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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평전 - 음악, 사랑, 자유에 바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3년 8월
평점 :
제목 : 모차르트 평전
작가 : 이채훈
출판사 : 혜다
읽은기간 : 2024/03/05 -2024/04/15
보통 이런 유명 작곡가 평전은 외국인이 쓴 번역된 책들이 많은데 특이하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다. 더구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방송국PD다.
책이 벽돌책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다보니 읽는데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것 치고는 책은 괘 술술 넘어간다.
방송국 PD답게 책의 짜임새가 꽤 탄탄하다.
레퍼런스가 많지만 어느정도 취사선택을 해서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이 약간 아쉽다. 내가 모차르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더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아쉬움은 별로 없었을텐데... 알고 있는 지식이 짧은 내 탓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일생을 책으로 배운다는 건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꼭 해볼만한 작업이다.
천재라고 해서 머리속에서 막 악상을 끄집어 낸 건 아니다.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고, 하이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점점 발전시켜 나갔다. 음악이 세련되어지고 깊이가 있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책은 여러번 읽고 다른 평전도 읽어가면서 더 배워야 한다.
이런 천재와 천재의 음악을 모르고 죽는다는 건 인생에서 의미가 없다.
p16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p17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소니는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 소수의 일류 작곡가,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p27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
p33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의 음악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1762년 3월 4일 작곡한 알레그로 B플렛 장조 K3, 5월 11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4, 7월 5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5등 하나하나가 이전 작품보다 뛰어나다.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정을 보는 듯하다
p35 이렇게 어렵게 완성된 네크롤로그는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1798년 프란츠 자버 니메첵은 이를 자신이 쓴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에 통째로 인용했고 이 내용은 오늘날 거의 모든 모차르트 전기에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네크롤로그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p38 그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기를 싫어한 반면, 마음으로 음악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는 몇 시간이고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음악을 사랑한ㄷ”고 거짓말로라도 설득해야 그의 연주를 청해 들을 수 있었다
p45 그는 1790년 형에게 황제 지위를 이어받은 뒤 모차르트를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 절대 권력자들은 모차르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모차르트 인생에 굴절을 일으키고 생존 조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p68 조지3세는 미국독립전쟁 내내 식민지 민중에게 폭군, 압제자 소리를 들었고,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으며 온갖 기행을 저지른 왕이다. 그의 독특한 행로를 묘사한 조지왕의 광기라는 코미디 영화도 있다. 왕은 훗날 요제프 하이든을 런던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p79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는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난네를에게 세상이 덧없음과 어려서 죽는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그 시절, 부모들은 비참하게 고생하며 살기보다 일찍 죽는게 낫다며 자위하곤 했다. 난네를은 10월 21일 종부성사까지 받았지만, 카롤리네 공비가 보내준 의사 토마스 ㅅ퓨벵케가 처방한 약을 먹고 2주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p92 레오폴트는 올뮈츠 주임신부인 포트 슈타츠키 백작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볼프강이 천연두에 걸린 듯하니 제발 선처를 부탁합니다” 천만다행, 백작은 모차르트 가족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친절을 베푼 것이다.
p95 레오폴트 씨는 자식 교육을 참 잘했더군됴요. 특히 아들은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활기 넘치면서도 예의가 바른, 한번 보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였어요. 잘 자라면 정말 뛰어난 음악가가 될 겁니다. 하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음악 교사로 나폴리와 베네치아, 드레스덴과 빈 궁정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p104 이 오페라가 일으킨 소동은 큰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 모라츠트 가족에게 친절하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사건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 레오폴트가 빈 궁정음악가들과 충돌하고 탄원서까지 제출함으로써 궁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본 게 분명하다.
p122 바이올린 신동으로 꼽히던 이 소년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고 키도 똑같았다. 두 소년은 만나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또래 어린이와 사귀며 어울려 놀 기회가 없었다. 린리도 마찬가지였다. 음악 신동으로 화려하게 살았지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빼앗긴 두 소년의 우정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p123 토마스 린리는 20여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극음악 세익스피어 찬가, 오라토리오 모세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8월 5일 보트사고로 갑가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p145 11월 23일과 24일 밀라노에서 연주된 K.113은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중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곡이다 .그때까지 잘츠부르크 궁정 악단에는 클라리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클라리넷의 음색을 좋아했다.
