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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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해야겠다. 편저자(이하 저자라 표기함)존 캐리는 서문에서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으로써 목격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는 글의 선택기준에 따라 엮은 르포르타주 성격의 모음집임을 밝히고 있다. 즉 글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한에서 생생한 현실의 사건으로 독자가 안내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자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장성이 지닌 숨이 빠르고 주관적이고 불완전하기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는 유익이 있기도 하지만, 글의 정교함과 객관적 재현성의 불비라는 한계도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대해 그는 무서운 현실, 뜻밖의 현실과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이라는 르포르타주의 성격이야말로 어떤 의도된 덧칠이 없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규명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후일로 미루기로 한다.(책의 본질을 벗어난 얘기가 될 테니 말이다.)

 

한편 이 책의 한글 번역 제목이 왜 역사의 원전인가의 물음이다. 물론 2500년에 걸친 글들(르포르타주 성격)이다보니 당연히 연대기적 역사서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자칫 저자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기록의 원형들이니 가능한 제목이긴 하지만, 181개 꼭지의 글들 개개의 문체가 지닌 개별성에 주목해서, 닳고 닳은 언어의 추상화를 이겨낸 기록자 개인의 경험으로 읽히기를 의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도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어지러운 다양성을 정돈하기 위해 포괄적 용어들을 이용해 일반화하여 언어의 회색담요 밑으로 사실을 가리지 않은 기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 생명력 없는 객관성의 재현으로서의 역사 서술과 다른 글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 눈으로 봤다!”는 글들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기병대가 적의 우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라는 따위의 기록같지 않은 기록, ()살상의 구체적 표현을 철저히 피하는 이러한 완곡한 서술은 실제를 감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실이 감추어져 있는 글로서 여기 수록된 기록들과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576114일 스페인군의 네덜란드 앤트워프 약탈 기록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기록자인 영국 상인은 시체와 핏덩이로 엉망진창이 된 길거리의 추하고 더러움도 기록하지 않겠다. 매장하지 않는 시체가 썩어가면서 뿜는 독기가 공기에 가득 차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고 쓰고 있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의 기록은 현재성과 구체성을 담고 있다. 열흘 넘게 지속된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앤트워프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무차별적 학살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스페인의 만행을 제3국 이방인의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어떤 황급함으로 인해 예리한 위기감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현장성이 생동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이 대형판형인 이 책의 페이지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끝으로 르포르타주가 지닌 선정성(煽情性)의 문제이다. 사실 선정성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수사인지는 모르겠다. 르포르타주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호기심의 도구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네 뉴스 기사처럼 살인, 학살, 사고, 재해, 전쟁...등등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르포르타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인데, 어쩌면 이조차도 인간 욕망의 본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이나 소외와 고통을 생생히 그려내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봄(듣거나)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겪지 않고 있다는 불멸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곧 이것은 일종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르포르타주는 그래서 종교의 자연적 후계자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르포르타주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심리 저류에는 진정 이러한 종교적 갈망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

 


2500년 인간 역사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기록들이 지닌 생명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마치 살인 선집(殺人選集)”이 될 우려가 있어 이를 완화하려 의도했음에도 인간의 역사적 현장은 피로 얼룩진 것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81개의 기록들 중 3분의 2를 넘는 기록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수많은 전쟁과 약탈, 각종 재난과 또 죽음과 살인, 비열한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 정치적 적에 대한 고문과 처형, 그리고 또 살인, 농민, 노동자 저항과 학살..., 사실 읽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 아예 인간 역사의 기록은 살인과 죽음의 기록이라고 해두자.

