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르와 이폴리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10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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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이 내 시선을 동요케 하는구나, (...) 내가 정신을 잃었구나, (...).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내 마음이 내 손처럼 결백하면 좋으련만! (...)

내 손은 순진무결하나, 내 영혼은 오점이 있다!” - 13에서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작품인 장 라신의 비극을 읽게 된 이유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정치, 사회철학서인 수치심에 대한 비평적 저술을 통해서다. 아무튼 이 책은 내게 무진장한 정치적, 윤리적 영감을 주었으며, 그 진술을 위해 이용된 저작들은 마치 읽어두어야 할 것 같다는 어떤 의무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라신서문에서  여주인공(페드르;파이드라)의 충동은 자기 의지의 발로가 아니기에 죄의식의 순교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듯,  죄의식과 수치심을 구분할 줄 알았다.  우리들은 자신이 했거나 방치한 행동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데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안에서 낯선 기괴함으로 끓어오르는 충동에 휩싸일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이 작품은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다. 의붓아들인 이폴리트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은폐되어야만 하는 욕망의 이야기다.   페드르(Phaedra*파이드라)는 사랑의 정념에 빠지기 쉬운 동시에 그 정념을 고백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이를 절대적인 도덕적 자질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럼으로써 이 끔찍한 정념을 자신이 지녔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과 맞바꿀 만큼 침묵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내적 혼란을 겪는 여인이다.

 

때문에 불온한 사랑의 정념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가혹할 만큼 억압하며, 박해한다. 그녀에게 이 엄청난 정념의 고통은  너무 생생한 나의 상처에는 곧 피가 흘렀어.”라고 말할 정도이며, 황폐해지고 약탈당한 자아의 고통으로 죽음의 충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극심한 절망에 붙들려있다. 이러한 수치심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작품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한데, 16세기 데카르트 이후, 수치심을 의례화되고 억압적인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개인적 비극 속에 자리잡게 한, 즉  개인의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으로서 내면적 불안 속에 응축된 정서로 축소된 왜소한 감정을 반영한 작품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내면의 법정인 자신을 지켜보는 엄격한 눈의 감시를 두려워한다 나의 죄는 이제 도를 넘었다. 나는 숨 쉴 때마다 근친상간을 뿜어내는구나. (...) 불쌍한 것! 그런데도 살아있어? 그러고도 살아서 나를 낳아준 신성한 태양을 보고 있다고?” 처럼, 지엄한 신의 눈에 포획되어 있다. 물론 페드로의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녀의 수치심이 지나치게 과도한 도덕성에 붙들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대는 그 윤리적 잣대의 불온함은 재()사유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페드르는 타자를 장악하려는 가해자로서 근친상간의 폭력적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내면에 지닌 수치스러운 침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뿐이다. 우리는 자기의식의 완벽한 내적 판관이 될 수 없다.

 

내 의식과 분리되어 외재적으로 투사된 완벽하게 독립된 법정을 자기 안에 설립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아마 불가능할 것이고, 설혹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엄격한 검열에 메인다는 것은 수치심을 개인의 심리로 위축시킨 까닭이 아닐까?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온전히 개인의 정서적 책임으로 몰아 댄 법과 죄의식의 확장 때문에 말이다. 근대 이후로 수치심을 치유해야 할 상처이고 청산해야 할 독성이자 뿌리 뽑아야 할 것으로 말하는데 익숙해진 오늘의 우리들은 수치심의 사회적 역학관계를 무시하려한다.

 

사실 페드르가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아파하는 것은 발설하는 순간 자신으로부터 세상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리라는 총체적 재앙의 두려움이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해체, 세상을 더럽힌 존재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공포다. 다시 말해 수치심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동을 배척하고 사유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작품은 테제가 사망했다는 전언이 전해짐으로써 페드르의 은폐된 정념이 사건화 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은 페드르의 유모이자 심복인 외논의 자극에 의해 그녀의 입을 통해 이폴리트가 발설됨으로써 급격히 전환되고, 급기야 아버지 테제의 죽음 이후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테네로 출항하려는 이폴리트를 붙잡고 오랜 침묵 속에 잠겨있던 수치를 고백한다.

 

그녀의 이폴리트를 향한 사랑의 정념은 그야말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만다. 결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   내 수치를 고백했어, 희망이 나도 모르게 맘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었다.”며 도주하는 자신의 정숙함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이 말을 당사자에게 발설함으로써 정숙함의 의무를 벗어 던진 것이다. 작가의 치밀함은 총 1654행으로 짜인 희곡의 딱 절반인 827행에서 극적 전환을 가져온다. 테제가 살아서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 테제가 페드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잠시 화제를 돌려서 이 욕망의 통제와 관련하여 상극에 있는 루크레티아의 신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이 욕망이 수치심과 죄의 경계를 어떻게 분리하는 가의 하나의 사례가 되어 줄 것 같다. 동료 전우인 콜라티누스의 고결하고 완벽한 아내 루크레티아에게 느낀 시기어린 노여움으로 타르퀴니우스는 전장에서 이탈하여 늦은 밤 그녀가 홀로 있는 집에 찾아들어 여자의 정절이란 모두 허튼소리라며 미래의 보상과 편의로 유혹하지만 거절당한다. 루크레티아는 버티고, 함께 쾌락에 빠져들길 완강히 거부한다. 이때 타르퀴니우스는 치명적 협박을 가한다. 계속 거절하면 그대를 죽이고 남자 노예 한 명을 죽여 침대에 발가벗겨 나란히 눕혀 놓고 부정한 여인을 친구를 대신해 복수했음을 알리겠다고 죽음보다 더 최악의 일처럼 보이는 수치심 앞에 굴복하게 하곤 강간한다.