p150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는 미사 중 크레도 다음에 대주교가 복음서의 한 대목을 읽으면 오케스트라가 교회 소나타를 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위해 작곡한 교회 소나타는 모두 열일곱 곡으로 교향곡을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p156 루치오 실라가 공연되는 동안 모차르트는 라우치니에게 부탁받은 모테트 F장조 기뻐하라, 환호하라 K165를 작곡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가운데 레퀴엠 D단조, 대미사 C단조, 아베 베룸 코르푸스와 함께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p169 모차르트의 이 G단조 교향곡은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모차르트의 반항심이 자유를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만나서 빚어낸 절규가 아닐까? 음악학자 헤르만 아베르트는 이 곡을 그동안 모차르트 안에서 몇번씩 불타오르던 정열적이고 염세적인 기분이 가장 격하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p176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는 어린이가 치기엔 너무 쉽지만 전문 피아니스트가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어색하게 연주하면 바로 표시가 날 뿐 아니라, 모차르트 특유의 단순한 진행을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의미다
p201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루바토 기법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네테가 연주할 때 놓치는 것은, 아다지오의 루바토에서도 왼손은 템포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주할 때 왼손이 오른손을 엉거주춤 따라가선 안돼요. 모차르트는 오른손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때도 왼손은 정확하게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원칙은 루바토 기법에 대한 쇼팽의 소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p204 모차르트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썼으나 고상한 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p219 포글러는 만하임에서 공연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루치오 실라를 혹평해서 모차르트를 화나게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평범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건방지게 구는 사람을 혐오했고, 그런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경멸을 드러내고 직설적으로 비판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곤 했다
p233 공작이 들어와 음악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 해프닝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 사람들의 음악 취향과 언어에 거부감이 있던 모차르트는 이 일로 프랑스 혐오가 더 깊어졌다
p251 모차르트는 매우 품성이 착하고, 쉽게 사람들을 믿습니다. 커리어를 만드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죠. 이곳에서 인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약삭빠르고, 주도면밀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그의 재능 절반이면 충분하지만, 처세술은 지금보다 두 배가 필요해요
p264 265 놀라운 것은, E플렛 장조로 된 곡인데 비올라 솔로 파트가 D장조로 기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올라를 반음 높게 조율해서 D장조로 연주하면 결국 E플렛 장조가 된다. 비올라의 음색은 은은하고 내성적이지만 이렇게 현을 팽팽하게 조율하면 더 선명하고 밝은 음색을 얻을 수 있다. 선율과 화음 뿐 아니라 음색까지 창조재 낸 모차르트의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p270 졸리만처럼 사후에 잔인하게 모욕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몽군주 요제프 2세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1796년 그가 사망할 때는 황제 프란츠 2세가 지배하는 반동의 시대였다. 황제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공개 선언하기 위해 졸리만의 시신을 이용했다. 조각가 프란츠 탈러가 박제한 그의 시신은 희귀한 중남미 짐승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전시됐다. 유족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1848년 빈의 폭격으로 박물관이 불팠을 때 이 수치스런 인종차별의 증거도 사라졌다.
p308 신분사회를 비판한 그의 오페라는 황제의 계몽 정치와 잘 어울렸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황제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위협받은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황제의 푸들 정도로 여기며 미워했다. 요제프 2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못했지만, 1790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빈의 귀족들은 일제히 모차르트에게 등을 돌린다.
p313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IQ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기도를 하니 머릿속의 핏덩어리가 사라졌고” “천사가 자기를 도왔다”고 횡설수설했다. 돈 캠벨은 미국 전역은 물론 일본과 한국까지 찾아와 모차르트 효과에 대해 강연을 하고 책을 팔았다. 모차르트를 팔아서 잇속을 챙긴 사기나 다름없었다.
p320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를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준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의 반응은 까칠했다.
