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백 - 飛白
오탁번 지음 / 문학세계사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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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다.
세는나이로 여든인 2022년에 냈다.
2023년에 돌아가셨고.

늙음은 여러 모습으로 시에 등장한다.

완고
“역사적 사실에 개칠하며
입맛대로 나대는 놈들이 많다
침략자가 누군지 두루뭉술하게
6.25도 얼버무린다
여순도 4.3도 좌냐 우냐
업어치기 메치기 일쑤다
/그러면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조일전쟁
병자호란은 조청전쟁
이래야 평화 지향이 되겠네?
-6.25는 남북전쟁
이래야 통일 지향이 되겠네?
/나는야
겨울 피란길에서
죽다 살아나
백운초등학교 1학년 때
인민군이 남침한 6.25를
사무치게 배웠는데!” 100, 두루뭉술

, 죽음의 또렷한 가까움 절감
“-송년회 때 꼭 만나자!
장례식장을 나오며 말은 하지만
연말이 되기 전에
너나 내가
문상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59, 벼랑

, 반성
”1973년 낸 나의 첫 시집에도
‘이조의 흰 장지문’이 그대로 나온다
‘조선‘을 ‘이조’라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젊은 시인아
너를 불러내어 차꼬 채우고 싶다
2009년 활판시선집을 내면서야
‘조선의 흰 장지문‘이라고 바르게 고쳤지만
지은 죄는 소멸하지 않는다
/식민사관의 바이러스가
영혼을 갉아먹는 줄 몰랐던
한심한 시인아
너, 무기징역 먹어도 싸다“ 103, 무기징역

, 박한 자기 평가
“내가 걸어온 길은
기승전결 엉망인 쓰다가 만 소설
낙서 같은 시“ 45, 종종이

, 익살
”파샤바에는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거친
큼지막한 바위들이
숭이버섯처럼 불끈불끈 서 있다
버섯바위? 천만에!
씩씩한 남근석이다
일동 기립!“ 125, 일동 기립!

그리고, 2023년 작금의 한국 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풍자. 왠지 상징이 아니라 직설로 느껴져 더욱 시린.

”1959년 원주중학교 3학년 때
경주 수학여행을 못 가고
텅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2반 반장이었는데도
담임은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사흘 내내 신나게 공을 찼다
나는 울지 않았다
…이제 생애의 막바지에 서니
그때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어렵쇼, 갑자기 쏟아진다
그래서 말씀인데 말야
/전국조직을 하나 결성해야겠다는
기똥찬 아이디어가 불쑥!
‘수학여행 못 간 중학생 전국연합‘
약칭 <수못중 전국연합> 을 만들어
처음에는 비영리 사회봉사로 출발하지만
은근슬쩍 눈 먼 보조금 왕창 받아
어마어마하게 떼돈도 만들고
총선과 대선 때
화끈하게 정치활동을 한다면야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으렷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 춘천 제주
각 지부를 결성하여
맘에 맞는 서기와 총무를 임명하고
중앙 총서기 자리는 내 차지다
속이 빤히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야
다음 총선 비례대표는 따 논 당상!
또 모르지 바로 대선으로 직행할지도!
사람 팔자 개 팔자라는 말도 있으렷다?
아차, 말이 엇나갔다
대권을 잡는 사람은
놀고먹는 개가 된다고?
(아무튼! 닥치고!)
/내가 지금 미리 쓰고 있는
총서기 취임사의 앞대가리는 이렇다
- 진보와 보수는 가짜 진영이다
중3 때 수학여행을 갔느냐 못 갔느냐
오직 두 진영뿐이다
수학여행 간 놈들
족치자••• 씨를 말리자•••
/노트북 배터리가 다 됐다
오늘은 이만 끝“ 109-111, 용꿈

시집 뒤에 시인의 산문 <언어를 모시다>가 실려 있다. 시인이 얼마나 ’언어를 최고의 높임으로 잘 모시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귀하게 모신, 금시초문의 말들이 많다. 살려 쓰면 좋을 말들이 시에 잘 녹아 있다. 모두 사전을 찾아보아야 했다.

애총, 해동갑, 개맹이, 홍두깨생갈이, 옴니암니, 그러께, 술적심, 쥐코밥상, 깐깐오월, 개잠자다, 해름, 콩을 심으며 가다, 어뜨무러차, 다따가, 여든대다, 띠앗, 막불겅이, 늙정이, 하뿔싸, 어마지두, 부랴사랴

절창을 남긴다.

비백 飛白


콩을 심으며 논길 가는
노인의 머리 위로
백로 두어 마리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깐깐오월
모내는 날
일손 놓은 노인의 발걸음
호젓하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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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2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비백체를 좋아하는군요. <시집 보내다>에서도 비백飛白체 운운 하더니... 정작 비백체는 이름만 멋있지 글자 생김생김은 별 거 없던데요. ㅎㅎㅎ

저도 수못중 전국연합 회원입니다!!!

dalgial 2023-09-20 22:45   좋아요 0 | URL
노년의 흰머리와 경쾌한 삶의 지향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수못중 회원으로서 ‘씨’만은 말리지 말아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