 

책을 처음 여는 기록이 BC 430년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아테네를 강타한 역병의 모습이다. 대책없이 죽어가는, 즉은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차 있으며, 이로인해 법질서가 붕괴되고 매장 예법의 대혼란으로 절망에 빠진 아테네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니 이 기록은 오늘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 초기 상황이 아테네에 불리했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BC 401년 그리스 용병 부대원으로 페르시아 정벌에 참전했다 패퇴하여 혈로를 찾아 헤매던 크세노폰(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크세노폰 맞다)의 생생한 글이다.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은 병사들과 동상으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동료들을 버려두고 생존의 도주를 하는 한 인간의 혼돈의 걸음이 눈에 밟히는 것 같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주로에 발견된 마을을 불시에 덮치는 장면들...,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인간의 생존을 향한 의식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의 철학토론의 글들이 친근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읽다보면 역사의 반복되는 동일유사성이 저절로 느껴지는데, 12세기에 국왕 헨리와의 반목으로 처형되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게트의 살해 현장을 기록한 한 사제의 글은 16세기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처형으로 반복되는 수도사의 현장 기록으로 복사된 듯 출현하는데, 죽음에 처하는 두 사람의 대주교 모두 왕에 빌붙어 그 지원으로 대주교가 되자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닮아있다. 야심을 위해 최고 권력의 심복처럼 굴다가, 척을 지는 것이 어찌 그렇게 동일한지 인간 욕망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비참한 죽음임을 후대에 알려주려 했던 것만 같다.(지금 한국 정치권력의 동일 유사함은 구태여 말하지 않으련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과 그 진압에 가해지는 권력의 잔악한 학살의 역사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지역을 망라해서 수없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1851124일 나폴레옹의 파리 진압 현장을 쓴 빅토르 위고의 기록은 인간이란 종의 극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병력 16,400명이 파리에 집결해 눈 깜짝 할 사이에 하나의 도시를 도살장으로 변모시키는 지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총소리 한 방을 신호로 하여 탄환의 소나기가 군중에게 쏟아지지 시작했다.(...) 파리 전체의 4분의 1이 날아다니는 탄환과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 병사들은 아이를 끌어내 죽였다. 웃어대면서 아이의 상처를 칼로 벌려가며 구경했다. (...) 빈둥대다가는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 지하실에도 공기구멍으로 총을 쏘아댔다. 학살일 뿐이었다. 학살은 방사(放射)되어 나갔다. (...) 병사가 행인을 죽인다. 찔러라, 후려쳐라, 베어라! 광란의 살육이었다. (...) 이 범죄, 이 도살, 이 비극을 나는 목격했다.” - 빅토르 위고, <루이 나폴레옹 군대의 파리 진압, 1851.12.4.>

 

190519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기자가 쓴 르포르타주인데,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을 향해 청원을 위해 평화행진을 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궁전 앞 광장에 이르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무차별 사격을 통해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대()유혈 사태의 현장 취재기록이 있는가하면, 191671, 1차 대전의 한 격전장이었던 솜 강() 전투의 부상자 구호소에 참여했던 한 신부의 참담한 기록도 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 광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부상자들은 문자 그대로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못 받아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 , 너무 피곤해서 더 쓰지 못하겠다. (...) 이제 전쟁의 흉측함을 좀 알 것 같다. 하루에 1,000명씩 중상자가 나오는 판에 (...)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아주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대면하고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그 현장성이 주는 생동감이 높은 글이다. 1933227일 독일 의사당이 화재에 휩싸였는데, 이 날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화재 현장에 히틀러가 직접 나온 것이다. 외신기자인 영국인은 히틀러와 그 측근들의 무리를 따라 현장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히틀러가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임을 하느님은 알고 있소, 당신은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있소, 이 불이 그 시작이오.’” , 이 화재 사건은 히틀러 나치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를 탄압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획한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화재현장을 관리하던 내무장관 괴링 대령에게는 하늘이 내린 계시오. (... ) 이 못된 해충들을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는 데 아무 망설일 필요가 없소라고 주위사람들이 들으란 듯 정치적 적대자들을 숙청할 기회임을 시사한다.

