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품절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페트릭 브링리

 : 웅진지식

읽은기간 : 2024/04/02 -2024/04/08


꽤 인기있는 책이라 오래 기다려서 대출을 받았다.

제목이 정말 중요하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예측되면서 읽고 싶어진다. 

저자는 형의 죽음을 보고 잘나가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다.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경비원 생활을 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재미있게 읽었다. 

급여가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나서 대화하고 일을 한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예술품들을 감상한다.

물론 중간중간 경비원이라는 직업에 자괴감을 갖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특히, 돈많은 사람들의 무시는 저녁에 술한잔 하며 욕을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일에 만족하고, 희열을 느끼며 생활한다.

아주 작은 일에 뜻밖에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술관 경비 구역의 바닥에 쿠션이 살짝이라도 있는 곳에 배치되면 다리가 덜 아파서 너무나 좋다라는 이야기...

후반부로 가면서 저자는 결혼을 하고 더 많은 급여가 필요해 경비원 직을 그만두게 된다. 

나도 돈걱정이 좀 덜할 수 있다면, 은퇴후 국립중앙박물관 경비를 해보고 싶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직업인데 책을 읽다보니 충분히 도전해보고 싶다. 

재미있었다.. 


p27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재능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한 부지런함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비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가 존경하는 음악인의 양대 산맥인 바흐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다소 불안정할지언정 수줍어하지 않고 연주했다.

p86 나는 점차 늘어나고 있는 군중의 절반 정도가 큐레이터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사후에서 시작해 대 피라미드 시대와 왕국 이전의 시기로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95 동료들과 나는 일주일, 40시간 내내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사회의 사무실 관습에 따라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관습에 따라 책상에서 책을 펼 수도 머리는 식히는 산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모두가 그러듯 인터넷을 뒤적이고 책을 읽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점점 진흙탕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래지 않아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게을러진 것이다.

p120 메트의 부서들은 모두 합쳐 많게는 매년 서른 개의 기획전을 개최하는데 이 중 전세계의 박물관에서 작품을 대여해 올 정도로 광범위한 전시도 있고 한두 개의 전시실만 채우는 아담한 규모의 전시도 있다. 다시 말해 이곳에는 항상 새로운 볼거리가 있다.

p141 그들은 에술계의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메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놀라워하면서 실망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으로 가득찬 채 미술관을 나선다.

p151 조지아 오키프의 손, 발, 몸통, 가슴, 얼굴, 다시 얼굴 그리고 다시 얼굴.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것보다도 이 시리즈는 대체로 사람이 얼마나 구체적이고도 독특하게 만들어졌는지, 우리가 태도와 몸짓으로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을 하는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선, 색깔, 빛, 그림자로 보이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워준다.

p178 내 직업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에 화가 난다. 이렇게 평화적이고 정직한 일에서 흠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바보 같으며, 심지어 배신 행위라는 생각까지 든다.

p183 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p186 “검사 결과를 보면서 생각했지. 내가 유일하게 되고 싶었던 건 개인적으로 예술을 후원하는 부자였다고. 이게.” 그는 입고 있는 푸른색 근무복의 옷깃을 잡아당겨 편면서 말한다. “그 꿈에 제일 가까워”

p202 이 불명확한 세계에 대해 읽으며 그리스인들은 죽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직 삶에 관해서만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아는 것을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과 같은 작품을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p206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p230 자기 아들을 보고는 작은 사람들한테는 작은 힘이 어울리지. 인생이 그래.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무겁게 끝나자 사람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젓고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며 이런 차원의 도덕적 부패에 대해 곱씹어 생각한다.

p232 사이먼과 루시는 바로 이런 자리에서 사랑에 빠질 것이고, 그들은 친구 사이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먼은 자기가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함께 유타로 이사할 거라는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결국 우체부 일자리를 찾고 개 몇 마리와 함께 산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게 진짜 인생이다.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이 왁자지껄한 바에서 우리는 진짜 인생을 논하고 있다.

p235 사람들에게 그림이 진품이라고 확인해주고, 그 옆의 작은 캡션에 적힌 말이 복제품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걸 좋아한다. 거기엔 그림의 액자가 복제품이라고 쓰여 있는데, 큐레이터들은 유명한 그림 근처에 그 단어를 두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p242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메트보다 좀 덜 신중한 미술관에서 실력이 끝내주는 연주자를 데려다가 마음대로 전시 케이스를 열고 악기를 다뤄보게 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자는 매일 페르시아의 카만체, 일본의 고토, 수우족의 구애용 플루트, 이탈리아의 하프시코드를 익힐 수도 있다.

p250 인상파 그림은 왜 항상 그렇게 흐릿해 보이는 거 같아? 처럼 익숙한 대화를 엿듣게 되면 언제, 어떻게 내 의견을 말해야 하는지 안다(요즘엔 끼어들지 않고 내버려두는 편이긴 하지만). 달리 ㅁ라하면 나는 이제 베테랑이 됐고 이 일이 익숙하고 편안해졌다.

