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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평점 :
“오늘날 우리는 수치심의 위기를 지나가고 있다. 무례함이 부상하고, 천박함이 번성하고, 뻔뻔함이 늘어나며, 조심성, 수줍음, 절제, 거리낌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 이 세계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수치심의 위기다.”
- G. Hanus, A.Finkielkraut <레비나시아 학습 노트>에서
책은 수치심에 대한 구체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그러기위해 수치심의 역사 궤적을 통과하고, 그 변화하는 개념 아래에서 사회적 모멸이며 사회적 사실로서 개인과 집단을 감금하는 악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유형을 탐사한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도치, 전복, 파괴, 정화함으로써 윤리적 힘, 혁명적 힘의 동력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처럼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여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가하면 국제외교무대에서 이것들의 천박함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 수치심을 이중으로 겪어야하는 고통까지 안긴다. 이것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할뿐더러 그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것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수치심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수치심은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기 이전의 것과 그 성분이나 형식이 다르다. 개인과 가족,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처입고 훼손되는 명예의 실추에 따르는 전통적 수치심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6세기 데카르트는 “수치심은 자기애에 토대를 둔 슬픔으로 비난받으리라는 생각에서 온다.”고 《정념론》에 썼다. 자본주의 발흥과 시기를 함께하며 수치심은 이렇게 소심한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그 개념이 축소되어, 죄의 문화로 변질되어 버렸다. 수치심에 내재되어있던 정의가 몰수되고, 개인화되었으며, 자본주의 상품화논리에 수치심 본질의 한 축이었던 가족적 윤리를 맥 빠지게 만들어버렸다.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 《곱세크》의 주인공인 고리대금업자 곱세크 집 문턱을 넘으려면 읽게 되는 문장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 들어서는 그대, 모든 수치심을 버려라!”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현대성은 명예없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의 이등항해사 로드 짐이 자신의 이미지와 이름의 손상이라는 수치심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홀로 재판정에 서 죽음을 수용하는 이야기 속 명예있는 존재로서의 수치심과 그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공공법률+상거래+개인적 자유의 역할”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이다. 영리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심리적 얼굴로 수치심의 얼굴이 바뀌었다. 명예는 변모하여 ‘체면과 정상성(正常性)’, 즉 ‘표준’이라는 미묘한 사회적 행동모델로 변했다. 명예없는 현대세계에 정상성이라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새로운 명예가 된 것이다.
정상성이란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괴물같은 언어다. 오늘 이 정상성의 기준지표는 지극히 단순화되어 돈과 안락함이 지배한다. 즉 비정상성의 기호는 ‘가난’이라는 추상적 판단에 의해 사회적 멸시가 되었다. 옷, 말하고 먹고, 걷는 방식, 이빨 빠진 사람들, 작고 어둡고 계급없는 사람은 정상성을 구분하는 기호이다. 타인들의 말과 눈길 속에 작동하는 비교, 우리를 억압하는 멸시는 이렇게 출현한다. “오염, 얼룩, 불투명성이고 들러붙은 끈끈한 부정성,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 실체”, 자신의 좌표에 대한 수치심, 문화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수치심이 상징적으로 배제하는 폭력으로, 수모와 수치의 반복된 경험으로서 작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사회철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나로서는 사회적 수치심보다 성적 수치심에 대해 쓴 것이 한결 쉬웠다.”