 

폴란드 도시 오수비엔침 인근에 1940년 세워진 제1수용소가 아우슈비츠이고, 194110월에 추가로 세워진 제2수용소를 비르케나우라 부른다. 비르케나우에 SS(나치 친위대)가 직접 처형시설을 만들어, 시간당 1천명을 소각할 수 있는 거대한 지옥을 완성했다.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 기록이다. 트럭이 서자 마치 감자나 석탄 짐 내릴 때처럼 짐칸을 기울여 올려 우리를 쏟아냈습니다. 샤워장 같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조그만 창문에서 연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출처폐허가 된 드레스덴 시가 전경첵 755


2차 대전 전쟁 기록과 함께 생체 실험의 역겹고 참혹한 실상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외과의사 면허 소지자였던 기록자는 독일 의사들의 조수로써 해부 외과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을 현대 의학의 선도자로 만들게 했던 사악한 각종 생체 실험들이 즐비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독하게 잔인한 실험의 상세 기술 내용은 옮기지 않겠다. 인간 아닌 인간들, 이 모순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1945214일 영국과 미군 폭격기에 의해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완전히 파괴되고 도시민이 몰살된 현장의 참혹한 기록은 시민들의 잘못된 국가 리더의 선택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돌아 오는지에 대한 냉혹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이 방대한 인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글들을 읽다보면 과연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게 된다. 아마 이러한 자기 성찰적 물음은 눈을 감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일 게다. 한국전쟁도 세 꼭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1970년대의 한 사건으로 맺고 있다. 인류는 자신들의 문명을 으스대고 있지만, 여기 수록된 르포르타주들은 그 문명이란 것의 민낯이란 타인의 죽음을 딛고 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살해와 학살이란 적나라한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그리스 신전의 부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화재의 약탈과 파손, 약소국의 노동력과 자원 약탈을 위한 무자비한 탄압과 광범위한 학살이 동반되는 현장의 기록들이 살해선집으로서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구성된 일견 낭만적이거나 새로운 문화적 이기의 현장 이야기들로도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은 르포르타주, 즉 보도기획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소설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체기술에 대한 참조 도서가 될 수 있으리라. 또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원전(原典)을 참조하는 안내서로서 유용한 도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들은 대체 2,500년간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이 문명이란 것은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지엄한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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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권() 수를 좀 줄여 조금은 가벼운 한 달을 준비했다. 해서 좀 두꺼운 것으로, 한 권의 책에 긴 호흡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으로 오직 다섯 책만을 선택했다. 우선 옥스퍼드 영문학 교수인 존 캐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The Faber Book of Reportage)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종착지에 이르렀다.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이라는 서문을 하고 있는데, 서구 중심의 2,500년 인간역사의 기록들이 목격자 기록이라는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는 어려울 것이겠지만 나름 근접한 기록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라는 신빙성과 긴박성이 진실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현장성이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기록들을 살인 선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르포르타주라는 인간의 관심사는 죽음의 기록들을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각기 MIT와 프린스턴에서 문학과 독문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 두 교수의 공저인 발터 벤야민 평전(A Critical Life)은 원제목처럼 일생을 비평가의 삶으로 지낸 인간에 대한 전기이다. 다만 이 평전은 개인의 사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저술들을 근저로 한 사상에 중점을 둔 연대기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벤야민을 읽는 이들에게는 개별 저작들의 사유의 기초가 되었던 정황들을 접할 수 있어 독서에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기수였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으로 낭만주의를 탐색하는, 그러면서 기성의 문학에 대한 일견 잔혹한 비평을 담아내고 있는 저작으로 보인다. 지적 자만심에 가득 찬 청년기의 저작으로 현학적 글쓰기가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근간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참고 도서로 읽을 만할 것이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 작품을 선택했는데, 프랑스 작가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와 중국 작가 찬쉐의 격정 세계.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은 단 네 사람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도착함으로써 그 이름들의 역사가 술회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요 제재인 홀로코스트보다는 20세기 유럽사회를 휩쓸던 반유대주의에 어린 인종주의와 그것의 근저를 차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보인다. 욕설을 꽤나 주절거리면서 읽어 나갈 것 같다.

