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군, 내가 죽고 나도 ‘수치’는 살아남을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그의 저술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에서 ‘장 폴샤르트르’의 ‘우리는 대중 앞에서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빈틈 많은 주장을 인용하면서 “타자는 꼭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인간 내부에 있는 수많은 눈과 같은 무엇이 있음을 지적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사욕으로 똘똘 뭉친 한 인간의 끔찍한 짓, 비열한 짓거리와 그 타락하고 부패한 처신을 보며, “대체 저 인간은 어떻게 수치심도 안 느끼고, 자기 눈길을 견딜까?”라며 수치심이 부재한 인간에 대한 의아의 탄식과 분노를 쏟아낸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작품에 《개의 연구(이하 ‘연구’로 표기함)》라는 의미심장한 미완성 소설이 있다. 카프카의 생애 말년 소설인데, 주인공인 ‘개’는 작가를 대변하는 유대인이다. 이 개는 그 유례가 명확히 밝혀진 존재인데, 갈색 노트로 알려진 1922년에 기록된 글을 담은 카프카의 네 번째 노트에 제목도 없이 미완성으로 써진 이야기다. 카프카는 “이것은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더없이 축소된 요소들에 대한 발견이자 탐구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그의 생애를 장악한 당치 않는 모욕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해결 불가능한 수치심에 고뇌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집요한 연구임을 의미한다.
조금 사유를 건너뛰어, 유대인을 향해 적들이 사용하던 ‘개(犬)’가 왜 프란츠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는가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 개는 주변의 부정적 시선이 유발하는 수치스런 단어다. 그런가하면 이 단어를 유대인 내부에서 다른 유대인을 향해서도 뱉어내는 단어이기도 했다. “개(犬)들과 함께 누워있으면 벼룩이 옮는다.”며. 프란츠와 우정을 나누는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 친구인 뢰비를 향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모욕적 언사로 내뱉기도 한다. 프란츠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고, 즉각 이 말을 기원으로 문법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두 개의 문장을 만든다.
그것은 “벼룩이 옮은 자는 그 자신이 벼룩이다.”와 “개들과 함께 누운 자는 그 자신이 개다.”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잠에서 깬 잠자가 자신이 거대한 갑충임을 발견하는 《변신》이 바로 변형시킨 첫 문장을 출발점으로 한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여러 작품에 사용되는 데, 그 첫째가 《소송》의 마지막 부분인 “개 같이” 죽는 자신의 모습이고, 두 번째가 <유형지에서>의 탐험가 행위다. “내가 이 일을 보고도 묵인한다면 난 개다!”라고 말하면서 곧 네 발로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대단원이 바로 《연구》다. 즉 유대인들 자신들이 처한 해결 불능의 수치심에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집요한 탐사 이야기다. 제목이 아주 얄궂은 데, 이는 두 번째 문장을 변형한 2차 변형문장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이 모두 카프카의 일기와 노트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이 개라면 개는 유대인이다.”라는 것이다. 즉 소설 《연구》의 주인공인 개는 바로 유대인인 작가의 분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이야기는 개를 주인공으로 한 우화가 절대 아니며, 절망한 유대인 남자가 또렷한 정신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세하게 관찰한 구체적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만을 밝혀둔다.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있던 나였지만 말이다. 아니 매우 자주 주변의 친밀한 관계에마저 어떤 불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을 그저 보기만 해도, 어떤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편함과 두려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소설의 이 한 단락만을 인용해도 곧바로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텍스트에서 절로 떠올라 유령처럼 쫓아 버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애성 수치심’을 말하기 위해 에둘러왔다. 수치심은 대중 앞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타자로 인해서 느끼는 것이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면, 카프카는 자기의식의 판관이 될 수 있는 완벽하게 분리된, 즉 외재성처럼 투사하는 내면의 법정이 있었다. 압도하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내면의 지엄한 눈에 사로잡힌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내면에 무수한 타자를 지니고 있다. 프레데리크 그로가 자아의 형태에 따라 세 가지 수치심을 설명하는 글이 카프카로 냉큼 건너뛰게 했는데, 이 널뛰기의 욕구는 현실 한국사회의 수치심 부재, 혹은 수치심을 자기 것으로 삼을 줄 모르는 원초적 나르시시스트, 정신이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 짓거리에 대한 그 불모성의 이론적 확인 가능성 때문이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삼중의 수치심에서 해방되지 못했는데, 개인성을 주눅 들게 하는 주변 환경의 시선이 일차적이고, 그 수치심의 근원인 유대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류 사회에 동화(同化)하려는 행위에 내재된 부당함을 지지하고 승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이차적이며, 동화를 희구하는 유대인과 다른 유대인이 서로 경멸하는 유대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꼴사나움, 스스로에게 눈먼 바로 그들과 동족이라는 데서 연원하는 수치심이다. 이처럼 한 인간은 온통 도덕의식에 휩싸여 인간 실존의 고통에 대한 후대를 향한 풍부한 탐구의 초석을 남겼는가하면, 오늘 이 땅의 어떤 인간들은 이 엄중한 실재하는 도덕적 정서가 어떻게 부재할 수 있는가의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치심이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학에 달린 것이기에 카프카를 에워싼 수치의 고뇌는 자신과 가족, 유대 집단에 대한 연민과 유대를 토대로 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치심이 부재하다는 것은 애초에 사회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뿌리를 내리지 않거나 않으려는 인간임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즉 공동체의 이익과는 무관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무리는 절대 수치심이란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dl 이 수치심을 야기하는 내면에 대해 좀 거칠게 프로이트의 자아 분류를 사용한다면 ‘초자아,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자아란 나를 제압하는 내면의 판관으로서의 눈이다. 