p252 얼마 전에 라커룸에서 우연히 듣게 된 웃긴 이야기도 떠올려본다. “내가 그 여자한테 말했지. 우리는 경비원이 아니에요. 보안 예술가들이죠라고”

p280 메트에서 열린 전시는 좀 더 아담한 규모지만 내게는 거장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물은 미켈란젤로의 70년 커리어 전반에 걸친 133점의 소묘 작품들로, 대부분이 아무에게도 보여줄 의도가 없었던 습작들이다.

p284 전시가 시작된 후 내내 나는 미켈란젤로의 짜증과 절망이 섞이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결과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신이여, 도와주소서!”

p289 대부분의 관람객이 미켈란젤로가 70년 정도 걸려 완성한 작품들을 끝내는 데는 한 시간 가량이 걸린다.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미켈란젤로의 성미를 아는 나로서는 그가 이 사실을 알면 꽤 짜증을 낼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p313 나는 이 미술관을 떠나고 나면 나이가 나보다 곱절이나 많은 세상 반대편에서 태어난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되는 일이 일상적이지 않은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메트 경비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흔한 일이다.

p324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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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 나의 하루를 그림과 클래식으로 위로받는 마법 같은 시간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안인모 지음 / 지식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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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

 : 안인모

 : 지식서재

읽은기간 : 2024/03/28 -2024/04/01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피아니스트 안인모님의 책...

이번에는 음악과 그림의 콜라보다. 

제목을 봤을때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제목은 책 안의 한 꼭지를 뽑아낸 것이었다.

책에는 다양한 미술관의 그림들과 쇼팽을 비롯한 다양한 작곡가의 음악이 실려있다.

저자는 그림을 보며 자신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내용을 표현하고, 이후 그 그림에 어울리는 음악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림은 근대 이후의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고, 음악도 비슷한 시절의 음악을 엮어 마치 음악과 그림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었다. 

음악이 주는 힘이 있어서인지,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그림에 더 멋져 보인다. 

촛불이나 무드등 아래에서 책에서 소개한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한 잔 하며 그림을 감상하며 글을 읽어야 제맛이 날 것같다.

괜한 허세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걸 어쩌랴.. 

분위기 잡고 싶은 책이다.. 여자꼬실때 아는 체 하기 좋은 책이다.. 

역시 책이란 허세가 좀 섞여야 더 잘 읽히는 것 같다.. 속물같아서 미안하다. 


p13 클래식을 공부하다 보면 당대의 철학을 접하게 되고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동시대를 살며 서로가 주고받은 영향들이 문화와 예술의 큰 흐름이었지요.

p28 아주 엄격하게 이 반복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죠. 위 성부의 선율에 어떠한 변화가 있더라도 베이스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정해진 화성 진행을 반복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p47 하마터면 변호사가 될 뻔했고, 피아니스트를 선택했지만 그 꿈이 좌절되자 작곡가로 살아가는 슈만. 슈만의 꿈은 좌절된 게 아니라, 키워진 것이에요.

p80 피카소를 찍은 사진들을 보면, 당당한 표정과 근육질의 다부진 몸에서 열정적인 스페인 기질이 우러나요. 스무 살의 자화상 <나, 피카소>에서도 그는 한껏 힘준 강력한 눈빛으로 선전 포고를 합니다.

p88 파리의 여느 카페에서 연주되는 뻔한 음악도 아니에요. 드뷔시는 피아노의 해머가 피아노 줄을 때려서 내는 소리를 너무나 싫어했어요. 그래서 피아노 소리에서 해머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음악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드뷔시가 지향한 음악, 그 음색과 음향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눈앞에서 그림을 펼치는 마법을 부려요.

p95 너무나 놀라운 건, 슈베르트가 특히 아팠던 말년에 작곡한 곡들이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주옥 같은 명곡이라는 점이에요. 연가곡집 겨울나그네, 아프레지오네 소타나,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세 곡, 그리고 현악 5중주와 가곡집 백조의 노래까지.

p109 밤의 음악 녹턴을 들으며, 밤의 그림을 봅니다. 덴마크 화가 페테르 일스테드의 촛불에 책 읽는 여인. 그녀는 독특하게 앉아 있어요. 벽에 붙은 테이블과 마주 앉은 것도 아니고, 벽에 기댄 의자와도 어긋난 방향으로 앉아있어요. 초에서 나오는 불빛을 좀 더 잘 받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녀의 주 목적은 책을 읽는 것이니까요

p122 불현듯, 공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가 와닿습니다. 특히 소리 내는 일을 하는 음악가는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민폐일 수밖에 없어요. 붓을 든 그녀가 오른팔로 캔버스에 매달린 걸 보면, 피아노 소리가 조용히 집중해야 하는 작업을 방해한 걸까요? 그리고 보니 화가의 표정이 힘들어 보여요. 피아니스트는 연습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한 공간을 공유할 뿐, 그 외 것들은 서로 공감하지 못합니다.

