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미니북)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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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하면 인간의 광기와 욕망의 본성, 숨겨진 악마성에 대한 집착과 같은 눈초리가 느껴진다. 또한‘인간 삶의 역사란 우연과 광기’라 정의하기도 하였듯이, 어떤 순간에 우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 광기에 휘말리게 될까? 더구나 세상 모든 것에 적대감 가득한 증오를 보내며 악의를 부려댈 상황에 이르는 데에는 어떤 우연적 사건이 개입하는 것일까?
사실 간단히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그래서 그것을 통과하려 하지만 아무런 힘도 발휘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깊은 좌절감에 휩싸이면 아마 시쳇말로 돌아버리게 되는 순간에 직면하지 않을까.

이 단순해 보이는 상황은 우리들이 평생을 반복하는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피로와 권태, 좌절과 실의에 빠져들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모든 인간의 일상적 삶이란 거기서 거기라는 위안 때문일까? 아마 상상력이 빈곤해서일지도 모른다.  보지 못하고, 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이 뜻밖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체험한 후에 다시금 지리멸렬한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하면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광기와 악마성이 잠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려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 여직원, 크리스티네!

소설로 눈을 돌리면 초라한 시골 우체국에 우체국장이자 직원인 스물여덟의 시든 여성이 있다. 1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1926년의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이란 아마 빈곤이 넘쳐대는 남루함, 바로 그것일 것이다. 값싼 월세 다락방에 병들어 앓아누워 있는 홀어머니와 한 사람의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로 휘청거리는 삶에 누렇게 찌든 여자, ‘크리스티네’가 있다. 모든 것이 비싸다. 그녀의 삶이란 오직 생존의 문제이며, 비루함과의 싸움이다. 꿰맨 옷, 그저 발을 감싼 신발, 우체국의 유일한 직원, 종일을 일에 시달리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면 환자인 엄마의 시중으로 시간에 쫓긴다.

이런 여자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가 날아들고, 미국에서 커다란 사업을 일궈 부호가 된 이모부와 이모의 배려로 상류계층들이 모인 알프스의 고급 휴양지인 스위스 엥가딘으로 초대 된다. 그녀의 모습은 하늘하늘한 상상도 못한 최고의 드레스와, 고가의 목걸이, 최신 유행의 구두, 우아한 머리와 세련된 화장으로 미모의 여성으로 변신한다. 고향 마을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뭇 남성들의 관심어린 시선은 그녀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준다. 말끔하고 고가의 세련된 정장을 한 남성들이 가던 발길을 멈추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가하면, 계단에선 옆으로 비켜나 숙녀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그 우아한 예의는 여인의 자긍심을 한껏 부풀리는 것이다.

의기소침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던 여인은 사라지고, 충만한 행복감으로 활력을 발산하는 여인의 육체는 사교적 수다스러움이 더해져 휴양지 사교계 최고의 여인으로 칭송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잘못 발음되어 사교계의 상류층들로부터 명문 귀족의 이름인‘폰 볼렌’양으로 불리지만, 변신에 도취된 여인은 구태여 오스트리아 시골의 가난한 우체국 여직원의 신분이 드러날 자신의 이름을 시정하지 않는다. 새로이 알게 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일용품조차 구입하기 어려운 서민들의 삶에서는 꿈에서 조차 그려 볼 수 없는 세상이다. 자신의 두 달 급료에 해당하는 한 끼의 식사, 황홀할 정도의 화려함과 우아함, 세련됨이 어우러진 환경과 사람들, 처음 보는 최고급 세단, 젊은 남녀들의 과감하고 관능적인 몸짓들, 그 유한계급들의 별천지에 완벽하게 도취해 자신의 진짜 삶을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 버린다.

그러나 이 도취의 시간은 시기와 질투라는 상류층 여인들의 간교로 시골마을의 보잘것없는 신분에 존재하지도 않는 추문까지 더해져 자신의 과거 신분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이모에 의해 중지된다.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고된 일상과는 어디도 닮은 데가 없는 물질의 풍요와 우아함이 넘쳐나는 세계와의 단절은 극심한 고통으로 그녀의 정신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어떠한 노동도 없는, 죄어오는 생활의 강박도 없는 그야말로 낭만과 설렘과 쾌락만 있는 상류사회를 떠나 다시금 오스트리아 시골마을 우체국으로 돌아가는 여인의 추레한 옷차림만큼 여자의 내면은 누더기가 되어 수치와 모멸, 이상과의 괴리로 좌절과 증오로 가득 찬다.