 

찬췌의 소설은 더럽고 악취나는 절망의 양상으로 채워졌음에도 한껏 우아함을 뽐내며 오늘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에 빠진 우리 개별 인간들을 떠올리게 했던 전작(前作) 황니가의 생생한 매혹 때문에 다시 시선이 간 작품이다. 무미건조한 삶, 먹고 사는 게 빠듯한 삶, 대충 건성건성으로 사는 삶, 목표도 의미도 없는 삶....” 이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네 삶을 과연 문학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 삶들에 다시 격정을 불러 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소설 같다. 아마 또 한 번 찬쉐의 세계에 빠져들어야만 할 것 같다. 작품만으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에게 하버드, 코넬등에서 문학교재로 찬쉐의 소설이 활용되고 있다는 선전문구는 사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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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상은 가수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로 촉발되어 박지영의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로 연결된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소박한 상념이다. 소설집의 간략한 감상으로 시작해 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는 쓸모없음과 잉여나 허수와 같은 언어를 통해 쓸모와 효용과 생산성의 언어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를 직시토록 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들 효용이니 생산성이니 하는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집결된다고 할 것인데, 바로 쓸모있음이라는 유용(有用)’또는 소용(所用)이다. 이 단어는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로 사용되어 무용(無用;쓸모없음)’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겠다는 폭력성을 은닉하는 지배의 기호로 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를 앓는 일흔아홉 살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실종되기 일쑤인, 아무 쓸모가 없는, 생산력도, 어떤 효용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치매 아버지와 무생물 밥솥이 나란히 거론될 정도이지만, 쓸모의 가치 측면에서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으론 언제라도 폐기처분해도 될 것만 같지 않은가? 효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모순의 언어를 이 사회는 또한 가지고 있다.

 

의사 소통능력을 상실한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나? 멋대로 움직이거나 아무 곳이나 드러누우려 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협이 되거나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자식들이나 배우자등 가족을 향해 사람들은 무슨 도살장에 개 끌고 가는 개장수도 아니고서야 원~, 노인 학대야라고 섣부른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가?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그 쓸모없는 존재를 돌보는 이에게 쓸모없음을 잘 못 보호한다고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소설은 아마 이 이중의 위선적 잣대가 우리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치매환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자식들이 함께하는 매끈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포장된 거짓과 위선으로 치매 가족의 현실을 미화해서 보여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예가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란 제목을 하고 우아한 치매할머니와 시인인 아들이 등장해서 운치있는 풍경 속에 시와 한 잔의 차가 오가는 예쁜 장면으로 연출된다. 치매가 이렇게 우아한가? 똥칠을 온갖 곳에 하고, 한 순간에 사고가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의 연속이다. 치매의 본질을 싹 걷어내고 효자이고, 지극정성의 배우자 모습만을 과시하는 이것들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은 물론 세상 모든 타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유해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치매 아버지를 형과 누나를 대신해 돌보는 마흔의 아들인 주인공 강선동은 남에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선행을 하는 효자로 보이기 위한 많은 위선과 과장을 행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린 한국사회의 많은 우리들은 자기 안의 착한 아이와 싸워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59

 