p351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았지만 음악사에서 가장 미움받은 여자”가 됐다.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콘스탄체를 인색하게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가난에 책임이 있고, 남편의 장례를 엉망으로 치러서 시신이 실종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p363 빈에서 쓴 첫 피아노 협주곡(F장도 K 413, A장조 K414, C장도 K415)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곡들은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게, 매우 화려해서 귀로 듣기에 즐겁지만, 그렇다고 공허하지 않게 작곡했어요. 전문가만 만족할 만한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아마추어들도 이유를 모르면서 좋아할 곡입니다”
p368 왜 모차르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그의 위대한 재능과 다정다감한 성품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죠. 엄청나게 후회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레아 징어의 소설 벌거벗은 삶에는 “결혼한 뒤에도 모차르트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콘스탄체가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연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이야기다
p377 하이든에게 바친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곡 중 두 번째 곡 D단조 K421의 메뉴엣이다. 영국의 음악사가 빈센트 노벨로는 1829년 잘츠부르크에서 콘스탄체를 만난 뒤 이렇게 써다. “그녀는 자기가 첫아이를 낳으며 진통을 할 때 모차르트가 D단조 사중주곡을 쓰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특히 메뉴엣을 우리에게 노래까지 해주며, 이 대목이 바로 진통을 들으며 쓴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절규하는 메뉴엣의 주제는 고통스런 출산의 비명, 아니, 아내 콘스탄체의 고통을 함께 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이었다. 부드럽고 맑은 중간 부분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다
p384 11월 4일 화요일, 린츠 극장에서 예약 연주회가 열렸다. “교향곡을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새 교향곡을 써야 해요.” 닷새 만에 완성한 교향곡 C장조 린츠 K425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마다 늘 언급되는 바로 그 곡이다
p414 잘츠부르크에서 빈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9시까지 작곡을 하고, 오후 1시까지 레슨을 했다. 식사 초대가 없는 날은 오후 2-3시경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작곡을 더 했다. 저녁에는 연주를 하거나 밤 9시까지 작곡을 했고, 급한 일거리가 생기면 새벽 1시까지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은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p418 모차르트의 연주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리히터가 한탄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열심히 땀흘려 연습해도 쩔쩔매는데, 당신은 애들 노래를 연주하듯 쉽게 하는군요!” 모차르트가 답했다. “저도 열심히 연습을 했지요. 더 연습을 않아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모차르트가 누구보다 부지런히 연습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p421 피아노 파트를 미처 쓰지 못했고, 리허설을 할 시간도 없었기 대문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파트만 써주고 피아노는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했다. 요제프 2세가 어리둥절해서 “자네 파트 악보는 어디 있는가?” 묻자 모차르트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p427 난네를은 조넨부르크 남작과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801년 남편이 사망한 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p431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겪는 침묵과 죽음의 시련은 바로 이 프리메이슨 입문 의례를 묘사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권력자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로 늘 죽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프리메이슨 의례는 모든 사라미 죽는다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덧없는 욕망과 집착으 버리고 순수한 자아를 찾는 방편이었다.
p434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추적한 캐서린 톰슨은 열두 살 모차르트가 빈을 방문했을 때 메스머 박사를 통해 프리메이슨을 처음 접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프리메이슨 회원인 메스머 박사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p443 모차르트는 그해 1월 14일 사중주곡 C장도 K465를 완성한 직후 “나는 현악사중주곡 쓰는 법을 하이든에게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모차르트는 공들여 쓴 이 곡들에 대해 선배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고, 하이든은 익히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이든은 러시아 사중주곡을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양식으로 작곡했다.
p448 모차르트 음악은 하이든과 비교해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1786년 빈을 방문하고 있던 디터스도르프는 황제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하이든 음악은 한 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반면 모차르트 음악은 여러 번 들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디터스도르프는 화답했다. “제 의견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p452 레오폴트는 이날 연주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을까? 비밀은 아름다운 안단테에 있다. 피아노 독주자가 연주하는 둘째 주제 마무리 대목의 왼손 파트가 아버지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 왼손 파트와 똑같았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이 아름다운 안단테를 아버지에게 바치며 그의 작품 중 한 대목을 인용하여 오마주를 표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p463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을 간직하는 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존업성이라는 사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인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도 모차르트는 자유와 평등의 꿈을 잃지 않았고, 이에 따르는 대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p467 초견연주와 짝을 이루는 것이 즉흥연주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청중의 갈채에 즉흥연주로 보답하곤 했다. 덴마크 배우 요아힘 다니엘 프라이저는 1787년 1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자그마한 인간, 위대한 거장은 두 번의 즉흥연주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했다. 가장 어려운 패시지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멋진 연주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p478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기에 피가로의 결혼을 승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절대군주였기에 이토록 파격적인 결정이 가능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빈 궁정의 수많은 귀족 중 단 한사람도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p486 베토벤은 피아니스트 존 크라머가 연주한 이 곡을 듣고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음악학자들이 “베토벤의 협주곡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이 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지적한다
p487 오페라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피아노 협주곡은 대중들의 취향보다 자기 내면의 충동에 따라 작곡하게 됐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로서는 3-4년 동안이나 빈 청중의 비위를 맞췄으니 오래 참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496 스페인 작곡가 마르틴 이 솔레르는 러시아로 가는 길에 빈에 들러서 희귀한 일을 공연했는데, 1786년 11월 7일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이듬해 봄 시즌까지 무려 78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귀한 일이 오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을 압도한 것이다.