p156 프리앙의 그림 연인과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모두 그들이 30대가 되기 전의 작품이에요. 20대의 열렬했던 사랑,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대단했던 그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사랑도 상황도 바뀌기 마련이니, 처음의 그 사랑을 그대로 끝까지 지켜내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죠

p167 포레는 이 곡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중후하고 아름답게 녹여냅니다. 마치 하소연할 곳이 없어 악보에 잉크로 구구절절 외치는 듯해요. 포레가 자신의 슬픔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엘레지는 그의 낭만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마지막 작품이에요. 포레는 자신의 감정을 악보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자신답지 않다고 느끼고, 이후엔 음악에 감정 표현을 절제합니다.

p174 그대를 사항해나 알레라이데가 사랑 앞에서 찬진난만한 스물다섯 청년 베토벤의 노래였다면, 멀리 있는 연인에게는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중년 베토벤의 노래잡이에요. 그래서 더 아프답니다.

p183 60살이 된 브람스는 클라라를 만난 지 40년이 되자 6개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해서 그녀에게 헌정합니다. 그중 두 번째 곡 인터메조(간주곡)에서 브람스의 가슴 아픈 사랑이 들려옵니다. 그의 마음속 이야기를 읊조리듯 담아낸 이 곡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생애 마지막 연서였어요. 악보를 전해 받은 74세의 클라라는 브람스가 평생을 담아온 사랑을 오롯이 느껴요. 브람스의 사랑이 오선지 위 검정 잉크가 퍼지듯이 사방에 울립니다.

p190 상드는 쇼팽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어요. 들라크루아는 장례식에 참석해, 쇼팽의 친구 세 명과 함께 관을 운구합니다. 쇼팽이 가쁜 숨을 내쉬며 임종을 맞는 순간에 곁을 지킨 것도 들라크루아였어요. 이후 들라크루아는 상드와 우정을 유지하며, 죽기 직전까지 편지 왕애를 이어나가요. 결과적으로 둘의 편지 속에 언급된 쇼팽 이야기는 쇼팽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었지요

p197 아무것도 모른 채 시동생과 사랑에 빠진 프란체스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어요. 게다가 파울로는 프란체스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가련한 그녀에게 연민까지 느끼며, 둘의 사람은 깊어집니다. 그들은 신랑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요. 이 위험한 만남은 결국 형 조반니에게 발각돼요. 조반니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죽여버려요. 용납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한 두 영혼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곧장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p199 귀차르디는 귀족, 베토벤은 평민이었어요. 게다가 그녀는 어느 백작과 약혼한 상태였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는 데다 미래가 불투명한 음악가였죠. 고통이 없는 사랑이 있을까요? 이 사랑도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귀차르디의 사랑으로 행복을 찾아가던 베토벤은 그녀를 향한 사랑과 격정을 피아노 소나타 14번에 녹여냅니다. 그리고 이 곡을 그녀에게 헌정해요

p235 건반 위의 슈퍼스타 리스트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위로하는 로맨티스트 리스트가 작곡한 이 곡에는 왕년의 그가 보여주던 화려한 기교는 들리지 않아요.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로 보듬고, 진한 울림으로 다독이기 위해, 리스트는 시를 쓰듯 음표를 써 내려가요. 한 줄 한 줄 여백이 느껴지는 이 곡에는 공작부인에 대한 리스트의 사랑과 신뢰가 가득합니다.

p240 둘의 만남으로부터 약 60년이 지난 후, 70세의 클라라가 자신의 은퇴 무대에서 연주한 곡은 바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어요.

p256 라흐마니노프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우울증을 치료해 준 달 박사, 언제나 곁을 지켜준 아내 나탈리아, 라흐마니노프는 이 노래를 N에게 헌정해요. N이 누구인지는 라흐마니노프 본인만이 알지요. 니콜라이 달 박사아 나탈리아, 혹은 그들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어요. 아마도 라흐마니노프가 마음 깊이 고아뭐할만큼, 도움을 준 사람일 거에요. 눈먼 소녀의 그림을 보며 노래를 들으니 N이 라흐마니노프의 손을 잡아주었듯,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p271 저녁 퇴근길의 차디찬 공기를 맞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들어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아름다운 저녁입니다. 이 곡은 프랑스 시인 부르제의 시에 드뷔시가 선율을 붙인 노래에요. 드뷔시는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빛을 그려냅니다. 음표에 말이죠. 그는 특정 순간의 기분과 느낌, 정취, 또는 시를 읽고 떠오르는 장면을 음악으로 담아내요. 그러니까 이 곡은 해가 지고 저녁이 시작되는 그 시점의 풍경을 전해요