 


사실 욕망이란 언제나 우리 인간 안에서 끓어오르고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타자다. 툭하면 우리를 넘어서고, 벗어나며, 초과하고 규정하는 괴물성이다. 억누를 길 없는, 우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불복종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 충동을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억제한다. 그런데 이 욕망을 소유했다는 것이 수치심을 갖게 하지만 단지 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져야하거나 죄가 되지 않는다. 경계는 그 통제의 문턱을 넘는 순간 혼란에 빠뜨려 난폭해지는 욕망이다. 통제에 불복종해 문턱을 넘어 행해질 때 그것은 죄가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답변은 석연치 않다. 수치는 발설됨으로써 죄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법의 설정이 있음으로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수치심이 법의 지대로 나아감으로써 죄가 된다는 얘기인데, 그럼 수치심이라는 정념의 효용은 무엇인가?

 

페드르는 오직 너를 사랑해라고, 물론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언어이지만 그 발설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이것을 돌아온 테제에게 감추는 것은 그녀의 충성스러운 유모 외논의 비열한 계략, 페드르의 언어로  불행한 왕자들의 약점을 살찌우고, 그들의 마음이 이끌리는 비탈길로 몰고 가서, 감히 그들 앞에서 범죄의 길을 평평하게 닦아 놓는 자의 간언으로 인해 비극을 고조시킨다.  외논이 테제에게 이폴리트가 페드르의 침실을 넘봤다고 간음의 죄가 있었다고 거짓 간언하는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드르는 외논에게 분노를 쏟아 놓는다.  가증스러운 아첨꾼, 하늘의 분노가 왕들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 선물을. (...) 귀가 솔깃한 간언들이야말로 잘 다스려진 도시와 인간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외논은 바다의 파도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결한다. 그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자기 죄에 대한 죗값을 지불한 것이다. 사실 아첨꾼들, 간신배들과 관련하여 권력의 나르시시즘 행태 등 할 말이 무진장 있을 수 있지만 후일의 기회로 미룬다. 수치심의 효용은 조심성과 신중성 등 행위에 앞서 도덕성을 검열케 하여 자신과 타인의 세계에 위협의 요소를 제거하는 윤리적 성격이다. 페드르는 의붓아들인 이폴리트에 대한 사랑의 정념을 가졌다는 자신의 수치심을 테제에게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논의 거짓된 누명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음으로써 이폴리트는 아버지 테제의 분노에 의해 추방되고, 마차를 달리다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수치심으로 시작된 이 비극작품은 자신이 방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인 죄와 그 응분의 댓가로 맺는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에서 페드르는 목을 매고, 세네카의 페드르는 검으로 가슴을 찔러 자결한다. 라신의 페드르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생을 끝낸다. 수치심은 죄가 되어 소멸한다. 그런데  그토록 음험한 행동의 기억마저 그녀와 함께 사라져 버릴 수 없는가!”라는 테제의 마지막 방백은 기묘한 모순의 언어가 되어 소멸되지 않는 것임을 암시한다. 수치심의 성분은 결코 죄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끈질기고 집요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세계를 맴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자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루크레티아는 자신이 강간당했음을 남편과 모든 시민에게 알리고 자신의 수치심을 소멸시키기 위해 자살한다. 프레데리크 그로는  당사자의 죽음(루크레티아의 자살)은 수치를 죽이는 유일 방법이라 말하면서, 이것이 민중적 저항의 불씨가 되었고, 공화국의 수립, 즉 정치의 성적 계보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라신의 페드르 또한 페드르의 죽음으로써 테제는 왕권의 재정립과 후계의 적통성 확립을 이룸을 마지막 문장에 담음으로써 성의 정치적 계보를 잇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이 정념 비극의 최고봉이라는 당대 비평계의 칭송이나, 이보다 더 미덕이 더 많은 조명을 받은 작품을 결코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모든 이들이 필경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것이라 애착과 자부심을 보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의 성적 계보라는 의미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 자리를 틀 지우는 젠더의 고착화이고, 정숙한 여성의 성이 정치적 안정을 담보한다는 논리를 확대 생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애매한 경계에 서있다. 사랑의 정념의 대상을 근친상간을 전제하는 대상으로 세움으로써 금기를 방어막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페드르의 수치심은 작가의 죄의식과 분리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죄의 개념을 떨어버릴 수 없었다는 한계를 느끼게도 한다. 이 작품은 수치심과 죄라는 주제 말고도 악의 이행과 자기 행위의 정당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할 중요한 주제도 있다.

 

이는 이폴리트의 관점에 스며있는 폭풍우 이는 바다의 해안에서 폭풍 속 타인의 고통을 관조하는 방관자의 논리가 이해 당사자의 논리로 변화할 때의 인간의 비열한 자기 합리화와 그에 내재된 괴물성이다. 별도의 지면에서 다시 논의할 일이 있을 것 같아 후일의 사유로 미루어둔다. 어쩌면 이 작품은 페드르의 유모가 자신의 수치심을 자책하는 페드르를 향해, 사랑에 패한 사람이 어찌 마마 뿐일까요? 인간이라면 약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인간인 이상 마마도 인간의 운명을 따르세요.” 라는 말이 독자이자 관객인 우리 유약한 인간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소할 수 없는 정념의 내적 명령에 마주했을 때 과연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지만 내겐 떠오르는 방안이 없다. 아마 페드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참조: 페드르(그리스 신화이름;파이드라,Phaedra)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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