분노와 사랑, 가난한 연인들의 광기

어디를 둘러봐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알프스휴양지에서 보았던 남자들은 없다. 그 초라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몸짓들이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삶의 의미를 앗아가 버린다. 시골에 처박힌 채 시들어가는 삶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자신의 삶에 선물을 주고자 빈으로 달려가 알프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호텔을 예약하고는 오페라극장과 고급 상점가들을 둘러보지만 턱없이 비싼 그곳들은 여자의 발길을 허락하는 곳이 아님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결혼한 언니의 집을 방문하지만 언니는 알량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팍팍하기만 하다. 한 끼의 식사조차 인색하게 하는 전후(戰後) 서민들의 삭막한 경치가 더해져 여자의 고독과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내면화 된다.

우연히 만난 형부의 옛 친구, 전쟁의 상처를 안고 돌아온 상이용사이지만 전쟁과 부상의 상관성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지원을 거부하는 국가에 환멸과 좌절로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은 사내이다. 학업에 대한 간절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여건을 확보할 수 없는 남자는 건설 노동자의 삶으로 버텨낸다. 크리스티네는 그런 남자에 연민과 공감을 갖게 되고, 두 상처 받은 영혼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가난하기만 한 연인은 사랑을 위해, 미래를 위해, 희망을 말하려하지만 이것이 거짓임을 둘은 모르지 않는다. 두 사람만의 밀어조차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연인, 급기야 남자는 건설회사의 파산으로 일자리마저 잃어버린다. ‘마렉 플라스코’의 소설,『제 8요일』에서 자신들만의 방을 찾아 헤매는 연인들의 쳐진 어깨와 상실과 절망 어린 눈빛이 문득 오버랩 된다.

모든 물품과 금전의 송금업무까지 맡아하는 시골 우체국, 좁아터진 우체국의 유일한 인간인 크리스티네는 이 가난한 사랑의 지속에 절망의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다. 우체국에 불쑥 찾아 온 남자는 자살의 결심을 말하고 크리스티네 역시 자살계획에 동조하기로 하지만, 많은 금전 업무를 정리하는 여자를 본 순간, 남자는 횡령계획을 넌지시 비춘다. 어차피 죽을 결심까지 한, 잃어버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위험한 모험은 암흑만 기다리는 미래와 좌절한 삶으로서는 시도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치밀한 탈취와 도주 계획...

인간 소외를 만들어내는 무책임한 권력사회

어느 날 찾아 온 비루하기만 했던 일상에서의 탈출이 비극이 되어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전후의 피로감으로 지친 민중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전쟁을 기획하고 조종했던 권력층들은 사치와 향락에 여념이 없다. 남루함의 세계에서 꿈결 같은 화려함의 세계로의 도약은 한 여인을 도취에 취하게 하지만‘한바탕의 봄 꿈(一場春夢)’으로 끝나고 팽개쳐지듯이 비루한 현실로 돌려진 인생은 욕망의 메울 수 없는 틈새에 허무와 분노가 들어차 들끓게 한다. 이렇듯 여자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욕망의 소용돌이는 그 시선이 한 개인의 내부적 차원에 머물지만, 전쟁 참전으로 가족과 재산의 상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적 상흔까지 오롯이 개인이 안아야 하는 한 남자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 된다.

