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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ㅣ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2월
평점 :
※ 이 리뷰에는 책의 내용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리뷰어의 판단이 개입되어
저자의 의도에 대한 비(非)의도적 오독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은 하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 자본주의는 무수한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모순을 시정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의 제도적 질서를 이 문제 많은 자본주의에게 헤게모니를 쥐어주기까지 하고 그 어떠한 대응이나 탈취를 위한 기획이나 행동조차 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접근 경로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짚는 이유에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위 고전적 경제논리에 입각한 이해에 전념하다보니 그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에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낸시 프레이저’의 확장된 자본주의 정의에서 드러난다. 전통적이고 오늘에까지 일반적이고 통념적으로 이해하는 “사적소유, 시장교환, 임금노동, 그리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바탕을 둔 경제 시스템”이라는 단일 특성으로 바라보는 한 결코 자본주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윤 주도 경제가 그 작동에 필요한 ‘경제 외적 기둥’들을 포식하도록 북돋는 사회(societal)질서”, 즉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라는 단일 특성이 아니며, 경제에서 분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작동의 근간인 ‘비-경제’(경제외적)기둥 - 생태자연, 돌봄 등 재생산, 법을 비롯한 국가 권력, 수탈 영역 - 을 포함하는 은폐된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는 자본주의의 어떠한 측면에 대해서도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서’라는 것이다. 각 요소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요소에 제아무리 처방전을 내봐야 고쳐지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환상을 실재라고 승인하는 조금은 기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노동 시장’같은 말은 법률차원의 자유와 시공간적 자유라는 노동자의 자유의지를 부각시키며, 자본가에 종속적이고, 시공간적 구속을 받는 임금노동자임을 지워버린다. 또한 자본의 목적인 자기축적, 즉 자기자본의 확장이라는 고유충동을 부정한다. 때문에 발생한 잉여의 사회적 할당이 시장에 맡겨져 노동자 등 사회적 복리와는 무관하게 아주 자의적으로 배분되어 불평등을 내재적으로 보유하는 도착적 특성이 마치 없는 듯 행동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균형(조화)이라는 시장에 대한 환상, 자유노동이라는 환상...,게다가 자본가가 축적하는 잉여는 노동 생산의 이윤만이 아니라 비경제 요소를 무상 또는 해당가치에 훨씬 모자라는 저가로 사용하여 얻는 거의 수탈에 가까운 공짜 이익까지 더해져 사실 자본가의 축적은 더 큰 규모로 이뤄진다.
바로 이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이 무임승차하면서 한 푼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자기 축적에 전념함으로써 야기되는 전방위적인 사회적 폐해의 요소들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전경이 아닌 배경으로 밀쳐지고 분리되어 눈앞에서 치워진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상상해 내는 것이다. 내적 모순으로 인류를 신음하게 하는 헤게모니를 쥔 자본을 시정할 수 있는 대항 질서(대항 헤게모니 연대)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비경제 요소란 무엇인가? 자본을 경제라는 범주에 특정함으로써 경제 이외의 것들과는 무관한 듯 설명하며 배제한 것, 그러나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토대로 하여야 하는 것 말이다. 자기 축적을 위한 근본적 요소임에도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을 하지 않으려는 요소들. 낸시 프레이저는 이것을 ‘사회적 재생산, 생태 자연, 공적권력과 정치, 그리고 착취와 수탈’, 크게 네 가지로 분류 정리하고 있다.
노동이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입되려면 노동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위해 무수한 요인들을 필요로 한다. 정서적 신체적 돌봄, 가사, 육아, 학교, 다음세대를 낳고 사회화하는 일, 공동체 구축, 사회적 협력을 뒷받침하는 가치 지평의 가르침 등등 사회적 유대와 공동인식 유지를 위해 기여하는 일군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비경제 요소의 하나이다.
이들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자본의 생산 세계에서 분리되어 개별적인 사적 가정의 영역으로 유폐되고, 임금 노동에서 배제되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이라는 중차대한 진실을 가려버린다. 생산노동과 재생산 노동은 분리되어 재생산은 젠더화되고 여성의 차지가 되어왔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은 이것들마저 상품화하여 여성을 대거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에 충원한다. 이것은 추가적인 문제를 낳고 그것과 다시금 얽히는데, 착취와 수탈의 요소라는 노동의 이중성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여성이 일하는 여성 대신에 저가의 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수행하며 가난한 여성의 가정은 돌봄의 사각지대화 되어 서발턴을 고착화시킨다. 자본은 사회적 재생산을 공짜로 먹어치우며, 이 비용을 사회에 전가한다. 자본 축적, 즉 잉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것에 비용을 치루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불화라는 자본주의 위기, 내적 모순을 드러낸다.
생태자연이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가장 파렴치한 뻔뻔함의 하나일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무한히 회복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전제 하에 마치 비용이 제로인 듯 처리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을 분할하여 자연은 무상 이용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선인데, 경제는 가치 발생의 창조적 인간 행동의 장(場)이지만, 쉽고 무한히 보충할 수 있는 자연은 가치 없는 영역이라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만이자 왜곡인데, 생태 자연은 자본 생산의 필수 토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자본의 생산, 자본주의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 이용하고 그 부담은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이 또한 사회에 전가되고, 자본의 내적 모순이라 일컫는 오리무중의 모호한 지대로 자취를 감춘다.
