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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의 끝 ㅣ 쏜살 문고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첫 작품집 『쾌락과 나날(Les Plaisirs et les Jours)』중 네 편의 단편 소설을 뽑아 구성한 작은 선집이다. 아마 좀처럼 읽어내기에 참담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앞서 고유한 문체나 독특한 정서 등 문학적 감응을 통한 통독의 내심으로 유혹하기에 그만인 작품들이라 하겠다.
원작품집의 작품 배치와 같이 처음과 마지막 작품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이하 ‘발다사르’로 표기)」과 「질투의 끝」으로 동일한 편집 구성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여성 주인공의 관능으로의 타락이라는 공통의 제재로 묶일 수 있는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이하 ‘비올랑트’로 표기)」과 「어느 아가씨의 고백」이라는 두 편을 통해 어쩌면 그가 훗날 천착하게 되는 무의식의 심층, 정서적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소위 ‘프루스트적 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이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외침과 노여움에 가득 찬,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인 것을” - 셰익스피어, 『맥베스』 5막5장에서
처음과 마지막 단편인 「발다사르」와 「질투의 끝」 두 작품의 제재(題材)인 죽음과 질투는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감응을 선사하는데, 전자는 예고된 죽음에 친숙해져 있는, 즉 죽음의 유혹에 포획된 인물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 길 떠나는 이들에 매혹적인 약속을 속삭이는 짙은 바다(41쪽)”이지만, 후자에겐 고통과 미혹으로부터의 해방, 지난한 갈등을 해결하는 평온으로서의 종료이다. 각기 마지막 장면의 묘사는 1896년 『쾌락과 나날』의 서문을 쓴 ‘아나톨 프랑스’의 표현처럼 ‘지는 해의 서글픈 찬란함’이요, ‘신비하고 병적인 아름다움’의 우아함을 느끼게 한다.
질투라는 감정은 샘내고 시기하는 천박한 심리적 망상이라기보다는 꽤나 매혹적인 인간의 지성, 세련되고 무엇보다 논리에 집착하는 상상의 지각처럼 보인다. 발다사르의 경우 자신의 다가 온 죽음에 불현 듯 시라쿠사의 공녀 ‘피아’를 경쟁자인 ‘카스트루치오’로부터 빼앗아 곁에 두고 싶은 강박적 이기심으로 발현되고, 「질투의 끝」의 ‘오노레’는 연인 ‘프랑수아즈(손느 부인)’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소문 - “그자 말로는 ‘손느 부인’이 아주 격정적이라더군...!” - 에 의해 연인의 부정(不貞)에 대한 상상으로 빚어진 것이다.
특히 오노레의 뇌리에서 맴도는 떨어내지 못하는 상상의 연속은 치밀한 논리적 추론을 하는 이성과 매우 닮아있다. 이것이 죽음과 연결되는 것은 어쩌면 인간 에너지의 극한 소모, 불가해한 고통의 수반인 때문인 것만 같다. 발다사르 또한 죽음의 임박에서 피아에 대한 무리한 사랑의 요구인 영혼과 기억의 웅변 역시 그 어느 때의 말보다 빼어난 지성이다. 프루스트는 삶의 열정으로서 질투에 어린 숙명적 한계를 보았던 것만 같다.
「비올랑트」는 채워지지 않은 감각적 쾌락, 이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고향 스티리아를 떠나 궁중 사교계로 향하여 관능을 추구하는 의지박약한 한 여인의 일생을 술회한다. 곧 사교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며 숭앙받는 예술작품이 되지만 욕망의 덧없음, 권태로움으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원하던 물질적 삶에 대한 배움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던 스티리아 성의 집사이자 그녀의 가정교사 오귀스탱과의 약속은 끝없이 미뤄진다.
일면 교훈적인 어조로 구성된 오귀스탱이 비올랑트에게 하는 조언은 사교계 인물들이 추구하는 쾌락의 본질을 꿰뚫는다. “훌륭한 것에 마음을 쓰면 바로 그 훌륭함 때문에 ... 싫어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사교계이며, 이것들이 사랑하지 않는 “음악, 사색, 고독, 들녂(자연)..”의 상실이 곧 권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태가 야기하는 염증과 경멸마저 무너뜨리는 습관이라는 타성의 힘이 인간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불행과 행복을 분리하는 힘, 인간 욕망의 취약성을 복잡한 허영심과 섬세한 고뇌로 수놓은 젊은 작품이다.
반면에 관능적 욕망에 허물어지는 여자라는 「비올랑트」와 닮은 듯한 제재를 가진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내게 이 작품집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로 읽힌다.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지만 서툰 발사로 즉사하지 못하고 일주일의 삶이 남은 여자의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의 술회이다. 아마 이 소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장 많이 떠올리게 하는 이유로 더 집중하고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사랑, 고귀할 만큼 지극한 사랑의 기억이 깊숙이 배어있는 ‘레주블리(Les Oublis; 망각)’라는 장소에서의 엄마와의 달콤한 감동적 해후와 이별의 감미로운 인상들을 얘기한다. 여자에게 엄마는 신성이며, 고양된 영혼이고 지고(至高)한 순수이다. 즉 시간을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가 만나 강렬한 매혹의 순간을 기억, 체험하는 이 여정에서 ‘마르셀’의 어머니에 대한 반복되는 집착의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된다. 무의식에 침전되어 있던 매혹적인 기억들의 시간. 그리고 끔찍한 경악의 순간들을.
타락과 천진난만이 교차하고 모성의 자애와 자연의 잔인함이 교대하며 인간에게 안기는 생의 고통들이 지극히 섬세한 관찰의 문장으로 우아하게 독자의 가슴에 스며들게 한다. 혹자는 「질투의 끝」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스완의 오데트에 대한 질투, 마르셀의 알베르틴에 대한 질투라는 동일점을 시사하는 전 단계적 읽기의 대표작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작은 프루스트의 소설선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에 앞선 사전 읽기의 텍스트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과 욕망, 질투와 회한, 삶과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문학적 주제들을 풍성하게 담아낸 젊고 활력 넘치는 소설 그 자체로의 가치를 결코 폄훼할 수 없는 저작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