전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전쟁 기획자인 권력자들이 아니고 민중이며, 그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을 사는 것도 오직 민중만의 몫이다. 권력자들은 죽음과 비참함, 곤궁함을 결코 떠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민중과 그 고통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형태는 더욱 견고해지고, 민중은 이 견고해진 체계의 경계 밖에서 노예적 삶에 시달린다. 새벽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부지런히 출근하고 종일 일에 시달리다 늦은 밤 귀가하는 삶, 단지 생존을 위한 타성일 뿐이다. 곤궁함은 떠나지 않고 역시 모든 것은 비쌀 뿐이다. 사회는 관료화되어 개인들의 보호요구를 외면한다. 수많은 서류와 절차를 요구하고 그리곤 거절한다. 개인의 몫이라고. 국가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개인의 생존문제가 오직 개인에게만 지워진 사회, 고통은 민중의 몫이고 쾌락은 권력자의 몫이라고 이분화 된 사회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생결단의 선택만 남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한계적 상황, 이것이야말로 광기가 아니겠는가? 누가 만들어냈는가? 이 광기의 책임에 사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향락과 과시의 세계만을 뿌려대며 부추기는 오늘, 우리들이 대면하는 세계를 견주게 된다. 광기가 넘쳐흐른다. 삶의 주체자로서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한 여인의 내면을 세밀하게 쫓으며, 그 욕망이란 이름의 광기를 해부하는 이 소설에서 오늘의 양극화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인류의 진보를 이뤄냈다는 20세기의 잘난 인류 지성의 허영과 위선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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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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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결혼축하 인사말부터 각종 메시지, 자타의 저술을 위한 서문, 해설, 인물과 관련한 인상 등 그야말로 잡문(雜文)의 모음이지만, 팝 및 재즈 음악에 대한 아마추어를 넘어선 감각의 소회나 번역가로서 일종의 서평이자 작가들에 대한 평론적 글,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소신의 글들은 단순히 일화적인 감상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작가 자신의 팬들을 여념에 둔 작업이란 인상을 짙게 풍긴다. 나는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고, 내 성장의 단면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으며, 교우하는 벗들이나 일상의 만남 속에는 이런 사람들과의 접촉도 있었다. 또한 번역가이자 소설가로서 이런 작품을 인상 깊게 봐왔으며, 소설의 미덕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소설을 생각하고 있는지 하는 거의 자신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도록 편집된 자서전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의 개인사에는 관심이 없다. 잘 알려진 이웃나라의 중견 작가로서 그의 창작활동을 구성하고 있는 원천들이나 번역 및 소설가로서 문학에 대한 철학, 그만의 독특한 경험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있다. 물론 그를 에워싼 사적 세계와 공적으로서의 문학적 세계를 선명하게 양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생활적 요소가 어떻게 한 작가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하는 연원의 추적이나 연계성까지 읽어 낼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다. 해서 일종의 사회적 에세이집 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언더그라운드』를 배경으로 한 사회주류의 시스템 밖에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그의 시각을 대변하는 글들과, 자신이 번역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번역가로서의 소명의식이나 번역에 대한 문학적 지향점, 원작자들과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론, 그리고 자신의 발표 작품들에 대한 배경이나 의지의 설명을 기초로 하여 소설에 대한 신념을 밝힌 글들에 자연스레 관심이 집중 될 수밖에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하는 공존의 사회

세상의 시선을 받고 있는 작가로서,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은 실로 중요하다. 그가 발표하는 소설을 비롯한 각종 산문의 사회적 영향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산문집인데, 이는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인 사린가스를 살포함으로써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사건의 취재기라 할 수 있다. 하루키는 이 사건이 일본현대사의 분기점이 된 지점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와 관련되어 구성된 글들은 그의 책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 체제에 대한 인식이나 이념적 성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작가는 이 사건을 정점으로 소위 일본 사회는‘순수의 시대’가 끝나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건의 주체인 ‘옴 진리교’란 신흥종교의 출현과 사건 자체로부터 “사회 시스템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땅위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고 쓰고 있다. 사회는 변화하여야 하는데 주류의 질서, 기성의 사회시스템은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한다. 그래서 이를 대신할 새로운 시스템을 찾으려하는 심리에서 신흥종교가 발흥했다. 여기까지는 개괄적 사회진단에서 빗나가지 않고 있다.

사실 이후에 기술되는 그의 사회인식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그는 보수주의에 기초한 개량주의적 입장에 서있는 것 같다. 세상사에는 암묵적 사회규칙이 있고 이것의 인정을 전제로 한 점진적인 개량으로 조심스런 접근을 해야 되는 것이지, 사회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지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하면, 사회시스템을 자발적으로 이탈한 소수자들, 이러한 집단들은 안에서 개량하려는 사회인식이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정체모를 패거리, 알 수 없는 뭔가”인 소수자들은 사회와 공생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건실한 사회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개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본말이 전도된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새로운 시스템을 지향하는 소수자를 다수의 주류가 포용해야 하는 것이지, 배제되고 추방당하는 소수자가 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문제를 보지 않으려하는 닫힌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하루키는 소수자의 수용을 위해 활력 있는 서브시스템(하위 체계)의 구축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기존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거나 혁신하여 소수자를 껴안을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공존과 공생의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스템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아예 별도의 시스템을 두자는 분리 정책이자 차별화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사회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지배자와 피치자, 다수와 소수를 항구화 시키자는 이중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의 공생은 분리된 공존이다. 같이 살고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공생, 이것을 과연 진정한 공존이라 할 수 있을까?

