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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집 ㅣ 애지시선 28
정군칠 지음 / 애지 / 2009년 8월
평점 :
2009년에 나온 시집을 이제 읽는다.
읽자마자 좋아 시인의 다른 시집을 읽고자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본다.
이럴 수가. 2012년에 돌아가셨다.
이 시집이 두 번째 시집이자 생전에 낸 마지막 시집이다.
가족, 고향의 풍경이 담겼다.
그런데, 제주다.
그러므로, ‘구겨진 섬의 비명’이 가득할 수밖에.
시인의 아버지는 보리 수확을 하면서, 거기 깃든 꿩을 위해 수확의 ‘가처분 신청’을 하는 분이다.
“점심을 내 온 어머니는
성으로 남은 보리밭을 둘러보며
심드렁하게 말 한마디를 얹는다
또 알을 품은 목숨이 있는 모양이구먼”55
그도 깊은 애정을 담아 읊는다. 그래서 처절하기만 하지는 않다.
그리고, “탈탈탈,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가는
농로 위 저 문체가 간결하다” 94
지나침이 없다.
과잉도 간과도.
지주목
디스크를 앓는 맏형 열다섯 터울인 나는 어린나무였다 마디 굵은 지주목에 등 기대면 달착지근한 아버지 냄새가 풍겼다 내가 서너 차례 어긋났을 때 비바람에 무너진 과수원 돌담을 고쳐 쌓듯 바람막이가 되어주던 등허리 서서히 헐거워진 몸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나도 잎 무성한 성목인데 허옇게 센 머리와 아픈 허리 곧추세운 지주목은 퇴행된 디스크에 각인되어 있는 가계의 멍에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허리를 펼 때 우두둑 뼈마디 성긴 소리가 끙, 목을 타넘지 못하는 소리로 변주되는 지주목 바람 세찬 날이면 아직도 그 한쪽 어깨에 온몸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 P44
절벽
모래무덤을,
바람이 들고 나던 바위그늘을,
물 속 골짜기마다 무늬를 새겨 넣던 노을을,
그림자도 없이 혼자서 판독하며 걸어와
펑펑 우는 바다 - P58
풍토병을 앓는 바람이 굽은 능선을 타고 내린다 오래전 이 길 걸어간 누군가의 속울음이 내게로 번지는 듯하다
철 늦은 물매화 꽃향유 쑥부쟁이 들꽃들의 메마른 사유가 쓸쓸하다 꽃 한 송이 피우는 게 생의 전부였을 몸의 감옥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한
꽃의 울음인가 그 울음의 그늘인가
누구일까, 방금 아니 오래전에라도 무엇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긴 지나간 것인가
내 눈은 오래도록 밖을 향해 있었으니 나를 읽은 적 한 번도 없다 - P104
孤內
얼마나 외로웠으면 고내리 가는 길은 등뼈 다 드러나도록 검게 타들어간 채 안으로만 길을 내었을까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의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일
외로운 자들은 제 안의 화를 제 안에 태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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