공적 권력과 정치라는 비경제 요소는 자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그 경계를 오르내리는 자가당착(自家撞着)적 특성을 지닌다. 자본은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 규제를 폐지하고, 조세의 감면과 탈세를 추구한다. 즉 탈정치를 주장하지만, 자기 확장, 자본축적에 장애가 되는 것을 파괴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권력과 정치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재산권을 보장하고, 계약 내용의 실행과 분쟁을 심판하고, 노동자 저항을 진압하며, 질서를 보장하고, 이견을 관리하는 국가권력은 시장 교환이라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원초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요구하며 작금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방임을 지향한다.
이미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분할하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리함으로써, 이미 영역간, 그 경계의 자의적 융통성으로 인해 불의와 부패성이라는 위기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은 이러한 정치적 비용, 공공재의 비용에 대한 어떠한 책임과 부담을 지니려 하지 않는다. 이 역시 공짜이고 무임승차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을 용이하게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불평등과 불화의 문제인 것은 그 내적구조의 태생성이 지닌 반(反)민주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행태, 공공기관 및 그 자산의 민간 매각. 건보료를 비롯한 국민연금 등의 인상이라는 공적 부담의 회피, 대기업 조세감면, 금리의 폭발적인 인상 등은 민주주의 정치의 조건을 파괴한다.
금리 인상이 자본의 파렴치한 무한축적의 동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무엇에 견줘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자본이 사회와 자연의 부를 빨아들이는 일은 부채가 한다. 자본은 즉각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금융자본을 통해 대중을 훈육한다. 금리 인상은 부채상환에 압박을 받는 사적 개인의 몫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경계에 선 많은 이들을 빈곤계층의 나락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자본은 자기 축적을 확보한다. 여기에 정치권력은 막대한 떡고물을 받기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지원한다.
이러한 실태를 여기에 모두 열거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가 될 듯하여 자제토록 한다. 자본은 외형적으로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적으로는 긴밀하게 얽혀있다. 분리함으로써 자본은 이 비경제 요소인 국가권력, 공공재의 이용을 위한 아무런 비용도 부담하지 않으며,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로부터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사회질서는 그 윤리적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다. 이 질서의 혼란이 야기한 복구비용은 오로지 국민이라는 대중의 몫이 된다. 그것은 시간의 고통, 재정적 고통, 삶의 견딤이라는 정서적, 육체적 고통, 민주주의의 정치적 지향성이라 사회 윤리적 비용의 부담이다.
네 번째 요소인 착취와 수탈은 역사적, 지역적 시간에 따라 형태적 형상이 변화되어 온 비경제 요소이다. ‘착취’란 국가가 정해 놓은 법아래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 잉여분을 통한 자본 축적을 말하는 것이며, ‘수탈’이란 법이 보호하지 않는 영역의 노동, 즉 가계의 생계가 불가능 할 정도의 임금 또는 무상으로 빼앗는 잉여를 통한 자본축적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그 경계를 변경하며 인종주의와 주변부 지역(예로서 식민지 또는 이에 준하는 포스트 식민국가 등 제3 국가 등)으로부터의 강탈에서부터 현재의 플랫폼노동이나 이 밖의 임시직 노동을 비롯한 새로운 인클로저(물의 상품화를 위한 토지 수용, 식물의 소유권화, 터미네이터 씨앗 등)로 인한 박탈로부터 챙기는 공짜 잉여를 표면에 드러나게 해준다.
