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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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그늘과 빛 - 치열한 사랑의 성찰

 

넌 믿었지, 소피의 사랑이, 러시아어가,

내 삶과 내 죽음에 대한 조사(弔詞)가 널 해방시켜 줄거라고...”

-P 413 에서

 

이 작품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설>이 아니전기적 이야기라고 번역자는 썼다. 작품을 흥미롭게 읽어내는 데 있어 이 정의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우선 설명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분명한 소설이다. 화자인 가 작가 자신일 뿐이다. 즉 사소설(私小說)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경험 사실을 소설적 형태로 서술한 것, 따라서 작가의 경험을 한 치도 넘어설 수 없기에 갈등구조나 해결방식에 이르는 소설의 양식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돌파해내느냐에 문학적 성패가 달렸다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체험에서 삶의 균형을 상실하는 수많은 허구적 사건들을 취하여야 함을 엠마뉘엘 카레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도입된 것이 르포르타주, 53년간 러시아 코텔니치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있었던 헝가리인 전쟁포로의 사연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는 여정과 관련된 기록들이고, 작품 속에 또 하나의 단편소설인 연인 소피에게 보내는 회심의 사랑이벤트를 둘러싼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작가의 시선이 화자와 객관적 거리를 가지지 못해서 발생할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문학이라는 오명을 벗어난다.

 

한편 사실을 쓰는 사소설이기에 르 몽드에 게재한 포르노 편지형식을 띤 단편소설의 내용 역시 실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화자의 말을 빌면 수행적(遂行的)’이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경험된 것이 아니라면 경험되도록 해서라도 실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구성요소를 통해 비로소 이것이 소설이 되도록 하며, 문학적 예술성을 확보하게 된다. 단순한 전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코텔니치로 달리는 열차의 침대칸에서 꾸는 화자의 에로틱한 꿈처럼 상상과 현실의 경계 위를 지나는 기교, 7부에 이르는 작가적 구성능력까지 더해 문학적 향취 높은 소설임을 선언하고 있다.

 

자신의 내부세계에 갇혀 지내는데 지쳐있던 화자는 이제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반세기에 걸쳐 고독하게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되뇌었을 내적 독백의 언어를 웅얼거리는 전쟁포로 헝가리인이 수감 아니, 은둔해 있다시피 했던 러시아의 변방도시 코텔니치는 화자의 속을 갉아먹는 알 수 없는 정체이자, 고통의 뿌리인 외조부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는 이 르포르타주의 취재를 하면서 코텔니치가 자신의 그늘을 걷어내는 장소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한 화자의 노력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화자는 사랑하는 연인 소피를 위해 그야말로 사랑의 고백이자 선물로는 기발하기 그지없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단편소설을 계획된 일자에 게재될 수 있도록 르몽드에 발표한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수행적이어서 소설의 게재일자와 소설 속 열차와 시간은 등장인물과 현실의 조응을 예상케 하는 것이다.

 

이 두 내러티브는 지금까지 화자가 빠져있던 광기와 상실과 거짓말의 이야기들을 끝내고, 마침내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그늘에서 빛의 세계로 전환하는 기도(企圖)이다. 자신이 확신했던 사랑은 연인의 배신으로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에로틱하기 그지없었던 달콤한 밀어로 가득 채워진 단편은 연인에게 결코 펼쳐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사랑의 좌절에 번민하는 남자의 자기 성찰의 언어들은 이 소설의 스토리를 빛내는 압권이기도 하다. 한편 열린 성격, 다시 말해 편집할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코텔니치를 주제로 한 영화의 촬영 또한 그의 안에서 반복되던 과거의 깊고 깊은 우울을 떨쳐내는 데 결코 성공적인 여정이 되지 못한다. 그럼 이 화자의 기도들은 모두 실패한 것일까?

 

비록 현실의 원칙에 부딪혀 박살난 쾌락의 원칙이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말해진 무언가인 금지된 외조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무참한 폭로라는 비애를 드러내어 더 이상 자신이 침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종의 해방이기에 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것은 사소설 고유의 지위이기도 한데, 금지된 말,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통해 책으로 마침내 써낸 행위 그 자체가 성공이기도 할 것이다.

이번에도 쓸모가 있었죠. 난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았거든요. 난 이 책을 썼거든요.”(P414 에서)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객관적 거리감을 상실한 이 기이한 소설의 외줄 타기는 그런대로 목적지로 넘어갔다. 그러나 자기현실의 희생을 수반하는 이러한 글쓰기가 파멸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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