며, 세계의 분리와 경계, 문턱과 문을 발견하게 하여 자리의 박탈을 의미하는 사회적 출신이라는 멸시 기호의 끔찍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난은 선험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 될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는 몇 십 년(40여년)에 걸쳐 가난을 패배로, 개인의 실패(의지결핍, 게으름, 비겁함 etc.)라고 윤리적 얼굴이라 내면화시키는 학습화를 집요하게 추진했다. 가난의 수치라는 사회적 멸시를 내면화한 결과가 인간 행복의 열쇠를 엄청난 소득에 두고 그것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세상은 당연히 이런 것이라고,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고, 사욕의 뿌리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빅토르 위고는 “잠에서 깨시오, 수치심은 이제 그만!”이라고 1850년에 이미 자본주의 물질성에서 깨어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정치적 분노를 할 줄 모르는 나태한 상상력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유명한 글이 있다. 카뮈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에는 작가의 분신인 어린 자크의 분노하는 수치심이 있다. “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 건 어머니가 멸시당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용감하게 쉬지도 않고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그러자 곧 나의 수치심에 대해 수치심이 든다.”, 수치심을 느끼는 자체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 불공정한 가치 체계를 그렇게 쉽게 지지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서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멸시와 고결한 분노의 두 가지 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로서 우울의 수치심이 있다. 졸라의 《목로주점》에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자신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수치심에 잠겨 거리에 자신의 매력을 팔기위해 서있는 제르베즈의 마지막 쇠락 장면이 있다. “끈끈하게 들러붙는 지상 조건의 낙인인 몸 자체에 대한 수치심”이다. 수치심에는 세 가지 큰 영역이 있다. 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몸은 영혼에 수치심을 안긴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가 감수해야하는 타인의 무심한 눈길로부터의 외면, 무리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질적 두려움의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고통. 비곗덩어리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인 소위 사회적 품위를 지녔다는 인간들의 품위가 얼마나 비겁하게 주어지는 지를, 타자의 사회적 멸시를 통한 배척을 토대로 구축되는 그 더러운 품위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라!”, 원통함과 엄청난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이렇게 수치심에는 혁명의 씨앗이 움튼다.
사회적 모멸은 사회적 사실로서 외상성 수치심이라는 깊은 상처를 개인들에게, 집단에게 각인시키기도 하는데, 강간, 근친상간과 같은 윤곽도 분명한 오욕적 장면의 기억이 지닌 치명적 수치심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 권위주의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합의 결과로 생겨난 이 수치심은 수줍음의 도덕적 가설을 여성성의 특징으로 내세움으로써 희생자를 겨냥한 가해자들의 폭력성을 가라앉히는데 주력한다. “더는 저항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업자득이지 않습니까?”와 같은 악의적이고 비뚤어진 희생자 여성을 향한 심문은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원했다는 의미로 둔갑시킨다. 이러한 강간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 중심의 공적 판단 논리는 권위적 국가를 마주한 시민들에게도 동일하게 가해진다.
2009년 용산 재개발을 강행하려는 상가철거에 맞선 상인 6명을 죽음으로 몰고 23명을 중경상에 빠뜨린 당시 폭력사태를 지휘하던 서울시장(오세훈)과 서울경찰청장(김석기)은 시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자업자득의 논리, 저항의 극렬함만을 강조하고 시민 안전, 인권 보호와 같은 자신들의 책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간이건 국가폭력이건 다들 가해자는 항시 희생자가 “순수한 희생자”가 아님을 입증하려 든다. 저항을 진정으로 입증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는 이 구토나는 혐오스러움이 이 사회를 짙게 덮고 있다.