하루키의 번역물과 소설들

「번역하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두 개의 장에서는 그의 번역가로서,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흥미롭게 투영되어 있어 작가를 지망하거나 문학 작품의 독서자들에는 제법 참조할 문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그의 번역가로서의 경험이 자신의 소설 작법에서 이미 번역을 상정하여 “외국어처럼 만들어 언어의 생래적 일상성을 탈피하여 문장을 구축”한다는 설명이나, 몇 몇 고전적 지위에 선 문학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론은 번역문학을 대하는 독자의 이해를 확장시켜준다.

그가 번역하거나 혹은 원작자와의 만남 등의 기억을 통해 원작에 대한 감상을 전달하는 내용들과 자신의 독서 감상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는 독서가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경우에는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제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개인적 거울”이라 하면서 “다면적 검증을 견뎌낸 소설”이라고 격찬을 하고 있으며, ‘챈들러’는 “시간이 지나도 이미지를 남기는”작품을 쓴 작가로서, ‘레이먼드 카버’의 경우는 보다 친밀한 동시대인으로서 애착을 보이면서 “ 자기의 영혼을 이야기라는 형태로 정직하게 토로한 진지한” 작가로서 “소설의 시점이 절대 땅바닥 높이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찬양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불안하면서도 불쾌하지 않는 공포의 질을 알고 있는 작가라고 ‘스티븐 킹’ 소설의 미덕을 설명하기도 하며, 음악적 기악(器樂)적으로 정밀하게 구축된 인상을 지닌 작품이라는 음악적 공감을 토대로 ‘폴 오스터’의 문학은“물리적 기악성에 몸을” 맡겼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잭 런던’의 경우에는 20세기 초 한국의 한 벽촌에서의 일화를 꺼내 그 인간성의 후덕함에 존경을 표하고, ‘스콧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를 통해 문학의 요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자신의 번역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현대 영미문학의 걸작들에 대한 멋진 서평 집을 만들어 낸다.

한편, 자신의 소설들인 『해변의 카프카』,『노르웨이 숲』,『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등에 대한 인터뷰나 해설을 통해 해당 작품들의 배경이나 독자적 궁금증을 풀어 주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을 접한 독자들에게 작가의 의식에 한 걸음 다가가게 하는 긴요한 선물이 된다.
일례로 그의 소설제목이나 내용에서 자주 등장하는 ‘끝’이란 개념이 종말이 아니라 막다른 곳이라는 의미에 가까우며 세계 저 너머까지 걸어간 그 끄트머리로서 내적인 세계, 신화적 세계의 관념을 가진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외에도 소설은 음악과 같은 것으로서 소설의 가장 기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리듬이며 내적인 마음의 울림으로서 하모니, 그리고 즉흥연주와 고양된 기분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소설에 대한 신념과 음악적 영향의 깊이를 읽을 수 도 있다.

결 어

이처럼 이 책은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30 여년의 역사를 보여준다. 음악애호가로서 그 음악적 감각의 취향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각각의 소설들이 어떻게 씌어졌는지,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지, 자신과 교우하는 동료작가, 화가, 여행 작가, 기타 각 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쌓아지는 내적 경험들 등 그의 작품을 구축한 그만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가운데 “책은 우리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야만 한다.”라는‘프란츠 카프카’를 인용하는 그를 보면서 그가 작가로서 어떤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고, “뛰어난 이야기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물리적인 효용을 반드시 수반한다.”라는 말처럼 그가 중요시하는 소설의 이야기로서의 관점을 통해 소설 쓰기의 감각도 참조 할 수 있게 된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동시대인에 대한 시선을 비록 의도된 구성과 편집이긴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친 조각의 연결로 어떤 완성에 가까운 형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측면에서 그 수고와 진심이 느껴지는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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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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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책을 읽는 시점에 우리사회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국론이 분열되고 급기야는 사법부내까지 에서도‘불평등 조약’이다. 아니다. 로 시끌벅적하다. 세계는 선진 개발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기조 하에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을 대상으로 자유무역과 자유방임주의 정책과 제도를‘국제기준’이라 하여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이 장점을 선전하며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에 권유하는 자유무역주의는 이들 나라의 경제발전에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신들은 자국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보호주의 정책을 펼쳤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일까? 저자는 오늘의 선진국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국가들의 경제발전 역사를 추적하여 이들이 말하는 '좋은 정책(Good Policy)', '좋은 통치제도(Good Governance)'의 실상을 탐사하여 그 위선을 고발한다.