쓸모있음이라는 말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음이 드러난다. 인간 삶은 결코 유용이나 효용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는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던 형이 죽자, 그 형의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도 형의 블랙홀에 같이 빠져들까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왔음에 내재한 진실을 향한 동석이란 인물의 자기 성찰적 걸음의 이야기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쌓인 눈을 치우고, 상점들의 짐을 거들어 날라주고, 밤새 토해낸 악취나는 말라붙은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는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미화원이었던 아버지 배철영은 약한 지적장애인 아들 배병식이 자기가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 이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웃비()를 선() 지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웃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그들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쓸모있는 이웃이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이 소용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극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동석의 형은 함께하는 동생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해 집에 머물면서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무한도전>을 보며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체적을 최대한 줄이는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때 체중은 50Kg 남짓이었다고 동석은 말한다. 그는 이를 형과 닮은 보이지 않는 이웃 배병식을 통해 상기하는데, 그것조차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동석 자신이라는 고작과 모자라는 병식이라는 존재의 감히의 관계를 넘지 못한다. 동석은 병식에 대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 ‘선 밖의 이웃우리안의 이웃에 존재하는 매우 엄중한 제도 혹은 잣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 같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인 척이라도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세계에 조금이라도 공평함을 돌려주기 위해필요한 것이리라. 위선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행일지라도 진실한 수고가 뒤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밝음을 위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석의 행위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다는 감정을 갖는 것, 아마 여기가 훈련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의 몇 작품이라도 급하게 읽게 된 이유가 있다. 최근 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행태가 다시금 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노래 제목조차 간섭하기 시작하는 형국을 접하며 촉발된 선 밖의 이웃 갈라치기라는 폭력성의 속살을 보다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수 아이유(IU)의 노래 <Love wins>가 성소수자 구호로 이해되어 사회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정해서 Love wins all이라는 제목으로 변경 발표되는 일이 있었다. 발표된 음악영상의 내용은 육면체 상자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인 두 연인을 추적하며 혐오 가득한 편견으로 감시를 그치지 않는 상황 속에 끝내 서로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유튜브, IU 'Love wins all' MV영상 화면클릭(원 영상)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자(Cube,Box)로 상징되는 것은 서구사회에선 익숙한 은유이다. 사회라는 울타리에는 동일성만 유지되고 자기와 다른 이질성에는 곧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억압과 편견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기호이다. 바로 그 편견의 존재를 사랑으로 이겨내자는 노래에 비난을 가하는 세계가 바로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알아본 세계인들의 높은 반향이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노래는 날 데려가 줄래? /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 떠올릴 수 없는 곳으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곤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이라는 음절로 이어진다. 그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벗어난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버림받은 이 세계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은 그래서 세상 끝 다른 세계가 있는 곳을 향해 도망친다.

 

오늘 한국 사회는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적질병자, 노인, 그 밖의 사회적 약자(경비,미화 노동자등)에게 그 어느 때보다 극렬한 혐오의 감정을 뱉어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24년 치매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21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등록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5.1%2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두 집단의 인구만 하더라도 360만 명에 이르고, 여기에 성소수자와 독거노인등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인구까지 더하면 인구 10명에 1명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말이며, 이는 둘 또는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들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라 가정한다면 전체 인구가 모두 이들과 관련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타자라고, 사회가 배제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 일수도, 자식일수도, 형제자매일수도, 삼촌이고 고모와 이모이고 사촌형제이고 조카이며 손녀손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니 잃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테고, 설혹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외면하는 의도의 행위일 것이다. 모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행위에서 동일한 양상을 낳는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의 무지나, 경비노동자에게 자기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발길질을 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다를 것이 없다.

 

사회 약자를 향해 저질러지는 혐오와 폭력들을 방임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은 세계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짜 마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거짓이라도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표현에도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들의 누군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우리들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왜 세계인들이 하나의 노래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청각장애인으로 분()한 아이유가 노래하는 오직 장애인만이 서로 의지가 되는 세상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들의 우주(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노력, 그래서 그 다름의 불신의 정체를 해소하는 걸음을 걸어보자. 혐오와 편견을 저멀리 날려보내고 설혹 위선이라도 행해보자. 아마 우리 세상은 조금은 더 밝고 환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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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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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정령이 의인화된 존재로서 나는 추상성을 즐긴다.(17)”고 작가 토마스 만은 구체적 현실의 인물로서의 개별성을 지우고 인간 일반이라는 추상에 숨어드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나치가 패망하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1951년 발표된 작가의 후기 말년의 소설이다. 그는 비록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표면적 도피의 외형을 보였으나, 문학은 정치적 소명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회색지대의 인간으로 비난을 면치 못 한 것도 사실이다.