저자는 사회적 모멸과 사회적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설명하며 영원한 굴종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불의한 이 세계의 체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내모는 체제는 폭력 자체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타자들의 소유를 점유하면서 커지는 이 부당한 점유가 ‘발가벗은 힘’, 타자들을 장악하고 함부로 하려는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발가벗은 힘의 상징적 제도화임을 입증한다. 강간, 학대, 근친상간 폭력에 대한 사법과 공권력의 시선은 이 세계의 추잡한 정치 체계를 요약한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체계, 이 역전된 수치심을 가해자의 진영으로 전환시켜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정의 아닌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계가 수치심에서 정의를 제거해버렸지만 우리는 이를 회복시켜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남편 콜라티누스의 동료인 에투루리아의 왕자 타르퀴니우스에게 강간당한 루크레티아의 자결 신화는 정치적 성적 토대를 제시한다. 동침을 거절하는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노예와 동침한 부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협박에 그녀는 자포자기한다. 루크레티아는 이 수치를 남편에게 알리고 자살하는데 그녀의 시신을 마주한 로마인들의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로마 공화국 수립을 초래한다. 이 신화의 정치적 의미는 보완성의 약속이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이 수치심에는 교묘한 이중의 얼굴이 숨어있다. 여성의 다소곳함, 여성의 정절을 찬양하는 불순한 젠더화가 있으며, 사회적 사실로서의 폭력에 대한 수치심, 윤리적 수치심이라는 두 얼굴이다. 공화국이란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고정된 자리와 보완적 의무를 맡김으로써 성립했다는 것이다. 공화국을 보장하기 위하 라틴식 질문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충실한가? 여성의 성생활이 남편의 정치적 완성을 보장한다. 남성에게는 정의를, 여성에게는 수치심을 안겨라.”, 이 세계를 지탱하는 정치쳬라는 것의 불온성과 불모성을 엿보게 하는, 오늘에도 무심히 읽히는 신화다. 우리들은 무의식중에 이러한 태도를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이 불온성과 불모성의 실체인 파렴치함이란 조심성의 부재로 알아본다고 한다. 반면에 수치심은 어떤 일을 행하기에 앞서 그 도덕적 성질에 따라 정지시키고 한계 짓는 능력이다. 다시말해 파렴치는 수치심의 부재라는 의미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는 이처럼 악을, 불의를, 멈출 수 있는 생각으로서 윤리적 수치심을 뜻하는 아이도스(Aidos)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수치심을 영혼의 독으로, 중대한 장애물로, 행복을 가로막는 최악의 적으로 규탄한다.” 그렇기에 수치심을 윤리의 기둥을 표상하는 정서로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향연》에서 언급하듯 “수치심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허영심, 착각, 말과 행동사이의 괴리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으로 본성을 과장으로 왜곡되지 않게 막는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만약 ...라면 난 너무 수치스러울거야” 라는 우리네 일상 속 문장처럼 윤리적 수치심은 상상력으로 지지되는 생각의 경험을 먹고 자라는 자가-정서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철학이란 바로 앎에 대한 오만, 사회적 안락에 대한 확신을 모욕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들에게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안겨 영혼을 발가벗기고 관통하며 박탈하고 화나게 노출시킨다. 그럼으로써 억견(臆見) 직전에 어리석음과 영적 저속성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무지보다 훨씬 위험하고 해로운 것은 바로 안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안다고 믿고서 타인들에게 그 알량한 지식을 강요하길 즐기고 뻐기면서 경멸의 이유를 찾는 악의 평범성이기도 하다.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망, 철학은 이러한 진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소크라테스가 왜 아테네에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상기해보라. 대중 앞에서 영혼이 발가벗겨진 거들먹거리는 정치인들, 거만한 법관들, 건방진 예술가들은 드러난 천박성으로 인한 자신들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불의한 힘에 의해 죽어야만 했음을 오늘 우리들에게 상기토록 한다. 지금 벌어지는 70~80년대 이 땅에 민주주의 토대를 만들어낸 민주투사들을 폄훼, 평가절하하려 총공세를 가하는 기득권의 추한 토끼몰이식 저열함을 보라,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에 부하뇌동하는 우매한 대중들을 보라.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혐오논리의 복귀, 폭력의 두려운 반복을 예방해준다. 고통을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하는 기만적 무구(無垢)함이 죄를 구성한다. “무구함의 반대말이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인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와 불공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주의깊게 바라본다. 계통적 수치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동류로서 공감할 줄 아는 자의 수치심,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이르는 말이다.