1. 현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의 역사

현재 선진국들이라 하는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스웨덴 등 서구 국가들과 미국 및 일본이 오늘의 부국에 이르기까지의 경제발전의 여정을 쫓는다. 그들이 가장 산업화된 선진부국에 이르는 과정에 어떤 정책과 제도들을 통해 자국의 경제를 부흥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국가 중 특히 영국과 미국은 마치 자신들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보호주의 정책은 채택한 적이 없으며, 자유무역주의만을 수호한 것처럼 경제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그들처럼 자국의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개입주의적 산업, 무역 기술정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고율의 관세 정책을 펼치는 등 보호주의를 강력하게 고수한 나라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영국은 17세기 자신들의 모직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지역 모직물에 고율의 수입관세를 적용하는가하면, 식민지인 인도의 섬유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하여 금수물품화하거나 고관세 정책을 펼치는 등 적극적인 국가 개입정책을 사용하였다. 18~9세기 미국의 경우에도 영국에 대항하여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운영하였으며, 스웨덴이나 독일 역시 유치산업 보호정책의 방법이나 정도는 달리하였으나 보호주의를 통해 자국의 경제발전을 도모한 것에는 차이가 없다.

15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내 가장 산업화가 늦었던 독일이나 기타 군소국가의 산업 발전과정을 보면 이러한 양상을 더욱 극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화와 경쟁력을 먼저 갖춘 18세기의 영국이 자신들보다 늦은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여타 국가들이나 세계 식민지에 보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무역주의를 실행 할 것을 요구하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경제를 위해서는 고율의 수입관세를 적용하거나 수출원자재의 수입관세는 수출시 환급하여 주는 등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펼치다가 자신들의 산업우위가 확보되자 보호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며, 자유무역주의의 장점을 호소하는 기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관세를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그만큼 경제발전에 곤혹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먼저 산업화에 도달한 나라들이 후발국들에게 강요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인다. 결국 자유무역주의가 그네들의 경제를 선진국으로 올려놓은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자국의 유치산업 보호정책이란 보호주의를 통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무역주의는 허상이고 거짓이다. 먼저 사다리를 올라간 자가 후발 주자가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과 같다. 이익을 독점하고 항구화하겠다는 야만적 이기심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완전 무장을 하고 상대에게는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부당함인 것이다.

2.' Good Policy', 'Good Governance'의 기만

이처럼 ‘좋은 정책’이라고 패키지화하여 후발국에게 강요하는 현 선진국들의 자유무역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정책은 자신들의 경제발전 단계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오직 철저한 보호정책만 있었을 뿐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자신이 고지위에 섰을 때 마음껏 후발자를 유린하기 위한 것이 자유주의 이다. 19세기 중반에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여 1911년이 되어서야 관세권을 돌려받았으며, 이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예처럼 정상에 선 자가 사다리를 걷어참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적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또 하나 웃지못할 사례로서 18~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선진국들은 후발국들의 기술적 도전이나 기술유출을 차단하기 위해 특허 등 지적재산권을 도입하는데, 스위스의 경우에는 영국이나 독일 등의 선진 기술을 도용하기 위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100여년이나 늦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부분적으로 제도화 한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자국 제약회사들의 지적재산권을 개발도상국들이 강력하게 보호하지 않는다고 반감을 표하는 것이다. 자신의 산업 경쟁력이 확보되기까지는 어떠한 나라보다 폐쇄적이고 보호주의 정책을 고수하다가 정상에 서면 바로 그 보호주의 정책을 차버리고 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상대를 윽박지르는 해괴한 일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이 현 선진국들이 그들의 발전단계를 거칠 때 사용했던 보호주의의 수위보다 높은 것일까? 생산성의 차이를 감안하여 현 선진국들의 보호주의 역사와 비교하면 결코 오늘의 후발국의 보호주의 수위는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근래의 상황이 아닌 역사의 단계에서 동등한 수준으로 비교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들이 선진국에 이르러 그 결과물로서 드러난 현상을 후발국들에 강요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이고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책적 기만과 병행하여 최근에는 민주주의, 관료제도, 사법권, 지적 재산권, 유한책임제도, 회계 및 공시제도, 금융제도, 공공재정 제도, 아동 근로제도 등을 패키지화하여‘좋은 통치제도’를 후진국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더구나 5~10년 만에 그들이 말하는 이 같은‘국제적 기준’에 맞는 제도를 수립하도록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제도적 기준을 세워 일종의 보호주의를 목적으로 은밀하게 불공정한 형태로 남용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프랑스의 경우, 남성 보통 선거권으로부터 완전한 보통 선거권으로 전환되는데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유럽 각국들이 근대적 전문 관료사회의 필요성인식으로부터 실제 제도 수립까지 3세기 남짓한 시간이 걸렸으며, 중앙은행 제도는 17세기 초의 필요성 제기에서 화폐발행 등 진정한 중앙은행의 설립까지 15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들 현 선진국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떤 혁신적인 제도가 등장한 이후 과반수의 선진국들이 채택하기까지 제도마다 짧게는 20년에서 150년의 기간이 걸렸다는 사실에서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발전된 세무 관료제도도 없이 공공재정 제도를 발전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제도들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획일적으로 제도를 이식하여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선진국들의 후발국에 대한 소위‘좋은 제도’의 일괄적 강요에 부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결 어

