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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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조차 관찰하며 타인의 것처럼
묘사하고 서술한다. 말이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꿈이 밀어낸 정액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들은 나오고 말았다 어디에선가 말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끝에 빛이 달려 있을 것 같은 구멍들을 향해 가고 있다” 55
“생각 없는 말들이 나온다 중얼중얼중얼 생각의 무게에서 벗어난 말들은 가볍다 말 속에는 단지 목청의 떨림이나 내장 냄새 발음 억양 따위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정말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내 안에서 무엇이 그 말들을 밀어냈던 것이다” 55
“말들은 두꺼운 살덩이 깊숙이 박혀 있다가
채 뽑히지 못하고 우두둑우두둑 뜯겨지기도 한다” 85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는 사무직 근로자의
극심한 피로와 권태, 불안이 가득하다.

“내 불안은 내장처럼 한꺼번에 거리에 쏟아져나오지 않겠는가.” 20

당연히 성찰이 없을 수 없고,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52

퇴근길에 맡은 돼지갈비 냄새를 맡고 냉소적 비판과 욕망을 역시 줄줄이 서술한다.

죽은 침묵에서 살아 숨쉬는 것을 듣고 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안주로 나온 멸치를 보고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 34
목조 가구의 대패로 깎아낸 자리의 무늬를 보고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93
한다.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것이
지구나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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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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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시편도 적고, 각 시들도 짧다. 어눌을 자처하는 듯하다.
낮달이 자주 등장한다. ‘소금빛 조선낫 한 자루’(38)로 고샅길에서 소피 보고 재회하는 ‘모자 쓴 낮달’(35)로도 나오고, 홀어미 설거지에 헹구기도 하고(18) 표제작에서는 이렇게 읊는다.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긴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9쪽, 귀

머물고 젖어든다.

낮달을 찍다



꿈 깬 팔랑나비

장자의 늙은 무덤 - P33

관음



어려서 배고파서
오이밭 주인에게
얻어맞은 귀싸대기
이제 와서 괜찮다고
허탕 치듯 사라져벼린
슬픈 귀울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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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현담 주해
한용운 지음, 서준섭 옮김 / 어의운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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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말고 한용운의 책은 예전 종로서적이 지상에 있을 때, 서가 깊숙한 데서 찾은, 서정주가 번역한 한시를 모은 것을 읽은 게 다다.
그러니 이 책은 금시초문이다. <십현담>을 한용운이 주해한 책이라고 한다. <십현담>은 10세기 중국의 조동종 선승 동안상찰이 선의 본체를 7언율시 10편으로 읊은 것이다. 김시습이 해석하고 주를 달아 <십현담 요해>를 펴내기도 했다고.
흥미가 동하는 거리가 많아 덥석 집어 찬찬히 읽는다.

1/10 마음을 다룬다. 한용운의 말이 이렇게 끝난다.

“山雨未晴 春事在邇” : “산에 오는 비는 개지 않는데 봄철 농사 일은 코앞에 닥쳤도다.”

무심은 세상 온갖 것에 대해 생각을 끊는 것이다. 대개 깨닫는 것의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그것이 소승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한용운도 “무심의 병이 오히려 유심의 병보다 심한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면 마음을 바로 보는 법은 “유심으로도 얻을 수 없고 무심으로도 구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그 답이 저 구절이다.
살짝 느껴질 뿐, 풀어낼 깜냥이 아직 내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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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시선집
신현정 지음 / 북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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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정 시인은 이미 돌아가셨고, 네 권의 시집을 남겼다. 이 시집은 시선집이다. 두 번째 시집 <염소와 풀밭>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 여기 실린 시들이라도 보려고 구해 읽었다.

우선, 첫 번째 시집 <대립>에 대해서 슬쩍 말하고 가야겠다. 74년에 등단해 83년에 냈다.

“자기가 깨어지지 않으면 암흑이 깨어지는
둘중의 하나인 세계!에서
보라, 이제는
벌겋게 달군 고문!의 쇠도 먹을 수 있게
이마가 남는다.“ 105 대립

신현정 하면 ‘바보’처럼 순한 마음, 어리숙한 표현이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시대에 저항하는 강단도 있다.

온 지구가 이글거리는 이 꼴을 생전에 보았을까? 미리 보기도 한다 시인은.

“이제는 땅을 매질해 집을 짓는 수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땅은 묵묵하게 받아들일 것이고 우리는 더 많이
땅을 매질해 많은 집을 짓고 물을 얻고
그리고 우리가 이제 더 많이 신음하고 아파하며
고통에 떨 것도 알고 있습니다.” 101 집을 짓고 물을 얻고

두 번째 시집 <염소와 풀밭>에서 뽑힌 시들에는 뭇 생명과의 교감이 가득하다. 풀벌레들의 밀약을 듣고, 달팽이의 질주를 보고, 민들레를 불고, 염소의 세계를 묻고, 나무의 손아귀에 덥석 잡히고, 민들레에게 정처를 알려주고, 고운 단풍을 보며 덫에 치인 짐승의 울음을 듣는다.

이미 읽은 나머지 두 시집에서 뽑아 놓은 시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얼마전에 읽은 듯한데, 초면 느낌이 많다.

최근 시집부터 옛 시집 순으로 편집했는데, 20여 년의 층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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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에서 청색지시선 3
고운기 지음 / 청색종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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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몸에 병을 얻자
나에게는 소주 올린 밥상 대신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31


짙은 쓸쓸함
“도화지 한 장만한 삶인 것이다
넓이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면 그만이다
/33번 버스는 오지 않고
실은
지난 번 시장이 노선을 개편해 버렸다 한다
/시절은
한 사람의 생애는 그와 같은 것이다” 20

“나의 생애는
재미없는 일정으로 설계된 채 버리지 못한 계절” 33


그러나, 계속되는 것
“옛길은 새길에게 자리를 내주고 두렵지 않다
두렵다면 길이 아니다” 59

시작은 꽃


강릉 길 수로부인이
아니 부끄러워하며 받던

치히로가 아버지의 옛 마을로 갈 때
가슴에 살짝 품고 있던

시작은 꽃이다

그렇게 떠나는 길에 꽃이다
어떤 어려움이 반드시 닥칠 것이니
그럼
용궁에 잡혀가더라도, 귀신의 여관 아궁이에 불을 때더라도
두려움 없이 던져다오
네가 받은 꽃
지지 않고 살아날 꽃

시작하러 떠나는 길
우리는 무리로부터 떨어지는 법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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