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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를 낚다 ㅣ 시작시인선 256
여영현 지음 / 천년의시작 / 2018년 4월
평점 :
1부 바다가 출렁인다. 낚시하며 바다와 함께 있다. 시집 제목 그대로 바다를 낚으며 시도 얻었다.
“당신은 원래 없었다
제주는 섬이어서
온통 바다뿐,
바다에 일렁이는 내 생각뿐……
어쩌면 나도 없었다.” 31
때론 좋기도 하지만, 어색할 때도 있는, 아포리즘 같이 의미심장하려는 단문들이 자주 등장한다.
“산다는 건 지구의 회전을 견디는 일이다” 13
“사랑도 지나치면 환멸이다” 42
“그렇다, 꽃은 벌써
진 자리에서 다시 피고 있다.” 46
“내 지병은 그리움인 걸 안다
…나는 실향민이다
당신이 그런 고향이었다.” 47
“포기해야 할 게 많아 시작해야 할 문장을 찾지 못했다” 106
“삶은 부력이 약하다
나는 바다가 무섭다.” 103
3부는 습작 시절의 시인 듯, 정제되지 않은 정서가 흘러 넘친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누구나 달려 있는
저 둥근 입이
오오 제 고통의 소리를 지르고
환청과 환각의 시각엔 노을마저 붉어
나는 알약을 챙기지 못했다
하루는 산만했고 자막은 지워졌다
그리고 감독인지 엑스트라인지도 모를
영화의 남은 분량을 위해
다시 하루가 쓰러진다
스크린에는 이 지구에서
내게 상처를 준 수많은 이름이 나열된다“ 100-101
2부의, 일상이 담긴 시들이 좋다.
화자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 슬픔과 그 그리움이 고스란하다. 남매를 키우는 듯한데, 사진 찍기에 비협조적인 애들과 함께 하는 가족 여행이 영화 보듯 환하다.
밑줄긋기에 적어 두었다.
첫 시집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읽는 맛이 있는 시집이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어깨의 힘만 좀 빼면 더 좋겠다. 신작을 기다리는 시인이 한 명 더 늘었다.
엄마 밥상
밥상은 느리게 차려졌다 내가 좋아하는 무생채와 콩나물무침, 어릴 적엔 귀해 못 먹던 갈치도 있었다 무얼 그리 물끄러미 보시는지 나중에 거북이가 되시려나. 엄마는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느린 것에는 슬픔이 있다 한 번 지나가면 되돌리기 어려운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만 천천히 움직인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자니 나도 슬펐다 엄마의 마지막 밥상은 그렇게 한 장 사진으로만 남았다
한 생애의 허기가 좀체 가시지 않는다 볼이 미어지도록 먹고 싶은 밥이 사진 속에서 여태 김을 내고 있다. - P59
오늘은 무지개송어와 강원도의 육중한 눈 산, 네 명의 식구까지 모이니 이런 장엄한 광경이 또 있겠는가, 때는 정유년 초사흘의 일이다
나는 사관처럼 이 찰나를 기록하고 싶었다 비록 아이들의 비협조로 가족사진은 없지만,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화는 냈지만, 일지에는 태평성대라고 쓴다 - P69
식당을 나오는데 모퉁이에 쪼그려 앉은 노파 손톱 밑에 검은 흙을 보니 홀로 농사를 지은 게다 플라스틱 소반의 저 통마늘이야 다 팔아야 만 원, 이만 원..... 나는 지나던 걸음을 돌려 통마늘 한 소반을 샀다 노인의 눈동자는 말린 옥돔의 그것처럼 물기가 없다
"한 소쿠리 더 샀쑤꽈?"
나는 처가에서 보낸 바늘이 많다고 지금은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근디 와 샀쑤까, 아 내 갈아줄라꼬?"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돈 만원을 노파에게 건넸다 이제 두 소반만 더 팔면 그 고된 몸이 집으로 향하리라 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가방을 끌며 시장통을 나서는데 금세 길이 흐려졌다 눈물이 쏟아져 어느 방향에서 택시를 타야 할지 모르겠다 고구마에 묻은 흙을 털어내던 농투성이 손이 떠오른다
아, 김천 장날 평화시장의 내 어머니 그 남은 몇 소반을 팔고 오던 길 저녁달이 뜨면 그림자는 또 얼마나 길었을까?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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