이 책은 이와 같이 현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이 처한 발전 단계를 그네들의 유사한 역사적 묘사와 견주어 정책과 제도의 다양한 도입과 정착의 양상을 비교하고 있다.
현 선진국들이 그들의 경제개발 초기에 실제로 이용했던 정책과 제도들은 오늘날 후발국에 강요하는 패키지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대적인 기술의 후진성이나 국제환경, 인적자원의 부존량에 따라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정책 수단을 다양하게 사용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제도마다의 도입 시기, 다채로운 방식의 보호정책 등 자국에 적합하게 바꾸어 나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선진국에 도달함으로써 획득된 제반 결과물을 후발국들에게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과도 모순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라는 자유무역의 수용 압력은 구미 선진국들이 그들의 경제발전 초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행하던 관세권의 박탈과 같은 불평등조약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합의에 따라 신자유주의 패키지를 거부하지 못하고 수용한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기침체와 후퇴를 겪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경제 발전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소위 좋은 통치제도를 지닌 나라가 아니다. 민주주의나 관료제도, 각종 공공재정이나 금융시스템 등에서 국제기준과는 한참이나 이격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 투자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중국에 달려들고 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의 잠재적 가치란 실제 중요한 경제적 조건이지만 이것만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역시 19세기 말 일본에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고 수탈경제 하에 신음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해방과 동족전쟁을 치르고 나서 1960년에서나 비로소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불과 50년 남짓한 시간에 현 선진국들이 수세기에 걸쳐 획득한 정책과 제도들을 압축적으로 수용했다. 산업화과정에서 취약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보조금과 세제 특혜, 수입관세의 환급 등 유치산업 보호 를 위한 강력한 국가개입 정책을 적절히 구사한 것은 우리만의 차별화 된 보호주의 정책의 사용이었으며, 이것이 우리의 경제를 오늘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반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현 선진국 체제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물살에 휩쓸리는 것이 마치 선진국이라도 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그들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기운이 팽배하다. 자신들이 정상에 오르자 사다리를 걷어차는 현 선진국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 불평등조약이란 지적은 이러한 관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라 할 것이다.

선진국들이 말하는 좋은 정책, 좋은 통치제도와 같은 아전인수식‘자기정의(自己正義)는 이기심보다 훨씬 완고하다’고 했다. 우리는 보다 현명해져야 할 것 같다. 원조 국가 되었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며, 설혹 선진국의 대열에 끼었다고 해도 엄연히 기술적, 경제적, 제도적 우열이 존재한다. 우리가 오르는 사다리는 항상 먼저 도달한 자에게 걷어차일 수 있다. 도둑질 하던 자들이 파수꾼이 되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제 우린 저들과는 다른 우리에게 적합한 고유의 정책 발굴과 제도 수립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또한 후진국, 개발도상국으로서의 경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저자의 말처럼 대승적 민족주의의 차원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유력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선진국들의 자유무역주의를 기조로 하는 신자유주의 패키지를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춘 새로운 패키지의 기획자로서 나설 수 있다는 위치이자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선진국에게는 후발국을 포함한 세계경제를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통해 되돌아보게 하고, 후발국들에게는 앞에 놓인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과 제도의 수용에 있어 선택의 적절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진정 공존하는 세계경제체제를 위한 사유의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분명한 분기점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비정상적지만 비준이 된 한미자유무역협정에는 많은 이들이 저적하듯이 불평등한 조항들이 산재하고 있다. 정책자는 이러한 지적들을 책임을 다하여 해소하여야 한다. 경제적 평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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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항구 매그레 시리즈 16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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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농의 ‘매그레 시리즈’중 작은 항구도시인‘지베’를 배경으로 한 <플랑드르인의 집>에 이어 우연히도 짙은 안개에 싸인 소도시‘위스트르앙’항구로 이어졌는데, 왠지 무표정한 피로가 묻어난 듯한 느낌, 만남과 이별조차 무심해야 할 것만 같은 절제되고 동떨어진 무엇에 이끌렸기 때문일까?
치열함을 비켜간 정적 분위기에 대한 나의 기대는 옳았다. 감정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작품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인데, 말이나 행동, 내면의 요란함이 없는‘매그레’란 인물이 그래서 더욱 마음에 닿는다.