이들에게는 사회안정 보험의 수혜도 받지 못하고, 착취 노동자로부터도 경멸받으며,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빼앗기며 아무 발언권도 지니지 못한다. 때문에 수탈 대상 계층과 지역민은 제도화된 사회질서의 변경에 그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한다. 택배노동자, 퀵(음식) 배달 노동자, 경비 노동자 등 긱(geek)노동 에 가해지는 끊임없는 폭행과 불이익의 수용이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비경제 요소들은 결코 그 요소 자체의 문제로 인해 야기되는 불의가 아니다. 이들은 상호 엮여있는데, 이것들에 대한 자체적 요인만으로 문제 해결을 해보았자 미봉책이거나 시늉에 불과한 꼴이 되고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적으로 곪아가기만 한다.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남성중심 사회를 그 어떤 중심도 아닌 기회 평등과 공정을 외치며 여성의 일자리 진출을 하나의 전형적 모델로 등장시켰다. 소위 ‘맞벌이 가족’이라는 해방 지향 운동으로 보이지만 시장주의자들이 환호하고 나선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는데 아주 유용한 프로파간다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시장 자본주의와 공모하며,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투쟁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특권을 지닌 여성이 가난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고, 유례없는 ‘돌봄 사슬’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공짜 재생산 비용의 비난을 회피하고, 마치 존재하는 문제가 아닌 듯 책임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게 해주었다. 페미니즘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일 요소의 문제로 접근하면 다른 파생적 문제를 낳는 비경제 요소의 상호 엮임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착취와 수탈’의 영역과 협력해야 하며,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경계에 대해, 또한 생태자연의 영역과 연대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성과의 연대 문제가 아니라 비경제 요소 상호간의 연대의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잠자리를 함께하며 문제를 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좌파라고 하는 집단의 행동도 또한 신자유주의의 놀음에 동참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외치는 불가능한 접근으로 자본주의의 축적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정치경제에 해방이라는 매혹적 분위기로 화장해주는 역할을 해 온 것이 페미니즘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질서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여 인민대중이 일어날 때 페미니즘과 현재의 좌파, 인종주의는 거부되는 형국을 불러 올 수 있으며, 이는 곧 사회 분열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분열된 대중은 결코 반동적 우익 포퓰리즘이 지향하는 추악한 자본 축적의 동기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며,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회 정의를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그럴듯한 해결은 새로운 왜곡의 시작을 알려 줄 뿐이다. 이의 역사적 실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만두겠다. 낸시 프레이저의 목소리(이 책『cannibal capitalism』)를 참조하시라는 조언으로 갈음하여야겠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극우화된 현재의 권력은 자본의 충실한 충복들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자본축적의 동기로 가득한 대기업의 출자 기업들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확장을 방해하는 요소와 세력은 살해하여야 하는 대상 일뿐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자본가의 미디어 매체들이 바보같은 이 정권을 기를 쓰고 지원사격하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음해로 일관하는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당위적 현상이 노골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뻔뻔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와 구조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들고 나온 이슈가 무엇인가? 대기업 조세 감면과 공기업 매각, 공적 부담 장치들의 파괴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주변부의 부를 빨아들이기 위한 금리인상과 각종 공공요금의 무한 증가를 통한 자본 확장의 지원 아니었던가? 그리고는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의 해체 등 반민주주의, 반여성주의, 반생태주의, 반노동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저항하는 인간은 누구라도 때려잡겠다고 을러대고 있지 않는가? 이 모두는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가 지닌 뿌리깊은 내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의 핵심은 비경제 요소를 외면하고 소외시켜 은폐하는 것이다.
■ 맺는 말
책은 18~19세기의 중상주의-자본주의, 19세기~20세기 초의 식민주의-자본주의, 20세기 경제공황과 세계대전 이후의 국가주의-자본주의,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의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비경제 요소와 경제와의 경계를 어떻게 이전 은폐하며 봉합하여 지속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착취와 계급갈등을 가리기 위해 스위트 홈을 창안하여 남성 중심의 생산 경제와 여성 중심의 가정이라는 비경제로 분리하여 새로운 경계를 만들고, 이에 여성주의가 대두되자 이에 기생하여 맞벌이 가족을 이상화하며 경계를 이동시키고, 급기야 부채를 통한 착취와 수탈의 지대를 만들어 주변부의 부까지 빨아들이는 자본의 민낯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은 이처럼 경제와 비경제의 경계를 변경하며 은폐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화폐가 곧 권력의 표상이 된 세상이다.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거나 적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가치 없음의 이 상징은 곧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며, 제도질서에서 제외되고, 결코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발언권이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모순의 본성을 4D로 설명하고 있다. ‘분할(division)+의존(dependency)+책임회피(disavowal)=불안정화(destabilization)’,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자연과 경제를 분리하며, 경제와 수탈을 분할하며, 재생산과 생산을 분리하며 자본은 분리된 것에 등을 돌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 회피된 것들, 돌봄, 생태계, 수탈대상의 노동, 정의로운 정치에 기생하고 이를 이용하면서도 비용부담도, 그 어떤 책임도 회피하면서 오직 파괴하고 사회와 인간을 고통의 신음으로 몰아넣는다.
책은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이 은폐한 내적 결함을 감춰둔 장소들에 예리한 빛줄기를 드리워 노출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들을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단지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질서’라면, 새로운 질서를 우리들은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모든 것들을 단 번에 치유할 체제란 불가능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주의는 계급주의를 청산하고 사회적 잉여에 대한 분배의 공정성을 확보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는 경제, 즉 생산과 시장 교환시스템만이 아니라고 했다. 무임승차하고 돈 한 푼 내지 않는 비경제의 토대에 선 질서 체계이다. ‘젠더와 성, 인종적(확대하여 지역화되고 부채화된 노동),민족적 억압, 정치적 지배에 대한 불균형’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경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비경제 영역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지, 효율성과 성장을 내세우는 자본의 요구를 압도하는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기획해 낼 것인지 등 지금까지 자본의 배경에 머물렀던 것을 전경으로 세우기 위한 제도 설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주적 과정을 통한 결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경제에 중심을 둔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의 사회주의를 상상한다. 새로운 제도 질서로서의 사회 창안을. 아마 이 책은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생태적이며, 보다 평등한 성과 이질성의 극복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격려와 영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의 교과서를 읽는다면 나는 단연코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Cannibal Capitalism: 식인(카니발)이라는 표현을 은유라 설명했지만 사실은 의미 자체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먹이 떼를 향해 달려드는 포식자 무리’를 제도화 한 것으로서 사회를 바라보게” 한다. 중심메뉴는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