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찾아서 - 비르투오소의 면모들 거장이 만난 거장 4
알프레드 코르토 지음, 이세진 옮김 / 포노(PHONO)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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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팽을 찾아서

 : 알프레드 코르토

 : 포노

읽은기간 : 2024/03/15 -2024/03/31


올해는 책이 잘 안넘어간다. 아마 간신히 100권정도 읽을것 같다. 

개론서보다는 각론으로 들어가는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쇼팽의 전기라고 해야하나? 쇼팽을 흠모하는 프랑스 피아니스트가 쓴 쇼팽에 대한 모든것이다. 

교육자로서의 모습, 연주자로서의 모습, 인간적인 삶의 모습 등 쇼팽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했다. 

그동안 내가 알던 쇼팽이 아니어서 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여성스럽고 민감하고, 남에게 자기의 생각을 잘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물건도 부수고 화도 잘 내는 마초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외모만 봐서는 잘 모를 일이다. 

유명했던 한 사람을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좋다. 

역시 각론으로 들어가야 더 재미있다. 즐겁게 읽었다. 


p27 유명한 폴란드 작곡가가 4분의 3 입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과 중세의 성이 보이는 낭만적인 배경, 인물은 오른손에 자신의 작품 악보를(기발한 가정인지 화가의 상징적 의도를 읽어낸 것인지) 둘둘 말아 쥐고 있다. 당시에 쇼팽은 영광의 정점에 있었고-익명의 카탈로그 작성자는 여기서 상업적 의도가 명백한 생리학적 세부사항을 짚고 간다- “몇 년 후 그의 목숨을 앗아갈 병은 아직 징후를 드러내지 않았다.

p39 쇼팽이 죽기 1년 전, 정확히는 1848년 8월 18일에 칼더하우스에서 폰타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농담 반 불평 반으로 평생 두 가지는 안타깝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커다란 코와 말을 잘 안 듣는 네 번째 손가락”

p50 내 세대는 쇼팽의 마지막 제자라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력을 쌓으려 했거나 실제로 그렇게 했던 피아니스트나 피아노 선생들을 적잖이 알 것이다. 그중 몇몇은 실제로 어쩌다 한 번 쇼팽에게 오디션이나 대수롭지 않은 추천사를 받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p55 쇼팽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을 매우 중요시했고 클레멘티의 전주곡과 연습곡을 병행시켰다. 본인도 이런 곡들오 피아노를 배우고 실력을 쌓았던 만큼, 기초 수업을 보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p58 마티아스는 어떤 제자가 정신 못차리고 화음을 이상하게 쳤다고 쇼팽이 의자를 부숴버리는 모습까지 봤다고 한다. 연주의 디테일을 놓치거나 귀에 거슬리는 음을 내면 스승은 불같이 화를 낸다. 자기 머리를 쥐어뜯거나, 악보에 지시사항이나 운지법을 표기하는 연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예사였다.

p87 어쩌면 나쁠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잖아? 오직 결과만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려줄 수 있어, 베토벤의 서신에도 거의 동일한 진술이 있지 않았던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금지되지 않는다”

p115 1846년부터, 그러니까 환상 폴로네즈와 뱃노래를 발표한 이 해 이후로 쇼팽은 작품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의 1846년 이후 작품은 야상곡 두 편(작품 62), 마주르카 세 편(작품 63), 왈츠 세 편(작품 64)이 전부다

p133 내가 보기에 들라크루아는 쇼팽의 프랑스인 측근 중에서 그의 타고난 이상주의를 가장 제대로 본 사람, 그를 가장 지적으로 아껴주었던 사람이다. 들라크루아는 그와 우정을 나눔으로써 가장 확실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p161 상당한 금전적 수익에도 불구하고(두 번의 연주회로 5천 굴덴을 거둬들였다) 바르샤바 가제트와 폴라느 통신은 물론, 폴란드 국영신물까지 찬사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프랑스 아가씨가 무대에 올라와 그에게 월계관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더없이 강조하는 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연주회 초청을 죄다 거절했다.

p191 멘델스존은 아헨에서 쇼팽이 힐러와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고,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최고는 쇼팽입니다. 그의 연주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때와도 같은 충격을 줍니다.”