작중 인물들 역시 장황하거나 번잡스러움 없이 정제되어있어 거추장스러운 너절함 없이 깔끔하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찰, 인간 개성에 대한 탐사는 이 시리즈의 일관된 지향점을 확인하게 한다. 사건 추리의 트릭이나 논리추구와 같은 기교적 재미가 아니라 사건의 내재적 본성을 이루는 사람들의 면모에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인위적 잣대로 단정하는 오만의 짜증남이 없기에 평온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머리에는 총상을 치료하고 꿰맨 상처를 지닌 채 파리 한복판을 방황하는 중년의 남자가 발견된다. 프랑스북부 인구 1천명 남짓의 자그마한 항구도시‘위스트르앙’의 실종된 항만관리소장으로 신분이 확인되고, 매그레는 기억과 언어능력을 상실한 남자를 위스트르앙 그의 거처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다음날 독살된 주검으로 발견된다. 스토리는 이와 같이‘조리스’라는 남자의 머리에 난 상처와 독살의 의문을 쫓는 일면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특징은 단선적으로 용의자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다. 항구 도시의 구성원인 마을 인물들, 그 개인들, 인간들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 그 본성을 쫓기에 풍성한 무엇이 된다.

죽은 자의 계좌에 입금된 거금이나, 전과자인 하녀의 오라비, 토끼 사냥을 다니는 시장, 갑문을 관리하는 항만관리소의 동료선장 등 사건의 복선처럼 작용하는 조치들이 형식미를 더하고는 있지만 이는 역으로 이 소설이 추구하는 인간탐사의 하부구조로 작동할 뿐이다. 많은 선박의 소유주로서 권세를 과시하는 몸짓이 밴 작은 마을의 시장, 그리고 친절함에도 정숙한 위엄이 묻어나는 시장의 아내, 손상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녀의 순박함, 선원들의 투박함과 자신들만의 무언의 집단의식과 동료애, 경계를 세우는 이러한 집단의 세계에 다가가는 열린 마음과 그 뒤섞임의 의미 등 인간사와 인간개체에 대한 응시가 매력적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지배적 질서이자 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획일적인 잣대로 들이대지 않는 매그레의 관점이다.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이 된 진실로 접근함에 따라 여동생과 오빠의, 잃어버린 연인과 그 결실에 대한 떼어놓을 수 없는 천륜지정,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소유욕과 질투의 덧없음, 끈끈하게 얽힌 동료의식 등 인간이 최후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전체를 장악한다.

“살인범을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묵은 원한이 있다고 해둡시다! 외지에서 온 뱃사람이 선장을 죽이고 사라졌다고....”

타인들의 치정다툼에 터무니없이 희생된 주검에 대해서 다분히 비도덕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지만 산 자들의 평화와 사랑을 위한 정의라는 측면에서 이런 이해와 관용은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김 서린 기차 창문을 통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항구를 바라보는 수사관의 시선처럼 인간사란 그리 선명하게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게다. 온 사위가 적막한 어느 산막의 눈 내리는 겨울날 읽기에 그만인 소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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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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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줄 곧 수행하는 낯선 것의 드러냄과 그래서 익숙해 진 것들의 다시 낯선 것으로의 되돌리기 작업이다. 보지 못하던 것, 생각지 못하던 것, 알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이 상실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기획이다.
하찮고, 비루하며, 보잘것없어 그 존재마저 지워버리려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 이들‘불온한’것들의‘있음’에 대한,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존재론’인 까닭은 “존재하는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인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 라는 말이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설혹 우리들이 보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하며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존재하는 존재자들, 바로 이 알 수 없어 불온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의 이야기다. 이들 표상으로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oncomouse)’,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등 여섯의 불온한 것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각적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불온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체를 알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불온성은 그 부정의 대상이 나를 덮쳐올 것 같은 불안, 즉 내가 선 자리와 내가 가진 것을 잠식하리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당혹의 감정이다. 이 불편한 감정,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것을 억압하고 급기야는 폭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온하게 인식되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 최근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통념적 감각을 바꾸는 작업, 인간의 혁명을 말하고 있다.