 

들어가는 말 [*소설 내용이 일부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이 소설은 12세기 독일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한, 즉 신화적 소재를 끌어들여 현실적 문제를 형상화 시킨 인간애와 죄와 구원의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닮은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여 이중의 죄악과 신성모독, 그리고 혹독한 참회와 신의 은총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해피엔딩이다. 이 거듭되는 육체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이야기의 정령으로 베네딕트회 사제인 클레멘스의 입을 빌린 것이나, 그가 반복하여 성스러운 띠를 두른 나로서는과 같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작가의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화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심인물로 추정컨대 6세기 말의 기독교 세계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주장처럼 시대의 규명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에 앉아 특별한 교화로서 사제 클레멘스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시대를 알 수 없다는 것과, 이야기 정령의 시간과 장소의 편재성, 20세기 어느 날이기도 하며, 21세기 바로 오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바로 오늘의 현실적 현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으로 가득 찬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도(거센 파도)와 같은 종소리! , , 수많은 종이 진동하고 흔들리고 있다.” 

- 9, 372

 

소설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동일 유사하게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아주 다르게 다가온다. 첫 문장에서는 바빌론 언어의 혼란처럼 뒤엉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전쟁 후 책임 소재와 그 처벌과 용서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같다. 그런데 이 문장이 다시 기술되는 곳에서는 하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에 감동되어(...) 일곱 교구의 종이라는 종이 모두 저절로 힘차게 흔들리며화합과 관용을 담은 은총의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속이 거북해짐을 느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는 이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초월적 관용의 도덕에 기만과 위선의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그래서 나는 이 혼돈의 양가감정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라는 의혹 속에서 토씨까지 면밀히 읽었다.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는 이미 거장의 솜씨로 숙성된 소설가의 재능만큼 매혹적이다. 플랑드르 및 아르투아의 군주 그리말트와 그의 부인 바두헤나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는다. 바두헤나는 아이들의 출산과 함께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함께 태어난 아이들, 빌리기스와 지빌라 남매는 자신들만큼 고귀한 존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민의식과 더불어 서로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깊은 사랑을 공유하며 성장한다. 아버지인 그라말트 군주가 죽은 날, 오빠가 누이동생과 남자로서 여자와 동침한다. 그때 두 사람의 침실 사이에 있던 개 하네기프가 울부짖자 빌리기스는 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야기 정령은 사랑과 살해, 육체의 위기가 뭉쳐진 덩어리였다.”고 절묘한 어둠의 미학을 뽐낸다.

 

죄악은 열매를 빨리 맺어 두 사람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군주가 된 빌리기스는 참회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묘(聖墓) 순례길에 오른다. 지빌라는 충성스런 귀족의 수성(水城)에 은거하여 아들을 출산하지만 황제의 품위를 지닌 아이는 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는 아이다. 아이를 신의 손에 맡기기 위해 출생내력과 함께 상징적인 옷감과 금화를 넣은 통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이에 대해 정령은 빌리기스 남매 이야기는 측정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의 은총에 관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나치의 순혈주의, 자기 동일화라는 복제적 생산 행위가 신의 은총을 입증하는 행위라는 괴변(怪變)을 주절거린다. 역겨움이 올라오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그칠 수 없다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계속 읽어나간다.

 

순례길에 나섰던 남편이자 오빠인 빌리기스의 죽음 소식이 전해오고 지빌라는 분명 죄 많은 여인임을 자인하지만 오빠의 죽음이라는 신의 권고를 영원히 부인하겠다고 다짐한다. 생명이 끊어진 수녀 같은 군주로서 죄를 범했던 벨라페르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만에 있는 브뤼주성에서 은둔하며 참회하는 금욕 생활을 한다. 뛰어난 미색의 여자 군주를 손에 넣으려는 뾰족수염의 로저라는 아레라트 왕위를 계승한 악마같은 놈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플랑두르를 무력 침공한다.