즉 나의 도덕적 의식을 키우는 기준이기에 내면의 법정이 야기하는 수치심은 내 행위에 앞서 조심성과 신중함을 부여해 부당하거나 불의한 것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게 해준다. 사실 수치심을 좋은 것 나쁜 것이라 말하는 것이 그리 적절한 표현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를테면 윤리적 수치심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심이 마냥 유익한 것만은 아니어서 엄격한 판관일 경우 지나치게 삶을 옥죄게 되어 과잉의 수치심, 즉 굴종이 예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크게 야기하는 것은 ‘이상적 자아’ 또는 ‘자기애성 자아’란 것이다. 바로 지금 한국의 정치권력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의 정신이 전능한 힘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전제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환상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서 이 전능함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자기애성 수치심은 손상을 입게 되고, 패배의 자각을 하게 한다. 이때 이 이상적 자아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는데, 바로 손상된 상처를 회피토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참을 수 없는 전제적 자아이기에 이 수치심은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작업에 돌입하고, 타인을 향해 고함과 욕설을 퍼붓는다. 다시 말해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고 자기애성 자아를 쓰다듬는 것이다. 이상적 자아에 결박된 이 자아를 ‘원초적 나르시시즘, 또는 광적 자기애, 아기 폐하’로 부르는 이유이다. 학교 폭력의 주체인 아이들,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 집단이 수치심이 부재한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것이 바로 이 자기숭배라는 얼빠진 넋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를 억압하던 반사된 수치심이기도 한데, 바로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는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던 그것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카프카로 대표되는 유대인이면서 반유대주의자인 인간, 프란츠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이 어리석음에 대한 수치심과 초자아로서 법이라는 사회적 주류의 시선이 부여하는 수치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자아-이상’이라는 타인들의 눈에 보이고 싶거나 그들 담론 속에 어울리고 싶은 모습으로서 자아인, 사회적-모델로서의 실패로 인한 수치심, 즉 자기 비하 메커니즘의 작동으로 인한 수치심에 더불어 얽혀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사회-이상적 수치심은 그 메커니즘의 본질로 인해 프란츠 개인이 돌파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능성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연구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상적 자아라는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일화로 1993년 1월 9일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아내와 두 아이의 살해, 그리고 부모와 개까지 살해한 장클로드 로망이란 인물을 소개하는데, 이는 후일 ‘에마뉘엘 카레르’의 실화소설 《적 L'adbersaire》으로 알려져 제법 많은 이들이 알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가짜 의사 면허, 국제 보건기구 관리라는 날조된 삶으로 점철된 거짓말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인간의 이야기다. 자기 전능성의 손상이 전부 외부의 탓으로 전가되어 기만적 삶이 축적된,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 된 인간이 종국에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벌인 희대의 파국적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에브라임 라비노비치라는 인물을 호출하게 하는데, 바로 주류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유대인의 표식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바꾸려하고,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귀화신청까지 하는 사람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눈앞에 다가오고 반유대주의 열풍이 불 때조차 그는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 라며, 붕괴된 자아를 남의 탓으로 싸매려 한다. 이 자기애성 자아인 이상적 자아는 수치심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결국 가족과 자기 파멸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이 이러할 때, 나아가 국가의 리더가 이렇게 자기애성 자아에 매몰되어 있을 때, 가족과 국민은 파멸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연구》의 개는 철학자이자 현자이다. 작가의 이 지적 분신은 “내가 아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의 모든 근심을 공유하면서 개들 중에서도 개였을 당시를 뒤돌아보며 세밀히 관찰해 본 결과 애초부터 거기에 뭔가 비정상적인 것, 작은 균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소설의 도입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미리 고지하고 시작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아의 성분과 그 작동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설 《연구》는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깃든 끊임없는 억제의 역동성에 작용하는 요소, 힘들을 집요하리만큼 꼼꼼하게 질문하고 답하는 치열한 자기 탐사다.
늦었지만 오늘 우리 사회가 잊어버리거나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해 볼 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 전부가 온통 자신과 공동체 내면의 성찰인 것에 동종의 인간으로서 겸허와 경외를 느끼게 한다. 더 이상 이 땅에서 ‘수치를 모르는 것들!’이란 외침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참고 문헌 (이 글은 프레데리크 그로와 마르트 로베르의 아래 책에 많은 부분 빚을 졌습니다.)
1) 프란츠 카프카 著 『프란츠 카프카』, 현대문학刊, 세계문학 단편선37
2) 프레데리크 그로 著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책세상刊
3) 엠마뉘엘 카레르 作 『적』, 열린책들 刊
4) 안느 브레스트 作 『우편엽서』, 사유와공간 刊
5) 프란츠 카프카 作 『소송』, 문학동네 刊
6) 마르트 로베르 著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동문선 刊
7) 막스 브로트 著 『나의 카프카』, 출판사 솔 刊
8) 장 폴 샤르트르 著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