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분명히 처음 읽는데내 글씨 낙서가 곳곳에 있다.언제적인지 모를 낙서를 옮긴다.“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읽음. 의미심장하지 않다. 지나치게 소소한 일상의 편린. 그것이 흠이 되어 우리 평단은 하루키를 비판했을까. 20대의 꿀꿀한 남자가 사촌동생 이비인후과 병원 가는 데 동행한 이야기. 거기에 반딧불이의 주인공과 같은 경험인 10대 후반에 친한 벗을 잃고, 그 벗의 여친과 얽힌 이야기가 추억으로 등장. 귓병과 그 여친의 상상이 만나며 끝. 여전히 매력적인 문장도, 이야기도, 인물도 없다.”
온세상을 덮는 폭풍이 오자“길을 잃어 버렸습니다.두려움은 불안의 공간을 비추고 채우게 이끌었습니다.다른 이의 두려움은 잊게 했습니다.”그리고 모두들 함께 손을 잡았고해가 떴습니다.그럴 수가 있나?그랬으면 좋겠다.
네 편의 단편이 실린 만화책개성이 분명한 그림.앞 두 편은 기대는 소설과 만화가 있어서 그 이해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뒷 두 편도 전개가 매끄럽지 않아 잘 읽히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뭔가 놓친, 섬세한 것이 있었을까?재다 그런 것도 아닌데 어쩌다 외롭게 늙은 자들의 어긋나는 만남을 그린, 네 번째 단편 2-2-6이 그나마 읽을 만했다.
자신의 행복조차 관심 없이(“진심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연애할 겨를도 없는 법이지.“54)그림에 삶을 다 갈아 넣은1888-1890년 고흐의 삶이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에 담겼다.테오의 아들 빈센트2세가 태어나 가셰 박사댁에서 행복한 저녁을 보내고서는아무런 대사 없이 그 밀밭 그림을 좌우 두 쪽씩 3장 연거푸 보여 주면서 급하게 책이 끝난다.영문 모를 급작스러운 죽음을 절감한다.
예술영역이 소비영역과는 철저히 분리된 채 그 자신의 논리를 좇던 때, 사람들은 예술이 만족을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상업을 멀리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낮섦"이라는 아도르노의 격언은 아직 유효했다. 아도르노의 말이 맞다면 쾌적한 예술이란 모순이다. 예술은 낮설게 하고, 교란하고, 당황하게 하고, 고통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예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무른다. 예술의 집은 낯선 곳에 있다. 다름 아닌 낯섦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