p508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는 여전히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차별받는 도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와 같은 도시가 바로 프라하였던 것이다.
p514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다소 구식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직접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연주한 반면, 베토벤은 소나타 월광의 피날레나 소나타 열정에서 보듯 피아노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법을 구사했다. 피아노 음악은 빠르게 발전했고, 열네 살이라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세대 차를 의미했다.
p526 빈에 도착한 뒤 거의 매일 저를 진료해줘요. 이렇게 충실했던 바리자니가 1787년 9월 3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 앨범에 짧은 글을 남겼다. “그대의 친구를 잊지 말아주오. 세상의 즐거움인 그대를 두 차례 치료해서 더 살 수 있게 해드린 것은 저의 자랑이자 행복이지요” 모차르트는 바리자니의 글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9월 3일, 내 목숨을 구해 준 이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바리자니가 오래 살았다면
모차르트도 좀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p534 19세기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한 챕터를 할애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예찬했다. 돈 조반니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사랑의 천재이자 실존의 영웅이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여주인공들은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사랑과 실존을 직면했을 뿐이다.
p538 이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의 세계에 공포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기사장이 돈 조반니를 심판하려고 등장하는 순간 트럼본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모차르트는 이 트럼본을 합창석 높은 곳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빈에서는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다.
p548 그는 소탈했고, 때로 광대처럼 행동했기에 외모나 행동에서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에로틱한 것에서, 비극적인 것에서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진정한 위대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모차르트는 위대성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은 그 시대에도, 그 자신에게도 감춰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너무나 비밀스럽게 위대했기 대문에 그의 시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자신은 더 몰랐다”
p551 그는 제국이 잠자고 있을 때 황제는 깨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면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과 사제들의 기득권을 축소했기 대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 불만 세력을 잘 다독이지 못했다. 개혁 과정에서 대중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특히 장례 제도 개혁처럼 전통과 관습을 거스르는 조치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p565 그 해 여름 작곡한 마지막 세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기악곡 중 최고 걸작이다. 세상을 초월한 듯 행복으로 빛나는 39번 E플렛장조, 아름다움과 슬픔의 고귀한 결정체인 40번 G단조, 당당하고 위엄 있는 41번 C장조 주피터. 이 세 곡을 삼형제별처럼 나란히 빛나며 교향곡의 역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룬다.
p568 모차르트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그 법칙들을 완성하려 했지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의 독창적 어법과 개성 있는 예술이 그 시대의 기준이자 특징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모차르트는 한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서 있었기에 베토벤보다 더 먼 미래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p571 야상곡 창시자로 유명한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존 필드는 한 연주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건 악마 아니면 훔멜이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훔멜은 전성기 때 베토벤과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협주곡 여덟 곡과 소나타 열 곡 등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해서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낡은 음악가로 취급된다.
p584 모차르트는 이 노력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도움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796년, 콘스탄체는 라이프치히에 레퀴엠 악보를 갖고 와서 공연했다. 이때 라이프치히의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에게 후한 사례를 했고,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는 모차르트 전집 출판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p587 왕은 모차르트의 솔직한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일해 보시지 않겠소? 그대 말대로 악단이 개선되는지 한번 보고 싶소. 1년에 3,000탈러를 드리겠소. 모차르트는 제가 모시고 있는 황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말에 감동한 왕은 한참 침묵한 뒤 덧붙였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시오. 나중에라도 약속은 지키겠소. 왕은 이 일화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했고, 모차르트 사후 베를린에 온 콘스탄체에게도 말해 주었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전남편도 똑같이 말했다.
p598 그는 이 악기 소리를 듣자마자 매혹되어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아, 우리에게도 클라리넷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빛난느 효과를 아버지는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을 표현하는 클라리넷은 그 후 모차르트가 따뜻한 감정을 노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오중주곡은 균형잡힌 선율, 기품있는 형식, 우수에 찬 달콤한 울림이 가득한 주옥같은 작품이다.
