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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방구 뿌웅~, 이 무슨 실없는 서두인가 하겠다. 사실 오랜만에 아랫배를 움켜잡고 비실비실 웃어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구상의 모든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는 분명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단 하나의 미덕도 없는 완전한 실패작을 연출한 영화감독,‘인모’의 실소를 머금게 하는 신소리들이 들려주는 소위 ‘콩가루 집안’의 진솔한 이야기에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사람 사는 것이 별것이냐? 사람들이란“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다들 속으론 자기만의 병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진짜 삶은 미래에 있다고 버둥거리지만 남는 것은‘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니, 자신에게 허용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일 게다. 비범했다는 ‘헤밍웨이’나,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말이 “나는 버팔로 빌을 몰라요”라든가, “개가 불쌍해”라고 하지만, 우리 평범한 사람들 모두는 “맘마”가 처음한 말이 아니겠는가! 하는 웃기는 이 한마디에 실려 있는 작가다운 한 방에 모두 담겨있다 해도 지나친 독해는 아닐 것이다.
월세도 못내 쫓겨나는 신세가 된 마흔여덟의 실패한 영화감독 인모, 그래서 기어들어간 곳은 칠순의 노모가 사는 다 스러져가는 24평 연립주택 302호, 여기에는 전과 5범, 쉰 두 살의 백이십 킬로그램의 거구인 배다른 형, 오한모(일명 오함마)가 살고 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남편에게 쫓겨난 여동생‘미연’이 중학생 조카까지 대동하고 살겠다고 모여든다. 후줄근한 중년의 삼남매가“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서” 집에서 떠난 지 이십여 년 만에 엄마 곁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인모가 입성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대의 코미디로 연출 된다. “엄마! 인모새끼도 여기 들어와서 살겠대.”그리곤 오십 전후의 두 사내가 뒤엉켜 싸우는 꼴은 속절없이 킥킥거리게 한다. 물론 씁쓸한 여운을 선물하면서.
평균 나이 마흔아홉의 자식들을 위해 묵묵히 고기반찬을 연일 차려대는 엄마, 그런데 이 고기는 느닷없는 효력을 발생시킨다. 머리를 깎다가 슬쩍 스치는 미용사의 가슴에 “난 데 없는 발기”가 그렇고,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해석이 그것이다. 이처럼 해학 속에 삶의 진중한 의미가 넘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 된다.
이복형, 이부여동생, 이들 중 적자라 할 수 있는 주인공 인모는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고 가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 인물이다. 폭력과 강간으로 점철되어 감옥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형, 화냥기로 이혼을 밥먹 듯 하는 여동생, 외간 남자와 간통으로 이부 여동생까지 안고 들어왔던 엄마, 게다가 일평생 무능과 무지로 숱한 수모와 상처를 안고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로 구성된 가족, 그래서 이렇게 주절거린다. “불명예와 오명의 역사....도대체 내가 어떻게 가족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하고 몸서리치지만, 이들 모두는 바로 그 자신을 위해 희생하였던 인물들이다.
“이놈의 집구석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인가?”고 외치지만, 진정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무슨 동네 똥개도 아니고...”했던 여동생은 성실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형은 가족의 사랑을 일깨워준 조카를 구해내기 위해 맡아야 했던 불법오락실 두목의 뒤통수를 멋지게 때리고 사랑하는 미용사와 남국의 삶으로 떠난다. 부서진 희망을 부여잡고 자기만의 인생을 어루만지며 사는 것이 무릇 평범한 우리 인간들의 삶이라는 듯이.
한편 이 작품에는 버려진 낡은 헤밍웨이 전집이 작품 곳곳을 매개하고 있는데, 아마 헤밍웨이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제이크 번즈,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드릭 헨리, 등등의 인물들과 사물들, 그리고 헤밍웨이 자신까지를 통해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의 대미는 인모가 형 오함마에게 당한 오락실 두목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터지는 장면인데, 형이 있는 곳을 까발리려다 단지 붙잡아 온 이유를 듣지 않고 자신에게 매질을 가한 비논리적 행위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다. 아마 주인공 최초의 이타적 행위일 것이다. 결국 만신창이의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옛 애인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이라며, 비로소 진짜 삶의 평범한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마도 유쾌한 해학에 담아 지루하고 상투적인 듯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쓰다듬어 주려는 작가의 노력이자, 주인공 인모만큼의 삶을 산 작가가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비범하지 않은 평범의 진리이리라. 킥킥거리는 재미 속에서 삶의 진정성까지 깨닫게 해주는 즐거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