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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ㅣ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평점 :
역사는 포용하는 사회영역의 포괄 범위에 따라 거시사와 미시사로 구분한다. 즉 정치에서부터 경제와 법률, 문화, 과학 등등의 영역을 아우르는 역사를 거시사, 우리네가 늘 접하는 통상의 역사이고, 이들 영역에서 하나의 영역에 세밀한 연구를 수행한 것을 미시사로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이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가 살던, 소위 계몽주의가 대두하던 시기의 오늘날 프랑스라는 단일의 영토국가로 불리는 지역의 사람살이를 추적한다.
그것은 농민의 목소리가 배어있는 민담이고, 어느 인쇄공의 이야기이며, 중산계급이라 자부하는 어느 슬기롭지 못하고 아둔한 부르주아의 설명서이고, 문필가들의 사상 검증을 위해 명부를 작성한 하급 경찰 조사서이며, 어느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이다. 이를 통해 당대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즉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의 지성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을 ‘망탈리테(mentalite)의 역사’라 부른다. 사회문화 현상의 바닥에 자리잡은 인간집단의 무의식, 시대의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 다시말해 표면적으로 떠올라 가시화되지 않아 인지되지 않았으나 실제 광범위하게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마더구스 이야기’와 같은 당대 민담이나 도서 주문 편지, 경찰의 조사서, 중산계급임을 자부하는 인물이 쓴 도시 설명서 등 아카이브(문서고)를 각기 바탕으로 한 여섯 꼭지의 미시사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의 저류에 흐르는 당대 인간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사를 우리는 직조해 낼 수 있게 된다.
미시사가 아름다운 것은 마치 저 위에서 조망하듯 지배자의 총합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거시사의 오만함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다수자인 대중이라는 존재들의 진실된 삶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주 유사한 그 평범성에 내재하는 속성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바라보는 일은 새로운 깨달음이며 즐거움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인 <고양이 대학살>의 논의에 앞서 저자는 역사적 문서로서의 민담을 우선 살펴본다. 이것은 이유가 있는 배치인데,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민담이 이야기하려는 했던 것들을 시대의 사회상 반영으로 해독하여 왜 ‘고양이를 대학살’해야 했는지, 그 저의(底意)를 보다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담은 밑도 끝도 없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항시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 경험된 것들의 어떤 공통적 근거를 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민담은 사실상의 역사적 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루이 14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정책 입안자로서 농민 문화에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페로의 민담집처럼 기득권자의 교만한 훈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농민판본에 의거한 원색적이고 날것인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빨간 모자」, 「엄지 소년」, 「신데렐라」, 「잠자는 미녀」, 「장화신은 고양이」,... 등 이야기를 독일과 프랑스의 서로 다른 판본을 비교 분석하며 18세기 대중인 농민들에 깃든 의식, 그 본질을 길어 올린다. 프랑스의 민담은 동일한 소재의 이야기에서 독일과는 아주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독일의 민담에서는 콩나무를 기어올라 닿은 공상의 세계에서 거인을 죽이지만 프랑스인들은 현실적 배경에서 기지와 교활성을 통해 거인을 처단한다. 「빨간 모자」역시 소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나며 불가해하고 비정한 세계에 어떠한 포장도 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프랑스 판본인 「작은 아네트」에는 영양실조를 두드러지게 묘사하여 이를 제외한 판본들과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민담의 주인공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소원의 권리를 취득했을 때 고작 음식을 말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상상 속에 어른거리는 일차적 즐거움은 식욕이 고갈될 때까지 먹어보는 것이었고, 실상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민담의 도처에 등장하는 그 많은 계모와 의붓자식의 박대, 연약한 아이에게 초인적인 일을 던지고 끝내놓으라는 명령들의 이야기는 실재하는 당대의 현실의 반영이었다. 18세기 여러 문헌들은 프랑스인의 40%가 10세 이전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성직자와 귀족은 빠진 채 농민에게만 부과되던 악명 높은 타이유(taille)稅 부터 기근과 흉작으로 인한 빚더미와 이에따른 노역으로 극빈으로 내몰려 길에 떠돌던 절박한 영혼이 수백만에 달했음의 투영이기도 하다. “보잘 것 없는 몸이 보잘 것 없이 죽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계모가 급증했으며, 고아와 의붓자식이 방치되고 넘쳐났다.
