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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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내리 읽게 된 것은 화자가 처해있는 바로 그 상태가 내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완전히 바뀌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모든 변화 가운데 마지막, 가장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이라는 화자 '모든(맥스)'의 주절거림. 살아온 방식, 태도, 의지...등등 자신의 믿음을 철회해야하는 순간에 도달해 있음을.

 

그리고 그가 그리는 풍경 -  "온화한 날씨 속에 한 해가 끝을 향해 이울어가고, 낙엽들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낮의 밝음이 희미해지고, 가로등이 매일 저녁 어제보다 약간 더 일찍 켜지는 때에, 그래,  이것이 내가 어른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던 것이다. 늦가을에 맞이한 기나긴 화창한 날씨 같은 것, 고요의 상태, 호기심이 사라진 차분한 상태......마지막, 거의 알아챌수도 없는 해방을 향해 흘러가는 상태."(P 92중에서) - 이 왜 그렇게 시린지, 그저 절절한 울림이 되어 아득한 가슴을 움켜쥐게 된다.

 

아마 이 문장이 읽기를 견인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소설속에 정말 깊숙히 빠져들었으니까. '모든(맥스)', 그의 인생의 역사에서 맞이한 대(大)위기,  자기 삶의 변형의 매개였으며, 환상의 실현을 위한 방법이었던 아내, '애나'의 죽음이라는 위기 앞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중얼거리는, 결국 그 답이랄 수 있는 삶의 다양한 상황들이란 무엇인지, 이를 통해 무언가 위안을 얻으리라는 기대가 뇌리()를 가득 채웠으니까.  불현듯 '테리 이글턴'의 저서 <인생의 의미: The meaning of Life>에서 "전통적인 믿음들이 역사적 위기에 직면해서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삶의 의미'라는 문제가 앞으로 튀어나오는 경향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그래 '역사적 위기' 앞에 서게되면 지나온 인생의 길들을 돌아보게 된다. 허전하고, 공허하고, 아리송한 공백만이 느껴지는 그런 것, 그러나 그렇지않다고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 먼 기억들을 불러온다.

 

모든(맥스)은 소년시절 그에게 신(神)들이 거주하는 저택으로 보였던, 쇠락()의 기운이 내려앉은 '시더스'를 찾는다.  그의 삶에 어떤 의미, 아주 중대한 삶의 특징을 내면화시킨 그런 곳이리라. 신들, 그레이스 가족, 신비한 슬픔과 관능적 쾌락, 부의 여유와 쾌적함, 상류 계급에 대한 동경.... 소년은 '콘스턴스', 아니 그레이스 부인의 성숙한 여체, 부드럽고 지적인 관능에 매료되어 이들 가족, 신들의 집을 서성인다. 그리고 그 가족의 아이들, 또래인 쌍둥이 남매, 클로이, 마일스에 접근하고, 그네들 일상의 일원이 되어간다. 남매에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든(맥스)에게 이 신들과의 짧은 접촉은 그의 삶의 계획을 형성할 만큼 너무도 강렬한 것이다.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꿈 같은 계획, 이를테면 성, 놀이, 애도, 위안, 웃음, 죽음... 같은 것, 그리고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을 형성케 한 그런 시간으로 기억된다. 처음으로 자신의 객관적 실체를 지각했다고 하여 '모든(맥스)'의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은 아니다. 아니, 변한 것이리라. 독특하지 않은 어떤 존재, 늘 피난처와 위안, 아늑함, 그런 단순한 것들만 찾는 그런 존재, 세상의 벽에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와 같은 행동과 긍정의 투쟁을 회피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교활한 변신이라 해야하는 것일지도. 그래서 그의 아내 애나는 "왜 당신 자신이 되려하지 않아?"라고 안타까워 했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된 모든(맥스)의 태도는 이를 반영한다. "나는 마치 다른 매체로 뛰어들듯이 애나와 그녀의 아버지의 수상쩍은 세계로 뛰어들었는데, 이 환상적인 매체에서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규칙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렴풋하게 가물거릴뿐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었다. 또는 진짜이기는 하지만, 찰리의 아파트에 있는 완벽한 과일 쟁반처럼 가짜로 보였다. 이제 나는 이 흥미진진하고 낯선 심연의 주민이 되어 달라는 권유를 받고 있었다. ....애나가 나에게 제안한 것은 결혼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의 환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P101 중에서)

 

그러나 환상이 실현되지 못한것 같다. 자신의 얼굴을 보았으니까. 카메라 렌즈에 비친 얼굴, 그 타자를 비로소 보았으니까.  

 "내 표정은 하나같이 쾌활하고 환심을 사려는 듯했다.  ...정상참작을 요구하며 변명을 준비하는 이단자의 표정이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웃음을 짓고 있던지. 추파, 이것이야말로 추파였다." (P163 중에서)

사기꾼의 얼굴, 까발려진 자신의 내면, 미몽에서 깨어난 남자의 당혹스런 모습이 그려진다.

환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아내의 죽음, 그녀의 시계가 멈추자 남자는 자기의 자리를 생각한다. 자신의 합리적 생각들에 저항하면서. "미래의 어떤 순간에 수많은 오독과 실수와 대실패로 점철된 내 인생이라는 지속적인 리허설은 끝이 나고, 내가 늘 열심히 준비해왔던 진짜 드라마가 마침내 시작될 것이라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나도 안다. 이것은 모두가 품는 흔한 망상이다."  (P173 중에서)

 

과연 이 진짜 드라마는 무엇인가? 진짜 삶의 의미라는 것? 우리 인간 모두의 은밀한 목표. "살로는 이제 그만 존재하고, 고통을 겪지 않은 거미줄 같은 영으로 완전히 변신하는 것?" 그런데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만일 영생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이 나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의미들이 삶의 의미가 될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 또한 '모든(맥스)'이 마침내 외치듯이 연설되고, 표현되고, 말해지는 영원한 나같은 것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외려 욕망했고, 사랑했으며, 명상하기도 하고, 가끔은 치열한 경험의 힘을 축적하려고 하고, 세속적인 성공 근처에도 가보고, 즐거움을 얻으며, 마침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 자체, 그냥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걷는 그것이라고 나를 설득한다. 진짜 드라마는 이미 진행중이었다고, 리허설이란 없는 것이라고. '모든(맥스)의 기억들 - 욕망,관능,위안,아늑함,실패,슬픔,죽음....- 그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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