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 오렐리아 문지 스펙트럼
제라르 드 네르발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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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한 시대의 희미한 흔적들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인생의 아침에 사람을 매혹하고 방황케 하는 미망들,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무언가 가슴에 맺혀 잠시 시선을 옮기지 못한다. 반복되는 정신착란과 분열증을 겪으며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을 수 없는 이상을 좇아야 했던 19세기 시인의 어떤 숙명적 이야기에 빠져들며 동질감, 아니 유대감이라야 해야 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은 어리석게 소진해버린 삶에 대한 뒤늦은 회한인 것일까? 수록된 '제라르 드 네르발'의 두 작품,실비(Sylvie)오렐리아(Aurelia)는 작가가 1855126일 비에이유-랑테른(Vielle-Lanterne) 의 뒷골목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기 각기 1, 2년 전에 집필된 것으로 전해진다.

 

 

1. 실비;Sylvie

 

숭고한 이상, 감미로운 현실,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떼어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실비(Sylvie)동일한 사랑, 두 반쪽의 총체인 단 하나의 별, 이상화된 여인, 구원의 여신을 향한 방황의 꿈과 동경과 추억의 소슬한 사랑 이야기다. 어린 시절을 보내던 시골 마을의 소년과 소녀, 소년은 옛 왕가의 후손인 금발의 소녀 아드리엔의 광휘에 사로잡히고 단짝 소녀 실비를 잠시 잊는다. 작중 화자는 소설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어느 극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와도 같이

성장(盛裝)을 하고 무대 옆 특별석에 나타나곤 했다.”

 

여배우 오렐리의 미소는 무한한 행복감으로 그를 채워주고, 그녀의 목소리는 기쁨과 사랑으로 전율케 한다. 완벽함, 그녀 안에서 살고 있는 남자. 그러나 바라보기만 하는 이에게 그의 자존심은 반발한다. 추억으로 향하는 영상은 오래전 잊어버렸던 고향으로 향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실비의 발랄함은 풋풋하고 달콤한 활기를 선사하지만 아드리엔에 대한 기억과 이상화된 오렐리에 대한 상념으로 달아난다.

 

네르발의 소설은 그의 삶과 내밀한 연결을 피하지 못한다. 실비(Sylvie)의 등장인물인 오렐리는 소설 오렐리아(Aurelia)에서 다시 반복되어 그의 삶을 지배하는 구원의 여인, 세계와의 은밀한 조응을 가능케 하는 궁극의 총체, 존재의 비의(秘義)에 대한 발견을 향한 하계(下界)의 여행이라는 광기의 터널을 통과케 하는 근원이다. 이 같은 치열한 영혼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단편 실비의 싱그러운 추억의 일화들은 세상의 소음을 잠시 잊고 생의 어느 한 때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한다.

 

성과 그 둘레의 잔잔한 물, 바위틈으로 구슬픈 소리를 내는 폭포

그리고 마을의 두 부분을 이어주는 오솔길... 

붉은 히스 가운데 고사리의 푸른빛이 두드러져 보이는 황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가! 실비의 매혹적 눈길, 그녀의 달음박질...”

 

맑은 정취, 소박하고 영롱한 자연의 풍광들과 생동하는 젊음, 목가적 분위기와 어울려 젊은 날의 이상이 탕진한 현실의 어설픈 인식이 남겨놓은 사랑의 쓸쓸함이 애틋하게 그려진 수채화 같기도 하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에 대한 엇갈리는 대화를 주고받는 나와 실비의 배경을 수놓는 안개 속에 고립된 클라망의 수풀들의 묘사처럼 시야를 흐리는 뿌연 안개는 현실을 꿈과 환상의 지대로 옮겨 놓는다. 현실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영혼의 방랑, 네르발이 소설 오렐리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대인 꿈으로 향하는 것은 현실의 불가능성을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연민에 이르게 한다.

 

 

2. 오렐리아;Aurelia

 

네르발의 어머니는 종군 의사인 남편을 따라 전지에 동행했다 열병으로 사망했다. 네르발의 나이 두 살인 1810년의 일이다. 내겐 이 짤막한 사실이 온통 꿈과 환상의 기록으로 써진 소설, 광기의 회고록이라 불리기도 하는 오렐리아에서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단일성, 영원한 총체, 무수히 등장하는 여신을 향한 갈구와 결코 분리 할 수 없는 근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네르발의 또 다른 소설 불의 딸들서문에는 나의 이야기, 나의 모든 꿈들과 모든 느낌을 옮기기 시작했으며, 나를 내 운명의 밤 속에 홀로 버려두고 달아난 저 별에 대한 사랑에 측은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울었고...“라는 오렐리아에 대한 집필 의도와 감상이 있다.

 

또한 소설 속 숨겨진 짧은 문장이지만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방황하는 자기 분신과 싸우는 한 인간이 끝내 이르기를 원하는 대상의 실체가 보인다.


성모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쏟아낸 눈물이 내 영혼을 

진정시켜주었다...”   - P186 中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네르발의 오렐리아인 여배우제니 콜롱(1808~1842)’에 대한 지고한 사랑이라는 현실적 실체가 그의 이상화 된 신성으로 많은 평자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이상화된 여인상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라고 속삭인다. 소설 실비(Sylvie)에서 보이듯 네르발의 사랑은 현실에서 실현 된 것이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도달 불가능한 욕망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대목이다. 아드리엔도, 실비도, 오렐리아도, 어느 여인도 그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결코 안겨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자기 소멸(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멸과 윤회에 대한 신비주의에 대한 귀의는 사랑이라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 곧 자기의 무화(無化)이기에 무의식, 그의 지하세계의 어둠 속에서는 현실의 부정만이 가능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강박증의 세계마저 마침내 허물어지는 시기가 그의 기록으로 최초의 중대한 정신착란에 빠졌다고 하는 18412월이었던 것 같다. 이제 자기 분신과의 치열한 싸움, 본격적인 심연의 마주함이라는 영혼의 분투가 이어진다.

 

저 매혹적이고 두려운 몽환을 길들인다는 것,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 노는 저 밤의 영들에게 규칙을 부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  - P 218

 

그래서 그의 선택이꿈이라는 새로운 삶의 길인 것은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소설오렐리아는 그래서 제 2의 삶으로서 선택된 꿈과 환상의 기록, 광인의 기록이어야 했으며, 네르발의 존재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내겐 닿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기억의 저편 어딘가 무의식에 새겨져 있을 어머니를 향한 네르발의 애끓는 외침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그래서 네르발의 자살에 붙은 의혹의 시선들, 신비적 예식으로서의 죽음 이라든가, 절망의 고백이라는 해석보다는 지극히 근원적인 것,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마침내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길의 실천이었다고 생각게 된다. 이보다 진실한 인간의 기록이 가능할까? 음울한 고뇌의 심상함이 더욱 마음을 휘젓는 손에서 놓기 싫어지는 그런 작품이다.

 

모든 존재는 신이라는 존재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는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인 죽음은 존재들의 총화에로의 귀환이다.”  - P 140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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