계통적 사회 멸시, 계통적 권위주의, 계통적 (인종) 차별주의, 계통적 가부장주의, 큰 행운을 누렸음을 인정하는 진지한 목소리, 객관적 지배자의 수치심이다. 우리는 모두 권리 승계자로서 태어난 마땅히 치러야 할 수치심을 지녀야 한다. 인간이라는 수치심은 “밑바닥에 떨어진 인류를 마주하고 보이는 일종의 저항이고 넌덜머리 난 초탈이며, 다른 되기에 휩쓸리려는 욕망”이라 한다. 존 M.쿠체는 《추락》에서 백인으로 고통스러운 상속자의 수치심을 말한다. 아파르헤이트로 유색인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한 모멸과 가학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주인공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계통적 수치심이요, 윤리적 수치심이다.
이제 우리는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어내야 한다. 수치심이 피해자, 희생자의 몫이 아니라 바로 가해자의 것이 되어야 함을. 로스탕의 극작품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의 코가 기형적으로 커 조롱의 대상이 된 주인공이나, 장 주네의 소설 《도둑 일기》에서 감화원의 그 극한의 치욕의 현장에서 수치심의 진영을 바꾸고, 치욕의 장소를 점유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입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치심은 반전 시킬 수 있으며, 그 속성은 이미 도치와 투사, 전복, 정화를 통해 변화시키는 에너지, 실존의 연료로 삼을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수치심은 윤리의 기둥이며, 연대의 표식기다. 세상의 어리석음, 운 좋은 자들의 잔인한 악의에 대한 분노이자 증오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은밀한 분노이기에, 또한 부당한 멸시에 대한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이며, 정의에 대한 부정을 강요하는 멸시에 대한 분노, 이 구속에 맞서는 생명의 힘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치심은 혁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사회체제와 대중문화가 비록 우리들의 상상력을 좌절시키도록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자리에 서보거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기도 하다.
책은 이처럼 수치심 작동의 메커니즘에서부터 수치심의 다양한 형태들, 야기된 수치심들이 개인과 집단에게 기대하는 불온한 효과들, 그리고 사회적 모멸과 사실로서의 수치심을 “비처럼 쏟아부어 무시의 눈길이 축적되고 딱딱한 껍질이 되어 영혼을 옥죄”어 인간을 수동화시키는 광범위한 악의 파렴치가 점령한 세계의 현상을 마주하게도 한다. 임레 케르테스의 말처럼 오늘 우리들은 “산다는 수치심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성이나 계층과 인종적 차별이라는 상투성의 항구적 재(再)할당으로 벗을 수 없는 공식 속에 인간을 가두려는 본질주의가 판을 치고, 작은 차이나 격차를 포착하여 배척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낙인찍기가 이 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의 관계의 투명성에 빼내져 힘과 특권을 누리는 타인들의 광기 속에 구속되기 일쑤인 세상에 살고 있다. 정말 불온한 세계이다. 아마 이 화려하고 박학한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진심과 노고를 절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고 철학과 신화, 문학(소설,희극,시)작품들의 이야기를 예시하며 수치심의 잎맥을 재구성하여 그 구체적 메커니즘을 신랄하고 극적이고 섬세하며 진지하게 다루어 내고 있는 명 저술이다. 책을 읽고나면 수치심이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주된 정서임을 숙지하게 되고, 한편으론 새로운 삶의 세계를 향한 투쟁의 기표임을 발견하게 된다. 갈수록 무례함과 무람없음이 늘어만 가는 이 세계가 너무 불온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세상에 대해 수치심을 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이 모욕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우리들은 함께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한국의 정치 사회는 급격하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수치심을 모르는 것들이 장악한 세계에 체념해서는 안 된다.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라 프리모 레비가 말했다. 이 책은 이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수치심의 정체를 거의 완벽하다시피 할 정도로 파헤쳐내고 있다. 이제 이것을 가공, 구상, 다듬어서 순화하여 새로운 형태의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우리들의 태도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발가벗는 순간을 안간힘을 다하여 모면하려는 마음 속 두려움은 윤리적이고 혁명적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악한 폭력의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후자가 난무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전자로 전환할 수 있다. 아~, 이 저술은 수치심이라는 정서에 대한 고전적 지위의 명저로 남을 것 같다. 아니 인간 세계에 오랫동안 읽힐 위대한 명저로 손색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