p282 도시무도회와 부지발 무도회에 등장하는 발라동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에요 르누아르뿐 아니라, 드가, 로트레크, 모딜리아니 등 당대 웬만한 프랑스 화가들의 캔버스엔 그녀가 그려져 있지요. 그녀의 예쁜 얼굴은 다양한 붓끝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화가의 모델 일을 하며 그들의 애인 역할도 하던 다른 모델들과 달리, 발라동은 모델 일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화가가 되어 직접 그림을 그려요

p309 음악에 대한 사티의 관념은 다소 독특했어요. 대부분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이 주목받길 바랐지만, 사티는 그 반대였어요. 사티는 주목받는 음악이 아닌, 공간속에서 가구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음악을 추구합니다.

p310 짐노페디는 사티의 대표 가구 음악이에요. 짐노페디는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청년들이 나체로 추던 춤이에요. 아마도 사티는 우연히 이 낯선 단어를 접하고 그 생소함에 이끌려 제목으로 사용한 것 같아요. 3개의 짐노페디 중 1번은 다양한 미디어에 등장해 유명해졌어요.

p337 스탈린이 죽고 4년 후, 51세가 된 쇼스타코비치는 사랑하는 아들 막심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이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해요. 막심은 자신의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연주회에서 이 곡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합니다. 특히 이 곡의 2악장 안단테는 낛을 놓고 듣게 되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요. 전체적으로 여운이 느껴지는 간결미와 느린 템포의 조화로움이 지친 영혼을 달래줍니다.

p364 온 사방이 꽃이고, 나무이고, 생명체입니다. 화관 속에 누운 듯한 그녀만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아요. 투명한 냇물에 누운 그녀는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요. 그녀의 눈에 하늘은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과 그속에 자리한 그녀의 차디찬 육체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p366 영원히 묻혀버릴 뻔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바흐에요. 바흐는 마르첼로가 오보에로 새긴 깊은 슬픔에 감동해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해요. 이렇듯 바흐의 손에 의해 마르첼로의 협주곡으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마르첼로의 이름도 주목받게 됩니다.

p374 물이 내게 준 것은 칼로의 그 유명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녀의 모든 희로애락을 잘 보여주는 진정한 자화상이에요. 얼굴 없는 자화상이면서, 그녀의 삶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자서전이죠.

p381 그녀의 생애 마지막 그림이 된 수박 그림. 칼로는 빨간 과육에 대문자로 마지막 메시지를 써요. 인생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 1954년 멕시코 코요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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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을 찾아서 - 비르투오소의 면모들 거장이 만난 거장 4
알프레드 코르토 지음, 이세진 옮김 / 포노(PHONO)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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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팽을 찾아서

 : 알프레드 코르토

 : 포노

읽은기간 : 2024/03/15 -2024/03/31


올해는 책이 잘 안넘어간다. 아마 간신히 100권정도 읽을것 같다. 

개론서보다는 각론으로 들어가는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쇼팽의 전기라고 해야하나? 쇼팽을 흠모하는 프랑스 피아니스트가 쓴 쇼팽에 대한 모든것이다. 

교육자로서의 모습, 연주자로서의 모습, 인간적인 삶의 모습 등 쇼팽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했다. 

그동안 내가 알던 쇼팽이 아니어서 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여성스럽고 민감하고, 남에게 자기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물건도 부수고 화도 잘 내는 마초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외모만 봐서는 잘 모를 일이다. 

유명했던 한 사람을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좋다. 

역시 각론으로 들어가야 더 재미있다. 즐겁게 읽었다. 


p27 유명한 폴란드 작곡가가 4분의 3 입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과 중세의 성이 보이는 낭만적인 배경, 인물은 오른손에 자신의 작품 악보를(기발한 가정인지 화가의 상징적 의도를 읽어낸 것인지) 둘둘 말아 쥐고 있다. 당시에 쇼팽은 영광의 정점에 있었고-익명의 카탈로그 작성자는 여기서 상업적 의도가 명백한 생리학적 세부사항을 짚고 간다- “몇 년 후 그의 목숨을 앗아갈 병은 아직 징후를 드러내지 않았다.

p39 쇼팽이 죽기 1년 전, 정확히는 1848년 8월 18일에 칼더하우스에서 폰타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농담 반 불평 반으로 평생 두 가지는 안타깝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커다란 코와 말을 잘 안 듣는 네 번째 손가락”

p50 내 세대는 쇼팽의 마지막 제자라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력을 쌓으려 했거나 실제로 그렇게 했던 피아니스트나 피아노 선생들을 적잖이 알 것이다. 그중 몇몇은 실제로 어쩌다 한 번 쇼팽에게 오디션이나 대수롭지 않은 추천사를 받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p55 쇼팽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매우 중요시했고 클레멘티의 전주곡과 연습곡을 병행시켰다. 본인도 이런 곡들오 피아노를 배우고 실력을 쌓았던 만큼, 기초 수업을 보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p58 마티아스는 어떤 제자가 정신 못차리고 화음을 이상하게 쳤다고 쇼팽이 의자를 부숴버리는 모습까지 봤다고 한다. 연주의 디테일을 놓치거나 귀에 거슬리는 음을 내면 스승은 불같이 화를 낸다. 자기 머리를 쥐어뜯거나, 악보에 지시사항이나 운지법을 표기하는 연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예사였다.

