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먹는 소 문예중앙시선 28
고진하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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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똥찬 통찰이 담긴 묘사다.

“건기가 길어지고 있다
풀뿌리까지 타들어가는 건기에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들은
풀썩이는 먼지와 동족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은 눈치다
사방팔방
마른 잎들을 다 날려 보내고
졸가리만 남은 나뭇가지 하나가
치열이 비뚤비뚤한 바람의 이빨을 닦고 있다
치카, 치카, 치카· · · · · ·
천하 건달 바람의 누런 이빨을 닦고 있다“ 26, 님나무* 천연항생제가 함유되어 있어, 지금도 가난한 시골 사람들은 님나무 가지를 꺾어 이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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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촛불 애지시선 24
복효근 지음 / 애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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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은 무척 따뜻하다. 뭇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하다.

“오체투지, 일보일배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20, 자벌레

자벌레가 어디 가는 모습을 아주 섬세히 묘사하면서 거기서 배운다. 경전으로 모시고. 목숨을 건 한 걸음걸음. 우리의 삶도 다를 바 없고.

그리고, 애틋하게 바라본다.

“땟물 지문이 드문드문 찍혔다
참고 참았다가
누이가 건네주던
차게 식은 삼립호빵” 85, 보름달

보름달을 보고 누이가 준 호빵이 떠오른다. 땟물 지문에서 느껴지는 가난과 망설임과 사랑. 지금은 그 호빵 회사가 비정한 한국식 자본주의의 선두 주자가 돼버려 그 애틋함이 반감되어 읽힌다. 한때 이쁜 이름이었을 것이 개명 대상이 된 ‘조주빈’처럼 언어는 제한된 표상에 불과한지라 힘센 의미에 휘둘리기도 한다.

유난히 감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병풍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다섯 번 등장한다.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16-17, 접목椄木

‘늘그막의 두 내외’의 해로를 다른 두 나무의 접목에 빗대면서 한 나무로.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행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54, 아침

맑고 싱그러운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들려주는 주체로

“감을 감으로 불리우게 하는,
그 무엇을 그 무엇으로 불리우게 하는 것은
다 사라진 뒤에도
사라진 그것을 추억하는
그 얇은 껍질일지도 모른다” 70, 껍질을 위하여

껍질의 의미를 파고들 때 그 알맹이로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72-73, 막막한 날엔

길도 소용 없고, 알고 모르고도 소용 없이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그대를 찾고 사랑하겠다는 연시에서 그것을 지지하며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76, 무심풍경

우주 만물의 한 존재로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무심한 풍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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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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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의 시를 읽다 보면 그가 60대 후반이란 사실에 놀란다. 치열하고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정서도 시각도 유순하지 않고 날카롭기 그지없다. 60대가 청년인 시대인데 오해한 것일까.

그는 시에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법이 없다. 흐릿하게 툭 던질 뿐이다. 그래서 매번 시의 화자를 대할 뿐, 이규리라는 시인을 떠올리지 않고 읽는다.

화자는 매우 아팠고 어둡다.

“머뭇거림과 갈등과 고립과
나는, 안 되는구나” 025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026

”때때로 병을 더 연장할까 싶을 만큼 생은 무료했고
/통증도 초기는 아름다웠다
/궤양처럼 뿌연 해가 번지고
약이 알록달록해질수록 혈은 무거워갔는데
/그때 약국을 나서다가 현기를 만났다” 052

“나는 잘살지 않았으므로
누가 알은체하면 두려움이 많았고
…고립과 우울이 1+1” 070

“어제는 아프고 아름다움은 위태롭고” 109

“종일 말하지 않는 아이, 웃지 않는 아이, 세상을 너무 일찍 닫아거는 비애
/나의 오랜 선생이었던 이것” 110

“원인도 모르는 슬픔으로 격리되겠습니다” 130

그 바탕에는 ‘없음에 대한 일’이 있다. 삶이란 본래 허무한 것이라는 인식.

