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오르며흙과 멀어질수록출세한다 국정교과서에 적혀 있고텔레비전이 연일 보도하고예고편 영화에서 대대적으로 알린다흙을 버릴수록돈을 번다 카피라이터는 이 원리로 카피를 쓰고영화감독은 엑스트라의 옷을 벗긴다흙을 무시할수록사람다워진다 세련된 사랑을 할 줄 알고합리적 관계로 매출액을 산출한다재선을 노리는 정치인이나 국밥집 아주머니나주저하지 않고 인정한다흙을 멀리할수록유용하다 지정된 층으로 예외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처럼삶이 보장된다먼지 하나 일지 않는 아파트 광장에서차들이 클랙슨을 울리며 동감한다흙에 무관심할수록오래 산다 죽음이 겁나 봉분을 올리고 비석을 높인다 - P109
두고두고 종종 꺼내 보고픈 책이다.절판이 아쉽다.
나는 우리 전통가옥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이 툇마루라고 생각한다. 담장이나 울타리로 되어 있는 우리의 가옥은 외부에 대해서 어느 정도 폐쇄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구조를 보면, 닫힌 공간으로서 방과 열린 공간으로서 마당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가옥은 휴면과 식생활, 생활용품의 보관과 저장, 주변환경의관망 등 가옥의 기능을 잘 살리기 위해 실내와 마당, 방과 방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는가에 대단히 치중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가옥 형태를 발전시켰다. 이 방과 마당, 방과 방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마루다. 마루에는 대청마루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툇마루는 전통가옥에 거의 다 있을 뿐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된다. 마당에서 활동하다가 신발을 벗지 않고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방에 들어가지 않고도 적당한 휴식과 주변 관망이 가능하고 실내에 있는 사람도 신발을 신고 마당까지 반드시 내려서지 않아도 되어, 방에 있는 사람이나 마당에 있는 사람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다. 툇마루는 닫힌 공간인 방에 밀착되어 있는 열린 공간이다. 툇마루는 실내라고도 할 수 없고 바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중간 공간인 것이다. 중간 공간이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을 소통시킬 수 있고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특별한 기능을 가진 툇마루야말로 여가를 일상화하는 공간으로서 우리 전통가옥의 독특한 문화가 아니겠는가! 사실 봉정사는 툇마루 절간이라 불러도 좋을 그런 사찰이다. 대응전에 툇마루가 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극락전에도 1972년 해체 보수하기 전까지는 툇마루가 있었고, 고금당에도 1969년 보수 전까지는 툇마루가 있었다. 보수 전까지는 극락전 맞은편에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연결하는 7칸의 우화루와, 화엄강당과 무량해회를 연결하는 3칸의 진여문도 있었다. 만약 보수 전의 이와 같은 모습을 상면, 현재의 영산암과 같은 폐쇄적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툇마루가 붙은 법당 건물과 기단을 한 단계 낮추어 강당 • 누각 • 요사채 등 법당 앞 건물들을 툇마루로 연결한 이러한 방식은 봉정사와 영산암이 같은 구조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영산암을 봉정사의 모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정사는 해체 보수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개방구조를 갖게 되었으나, 영산암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시대의 봉정사 모습을 추측하는 데 이 영산암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현재도 영산암의 앞쪽 구조체가 모두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봉정사를 ’툇마루 사찰‘이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P101
첫눈 야근 끝내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기 위해 사택(社宅) 골목 어귀에 다소곳이 서 있는 새색시의 스웨터 사이로 사글세방 연탄이 꺼지고 으슬으슬한 저녁, "이것 좀 먹어봐." 불쑥 방문을 열고 비지찌개 한 그릇 들어놓는 옆방 할머니의 메마른 손 사이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따서 입에 넣고 재잘거리는 횡단보도 건너편의 아이들 얼굴 사이로 오래된 앨범에 끼워진, 중국집 배달을 나갔다가 덤프 트럭에 깔려 죽은 불알친구 동석이의 오토바이 사이로 "하여간 굶지는 마라, 뭘 해도 몸이 성해야지." 식당에 일 다니는 막내고모님의 늦은 저녁 전화 사이로 몸 달궈 들이박는 저 눈물 - P46
“시를 시이게 하는 글자나 요소를 뜻하는 시안詩眼이 한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시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모실 때도 점안點眼이 가장 중요하듯 시에는 시의 눈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말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한 편의 시로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바로 그 말 하나! 이것이야말로 한 작품의 빛나는 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리말이 지닌 신비하고도 넉넉한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그냥 대충 소감이나 주장을 설파하는 시는 싱거워서 못 읽는다.” 133-134. 시작노트 모든 사라진 것들과의 해후 ‘하릅송아지’나 ‘엇송아지’처럼 농경문화와 함께 사라져버린 말들이 등장하여 벙벙해지기도 하지만,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엇송아지 한 마리가 강중강중 뛴다‘, ’낚시바늘 답삭 물고 몸부림하고 싶네‘,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등에서 볼 수 있듯 센말만 주로 써서 있는 줄도 몰랐던 여린말을 찾아내 알려주는데, 그 말결을 생각해 보면 참 딱 그 자리에 어울려 경탄한다. 생의 비의를 점잖게 읊을 수도 있으나,”소나무 가지에서 한댕한댕 흔들리는풍경 소리홋홋하고/낮곁 지나수련 잠드는 소리캄캄한 우주를 흔든다/오늘밤들고양이가떠돌이별처럼으앙으앙 울겠다“ 114, 무심사탱탱한 삶의 비루를 숨기지 않는다.“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무중력 우주선을 타고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방학리에 왔으니 학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을 쫒아가다가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124, 블랙홀
철학자가 써서 그런가 연혁과 문화재만 나열하는 소개글을 넘어선다. 꼼꼼히 읽는다.
비록 사찰이란 곳이 부처를 모시고 진리를 깨우치는 신성한 장소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지 자연의 몫이 아닌 까닭에 자연에게 사찰 조성의 양해를 구하고 혹 훼손되는 일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 여기는 토속신앙은 너무나 윤리적이다. 그리고 토속신앙의 그러한 요구가 영역침범을 불허하는 배타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기꺼이 순응해 간 불교의 겸손도 땅에 대한 우리의 윤리의식을 더 윤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밀 히 말하면 전통신앙과 불교가 화해한 것이 아니라 전통신앙이 불교의 팔을 끌고 함께 자연과 화해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교와 토속신앙의 이와 같은 만남은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에 망연자실해 하면서도 현재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P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