p87 어쩌면 나쁠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잖아? 오직 결과만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려줄 수 있어, 베토벤의 서신에도 거의 동일한 진술이 있지 않았던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

p115 1846년부터, 그러니까 환상 폴로네즈와 뱃노래를 발표한 이 해 이후로 쇼팽은 작품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의 1846년 이후 작품은 야상곡 두 편(작품 62), 마주르카 세 편(작품 63), 왈츠 세 편(작품 64)이 전부다

p133 내가 보기에 들라크루아는 쇼팽의 프랑스인 측근 중에서 그의 타고난 이상주의를 가장 제대로 본 사람, 그를 가장 지적으로 아껴주었던 사람이다. 들라크루아는 그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가장 확실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p161 상당한 금전적 수익에도 불구하고(두 번의 연주회로 5천 굴덴을 거둬들였다) 바르샤바 가제트와 폴라느 통신은 물론, 폴란드 국영신물까지 찬사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프랑스 아가씨가 무대에 올라와 그에게 월계관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더없이 강조하는 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연주회 초청을 죄다 거절했다.

p191 멘델스존은 아헨에서 쇼팽이 힐러와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고,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최고는 쇼팽입니다.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와도 같은 충격을 줍니다.”

p197 1835년의 리스트는 경이로운 비르투오소의 전형이었던 반면, 쇼팽은 시인과도 같은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리스트는 흡사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기막힌 연주를 뽐내지만 쇼팽은 반대로 청중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 내면의 소리르 듣는 데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기복을 타긴 하지만 영감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면 피아노 건반에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노래를 끌어냅니다.

p209 그는 단순히 재주가 뛰어난 비르추오소, 건반의 대가가 아니므로 그는 단순히 이름난 에술가가 아니므로, 그날의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쇼팽이었다.

p213 이 기사는 쇼팽을 슈베르트와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예리한 지적을 남긴다 “우리가 슈베르트를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쇼팽과 천성이 흡사한 인물이 달리 없기 대문이다. 슈베르트가 성악을 위해서 한 일을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했다”

p231 그의 편지를 보면, 대중앞에 서기 싫은 마음보다 경제적 필요가 압도적이었던 모양이다.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고 내가 해낼 힘만 있다면 해야지.

p258 세련미를 추구하는 댄디즘,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이 소년에게서 조짐을 보이고 ㅇㅆ었다. 쇼팽의 경우는 교만하고 과시적인 멋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p263 이 선생이 모차르트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열렬히 찬양했기 때문에(특히 바흐는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그리 인기 있는 음악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팽도 그 영향으로 고전파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훗날 완벽한 선을 표현하는 자랑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p266 한편에는 기적 같은 천재성, 거의 초자연적인 재능이 있다. 그는 아무런 기초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음악만이 지니는 특권, 다시 말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조합된 소리들이 지니는 감동의 힘을 단박에 통찰했다.

p276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확신했다. 자기는 객지 생활을 하다가 홀로 죽을 운명이라고, 자기 주위에는 자기가 어떻게 되는 관심도 없고 자기에게도 별 의미없는 외국인들뿐일 거라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을 사귀겠지만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없을 거라고.

p283 쇼팽의 훌륭한 자질을 늘 너그럽게 평가했던 리스트도 쇼팽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수없이 다채로운 뉘앙스로 뭉친 사람이었다. 그 뉘앙스들은 서로 상충하기도 하고 서로를 은폐하기도 했기 때문에 하눈에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리스트는 슬라브 사람들에게 대체로 이런 기질이 있다고 했다

p286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 스승의 분노 발작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스승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이유로 성질을 내다가 결국은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가구나 물건을 박살내는 것으로 끝을 내곤 했다.

