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갈의 향기 - 황금이삭 2
이시영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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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시영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하면 슬쩍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런 것도 시가 되나?
그의 시는 크게 두 축으로 세상에 나온다. 하나는 이야기다. 고향의 이야기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 문단의 뒷 이야기들. 굉장히 인상적이고 재밌다. 간결하면서도 얘깃거리가 풍부하다. 이 역설에 그의 장점이 있다.

“학재 당숙은 등짐을 잘 져 밤마다 빨치산들의 보급품을 지고 산으로 갔다. 그런데 하루는 보급품이 바닥나자 그의 집 암소를 끌고 산을 올랐다. 그런데 소가 천황재를 넘자마자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한 걸음도 더 떼지 않고 그렁그렁 울어대었다. 기이히 여긴 빨치산들이 암소의 등짝을 쳐 그에게 돌려주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어이 당숙 동무, 이 소 동무에게 좀 잘해주시구레!˝ 19쪽, 소 동무

“요산 선생 임종시에 일곱이나 되는 딸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침상맡이 한동안 부산했다고 한다. 요산 선생이 가느단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갖다대며 말했다. “아부지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러 왔으면 좀 조용히 해야지 이 무슨 소란들이냐!” 그러곤 가만히 눈을 감으셨다.“ 50쪽, 樂山 선생님

소설가 김정한의 정갈한 인품이 훅 끼쳐온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 시집에는 송기숙, 외미동댁, 16세 까까머리 국군 소년 사병, 학재 당숙, 한남철, 박윤배, 박정만, 최장학, 송건호, 유홍준, 김원일, 송기원, 사형수, 리용악, 김동리, 서정주, 박용래, 김관식, 황의복, 육촌 매형, 자야 여사, 북한의 농부, 신동문, 임영조, 박건한, 안 선생, 김만숙, 이주홍, 해군들, 고은, 이문구, 조태현, 정수일, 여운형, 김종철, 지율 스님, 황 모 작가, 노영희, 박목월, 김구용, 재용이 아버지, 신대철, 이영진, 봄면댁, 현경이, 코보네, 응식이, 요시다 씨, 기쿠치 씨, 박동훈, 능원 스님, 김남주, 종태 스님, 이근배, 정지용 등의 이야기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매우 짧은 시. 한두 줄에 그치는. 그러나, 울림 큰.




해 잠기는 옅은 강에 송사리들이 몰려 헤엄치고 있습니다.
강물이 내려다보곤 잠시 생각에 잠기다간 이내 자기의 길을 무연히 갑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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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 - 백무산의 길 잡도리 하나
백무산 지음 / 갈무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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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슬프다.
늙어가는 투사의 ‘문드러진 발톱’이
‘세월에 쓸려가 버린 날들’이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 많은 ‘형’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공고한 ‘무한경쟁의 자본’과 ‘무한차별의 혐오화’가 탄생시킨 ‘제국’이.
그러나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무엇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무엇이 권력을 탄생시키고
무력을 조직하며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가
무엇이 전쟁을 유도하고
무엇이 학살을 지시하는가

그것은,

혐오다



그대, 다시 거리에 나가 이제
정의와 평등을 외쳐 보아라
이것들이 보편적 가치라고 알고 있다면
그대는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하리라

저 무지하고 저급한 무리들과
저학력과 유색 피부와 저열한 종족들과
같은 거리를 활보하고 같은 권리를 누리고
같은 식탁에 마주앉다니 어떻게 저들과
아래위도 없이 자연의 질서도 무시하고 살 수 있느냐고 혀를 차고 비웃으며
혐오하고 있다

그대, 다시 거리에 나가 이제
사랑이라고 외쳐 보아라
그것이 초월적 가치라고 생각했다면
그대는 손가락질을 면할 수 없으리라
언제라도 준비된 폭력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어떠한 침략이 신의 정의와 사랑의 이름으로 짓밟지 않은 것이 있느냐
저들이 차별의 금기를 확고히 하고
저 높은 곳에서 시혜를 베풀 때만 사랑이며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차별의 혐오를
재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평화를 제압하여야
저들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 P115

지나간 날들이여, 오 슬프고 어두침침하고 창백한 것보다 더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나는 사랑이 아니라 분노를 택하였네. 처음 그것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나 내 사랑은 분노의 불길로 인해 깊은 화상을 입었네.
나는 아직도 사랑이 두렵네. - P36

슬프고 놀라운


내가 가꾼 텃밭에 잡초만 무성하네
내가 심어 싹을 틔운 것은
그늘에서 햇빛도 받지 못하였네

잡초들만 꽃을 피워 가득하네
내가 가꾼 것은 꽃망울도 맺지 못하였네

내가 꿈꾸어 온 것은 어디 가고
낯선 것만 내 텃밭에 뿌리 내렸네

어쩌다 이리 낯선 삶만 무성한가

그래도 저것은 모두 내 텃밭에 핀 꽃들
저 꽃들 모두 날 찾아 온 꽃들

뱉고 나면 언제나 낯선 말처럼
삶은 낯설어 슬프고 놀라운 것 - P51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 P44

이 싸움이 네 욕망이냐 내 욕망이냐가 될 수 없다
네 권력이냐 내 권력이냐가 될 수 없다
네 것 내 것 차별이 될 수 없다 그 자체다
강도라면 강도 자체를
총칼이라면 총칼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
이것이 얼마나 먼 길이냐
얼마나 가까운 내 안의 길이냐
그래서 삶은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살아서 언제까지나 가슴을 치며 울기를
두려워 말자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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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의 꽃 서정시학 서정시 126
나기철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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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머니를 잃었다. 1부에 그 상심을 담았다.

“살던 집
문 닫히고

제주 바다 하얗다

청천강 옆 마을로
날아가신

어머니” -새, 15쪽

그리움이 왜 없겠는가마는

”아내가 집에 있다

아파트 문
열기 전
걸음이 빨라진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있는 집에
올 때처럼“ - 엄마, 65쪽

그의 시는 아주 짧고
내내 ‘덤덤하다’
그래서, ‘선명하다’

녹나무


연둣빛 바람
누렇게
지는 이파리
하나

다시
바람 분다

저 너머
어제와 다른
구름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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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산책
다니구치 지로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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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 완숙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림도 줄거리도 여유롭고 자연스럽다.
고바야시 잇사가 두 번 나오는데, 하이쿠의 묘와 이야기 전개가 아주 잘 맞물린다.
엊그제 읽은 줄 알았는데, 일기앱을 찾아보니 딱 8년 만이다.
그사이 작가는 가시고 작품은 여전히 훌륭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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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외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7
복효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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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뭇 생명을 바라본다.
선량한 온기 가득한 눈으로.
그리고 ‘받아 적’는다.

따뜻한 외면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나비 쪽을 외면하는
늦은 오후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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