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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옛날 옛적, 유년의 기억, 춤추는 추억들...., 그곳에 묻혔던 글과 말, 행위들이 깨어나고, 이야기가 싹을 틔우고 향기로운 꽃이 되어 자신의 뿌리, 외면할 수 없는 곳, 페르시아의 아픈 사랑을 시리게 퍼뜨린다. 이것은 이별과 죽음의 냄새만이 피어오르던 곳, 도망치듯 조국 이란을 떠나 낯 선 프랑스에서 망명자의 삶을 시작해야 했던 아이였고, 소녀였으며, 여인이 된 작가 ‘마리암 마지디’의 이 자전적 소설이 발산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첫 페이지는 한 남자가 감방에 홀로앉아 작은 돌에 아기 ‘마리암’의 이름을 새기는 장면이 펼쳐지고, 곧 이어 ‘옛날 옛적에 어머니....’로 시작하는 임신 칠 개월 여자의 필사적인 공포로부터의 도주가 묘사된다. 시위대에 참여했다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어머니의 이 행위는 아기에 대한 “미친 양육자, 다정한 암살자”의 무모함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옛날 옛적에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하마터면 너도, 내 첫 손녀도 죽을 뻔 했다고!”, “애를 낳을 때까지 너를 가둘 거니까 그리 알아라!” 아기 마리암의 생은 이렇게 구원되고 시작된다.
Maryam Madjidi évoque l'Iran au salon du livre
스냅장면 같은 일화와 소환된 조각조각의 추억 이야기들이 모여 사랑과 증오, 이해와 부정, 불어와 페르시아어와 같이 망명자의 자식으로서, 또한 이방의 나라로 내몰았던 조국, 다름을 배척하는 문화배타주의 방책을 견고하게 두른 이방의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를 혼란스럽게 서성거려야만 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이 떠도는 이야기임에도 그 방황해야 했던 여정을 유쾌하고, 때론 사춘기 소녀의 시니컬함으로, 그리고 성숙한 지성의 포용과 관대함으로 지펴낸다.
프랑스 망명의 길에서 발생한 경찰의 여권 압수, 아빠를 보러가야 한다고 줄기차게 울부짖음으로써 경찰의 마음을 돌렸던 여섯 살 꼬마의 맹랑하기만 했던 아찔한 추억에서부터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15제곱미터 7층 다락방의 문을 열던 아버지의 어색한 웃음의 기억, 미풍양속의 수호라는 이름아래 샌들 사이로 보라색 매니큐어가 보인다고 무력으로 젊은 여자를 끌고가는 이란의 파트메 특공대원들의 폭력성과 여기에 도사린 도덕적 위선에 짓눌린 사회의 단면이 스치듯 지나가고, 어린 딸아이의 늦은 언어 적응력에 노심초사하던 아버지와 낯 선 곳에서의 삶을 위해서 필수적이어야 하는 프랑스어를 드디어 입 밖으로 쏟아냈을 때 환하게 웃던 부모의 모습이 한 컷의 사진처럼 이어진다.
망명자의 “얼굴에는 흉터가 있다. 조국을 떠남으로써 두동강 나버린 흉터다. 나는 그 흉터를 감쪽같이 붙여서 남들과 똑같아지고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내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었다.”
그래서 소녀는 프랑스가 요구하는 광범위한 세탁과정, 그들의 문화와 다름을 완전히 지워야 하는 정체성 박탈과정을 이행하고 프랑스인으로서 그 사회의 일원이 되리라 노력한다. 그러나 이 이방의 나라 프랑스는 자신들과 다른 것은 모두 거부되는 사회임을 자각한다.
“무슨 일을 하세요?”
“전 프랑스어 교사예요.”
“프랑스어는 프랑스인이 가르치는 것 아닌가요?”
소르본대학 문학석사 마리암은 프랑스인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화들의 조각이 아마 일백여 단원은 될 듯하다. 이것들 모두의 단 한 쪽도 그저 넘길 수 없는 메시지들로 아우성을 쳐댄다. 그것에는 “기괴한 컬렉션으로 뒤 덮인 땅”으로 묘사되는 반정부 시위대원들의 주검으로 쌓인 저주 받은 조국, 심장이 감당 못할 만큼의 사랑으로 충만해서 그 분출된 사랑이 세상을 온통 물들일 것 같았던 어느 청년의 죽음에 대한 기억, 한없이 슬픈 눈을 한 아버지의 페르시아어 학습의 요구를 거부했던 어린시절 어리석음의 안타까움, 어머니의 서툰 프랑스어가 부끄러워 친구들을 집에 부르지 못했던 이기심, 옛 페르시아의 신비와 관능성을 떠올리는 서구에 장악된 오리엔탈리즘의 여전한 무지의 왜곡 등이 정체성의 경계를 오가며 하나의 방향으로 향한다.
‘내 이야기’를 쓰겠다던 마리암의 꿈은 바로 이처럼 페르시아어 수업을 프랑스어 소설로 실현해내고 있다. 주의 깊게 듣는 귀에 선사하고 싶다던 그녀 이야기의 청자(聽者)가 온통 나이고 싶을 만큼 이 ‘페르시아어 수업’의 풍성한 감동으로 빼곡한 아름다움에 몰입한다. 고통스럽고 아픈 추억과 일화와 이야기가 이란과 프랑스, 중국과 터키까지 행보하며 마침내 그녀의 영원한 조언자이자 말동무였던, 아니 그녀의 탄생을 구원했던 외할머니, 그의 몸에 머리를 묻고 유년의 냄새를 들이킴으로써 비로소 조국, 뿌리에 대한 이해와 삶의 균형, 견고한 자신의 정체를 단단하게 축조하는 것은 덩달아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한다. 그녀를 항상 기다려주는 가족, 그 뿌리가 있는 모국(母國), 이란과 그녀의 일상적 삶을 형성하는 또 다른 뿌리로서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이해의 이야기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