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런거리는 뒤란 창비시선 196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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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문태준의 첫 시집이다.

음산하다.
한 세대 전의 농촌과 다를 바 없는, 폐가 넘치는, 음울한 공간으로 그려진 농촌이 배경이다.
다만, 전혀 정치적인 접근은 없다.
개성적인 시각과 표현이 있다.

지는 꽃


언덕길에 곱사등이들이 모가지를 빼고 앉아 있네

문득 휘몰아친다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은
등뼈를 바깥으로 탈골시키네 그들은 대갈못처럼
더욱 주저앉네, 꽃에서 한잎의 귀가 떨어지네
이 지상에서 잊혀진 소리들이 건너 지방으로•••••••

우리는 등을 켜고 가만히 보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힘을. - P24

내 배후로 夕陽, 夕陽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내 맨발 흥건히 젖어들 때
툇마루에 반쯤 걸터앉은 햇빛에는 애당초 누군가 살고 있는 게다
한량처럼 열대의 늪을 건너가는 河馬와
南國으로, 남국으로 한절기를 버티려는 되새떼 그 빈사의 폭동 사이
개 같은, 당최 이 개 같은 틈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때
내 맨발이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가려질 때
눈에 호롱불을 들이고
바늘귀를 꿰주마, 중얼거리는 그런 오랜 족속이 있는 게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내 할머니 넋, 혹은 내가 부려온 세상의 노복들이 있는 게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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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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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지배해온 사람들이 동상이나 기념관을 세워 추앙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나라가 그 하늘에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나라의 글자를 만든 임금이 있었고, 어떤 도를 실천하려는 선비들이 있었고,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 P106

성장통이란 말을 끄집어내게 된다. 그런데 합당한 말인가. 그 말이 비록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가득 안고 있다 하더라도,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게 하기에도 십상이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내가 4•19와 5•18의 중간 어름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에도 하는 말이지만, 경무대 앞에서 그 많은 학생들이 무얼 몰라서 총 맞아 죽은 것이 아니며, 거대한 폭력에 에워싸인 광주의 젊은이들이 그 마지막 밤에 세상을 만만하게 보아서 도청을 사수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잘 만들어진 실패담이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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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한강 1 : 해방
김세영 지음, 허영만 그림 / 가디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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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마님의 딸 아씨를 혜린씨라 부르게 되었고
그는 평양으로 향한다.
다 말하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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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타이밍 애지시선 113
이송우 지음 / 애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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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다.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노동시.
투쟁을 외치지 않는. 추상적인 것으로 숭고하게 존재하는 그 노동이 아닌. 어떤 노동의 구체.
삼성전자 프린터 부분 상품기획 쪽 일을 하다가 프린터 사업부 전체가 HP로 넘어가고, 그예 ‘강제휴업명령’ 당한 이야기가 담겼다.

‘오토모티브 섹션장’, ‘컨조인트 효용 조합’, ‘상관계수 0.3’, ‘T2O 프로젝트’, ‘크론바흐 알파값’ 등등 낯선, 화자의 직장 생활에서는 익숙할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암 진단 후
곧 돌아오겠다고 웃던
개발팀 김수석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병석에서도 걱정이 많더니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네요

매출 확대를 위해
해외 거래선을 개척하고 오겠다던
걸걸한 목소리의 영업팀 이부장은
자신을 탓하다가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목을 맸다지요“ 54

”역량개선 프로그램에 내 이름을 울린 친구야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함께 산행하던 네가 부디 슬프지 않았으면“. 88

”삼십 년 개발자들
봄날 벚꽃처럼 날려가는 날“ 90

”어제는
명예퇴직한 동료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모금을 하자는 이메일을 보았다
청춘을 보낸 회사에서 자발적으로 밀려 나온 뒤
자택에서 맞은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죽음“ 92

등 비정한 자본에 희생당하는 부속품으로서의 고난이 흩뿌려져 있다.

”딸내미가 손목을 그은 후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렸고“ 96
”백신을 맞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앓는 사람처럼
뿔뿔이 흩어지라는 말이다
이곳에서 사라지라는 말이다“ 93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 섰다고
떨고 있는 나에게
두 손 놓아도 괜찮다고
여기 절벽은 없다고“ 99

이후가 궁금하다. 신경 쓰인다.

진부령 종산제


봄비처럼
사랑하는 이는 쉽게 떠나고

가을 서리처럼
새로운 이는 익숙해지기 어렵다지만

길이 끝나고
길이 시작되는

당신과 나를 기억하겠습니다 - P107

모세의 기적


선배님들 제발 나가주세요
저희도 좀 삽시다

애들 학자금 걱정되신다고요
오래 다니셨네요
저희도 일 좀 해봅시다

GM대우에서 왔다는
신임 인사팀장은 모세다

한솥밥 먹던 사람들, 노소로
단번에 갈라놓았다
그 정리해고 전문가는 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흩어지면 죽는다 - P87

궁극의 미래는 낙화,
터질 듯 부푼 목련이나
흩날리는 벚꽃이나
모든 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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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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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계약직 보일러공
막 쉰이 된 나이.
짐작할 수 있으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고단함과 서러움.

“생을 축음기에 얹어 되돌린다면
바늘이 가볍게 긁어내는 슬픔이 강처럼 흘러올 것이다.” 38


“개활지엔 덤프트럭 먼지구름 피워올리며 오가고
자주 빈약한 가로수 뒤로 숨어야 했다 삶은 늘 그랬다
먼지 걷히길 기다려 다시 길 위에 서나
어디에도 정처는 없다 그땐 아직 몰랐다
두려움이 한 생을 벌레처럼 파먹어버리라는 것” 44

“슈퍼엔 통조림이 많다 정어리 통조림은 싸다
배움이 짧아 고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정어리 통조림을 꾸준히 선택한다 누구도 이의를
달진 않지만 때로는 저녁 식탁의 젓갈질이 늘어지는 걸 본다” 74

그러나, 삶이 신산하기만 하겠는가.

“열일곱, 처음 손공구를 틀어쥐었다 차고 묵직하고 세상처럼 낯설었다 스물일곱, 서른일곱, 속맘으로 수없이 내팽개치며 따뜻한 밥을 찾아 손공구와 함께 떠돌았다 나는... 천품은 못되었다 삶과 일이 모두 서툴렀다 그렇다 그렇다 삶과 일과 그리고 유희가 한몸뚱이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나는 머리칼이 잔뜩 센 나이 마흔일곱에야 겨우 짐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주 오래 움켜쥐고 있으면 쇠도 손바닥처럼 따스해지고야 마는 듯” 57

익어가는 것이고, 따뜻해지는 것이다.
사랑 또한.

“밤낮없이 북대길 때 아내 얼굴 아슴푸레하더니 각방 쓰기 잦아지며 선연히 떠오른다 그래, 너로 하여 세상이 오래 뜨거웠구나 돌멩이마저 구르게 하는 힘이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죄다 미인이다, 이 한구절을 쓰는 데 나는 꼬박 사십년이 더 걸렸다.” 39

노동의 가치와 필요성을 또 이렇게 자연과 잘 버무려 강조한다.

“목련꽃 피면 겨울 하나 또 갔다,가 아니라
남자가 일할 수 없다면 목련꽃 펴도 봄은 온 게 아니라는 거다
세상은 꽃과 일이 함께 있어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법“

아래와 같이
시인이 닳도록 읽었다는, 박용래 시인에 대한 오마주이자
건강하고 따뜻한 삶이 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듯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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