p197 1835년의 리스트는 경이로운 비르투오소의 전형이었던 반면, 쇼팽은 시인과도 같은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리스트는 흡사 피아노의 파가니니처럼 기막힌 연주를 뽐내지만 쇼팽은 반대로 청중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 내면의 소리르 듣는 데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는 기복을 타긴 하지만 영감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면 피아노 건반에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노래를 끌어냅니다.

p209 그는 단순히 재주가 뛰어난 비르추오소, 건반의 대가가 아니므로 그는 단순히 이름난 에술가가 아니므로, 그날의 연주자는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쇼팽이었다.

p213 이 기사는 쇼팽을 슈베르트와 비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예리한 지적을 남긴다 “우리가 슈베르트를 언급한 이유는 그만큼 쇼팽과 천성이 흡사한 인물이 달리 없기 대문이다. 슈베르트가 성악을 위해서 한 일을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했다”

p231 그의 편지를 보면, 대중앞에 서기 싫은 마음보다 경제적 필요가 압도적이었던 모양이다.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고 내가 해낼 힘만 있다면 해야지.

p258 세련미를 추구하는 댄디즘,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이 소년에게서 조짐을 보이고 ㅇㅆ었다. 쇼팽의 경우는 교만하고 과시적인 멋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p263 이 선생이 모차르트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열렬히 찬양했기 때문에(특히 바흐는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그리 인기 있는 음악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팽도 그 영향으로 고전파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훗날 완벽한 선을 표현하는 자랑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p266 한편에는 기적 같은 천재성, 거의 초자연적인 재능이 있다. 그는 아무런 기초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음악만이 지니는 특권, 다시 말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조합된 소리들이 지니는 감동의 힘을 단박에 통찰했다.

p276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확신했다. 자기는 객지 생활을 하다가 홀로 죽을 운명이라고, 자기 주위에는 자기가 어떻게 되는 관심도 없고 자기에게도 별 의미없는 외국인들뿐일 거라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을 사귀겠지만 진정한 친구는 한 명도 없을 거라고.

p283 쇼팽의 훌륭한 자질을 늘 너그럽게 평가했던 리스트도 쇼팽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수없이 다채로운 뉘앙스로 뭉친 사람이었다. 그 뉘앙스들은 서로 상충하기도 하고 서로를 은폐하기도 했기 때문에 하눈에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리스트는 슬라브 사람들에게 대체로 이런 기질이 있다고 했다

p286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 스승의 분노 발작을 목격한 적이 있다. 스승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이유로 성질을 내다가 결국은 손에 가장 먼저 잡힌 가구나 물건을 박살내는 것으로 끝을 내곤 했다.

p290 쇼팽은 어떤 도덕적 의무나 삶의 규범은 맹목적으로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믿음은 그의 양육 환경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어차피 선험적인 신념에 바탕을 둔 믿음이었기에, 이 믿음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그의 불같은 분노 아니면 차가운 경멸을 살 수 밖에 없었다

p296 쇼팽은 그렇게나 무대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선연주회에는 선뜻 출연할 만큼 너그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작곡가로서의 수입이 문제될 때는 양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쓴 편지들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p299 그에게 두 사람은 그냥 우연히 알게 된 지인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슈만이 자기에게 헌정한 작품-불멸의 크라이슬리라아-의 악보를 펼쳐보지도 않고 피아노 위에 몇 달간 방치했다. 이 최초의 숭배자의 열광적인 찬사에서 그가 얻은 바를 생각해본다면 쇼팽의 배은망덕이 각별히 더 무례하게 느껴진다

p305 포토츠카 백작부인은 하이네의 로렐라이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여성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렸다. 만약 그녀가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쇼팽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었다면, 그 감정은 작곡가의 마지막 순간에 상징적으로 거룩한 것이 되었으리라

p314 카라조프스키는 그 책에서 콘스탄챠가 쇼팽에게 불러일으킨 연정을 언급하면서 바르샤바 음악원 재학생들 가운데 그녀를 흠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쇼팽의 마음을 거절한 셈이 되어 얻게 된 불멸의 이름에 아무 관심이 없었는지 “어쨋거나 소팽은 나의 요세프만큼 훌륭한 남편은 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p326 쇼팽은 육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는지 도덕적 혐오감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육체의 상스러운 짓거리”를 극구 거부했다. 반면에 상드는 바로 그런 행위의 “천사같은 신성함”을 찬양하고 “천국에서만 이름을 갖는 그 행위”에 거룩한 순수가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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