세계는 냉혹하고 마을은 야비하고 인류는 악당으로 가득 차있다면 농민 대중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프랑스인의 독특한 세계관은 이를 도피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 세상에 대처하는 전략을, 그 경계표시를 민담으로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우둔함에도 동정을 보이지 않으며, 멍텅구리라는 단순성은 죄악의 전형이며 치명적 죄악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순진함이란 재앙으로 가는 초청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고되고 동료 이웃의 이타심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작은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서는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기지가 요구된다는 것, 도덕적 고결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기에 냉소적 초연함이 민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미몽에서 깨어날 것! ‘장화 신은 고양이’의 꾀바름은 이렇게 출현한다. 결코 추상을 다루지 않으며 현실적 삶의 기지와 그 경계를 경고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모욕을 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라블레식 웃음으로 파안대소하며 현실의 삶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동력을 얻으며.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이어진다. ‘작은 사람들(menu peuple)’이 ‘큰 사람들(les gros)’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역사의 표현으로서 인쇄소 직공들인 노동자들의 폭동이야기가 된다. 18세기의 노동자와 부루주아 사이에는 일과 음식과 잠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삶의 요소에서 커다란 운명적 불균형이 놓여있었다. 고용과 해고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져 일주일후에도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퇴니스’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에서 산업화 이전 사회를 미화하여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당대는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공동사회였다.”고 말이다. 이런 낭만적 헛소리를 학교에서 배우고 자랐다. 삶이 비정한 죽음과의 투쟁이었음에 눈을 감는, 지배권력을 위한 학자의 글이 여전히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 또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은 생세브랭 가(街) 자크 뱅상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인쇄소 직인이었던 니콜라스 콩타가 전하는 일화이다. 당대 분위기는 이렇다.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이미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속한 종(種)이었다는 점이다. 계급의 분할 기준인 특징은 부르주아는 일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인쇄소 주인부부는 실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늦게까지 잠을 자며, 견습공들은 물론 직인과 장인(匠人)조차도 주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먹고 남은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늘이 바라보이는 천장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로 몸을 붙이고 가까스로 불편한 잠을 자야했다. 더구나 밤마다 울어대는 주인부부가 기르는 25마리의 고양이로 인해 짧은 수면조차도 불가능했던 이들은 지혜를 짜낸다. 주인부부가 자는 본채의 지붕 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서 주인부부의 잠을 방해한다. 이윽고 주인의 부인은 이들에게 고양이를 처치하라고 명령한다.
인쇄소 직공들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부인이 가장 아끼는 고양이부터 시작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이 살육의 향연 이야기에는 무수한 상징이 가득한데, 이들 노동자의 행위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혹자는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라고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학적 환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고양이 죽이기는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중문화의 깊은 조류중 하나의 표현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 문화의 주제를 가지고 유희를 함으로써 부당하고 불의한 부르주아를 드러나지 않게 모호하게 공격한 것이다. 당대에 고양이에게 부여한 의미는 마법, 광란, 오쟁이 지기, 학살, 유혹, 강간, 살인...등이었다. 그들은 사회질서 전체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한 것이었다.
인쇄소 사장 부인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제일먼저 처단함으로써 그녀의 약탈적 성욕에 은밀히 혐오와 멸시로 답했으며, 한편으로는 오쟁이 진 사장의 멍청함을 조롱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일종의 성(性)과 유혹의 카니발은 폭력의 언저리에 억압된 감정을 희롱했던 유머의 한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 능욕을 가함으로써 그들은 한바탕 무릎을 치고 배를 잡는 라불레식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인쇄 노동자들의 이러한 폭력성 분출에는 다가오는 민중 봉기의 징후가 서려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1789년 대혁명의 씨앗은 이렇게 농민, 노동자에게서 싹트고 있었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지만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갈라치기의 잔혹함, 냉혹한 배제, 참담할 정도의 가렴주구가 만연한 사회였음을, 이러한 양상이 광범위하게 대중의 의식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신을 부르주아로 인식하는 인간은 당대의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768년 자신이 살고있던 도시 몽펠리에를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쓴 도시설명서에 나타난 한 견실한 중산 계급 시민의 가치관과 관념을 해독한다. ‘몽펠리에 퍼레이드’라는 도시의 대행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행진 순서에 따라 참가한 인물들에 대한 칭호, 특권, 수입, 기능까지 일일이 열거하여 도시사회의 집합적 질서와 인간 희극의 복잡성과 모순의 극치를 보게 한다. 이 부르주아는 행진의 순서인 명예와 품격이 실질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음을 도처에서 드러내며, 신분을 구별하는데, 부르주아는 제 2신분으로서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제 3신분인 평민은 “본연적으로 악하고 방종하며 폭동과 약탈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들 위치에 제한시켜야 되며, 아니면 추출하거나 교수형에 처하여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주아인 자신의 신분을 정의할 때조차 적대적 이웃 신분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부르주아의 권위를 정당화한다. 특히 제 3신분의 부르주아화(化)를 극도로 경계하며 혐오감을 보이고, ‘떨거지 출신’이라 비하하는가 하면, 자율적 선출을 통한 정치적 집합의 움직임에 경악하기도 한다. 특히 제3신분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 기회를 맹비난하며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들에 대한 교육기회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으며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 기뻐”한다. 동료 시민을 분류하려 시도하며 자신의 도시성에 행복해하는 18세기 중산층의 인간상을 바라 불 수 있는 특별한 사료이다.
