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평점 :
제목 :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작가 : 유홍준
출판사 : 눌와
읽은기간 : 2025/12/09 -2025/12/23
언제나 좋은 책을 쓰시는 유홍준 박물관장님의 새책을 읽었다.
이번 책은 한국미술사다. 개론서로서 아주 좋다.
꼭 국립박물관장님이 되셔서 앞으로 박물관에 오면 이런 작품들을 중심으로 감상하라고 쓴 책같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말기까지 건축, 회화, 공예를 총 망라해서 다양한 한국의 미술품들을 설명하고 도해해서 보여준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알아야 할 문화재들을 잘 공부했다.
아무래도 현대에 가까울수록 수록된 문화재가 점점 많아진다. 심지어 조선회화는 조선전기, 중기, 후기, 말기로 구분되어 써야할 만큼 방대한 문화재를 소개한다.
내용이 많아지니 내가 한국사 시험을 볼 것도 아닌데 이런 문화재도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이런 작품을 모르고 죽으면 또 억울할 것 같아 열심히 읽고 표시했다.
결국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박물관에 가서 유명한 작품도 봐야겠지만 스쳐 지나가지 않아야 하는 작품들도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026년도 박물관 방문이 기대된다.
p16 신석기시대는 크게 여섯 가지 특징이 있다. 집, 농경, 목축, 옷, 간석기, 토기 등이다.
p23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알타이, 오르도스, 몽골과 밀접한 천연성을 지녔으며 중국과는 큰 연관이 없다. 그래서 인종, 언어, 유물 어느 것으로 보아도 한민족은 뿌리를 몽골, 알타이에 연원을 둔 북방 민족으로 생각되고 있다.
p50 금령총에서 출토된 한 쌍의 기마인물모양도기는 무덤의 주인을 저승에 이르는 길로 안내하는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속이 비어 있는 용기로 말의 꼬리는 손잡이이고 등에는 깔때기가 달렸으며, 가슴 앞으로는 주구가 길게 나와 있다. 주인과 시종의 모습, 말의 형상과 말안장 모두가 정교하게 묘사된 하나의 조각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p58 3세기 무렵부터는 돌방흙무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현재 접안에 있는 1만 1300여 기의 고구려 무덤 중 반은 돌무지무덤, 반은 돌방흙무덤이다. 그리고 4세기 이후 돌방흙무덤에 벽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약 100기가 발견되었다. 벽화고분은 대개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으로 생각되고 있다.
p96 신라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으로도 확인된다. 특히 9세기 이슬람의 기행문인 이븐 크루다지바의 도로와 왕국 총람에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이슬람교도들이 영구 정착한 것은 그곳의 이런 이점 때문이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신라는 금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났기 대문에 수많은 순금 공예품을 만들어, 일본의 기록에서 신라를 두고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p126 이와 같은 뛰어난 비례 감각에 의해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은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다. 늘씬하게 올라간 상승감과 적당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추녀 끝 곡선은 백제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이다.
p148 통일신라의 문화는 8세기 중엽 경덕왕 대에 활짝 꽃피웠다.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 사리장엄구 등 우리나라 건축, 조각, 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모두 이때 만들어졌다.
p157 통일신라시대에는 3층석탑 정형의 완성과 동시에 이형탑이 탄생하였다. 70퍼센트의 전형에 30퍼센트의 변형이 이루어져 통일신라 석탑은 통일 속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p175 석굴암은 토함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565미터 되는 지점에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동남 30도 방향으로 세워졌다. 이 방향은 물리학자 남천우의 설명에 의하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연중 일조량이 가장 많다. 수학자 김용운은 석굴암에서 신라인들이 기하학을 응용한 예를 열가지 들면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인 root2의 전개를 기본으로 하여 석굴암 입구와 내부의 평면도는 정육각형의 한 변과 외접원의 관계이며, 본존불과 대좌의 구성은 정팔각형과 내접원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p202 발해는 기록뿐만 아니라 문화유산마저 남긴 것이 미미하다. 해동성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유물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빈약하다. 이런 경우 미술사는 유물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과 함께,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을 과제로 동반하게 된다.