“꽃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어” 029

그는 ‘첫눈’. ‘뭉쳐 고이 방에 두었던’.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인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나 그가 고이 쥔 눈은 허공이었으며, 결국 ‘물기도 없이 흩어졌다’.

그러니,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행로를 갈 수밖에 없다. 쥐었으나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가능한 일이다. 삶이 그러하고 죽음이 그러하듯이.

“돌아갈 수도 또
나아갈 수도 없는 저 발가벗은 햇볕 속을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기어가고 있는
지상의 춤,
/멀어라” 021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불가능
언제 어디서나 불가능한 가능
/갈 수 없어요
가고 싶어요” 028

이전 두 시집을 읽어 봐야겠다.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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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문학동네 시집 27
정일근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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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무겁고 슬프다.
경주 남산 연작 내내 그 이후에도 삶에 낙이 없다.
시집에는 ‘젊어서 몸과 마음이 아픈 나’117 정도만 나오는데, 찾아보니 이 시집을 낸 마흔 무렵에 뇌종양을 앓았다고 한다.
남산과 불교에 기댄 1, 2부 시들이 무거울 뿐 부족하지는 않으나,
일상의 다채로움이 담긴 3부가 더 좋았다.

“불판 위에 남은 고기가
자신이 뿜어낸 기름 속에서 다시 타고 있다.” 120, 중년

퇴락해가는 항구와 시집 내내 가득했던 슬픔과 쓸쓸함이 잘 버무려진 데다 묘사가 신선하며 뛰어난, 아래 밑줄긋기 한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구룡포 5리의 밤



파시는 오랜 전에 끝이 났고 항구는 더이상 잔치 음식을 담을 수 없는 이 빠진 낡은 사기접시 같다. 그 위로 얇게 고인 바다, 촉수 낮은 백열등 같은 파리한 조각달이 켜지고, 넘지 못하는 언덕과 나가지 못하는 바다 사이에 갇혀 그렁그렁 쉰 목소리를 내며 늙어가는 진퇴양난의 적산가옥들

늙어가는 것은 집들뿐만이 아니다. 이미 늙어버린 구룡포 5리의 길들, 그 길을 따라 찾아오는 아무도 불 밝히지 않는 어두운 저녁. 대처로 이어지는 큰길은 마을 밖에서 투덜거리며 우회하고, 한 번 우회한 사람과 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떠날 수 없는 집과 집. 번지와 번지 사이 실핏줄처럼 숨어 숨을 쉬는 골목길을 불러 깨우는 저 메밀묵 장수의 발자국 소리

사라진다. 바다로 열린 창문들 밤새 알 수 없는 이 지역 방언으로 중얼거리고, 정박중인 녹슨 바다 안개가 찾아와 홑이불 밖에서 뒤척이는 내 불면과 몸을 섞는다. 폐경의 자궁 속에 갇혀버린 마을, 다시는 새벽을 해산하지 못할 것 같은 무거운 어둠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와 운다. 아프게 운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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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백 - 飛白
오탁번 지음 / 문학세계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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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다.
세는나이로 여든인 2022년에 냈다.
2023년에 돌아가셨고.

늙음은 여러 모습으로 시에 등장한다.

완고
“역사적 사실에 개칠하며
입맛대로 나대는 놈들이 많다
침략자가 누군지 두루뭉술하게
6.25도 얼버무린다
여순도 4.3도 좌냐 우냐
업어치기 메치기 일쑤다
/그러면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조일전쟁
병자호란은 조청전쟁
이래야 평화 지향이 되겠네?
-6.25는 남북전쟁
이래야 통일 지향이 되겠네?
/나는야
겨울 피란길에서
죽다 살아나
백운초등학교 1학년 때
인민군이 남침한 6.25를
사무치게 배웠는데!” 100, 두루뭉술

, 죽음의 또렷한 가까움 절감
“-송년회 때 꼭 만나자!
장례식장을 나오며 말은 하지만
연말이 되기 전에
너나 내가
문상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59, 벼랑

