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시인선 548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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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쇠나
막 나온 강철이나
젊다고 씩씩대는 자나
하는 말마다 유언일지 모르는 때인 자나
태양 앞에서는?
아득한 우주에서는?

죽음아 너 어딨어?

아파트 낡으면서 사람도 낡아
엘리베이터에서 오래된 이웃 만나면
언제부터 우리 이렇게 됐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잠깐, 지금도
마음 홀리는 와인 한 병 잡으려
주머니 사정 살펴가며 마트의 와인 부스를 뒤지고
늦저녁 전철에서 빈자리 놔둔 채 꼭 껴안고 서 있는
젊은 남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죽음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꽃들이 가화가 되는 건 맞다.

꽃들이 죽는 이 세상에는
덮어씌운 눈 간질간질 녹이다가
살짝 웃음 띠고 얼굴 내미는
복수초의 샛노란 황홀이 있고,
해진 줄 모르고
독서 안경 끼고도 잘 안 뵈는 잔글씨를
죽음아 너 어딨어? 하듯
읽을 수 있는 마지막 글자까지 읽어내는 인간이 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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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0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황 선생의 시가 이렇게 변했군요. 문지시선 1번에 빛나는 시인답게 모더니즘의 기치를 휘날리더니, 급 관심! ^^

dalgial 2022-12-03 18:24   좋아요 0 | URL
네, 읽어 보셔요~
의연하고 자연스러운 노년이더군요.
 
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시선 484
이대흠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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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시집을 선물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이 시집은 썸타는 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면 좋겠다.
시인이 “바깥으로 향했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렸습니다.”라더니 특히 3부에서 화자가 당신이라는 청자를 갈구하는, 그 서정시들이 많다. 사뭇 말랑말랑한 표현도 시집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고.

그보다는 신선한 문장들이 좋았다.

채찍 같은 세월을 견디고 싶어서 우리는 명랑을 개발합니다 -21쪽

문득 마주친다면 나는 심심한 면발처럼 웃을 것입니다 -24쪽

연습하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을 치러야 합니다 -28


또, 이런 충고는 얼마나 값진가.

한 정서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 대개의 행복은 복고풍이고 괴로움은 지나치게 유행을 탑니다
오만의 속옷은 감추어도 드러나며 비굴의 외투는 몸을 옥죄어 숨통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 가끔은 명랑의 손수건도 나쁘지 않겠군요 근엄의 넥타이를 매셨다면 넥타이의 무게에 무너지지는 마십시오 -46


시인의 장흥 살이가 묻어 나오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구순 노인들의 다시 없을 독백인 듯한 대화 말고는 몇 없어서 아쉬웠다.
누구에게 선물할까 가만히 벗들을 불러 본다.
아래에 적는 시가 이 시집에서 나는 제일 좋았다.

구름의 망명지

고향을 적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구름의 망명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름의 거처에는 주소지가 없으니까요 구름에겐 이력서도 없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구름의 일이 아닙니다 구름은 언제든 자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은 한번도 당신을 벗어난 적이 없군요

구름이 되려면 머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아픈 곳,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더라도 지나쳐야 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도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가 집입니다 주어가 사라진 문장처럼 가벼워져야 합니다

있다와 하다의 사이를 지나 구름의 망명지로 갑시다 죽은 별이 자신의 궤도를 내려놓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안전이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기처럼 당신은 당신을 벗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달아난 당신만이 도착할 것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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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탐정 2 - 사이드킥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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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에서 지로 말씀하길 스토리가 리얼리즘이란 점에서 무리가 있어 ‘하드보일드 판타지’라 했다.
그러나, 그래서
어딘가에 있을 듯한, 있었으면 좋을
무뚝뚝하지만, 따뜻하고 심지 곧은 사람들이
서로 도와 해피엔드에 이르는
여기서는 특별히 동물과의 교감이 함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지로는 다음 권을 그리고 싶다 했는데
류몬과 김금화의 붉은 돼지 스타일 우아한 로맨스도 살짝 기대했는데
2권으로 멈춰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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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탐정 1 - 세인트 메리의 리본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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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2권을 읽고 싶다.
개도 사냥도 전혀 좋아하지 않으나,
인물, 이야기, 그림 다 좋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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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 시작시인선 448
김선태 지음 / 천년의시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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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 그대로 짧은 시들이 모여 있습니다.
짧은 시는 기승전결이라는 빌드업 없이 한번에
깊은 울림을 주거나, 기발하여 짜릿함을 줍니다.
덧없음을 깔고 있는, 선사들의 시들은 끝내 공허하여 가슴이 시리지만,
김선태는 단단히 속세를 붙잡고 있어서
눈이나 맘에 드는 시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새순

삐죽빼죽 돋아나는 아이의 송곳니
머잖아 허공을 푸르게 물어뜯을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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