 


일명 연애전쟁으로 불리는 저주스런 전쟁이 계속된다. 바다로 띄워 보냈던 아기는 폭풍우 치는 둘 째 날 어부들에 발견되어, 노르만 군도의 작은 외딴 섬 성둔스탄의 아고니아 데이(신의 고뇌) 수도원 원장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거두어진다. 통 속에 아이와 함께 발견된 아이는 부모의 형제이며 조카가 된다는”  서판의 내용을 읽고는 신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고난으로 삼으셨다.”, 명백하게 계시된 신의 계획에 따라 신중하고 현명하게 아이를 양육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젖형제로 키워진 플란의 코에 집중된 일격을 가한 우연의 사건으로부터 출생의 모호한 비밀과 주변 인간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자기 억압의 의혹으로부터의 해방을 맞는다. 수도원장의 위엄있는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그레고리우스는 통 속의 옷감으로 기사의 옷을 지어입고, 원장이 증식시켜 놓은 금화를 지니고 삼촌이자 고모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알지 못하는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성장한 아이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괴물성이 지닌 죄악을 말할 때 네가 과장해서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아주 고귀한 태생이라는 사실이라며 그의 입을 통해 다시금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개 낀 바다를 표류한지 17일 만에 저항하는 최후의 도시에 도달하게 되고,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 군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청년기사, 자칭 물고기 기사인 그레고리우스는 참회의 일환으로 기꺼이 여 군주를 위해 적과 싸울 것을, 군주의 승인을 청하고, 그것은 수락된다. 남자대 남자로 뾰족수염 로저와 싸우는 것이 단지 여왕을 위해서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여왕을 얻기 위해싸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절대적으로 온힘을 집중해 꼭 쥔 손을 통해 폐허가 된 나라에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여왕은 결사적으로 자기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낀다. 여왕은 통 속에 넣었던 똑 같은 옷감이라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하며, 조롱하듯 타오르는 망상, 사라져버린 이성에 의해 스스로 낳은 죄악의 자식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또 하나 숨겨진 야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순혈주의에 도전한 인접국의 구혼자를 뾰족 수염 로저라고 당대를 휩쓸던 사회생물학의 우생주의가 유대인에게 덧씌운 이질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곤 여지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레고리우스에게 포획되는 것으로 그려, 나치의 유대학살을 미화한다. 지독하고 집요한 독일의 순혈주의, 타자에 대한 극렬한 혐오가 여전히 토마스 만 의식의 저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두 사람은 국가적 결혼을 치루고 거짓으로 세워진 행복 위에서 두 아이를 낳는다. 진실은 다시금 드러나고, 두 사람, 아들이자 조카이며 남편 그레고리우스와 어머니이자 고모이며 아내인 지빌라는 생각의 몰락, 세상의 몰락이 닥쳐왔음을, 첩첩이 쌓인 죄악과 신성모독에 대한 참회의 길만이 자신들의 앞에 드리워졌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이야기 정령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절망할 수 있어도 신과 그의 충만한 은총에 대해서는 절망 할 수 없다.”, 그들의 죄과를 신의 초월적 구원에 맡겨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다. 문학 거장으로서의 미학적 성취와 달리 토마스 만이라는 한 인간의 기울어진 도덕성을 발견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레고리우스는 여왕의 남편, 대공의 자리를 버리고 혹독한 참회의 길에 나서고, 여왕은 나라를 사촌에게 위양하고 노숙자, 병자, 불구자, 나환자들을 위한 보호소에서 그들을 위한 낮은 자리에서 20년의 일생을 바친다. 그레고리우스는 지독한 불신자인 성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어부에 의해 호수 가운데 외따로 높이 솟은 바위에 사슬에 매여 버려지고 그렇게 그는 17년을, 퇴화된 사지를 지닌 고슴도치 같은 작은 몸이 되어 참회의 시간을 보낸다. 이 지독한 참회의 세월을 보내고 신의 계시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역사에 써진 교황 그레고리우스다.