p209 발해 도기에는 유약을 바른 삼채가 등장한다. 삼채는 자기로 가는 앞 단계에 나타난 기법이다. 납으로 만든 연유에 철, 구리 등을 섞어 가마에서 구워내면 초록, 노랑, 갈색 등 세 가지 색깔이 자연스럽게 번지는, 당시로서는 고급 도예 기술이다. 이 기법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당삼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p233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서 볼 수 있듯이 본래 보살상은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고려불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p305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후 옻칠을 덧입혀 반반하게 만든 것이다. 대체로 헝겁 바르기 —> 칠하기 —> 나전 시문 —> 칠하기 —> 나전무늬의 칠 벗겨내기 —> 광내기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칠기를 목심저피칠기라고도 부른다
p318 이러한 조선시대의 건축은 동양미술사 내지 세계미술사의 시각에서도 독특한 문화적 위상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창덕궁, 종묘, 수원 화성, 한국의 서원, 산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남한산성, 조선왕릉 등 모두 8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p328 조선시대 서원의 최고 명작은 희재 이언적을 모신 경주 옥산서원과 서애 류성룡을 모신 안동 병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아름다운 계곡가에 위치해 있고 병산서원은 낙동강 변의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병산을 마주한 언덕자락에 세워져 있다.
p350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초기 미술사가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어 왔다. 고유섭은 비정제성이 주는 구수한 큰 맛, 최순우는 어진 선 맛에서 일어나는 너그러움, 김원용은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화가 김환기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에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p366 조선 전기 백자의 상징이 매죽무늬 항아리이고, 조선 후기 금사리 가마 백자의 상징이 달항아리라면 조선 중기 백자의 상징은 철화백자 운룡무늬 항아리, 화룡준이다. 용준이라고도 불린 이 항아리는 본래 의례 때 사용하는 술항아리이다.
p379 백자 달항아리의 이런 아름다움은 후대에 거의 전설이 되어 무수한 찬미를 낳았다. 김환기는 백자 달항아리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고 했고, 최순우는 잘생긴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넉넉함이 있다고 했고, 이동주는 서민들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사대부의 지성미가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고 했다.
p425 소상팔경도는 북송의 송적이 처음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사계절 산수의 대명사가 되어 뭇 화가와 시인들이 이를 그리고 시로 읊었다. 초봄 산시청람 : 푸른 기운 감도는 산마을, 늦봄 연사만종 : 안개 낀 절의 저녁 종소리, 초여름 어촌석조 : 어촌의 저녁노을, 늦여름 원포귀범 :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초가을 소상야우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늦가을 동정추월 : 동정호의 가을 달, 초겨울 평사낙안 :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 늦겨울 강천모설 :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리는 눈
p468 이 속화첩은 사제첩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으로 이는 향기가 짙어 암수 사랑의 계기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는 뜻이다. 표제 오른쪽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는 조영석이 환쟁이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p486 정조 시대는 앞 시기인 영조 연간의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등이 개척한 속화, 진경산수, 문인화풍들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긍재 김득신 등 화원들에 의해 결실을 맺는 시기였다. 즉 진보적 지식인(문인화가)이 개척한 화풍을 테크노크라트라 할 전문인(화원)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교량 역할을 한 인물이 표암 강세황이다.
p501 그가 그린 속화와 미인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풍류와 낭만은 물론이고 당시의 아름다운 색감을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하기로 혜원은 춘화를 그려 도화소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혜원이 그린 춘화가 여러 폭 전한다.
p519 조희룡은 추사의 충실한 지지자로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 갈 때 그의 측근으로 연좌되어 임자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조희룡의 글씨는 추사의 글씨를 빼닮았는데 추사의 글씨는 강하고 조희룡의 글씨는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 조희룡은 난초, 매화, 산수 모두에서 기량이 뛰어나 추사가 추구한 문인화를 가장 잘 구현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p531 석파 이항은이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1849년 추사 나이 64세. 이하응 나이 30세 때이다. 이때부터 그는 추사의 난보를 보고 익혀 추사로부터 “압록강 이동에 이런 난초 그림은 없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p604 임진왜란을 계기로 불교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의승군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 불교가 크게 부활한 것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p617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취선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던 장면을 재구성한 의식이었기에 괘불탱은 영산회상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대규모 의식이 행해질 때면 옥외에 불단을 차린다. 이를 야단법석이라고 하는데 이때 내거는 대형 불화를 괘불탱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