p290 쇼팽은 어떤 도덕적 의무나 삶의 규범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믿음은 그의 양육 환경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어차피 선험적인 신념에 바탕을 둔 믿음이었기에, 이 믿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그의 불같은 분노 아니면 차가운 경멸을 살 수 밖에 없었다

p296 쇼팽은 그렇게나 무대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선연주회에는 선뜻 출연할 만큼 너그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작곡가로서의 수입이 문제될 때는 양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쓴 편지들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p299 그에게 두 사람은 그냥 우연히 알게 된 지인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슈만이 자기에게 헌정한 작품-불멸의 크라이슬리라아-의 악보를 펼쳐보지도 않고 피아노 위에 몇 달간 방치했다. 이 최초의 숭배자의 열광적인 찬사에서 그가 얻은 바를 생각해본다면 쇼팽의 배은망덕이 각별히 더 무례하게 느껴진다

p305 포토츠카 백작부인은 하이네의 로렐라이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여성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렸다. 만약 그녀가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쇼팽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면, 그 감정은 작곡가의 마지막 순간에 상징적으로 거룩한 것이 되었으리라

p314 카라조프스키는 그 책에서 콘스탄챠가 쇼팽에게 불러일으킨 연정을 언급하면서 바르샤바 음악원 재학생들 가운데 그녀를 흠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쇼팽의 마음을 거절한 셈이 되어 얻게 된 불멸의 이름에 아무 관심이 없었는지 “어쨋거나 소팽은 나의 요세프만큼 훌륭한 남편은 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p326 쇼팽은 육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는지 도덕적 혐오감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육체의 상스러운 짓거리”를 극구 거부했다. 반면에 상드는 바로 그런 행위의 “천사같은 신성함”을 찬양하고 “천국에서만 이름을 갖는 그 행위”에 거룩한 순수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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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지 않고 통째로 이해하는 통세계사 1 - 인류의 탄생에서 중세까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역사
김상훈 지음 / 다산초당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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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세계사1

 : 김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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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3/12 -2024/03/22


예전에 나왔던 책인데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 나는 개정판을 처음 읽었다.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을 구분해서 읽게 하는 책은 별로다. 동양과 서양 심지어 아메리카와 교류를 하면 발전했는데 따로따로 공부하다보면 숲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같은 시대라면 동서양을 계속해서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동양의 한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서양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중간중간 상기시켜준다.

시험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좋은 팁이 없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교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기에 좋은 방법이다. 

다른 세계사 책에서는 한세기마다 동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방식을 쓰기도 하던데 통사로 읽은 책은 이런 방법이 이해하기에 좋은 것 같다. 

청소년용인 것 같지만 성인이 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사를 읽으면 각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통사만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ㅜㅜ


p25 기원전 2350년경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어. 그가 바로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1세란다. 모든 도시국가들이 그의 용맹 앞에 무릎을 꿇었지. 사르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정복해 최초의 지배자로 등극했어.

p74 함무라비 왕이 사망하자 쇠퇴하기 시작한 거야.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잇달아 이민족인 히타이트와 엘람의 지배를 받았단다. 이윽고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지. 그 나라가 바로 아시리아야

p96 로마신화에서는 로물루스라는 영웅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돼 있어. 하지만 실제로는 그때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한 종족인 루마족에서 로마라는 이름이 유래했을 것이란 주장이 더설득력을 얻고 있지

p110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정예전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섰지. 그러나 적수가 되지는 않았어. 영화 300의 줄거리 그대로 스파르타 군대는 전멸했지. 페르시아는 아테네로 진격했어. 이때 등장한 그리스 영웅이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야. 그는 아테네 시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해전을 준비했지. 마침내 페르시아 함대가 눈앞에 나타났어. 테미스토클레스는 조심스레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만으로 유인했어. 이 해안은 폭이 좁아 페르시아의 큰 함선이 잘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 예상은 적중했단다. 후퇴하던 아테네 해군이 반격에 나서자 페르시아 함선들은 서로 부딪치며 우왕좌왕했어. 페르시아는 더 좋은 함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2차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어

p155 쿠시 왕국은 새로운 선택을 했어.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권을 건설하기로 한 거지. 이후 쿠시 왕국은 더 이상 오리엔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았어. 그 대신 아프리카에 정착하려고 노력했지. 그 덕분에 쿠시 왕국은 아프리카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됐단다.

p192 흉노의 왕국이 세워진 기원전 3세기 초반, 아소카 왕이 등극했어. 그는 왕에 오르자마자 정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얼마 후 타밀 지역을 뺀 인도 전역을 통일했지. 아소카 왕은 정말 냉혹한 정복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랬던 그가 갑자기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너무나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는 데 생각이 미친거지.

p224 팍스 로마나의 범위를 좁히면 이 네르바 황제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분과 혼란을 종결시킨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오른 시점부터 팍스 로마나로 보지

p2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로마 제국을 동방 지역과 서방 지역으로 쪼갰어. 각각의 지역에는 1명의 황제와 1명의 부황제를 두었지. 그러나 모든 권력을 혼자 쥐고 있었어. 사실 로마 제국을 분할한 것은 다른 3명의 황제와 부황제에게 국토 방위 임무를 맡기기 위한 정책에 불과했단다

p284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5년이 지났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에서 프랑크족의 클로비스란 인물이 프랑크 왕국을 창건했지. 481년 클로비스가 세운 왕조를 메로빙거 왕조라고 불러. 751년까지 280년간 계속됐지