 

마치면서

 

크나큰 지옥의 열매들에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 이야기 정령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행복할지어다.”라고, 17, 20년의 참회는 엄청난 것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며 이 만큼의 시간으로 신에 참회하면 모든 죄과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정의를 잊으라고 말 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던 카뮈의 목소리가 이 파렴치한 목소리에 대항하여 들린다. 나는 이 소설이 노회(老獪)한 작가 토마스 만의 자기기만, 자기 사면의 언어로 읽힌다. 어찌 이 자기 동일성 반복의 폭력, 타자 배제의 참혹한 역사의 당사자들을 위해 환희의 종소리가 울리고 영광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이야기 정령에 은닉된 목소리들에서 인류의 오래된 전체주의적 욕망만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연 오독일까? 인류에 혹독한 과오와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에 면죄부를 주려는 이 세련된 수사에 지옥 불이 내려치기를! 이 작품은 이러한 파렴치의 존재가 언제나 인간의 윤리를 혼돈으로 내몰고 있음의 증거로서 거듭 읽혀야 할 악마의 이야기 일 것이다. 자기 참회의 길을 걷는다면 그 어떤 죄악도 용서되어야 하는, 즉 자연의 절대 진리가 되었건 우주 창조의 유일자가 되었건 그 무엇으로 표현되던 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영예와 은총을 부여하는 관용의 윤리에 나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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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8 0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회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필리아 2024-01-28 19:16   좋아요 1 | URL
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죠.
용서한다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죄 지은 자의 내면의 문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이는 문제인 죄 지은 자가 타자에 저지른 해악의 당사자로서 ‘응당의 처분‘에 관한 것이 이 구원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을 학살하고 그 응당의 처벌이 사라지는 것이 정당한 윤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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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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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토리노 태생의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인간 조건에 대한 명상록이자 회고록이기도 한 주기율표는 독특한 구성으로 역사와 철학과 윤리의 성찰로 독자를 이끈다. 주기율표상의 원소마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유대인 마을의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어머니의 어머니들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을 엮어 이 세계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경쾌하게 써내고 있는 저술이다.

 

내 학부시절은 군사계엄이 연속되는 시대를 관통했다. 대학 정문은 계엄군이 가로막고 서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대자보에는 파쇼라는 수식어가 붙어 당시 군사독재 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곤 했다. 파시스트라는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대중을 향한 언어는 단순 명쾌해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한 마디로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며, 그 하나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이념이다. 즉 한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키 위해 권력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 이외의 그 어떤 다름도 부정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작금의 검찰 독재권력이 요구하는 것이 이러한 자기 동일성의 강요이다.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국민적 요구는 자기들과 다른 것이기에 부정되고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며, 급기야는 폭력과 살상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권력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전 토리노대학 화학과 최우등 졸업생으로 유망한 미래가 기대되던 청년이었다. 때문에 이 저작이 화학 원소마다에 꼬리를 문 회상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연(Zn)의 장에 있는 글인데, 그의 학부시절 실험수업의 한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회상이다. 실험 조교는 그에게 아연을 주고는 황산아연을 제조하라는 과제를 부과했다. 실험실에는 황산용액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에 쉽사리 주어진 과제를 제조할 수 있다. 즉 황산과 아연을 결합시키면 되는 것이니 단순하게 보인다. 그런데, 순수한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아연은 황산과 반응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으켜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생성하려면 불순물, 즉 다른 물질이 존재하여야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아연이 담긴 묽은 황산용액에 황산구리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불순물이 첨가되자 반응이 시작된다. 하얀 모피처럼 수소기포가 아연을 둘러싸고 황산아연으로 결합 반응을 시작한다. 우리네 삶과 사회의 생명력이란 이처럼 불순물이 필요하다. 사실 땅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키워내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시즘, 검찰 독재권력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금하고 배제하기까지 한다. 이 세계에는 결코 얼룩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게 존재한다면 정말 역겹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생존과 진화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은 이처럼 다름과 차이의 수용과 결합이 중추를 이룬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화학, 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여 단계마다 검증이 가능하고, 방송이나 신문처럼 거짓말과 공허함이 난마처럼 뒤얽힌 것이 아닌 화학이야말로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 윤리적 성찰로 견인하는 사유들이 빼곡한 이 저작이 지금 내 시선에 들어 온 것이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이 세계의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52,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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