 피해야겠다. 이 답변은 발미르의 할머니 리비르타드가 이미 들려준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어린 발미르가 모두 이해하지 못한 것, 용서없는 처벌의 신이라는 반쪽만 이해한 불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시초부터 줄곧 놓여있는 뱀과 함께 있는 검은 거울,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 이 둘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색과 모양도 다르지, 하지만 둘 다 신의 분신이다.”  -495

 

이 아스테카 신들의 이야기를 비집고 빛나는 하나의 문장이 있으니 공방의 운영자인 파블로’, 그는 불행한 소년 코시모가 어둠의 세계로 불려 들어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연민의 메시지를 보낸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다. 자비다...(마태복음)”

 

테스카틀리포카는 테스카(거울)와 코아틀()이 함께하는 이름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 밤과 낮, 그림자와 빛, 불과 물, 태양과 달, 이 세계의 정의는 경쟁도 아니요. 피의 복수도 아니며.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의 무참함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 이질성, 다름을 수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사회의 추하고 끔찍한 역사, 그리고 현실이라는 무대에 펼쳐지는 그 무지막지한 합리성에의 신묘한 적응성을 보이는 자본주의, 경쟁자와 이질적인 자를 향해 예리하게 갈고 닦인 칼날, 컬트교처럼 폐쇄적으로 엮인 집단들의 음침한 내부성들, 연대의 이탈을 응징하는 가족주의 등, 보이지 않는 비경제적 자원을 먹고사는 은폐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히 독자적 영역으로 구축한 작가와 작품에 갈채를 보낸다.

 

혹여 프레이저가 보았다면 결코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제된 인간들, 돌봄, 생태계 등 -경제적요인들이 뒤얽혀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질서 체제에 대한 낡은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확장된 사회적 자본주의를 읽을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힌 그야말로 창조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르문학으로 그 범주를 좁혀 가두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멀리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금세 화가 되어 돌아온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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