p335 이슬람 군대는 지금의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도착했어. 그들은 보르도 지방을 초토화 시킨 다음에 투르 지방까지 진격했지. 프랑크 군대가 막아섰어. 프랑크 왕국의 권력을 쥐고 있던 궁제 카를 마르텔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어. 프랑크 군대는 푸아티에 평원에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 이게 그 유명한 투르-푸아티에 전투야. 이 전쟁의 승리는 프랑크에 돌아갔어. 그 후 이슬람 제국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

p350 샤를마뉴의 업적은 너무 많아. 프랑크 왕국은 유럽 역사상 서로마 제국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 됐어. 문화도 발달했단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의 전통적인 라틴 문화는 많이 잊혀갔어. 샤를 마뉴는 그 라틴 문화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어. 신부들이 신을 섬기는 수도원도 이때부터 발달했지. 유럽 사람들은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이 때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러. 매우 번영했다는 뜻이야

p371 710년 일본은 아예 당나라의 수도인 시안을 그대로 본뜬 도시를 나라 지역에 건설했어. 단지 도시 모습만 따온 게 아니야. 율령을 비롯해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과 비슷하게 고쳤지. 문화도 당연히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이었어. 이때부터 약 70년 동안의 일본을 나라시대라고 한단다. 8세기 말에는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겼어. 헤이안시대가 열린 거야. 헤이안시대는 훗날 가마쿠라 바쿠후가 만들어질 때가지 약 390년간 계속됐어

p438 십자군이 왜 이렇게 흉악했는지 아니? 교황을 포함해 이때 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어. 그들은 성전을 촉구하면서 동방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고 선전했단다. 그래야 군인들이 더 잘 모이니까. 많은 기사와 농민들이 이 선전에 마음이 움직여 심자군에 자원한 거야. 어쩌면 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종교적 순수함보다 돈을 벌려는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어

p492 일 칸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한 다음 페르시아인들과 투르크인들을 힘으로 다스렸어. 당연히 반발이 있었겠지?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그 결과 14세기 중반이 되면 일 칸국은 여러 왕조들로 쪼개지고 말았단다. 이때 등장한 왕조 가운데 몽골 혈통의 티무르 왕조, 페르시아 혈통의 사파지 왕조, 투르크족 혈통의 오스만 왕조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

p511 바이바르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9세 왕을 사로잡은 데 이어 몽골 군대까지 물리쳤어. 그는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이자 영웅으로 떠올랐단다. 바이바르스 1세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가 4대 술탄을 제거하고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어

p527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위스 출신이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가 포함하는 신성로나 제국의 황제를 독점했지. 신성로마 제국에 속한 나라들은 근대로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영방 체제를 유지했어. 그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의 역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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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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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토박물관 순례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3/05 -2024/03/10


두번째 책.. 앞으로 계속 나올 시리즈가 기대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듯 하면서 좀 다른 느낌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지역을 돌면서 씌여진 책이라면 이 책은 지역을 돌기는 하지만 박물관을 끼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덕분에 몰랐던 박물관을 알게 되는 수확이 있다. 

내가 지방에 여행을 가면 가능하면 들리는 곳이 성당, 동네책방인데 지역 박물관을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제와 가야에 대한 답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둘 다 가본곳이 별로 없다. 

백제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고 가야, 특히 비화가야는 처음 들어본 곳이다.

창년이라는 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쓰면 이렇게 가보고 싶게 글을 쓸까? 부럽기만 하다. 

창녕도 가봐야 하고 부여도 가봐야 해서 올해도 갈 곳이 참 많다..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p17 부연 설명하기를 인물 : 탑 옆에서 (관람하며)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이 탑은 무조건 탑을 바라보며 관람하는 인물과 함께 찍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 그래야 실물크기가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p35 이에 창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 100명을 출가시켜 부처님을 받들게 하고 자신은 왕위를 이어갔다. 젊은 시절의 패기로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경험이 그를 크게 성장시켰던지 이후 창왕은 45년간의 치세 동안에 백제문화를 꽃피워 사실상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능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p5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봉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치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p70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서 기껏해야 10만 명 정도였으니 궁녀가 3천이 될 수가 없고 부소산 관북리 왕궁은 3천 명의 궁녀가 머물 공간도 없었다. 시인들은 단지 시어로 삼천을 읊었는데 대중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새기면서 낙화암은 의자왕의 호화방탕한 삶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p80 키 큰 상수리나무에 기대 쉬면서 곁에 있는 학부모에게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대재각을 다시 찾아온 것이 한 6,7년 만인것 같은데 그사이 근력이 쇠해진 것 아닌가 싶네요”라고 슬픈 듯이 말했더니 곧바로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만치 않은 산길이네요. 교수님 따라가는 우리가 더 힘드네요”라고 하여 금방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남과 이야기할 때는 이 학부모처럼 상대방이 듣기 좋은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p85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의 광적으로 좋아한 식물이라 좋은 매화나무 갖기를 너도 나도 원했다. 오죽했으면 퇴계 이황 선생이 운명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저 매화 화분 물줘라”였겠는가.

