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쉼표까지도 팽팽한 긴장을 지닌 소설
“밝은 햇살로 가득하고 모두 자유롭게 행복한 곳,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을 동경한 탓에 그 남자는 죽었다.” - 티저북 P 155中에서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날이 선 채 살아있다. 이면의 진실이라는 정보를 가득 담고서. 초입부터 쇄도하듯 등장하는 각양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 통화의 내용에, 신문의 사건 기사, 하물며 광고판에 스치듯 발설되는 이름, 인상, 캠페인 등등 모두가 어두운 베일에 가려진 빛처럼 보인다. 이 긴장이 더욱 작품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어느 종착역을 향해 추진력을 얻게 하는 흐릿하게 뿌려진 자기력을 지닌 단서들 무엇 하나도 놓칠 수 없게 한다. 아마 근자에 이처럼 집중하고 읽어 본 작품의 기억이 내겐 없다.
2005년 3월 25일 금요일, 화창한 봄날의 한가로운 오후, 네 명의 죽음과 자상(刺傷)을 입은 한 명의 생존자를 발생시킨 전철역 앞 광장의 무차별 살인사건이 “저예산 예능 프로그램의 농담”처럼 비현실적으로 벌어진다. 그리곤 뜻 밖에도 필로폰과 헤로인의 투약으로 심부전을 일으킨 살인 용의자가 사망한 채 발견되고, 경찰의 수사는 마약 중독자의 환각에 의한 무차별 살인 사건, 소위 아무런 이유 없이 수행된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종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편, “너 같은 놈은 빠져도 아무 문제없어.”라며, 수사 과정에서 배제되고 피해자 가족들의 형식적 조서나 받아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형사 소마, 그리고 속물적 이익만을 탐하려는 인간집단에 깊은 혐오를 지니게 된 살인사건의 생존자인 청년 ‘시게토 슈지’, 후일 소마, 슈지와 함께하게 되는 프리랜서 방송인 ‘야리미즈’는 집단 지성이라 부르며 의심 없는 지붕아래 무임승차하는 물신 숭배적 몽매성과 집단이기심의 밖에 서서 사회적 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을 쫓으려는 개인이다. 바로 이러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어 다수라는 얼굴을 하고 집단적 견해와 그 안이(安易)성에 편승하여 휘둘러대는 폭력적 무지와 몰지각성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진실을 쫓는 독자성을 보게 되는 것은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제 사건의 수사는 경찰조직을 떠나 독자적인 진실 추구의 과정이 되고, 사건의 이면에서 개인으로서의 소마와 슈지가 마주하게 될 진상, 그 실체는 더욱 위험하고,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조바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예측적 불안과 흥분에 맞추어 안면이 붕괴되는 미지의 병을 앓고 있는 아이와 엄마, 노회한 정치가와 이 못지않은 술책과 모사의 달인 같은 비서처럼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산아 육성책인 ‘스마일 키즈 캠페인’의 슬로건, 항 안벽 근처 바다에 가라앉은 차량과 찾을 수 없는 차량 소유자의 직업, 뇌경색으로 의식불명에 빠진 괴물기업 타이투스 그룹 회장 등, 놓칠 수 없는 암시와 단서, 복선들이 미스테리 특유의 지적 자극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이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존자인 슈지를 집요하게 살해하려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강한 배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살인에 정통한 프로로서의 존재와 이를 피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려는 힘의 지원 없는 개인 간의 보이지 않는 긴박한 싸움이라는 구도이다. 또한 이 싸움에는 시간적 제한이 있다는 강한 추측이 더해져 그 강도를 극대화하기까지 한다.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 , “4월 4일 건은 문제없나?”와 같은 구체적 시간은 있으나, 그 구체적 시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은폐된 진실을 엮어가며 완성된 무엇으로 향하는 추론의 게임은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원초적인 주제에 관통하는 이중적 발견의 즐거움으로 견인된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느 추리작품의 세련됨을 능가하는 미덕일 것이다. 미증유의 살인 사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야만 했던 피해자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