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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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아파하고 고발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애틋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어머니를 잃고 의연하게 슬퍼하기도 한다
잘 늙어가는 사람의 그윽한 눈길도 있다.

무엇이 됐든 말을 잘 눙친다.
읽을 맛이 나고
감탄과 감동에 이르는 구절이 많으며
읽고서 아득해지는 때가 잦다.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P118

얼빠진 집구석에 태어나
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
내 새끼들도 십중팔구
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
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
길은 없으리라. - P102

따신 밥 한술 먹자는 웃음기 도는 사람의 마음 - P99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 P93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 P41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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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시집 57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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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은
흐릿한 안개 속으로 숨거나
제 스스로 연기 피워 사라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일상에서 시를 길어 오므로
뭔가 저 멀리에 있는, 의미심장한 것들은 없다.
밍밍하면 어떠리 그게 집밥이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P28

넌 뭐냐?

식객이다.
아니다, 밥벌레다. - P46

구름
-청산옥에서 13


무엇이 되어볼까, 궁리하는 새에
벌써 몇 세상이 떴다 집니다. - P56

강가에서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P72

함께 젖다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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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사막 랜덤 시선 41
신현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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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나오는 시집이 있었던가

굴뚝새 거위 장수하늘소 토끼 고래 논병아리 나비 전갈 그리마 도마뱀 게 갈매기 방울뱀 낙타 고추잠자리 귀뚜라미 갈까마귀 휘파람새 너구리 물고기 기러기 다람쥐 두꺼비 거미 공작새 오소리 족제비 까치 사마귀 종달새 숭어 메기 호랑나비 흑염소 뻐꾸기 두루미 제비 사슴 종다리 오리 개 방아깨비 나귀 고양이 고슴도치

천진난만하다.
물론, 멀리 가기도 한다.

분꽃


너를 보자마자

짐짓 시치미를 뗀다든가

딴 데를 보는 척하면서

휘파람을 불어야 하는 건데

나는 휘파람을 불 줄 모른다

입을 오므려뜨려보지만

분꽃같이 되지 않는다. - P101

서쪽에서 싸우다



해가 진다

황혼이다

갈까마귀 울다

나, 서쪽에서 싸우다

너, 이거나 먹어라 하고 주먹을 팔까지 훑어 감자떡을 먹이다

신발짝을 확 벗어던지다

지팡이를 날리다

여차하면 도로 지팡이를 끌어안고

이제라도 못 본 척 장님 행세라도 하며 가면 그만이다

가던 길 타박타박 길 가면 그만이다

나, 나그네이다

일찍이 달마도 동쪽으로 가면서 그리하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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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05 0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사인은 신현정을 생각하며 지은 시 <바보사막>을 이렇게 시작하더군요. 읽어보셨을 듯.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dalgial 2023-01-05 10:47   좋아요 1 | URL
멋진 사람이었나봐요. 그를 그리워하는 시들이 꽤 많은 걸 보니. 보여 주신, 김사인 시구도 참 좋습니다. 덕분에 꺼내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울 수 없는 노래 창비시선 36
김정환 지음 / 창비 / 198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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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가 200권이 넘는 김정환
술술술 써내는 사람의
첫 시집이다.
20대 중후반에
오직 한 사람, 자신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담은 시들이라고 한다. 한 편 빼고.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이 시의 배경인지라
밝지는 않다.
특유의 아포리즘에 가까운 문장이 간혹 빛난다. 꽂히는 재미가 있다.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 P129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 P15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 P53

목숨을 걸고 살아오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길은 저렇게 아스팔트 길이다 - P58

사랑하는 사이 앞에서
모든 흘러감은 운동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생활의 때는 타락에 속하지 않는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도회지 깊은 밤, 쾌락과 배설의 찌꺼기, 껍질, 똥, 오줌, 담배꽁초, 껌종이가 흐르고
모든 버려지고 업수임 받고 가라앉는 것들의 슬픔은 강으로 흐른다. - P91

평소에 별빛처럼 아롱진
영롱한 아름다운 우리네 생활이 어디 있으랴
아아 고생 바가지 막걸리, 곪아터진 고름 질질 흐르는
한가운데서 끈끈하게 살아 숨쉬는
비린내 싱싱한 우리네 삶밖에
무엇이 또 남아 있을 수 있으랴 - P102

욕망은 끝없는 고통이 아니다

열쇠는 아무리 작아도 열쇠다.
자물쇠가 아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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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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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것이다
항꾼에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 "사식 넣어주는 사램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헌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 P47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 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P102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 P110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 P138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 P175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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