p93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향락에 빠졌던 왕이 아니라 재위 20년(641-660) 내내 신라를 공략한 전쟁의 제왕이었다.

p129 이 합장묘는 먼저 만든 북분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나중에 만든 남분은 돌방무덤이어서 신라의 묘제가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133 각기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10월 12일 경주에 도착하여 유물들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 놓고 21일까지 열흘간 조사했다. 금관총에서는 금관, 금제 관식, 금제 허리띠, 금제팔찌, 금제반지, 금제귀걸이, 금동신발, 유리잔, 청동제초두 등 1만 여점의 유물을 확인했다.

p145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는 모두 세 자루로 판명됐고 두자루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금관총 출토 금속편 중 칼집과 은제 허리띠에 이, 십, 팔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인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p151 신라 고분의 의미와 함께 우리의 전시 디스플레이 수준이 이렇게 높아져 있음에 높은 문화적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15년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전시를 보면서 울컥하는 감격이 일어나 어른답지 않게 절로 눈물이 나왔다.

p167 신라 고분의 출토품 중에 금관이 하이라이트로 여겨져 여타의 금속공예품들이 덜 조명받고 있지만 금관이 출토될 때는 금귀걸이, 금반지, 금허리띠, 금수식, 목걸이, 가슴걸이 등이 세트를 이룬다. 금령총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정교한 기교의 장신구들이 홀세트로 출토되었다

p176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 금제 태환식 귀걸이, 마노 대롱옥, 수정 다면옥,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은,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 곡옥을 단 가슴 장식, 금제과대(허리띠와 장식), 금은 팔찌와 유리 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p186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에 남아 박물관을 지켰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유물을 북쪽으로 반출하려고 조선물질문화조서 보존위원회 완장을 찬 사람들이 유물 포장을 지시했다. 그러나 최영희, 최순우, 김원용 등 박물관 직원들이 포장 시간을 길게 끌며 지연시켰고, 결국 서울 수복 후 미군의 도움을 얻어 유물들을 부산으로 대피시켰다.

p223 껴묻거리를 넣어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새날개모양 관모장식, 환두대도, 금그릇, 은그릇, 유리그릇, 칠기 등이 출토되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도기 1,500점과 철기 300점, 금동안장 등 각종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중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금동말안장과 페르시아풍이 역력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은 당시 신라의 교역 범위가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말해주어 발굴단을 놀라게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분 2만 2,700점, 북분 3만 5,648점으로 약 5만 8천 점이다.

p227 신라는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이 있었다. 금속판을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고 음각으로 무늬를 새기는 투조 기법, 판판한 금속파네 일정한 무늬를 망치로 두드려 나타내는 타출 기법, 옥이나 칠보 같은 보석을 감싸는 감옥 기법, 그리고 고난도 기술이 누금 세공 기법까지 구사했다.

p264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현지 실사를 거쳐 등재 권고라는 의견을 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야는 1세기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로, 여러 가야 고분군은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

p270 비화가야의 비화는 빛들 또는 빛이 좋은 들이라는 뜻으로 비사벌이라고도 부른다. 비스듬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창녕 비사벌은 과연 빛이 좋은 들판이다.

p276 오구라컬렉션보존회는 기증의 말에서 이 수집품으로 고대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말하면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오구라의 법적인 잘못을 따지는 것은 별도로 해두더라도, 학술적 입장에서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장물아비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입 경위와 출토 장소에 대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p276 송현이는 쌀과 보리, 콩과 견과류 등 식물류를 주로 섭취했는데 영양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송현이 머리의 수직 길이는 19.3 센티미터로 8등신이며, 허리둘레는 21.5인치로 현대 만 16세 여성의 평균 허리둘레 26.2인치보다 5인치가량 가는 개미허리였다.

p287 동삼층석탑은 진흥왕 척경비와 함께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창녕의 자랑이다. 또한 갈항상 동삼층석탑, 불구사 석가탑과 함께 고전미의 3요소인 비례, 균형, 조화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05 요새 사람이 지으면 아마도 포클레인으로 반반히 평지를 만들어놓고 시작했을텐데 옛 분들은 주어진 지형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배치했어요. 저 작은 건물들을 보세요.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켜앉아 건축적 리듬감이 있죠. 관룡서는 평면보다 입면의 배치가 탁월한 절집입니다.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컨트롤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은 이처럼 컨트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어요

p307 관룡사는 절집에서 정상 쪽으로 500미터 위쪽에 있는 용선대라는 벼랑에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사찰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3.18미터로 대좌와 불상으로 구성되는데, 불상은 근엄하고 좌대는 제법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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