p605 오페라의 주제는 여자는 정조 관념이 없다가 아니라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피와 살로 된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재조명되었다.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난 후에야 현실의 사랑이 시작되며, 끊임없이 나누고 존중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결혼 생황레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613 모차르트는 황후 마리아 루이사가 자기에게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해 여름, 황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여자는 다 그래를 혼자 관람했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그녀에겐 두 편 모두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황후는 모차르트처럼 자유사상가이자 제멋대로인 음악가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p624 그가 영국에 갔다면 어쩌면 이듬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연 기획자 요한 페터 잘로몬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은 하이든은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내와 별거중이라서 홀가분하게 영국행을 결단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늘 콘스탄체와 의논했고, 그녀의 반대에 부딪쳐서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p633 모차르트는 춤곡을 판매하고 받은 영수증 위에 이렇게 썼다. “내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 큰 돈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일이다”
p647 모차르트는 아내 없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보고 싶다는 말뿐이다. “내 유일한 소망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당신 곁에 있는 거야. 이토록 오랜 시간 당신만을 그리워하며 지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p660 오페라를 준비할 때 늘 그러했듯 마술피리도 초연 이틀 전에야 완성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과로로 앓았던 게 분명하지만 마술피리 초연 무렵에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p669 카를은 그날 아버지의 오페라를 처음 보았다. “카를은 오페라에 가는 걸 아주 즐거워했어요. 참 멋지게 생긴 아이지!” 콘스탄체가 바덴에서 요양할 때 늘 그녀를 따라갔던 카를은 이제 일곱 살이 지나 학교에 가야 했기에 모차르트와 함께 빈에 남았다. 카를은 마술피리 작곡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새잡이 파파게노의 아리아 정도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를에게 이날 오페라 관람은 평생 추억이 됐을 것이다.
p672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자전적 오페라로 인식됐다. 첫 장면, 괴물에게 쫓기는 타미노의 모습부터 모차르트의 힘든 처지를 뜻하는 걸로 보였다. 벨기에의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어린이로 돌아갔다고 보았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겨뤄야 했다. 그에겐 어린 시절이 없었다. 서른다섯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할 즈음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모차르트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로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p673 타미노처럼 고고한 것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자, 고귀한 인간성의 이상으로 넘치는 자였다. 동시에 그는 (파파게노처럼) 유쾌하고 천진한 젊은이, 세속적인 향락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젊은이였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타미노, 음식과 와인과 사랑만 있으면 만족하는 파파게노, 두 사람을 합치면 모차르트가 된다는 것이다.
p687 1791년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쓴 과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7월 하순(날짜 미상) <레퀴엠> 의뢰받음, <황제 티토의 자비> 작곡 및 프라하 여행. 9월 17일 프라하에서 빈으로 귀환, 9월 30일로 예정된 마술피리 초연에 집중 10월 중순(날짜 미상) 안톤 슈타틀러를 위한 클라리넷 협주곡 완성 10월 중순(날짜 미상) <레퀴엠> 본격 착수 11월 중순(날짜 미상) 프리메이슨 칸타타 작곡 위해 <레퀴엠> 잠시 중다 12월 5일 <레퀴엠>,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 작곡하고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
p693 집에 도착한 그는 차가운 물수건을 달라고 하더니 모차르트의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얹었어요. 하지만 열은 떵저지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사망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있었어요. 레퀴엠의 팀파니 음률을 입으로 웅얼거린 게 형부의 마지막 동작이었어요.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p696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쥐스마이어가 쓰기에 버거운 대목들을 아픈 몸으로 직접 썼다. 지금도 레뮈엠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만 듣는 사람이 적지 않다.
p706 콘스탄체와 카를 토마스의 증언을 보면 모차르트 유족들은 독살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p723 영국 사람들은 독일 출신인 헨델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히 모셨다. 이 나라에서는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통탄할 일이다. 우리 스치스런 역사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여! 그대가 아끼던 찌르레기가 죽었을 때 그대는 셋집 정원에 묘비를 세워주고 직접 애도의 시를 쓰셨지요. 그대가 새를 추모하듯 누군가 당신을 추모할 날은 언제일까요?
p727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슬픔의 흔적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슬픈 대목은 일정한 희망의 빛을 담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성의 단서가 된다
p734 모차르트는 한때 큰 도시의 궁정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가족은 죽은 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 페터 수도원,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멀리 파리의 생 의스타슈 성당에 잠들어 있다. 콘스탄체의 묘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시아버지 레오폴트의 묘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