불온한 것의 처음을 장식하는 대상은‘장애자’이다. 정상인들은 왜 장애자를 불온하게 여길까?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이 시선 속에서 장애자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 여기엔 인간의 위대함과 탁월성을 기초로하는 존재의 사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장애자는 인간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잠식하는‘결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자랑스런 통념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인간을 그 비루하고 소소한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불온한 것이 된다.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이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것일까? 이 터무니없는 토대는 덜 위대한 것, 덜 탁월한 것인 2류, 3류를 만들어내고, 다시금 배제시키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출현시킨다. 이 존재론적 서열화는 우리가 갈라서고 대결하여 끊어버려야 할 사슬일 것이다.

장애자만이 누군가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존재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장애자는 ‘폐를 끼치는 자’이다. 버스에 장애자가 타고 내리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정상인들은 이런 불편함과 불화로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장애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아마 남에게 가장 커다란 폐를 끼치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내주는 세금에 기대어 그 세금으로 관료들이나 졸개들을 거느릴 수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노동을 줄이면 호통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폐를 끼치는 것을 지우는 것으로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돈을 주는 순간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또한 돈을 주기 이전부터 줄 생각으로 자신이 끼치는 폐를 지워버린다. 자신이 지은 신세를 교환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시키면서도(이득이 없다면 고용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미래의 지불 가능성으로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자들은 항상 타인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장애자다. 모든 인간은 장애자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동등하다. 기대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오인이자 환상인 장애자에 대한 몰이해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자’가 이처럼 의타적 존재로서의 인간 보편의 운명을 통해 존재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면, ‘박테리아’는 생성과 면역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공생과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깨운다.
‘미토콘드리아’처럼 잡아먹힌 것에 잠식됨으로써 변성된, 잡아먹은 것의 새로운 신체가 출현하는 탄생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이렇듯 “어떤 만남이나 충돌에 의해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한편 나의 내부에 속하는 것과 외부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면역이 항상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만 작동한다면 우린 아마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질병이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라면 치유란 서로의 공생 내지 공존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과 같이 외부적인 것과 공생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다. 배제하고 추방하는 비위생적 치안이란 호소는 생물학적으로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이보그’에서는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를 얘기한다. 이것은 확장되어 오늘의 무선통신의 세계와 결합한 인간, 접속과 변환에 의해 자기가 소멸하는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의 바다, 실제적인 소통은 없으며 오직 오염과 감염, 변형과 변조만 있는 신체를 말하며, ‘온코마우스’에서는 목적론적 사유로 인해 수단이 되어버린 새로운 신체의 존재자가 된, 즉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신체, 생명복제시대의 윤리, 타자를 수단화하는 비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성이 남녀라는 인간의 형상을 모델로 하는 함수의 이항성에 매몰된 이성의 눈가림으로 인해‘페티시스트’라는 사물에의 사랑을 왜곡하는 ‘화폐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연결되어 사물성은 사라지고 화폐에 대한 미친 욕망에 휘둘리는 화폐가치라는 과시성 상품에 의존하는 천박한 남근주의적 욕망의 비판이 된다.

끝으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계약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정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범람하는 노동자, 이들을 양산하여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착취하려는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이 불명하고 애매모호한 계급의 불온성에 역습을 당 할 수도 있다. 이성이나 정신이 다가설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 목적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저항의 지대인 오이코스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드는‘미친 감각’”, 그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여 새로운 개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 공생과 공존의 화합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불온한 것들이라 밀어내는 것들, 그 거북함으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통해서 우린 보다 완전한 종족이 되어 가지 않겠는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제거와 추방을 행하는 지배질서의 오인을 멋지게 규명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을 기막히게 전복시키며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이 존재론적 사유는 적대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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