이 같은 몽펠리에의 한 부르주아의 관념은 앞선 농민과 노동자의 분노가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당대 부르주아의 정신이 모두 이러한 이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의 존재가 공개적으로 표명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 폄하할 이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층 간의 분열이 가진 자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획책되고 보다 악질적으로 누적되고 있었음이다.
이것은 한 서적거래 수사관의 500명에 이르는 문필가들의 조사보고서에 의해 당대 지식 사회 계급간의 관계성을 통해 또다른 차원의 확대된 갈라치기 된 사회상을 엿보게 된다. 파리의 이 하급 경찰관은 지식인을 걸러내어 명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포함하는 전기적 단평(短評)의 성격을 지닌, 즉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가 기묘하게 결합된 서류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대 문필가들의 지위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는가, 그런 것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의 실존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대체 이러한 명부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18세기 프랑스 문필가, 즉 글쓰기는 독자적 직업이나 별개의 신분으로 여겨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적상의 독점과 해적 산업으로 책으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필수적으로 보호의 그물망, 일종의 후견인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실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Abbé Prevost)’는 법원 관리로서 원장 신부 생활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문필가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몇 푼의 돈이 나오는 직업을 줄 수 있는 후견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후원자의 시혜에서 나오는 후원은 문필 공화국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 가장 중대한 요인이었다.
단지 먹고사는 것도 그만큼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문필가들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그 권위를 이용해 다시 누군가를 도와주는 그러한 커넥션으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만일 이러한 체제의 중심 권력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면 바로 이 사상검증의 공권력에 의해 바스티유로 직행하게 된다. 이 기본원리를 벗어난 문필가들은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수적 활동을 하게 되고, 이는 곧 감옥행으로 이어지곤 했으니 1789년 이전에 바스티유는 급진적 선동의 상징적 의미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볼테르를 비롯해 극작가 샤를루아 등이 귀족들의 하인에게 매질을 당하거나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 빈번했던 것처럼 문필가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재주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기존의 지식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재구성하려 했던 『백과전서』파로 불리는 계몽주의자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까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의 걸음이었을 것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지식의 나무-세부화된 인간 지식의 체계>, P340에서】
디도로와 달랑베르를 중심으로 하는 『백과전서』의 내용을 오늘의 시선으로 읽게되면 그 지루함으로 왜 이 저술이 그토록 역사성을 지닌 책일까 물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식의 낡은 질서를 해제시키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새로운 금을 그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지식의 경계선을 새롭게 그으려 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엄중한 지식이 지배하던 낡은 지식의 분류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식의 분류를 정립하려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금기(taboo)를 건드리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배우는 지식의 분류체계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어느 시기에나 기득권의 잔악한 방해를 받게 된다. 사실 그 어떤 질서가 고정된 진리라 하겠는가. 모든 질서는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든 어쩌면 최초의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이렇게 민담에서 시작하여 백과전서의 이야기를 통해 18세기 프랑스 민중의 역사를 파헤친다. 농민, 노동자, 부르주아, 귀족과 왕정의 이데올로기, 무의식과 현실의식이 어떻게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민중의 봉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한 정면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 번째 미시사를 여는,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를 통해 읽기의 실제로부터 당대인의 생각하기를 도출한다. ‘문화=부패’라는 反문학적 문학의 유형을 만들어내 교양인에 호소했던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과 『신엘로이즈』에 열광했던 18세기 프랑스인들의 내밀하고 진솔한 감정의 메마름을 엿보게 된다. 진실하고 순수한 영혼에 대한 갈망, 그러한 영혼과의 연결에 대한 희구, 저자의 내면까지 관통하도록 장려하는 독서의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수놓는다.
지배적 가치에 대한 반기를 들었던 루소의 소설이 1800년 이전까지만 70개 판본이 출시될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니 당시 대중의 정신은 이미 혁명에 가닿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갈라치기, 자기와 다른 이들의 배제와 억압, 다시금 69시간 노동을 외치는, 그리곤 공기업의 사영화를 통한 시민 삶의 빈곤화를 종용하는 퇴행적이고 사악한 권력을 마주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이 18세기 미시사는 많은 깨달음과 지혜, 그 길로 통하는 어떤 모티프를 발견하게 한다. 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호탕하게 웃는 노동자들의 유머가 유독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냉소적 초연함으로부터 기지와 지혜를 도모했던 18세기 프랑스 대중으로부터 모처럼 진짜 인간들의 역사를 배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역사가 지시한다. 혁명, 민중의 봉기는 기어이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