, 반성
”1973년 낸 나의 첫 시집에도
‘이조의 흰 장지문’이 그대로 나온다
‘조선‘을 ‘이조’라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젊은 시인아
너를 불러내어 차꼬 채우고 싶다
2009년 활판시선집을 내면서야
‘조선의 흰 장지문‘이라고 바르게 고쳤지만
지은 죄는 소멸하지 않는다
/식민사관의 바이러스가
영혼을 갉아먹는 줄 몰랐던
한심한 시인아
너, 무기징역 먹어도 싸다“ 103, 무기징역

, 박한 자기 평가
“내가 걸어온 길은
기승전결 엉망인 쓰다가 만 소설
낙서 같은 시“ 45, 종종이

, 익살
”파샤바에는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친
큼지막한 바위들이
숭이버섯처럼 불끈불끈 서 있다
버섯바위? 천만에!
씩씩한 남근석이다
일동 기립!“ 125, 일동 기립!

그리고, 2023년 작금의 한국 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풍자. 왠지 상징이 아니라 직설로 느껴져 더욱 시린.

”1959년 원주중학교 3학년 때
경주 수학여행을 못 가고
텅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2반 반장이었는데도
담임은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흘 내내 신나게 공을 찼다
나는 울지 않았다
…이제 생애의 막바지에 서니
그때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어렵쇼, 갑자기 쏟아진다
그래서 말씀인데 말야
/전국조직을 하나 결성해야겠다는
기똥찬 아이디어가 불쑥!
‘수학여행 못 간 중학생 전국연합‘
약칭 <수못중 전국연합> 을 만들어
처음에는 비영리 사회봉사로 출발하지만
은근슬쩍 눈 먼 보조금 왕창 받아
어마어마하게 떼돈도 만들고
총선과 대선 때
화끈하게 정치활동을 한다면야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으렷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춘천 제주
각 지부를 결성하여
맘에 맞는 서기와 총무를 임명하고
중앙 총서기 자리는 내 차지다
속이 빤히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야
다음 총선 비례대표는 따 논 당상!
또 모르지 바로 대선으로 직행할지도!
사람 팔자 개 팔자라는 말도 있으렷다?
아차, 말이 엇나갔다
대권을 잡는 사람은
놀고먹는 개가 된다고?
(아무튼! 닥치고!)
/내가 지금 미리 쓰고 있는
총서기 취임사의 앞대가리는 이렇다
- 진보와 보수는 가짜 진영이다
중3 때 수학여행을 갔느냐 못 갔느냐
오직 두 진영뿐이다
수학여행 간 놈들
족치자••• 씨를 말리자•••
/노트북 배터리가 다 됐다
오늘은 이만 끝“ 109-111, 용꿈

시집 뒤에 시인의 산문 <언어를 모시다>가 실려 있다. 시인이 얼마나 ’언어를 최고의 높임으로 잘 모시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귀하게 모신, 금시초문의 말들이 많다. 살려 쓰면 좋을 말들이 시에 잘 녹아 있다. 모두 사전을 찾아보아야 했다.

애총, 해동갑, 개맹이, 홍두깨생갈이, 옴니암니, 그러께, 술적심, 쥐코밥상, 깐깐오월, 개잠자다, 해름, 콩을 심으며 가다, 어뜨무러차, 다따가, 여든대다, 띠앗, 막불겅이, 늙정이, 하뿔싸, 어마지두, 부랴사랴

절창을 남긴다.

비백 飛白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
호젓하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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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2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비백체를 좋아하는군요. <시집 보내다>에서도 비백飛白체 운운 하더니... 정작 비백체는 이름만 멋있지 글자 생김생김은 별 거 없던데요. ㅎㅎㅎ

저도 수못중 전국연합 회원입니다!!!

dalgial 2023-09-20 22:45   좋아요 0 | URL
노년의 흰머리와 경쾌한 삶의 지향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수못중 회원으로서 ‘씨’만은 말리지 말아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