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 유튜버 하루데이가 기록한 낭만적인 도시 풍경
하루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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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 하루

 : 한경 arte

읽은기간 : 2024/05/07 -2024/05/08


뉴욕은 여행이나 한달살기 정도 할 곳이지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하철도 맘에 안들고, 집값은 미친듯이 비싸고, 집의 내구시설은 너무 안좋고, 거기에 엄청난 물가와 팁문화까지..

나같은 사람이 살기엔 너무나 버겁다.

그러나 센트럴파크와 같이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박물관이 컨텐츠가 좋고, 뮤지컬이 나를 부르니 안갈 수는 없을듯...

멋진 도시이자 살기에 너무 힘든 뉴욕을 잘 소개해주고 있다..

이런 곳에 사시는 분 정말 존경스럽다. 


p18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건물에는 집 안에 세탁기가 없다. 부동산 직원이 이 아파트는 건물 안에 공용 세탁소가 있으니 안심하라며 대단한 장점처럼 홍보하는데,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p39 센트럴파크를 중간에 두고 오른쪽에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왼쪽에는 어퍼 웨스트 사이드라는 뉴욕 최고의 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비록 우린 부촌이 아닌 그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센트럴파크 근처에 산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p87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독립서점의 이면에는 서점의 쇠락을 막기 위한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행사를 열어 동네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고자 했고, 서점의 역사를 내세운 기념품을 팔며 관광객들의 성지가 된 곳도 있었다.

p119 그저 낯설기만 하던 뉴욕이란 도시가 익숙한 동네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이 소중한 경험 덕분에 고양이가 그랬어 행복은 빈 상자 속에 있다고라는 책까지 낼 수 있었으니, 델리와 델리에 사는 야옹님들은 나의 뉴욕살이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p140 일본에서는 라멘과 돈지루가 그랬고, 싱가포르에서는 락사와 바쿠테가, 그리고 뉴욕에선 앞서 말한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베이글 그리고 뉴욕 피자가 추가되었다.

p156 나도 세 시간 간격의 수유와 서툴던 화장실 처리에 적응해 가며 냥초보에서 정식 집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야옹님들을 지켜보는 건 그야말로 기쁨 그 자체였다.

p169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다. 예전보다 훨씬 건강에 신경 쓰게 되었다는 것. 열심히 운동하고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며 병원에 가는 일을 최소화하도록, 거의 집착 수준으로 건강관리를 하게 됐다. 비록 시작은 돈이었지만 결국 건강도 얻게 되었으니 나름 일석이조의 효과라며 필사적으로 웃어본다.

p199 공짜라면 사족은 못쓰는 짠순이 심보와 한번 빠지면 답도 없는 덕질 근성이 합쳐져 자발적으로 구렁텅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뉴욕 문화생활의 구렁텅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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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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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

 : 성수영

 : 한경 arte

읽은기간 : 2024/04/27 -2024/05/05


미술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화가의 삶과 작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진다.

여전히 그림을 못 그리지만, 보는 것은 즐거워졌다. 

자주 보고, 작품에 대해 알게되니 궁금한 점은 늘어가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자꾸 읽게 된다. 좋은 선순환이다.

이 책은 작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을 보니 눈에 익숙한 작품이 많은데 작가의 이름은 낯선 사람이 꽤 있다.. 

작가의 삶을 읽어보니 눈물없이 못 읽을 삶도 있고,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 끝까지 평탄하게 살던 사람 등 다양한 삶을 알 수 있었다.

상당수의 작가들은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가난하게 살다 갔다.

왜 작가가 죽고 나서야 그 진가를 알아보게 되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집에 두고 읽어야 작가들의 이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듯하다. 다만, 이렇게 책을 사모으다 보면 책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책을 사야할 지 갈등이 들게 하는 책이다. 


p8 이 책은 그림을 작가의 삶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그림의 주재료인 작가의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원료인 삶을 알게 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p21 1960년대부터 레이턴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영국 화가로, 프레이밍 준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세기의 명작으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졌지요. 이에 따라 둘의 사랑이야기도 재조명받게 됐습니다.

p27 러시아에서 샤갈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선생님(레온 박스트)은 파리에서 샤갈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의 그림 속 색들이 제각기 노래를 부르는 것 같군”

p38 캐슬린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1882년 캐슬린은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둘이 함께한 시간은 고작 6년.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허무하게 티소를 떠나갔습니다.

p58 모네는 꺾이지 않고 자신의 직감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훗날 모네는 회고했습니다. “나는 위대한 화가가 아니다. 단지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상의 그림 그리는 규칙들을 자주 잊어버렸을 뿐이다”

p63 10대 시절부터 늘 사이가 좋았던 둘. 하지만 1914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모네의 아들은 당시 레옹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레옹의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사용하던 화학물질의 독성 때문에 모네의 아들과 레옹의 딸이 연달아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화학물질의 유독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형제는 서로의 탓을 하며 크게 다퉜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p80 그림을 지나치게 자세히 그리는 남편에게 “다 그릴 필요 없다”고 조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해부학 그림 같아. 그런 종류의 화가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는 그런 그림은 재미없더라. 카드를 다 보여주지 말고 숨겨” 앤드루는 곧바로 조언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그의 그림은 더욱 신비로워졌습니다.

p84 헬가 사건은 곧바로 미국 문화계의 최대 스캔들로 떠올랐습니다. 앤드루가 그린 헬가의 그림은 1986년 8월 18일 자 타임과 뉴스위크의 표지를 동시에 장식했습니다. 피카소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1987년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공개돼 전시됐고, 미국 전역의 다른 주요 박물관 여섯 곳을 순회하며 총 백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았습니다.

p95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결혼하면 예술은 종 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유부남은 예술에서 반동이다라고 했으며, 외젠 들라크루아는 당신이 사랑을 한다면 그건 안 좋은 일이야. 상대방이 예쁘다면 최악이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죽어버리거든. 예술가는 다른 모든 걸 버리고 작품에만 열정을 가져야 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p112 유언에 따라 그의 인상파컬렉션은 루브르박물관에 기부됐습니다. 관련 업무는 유언에 따라 친구였던 르누아르가 도맡았습니다. 인상파를 극도로 싫어하던 당시 미술계 주류와 박물관 위원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결국 조건부로 기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이 됐습니다.

p118 40대에 들어 그는 본격적으로 빛과 색채의 실험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가 태어나기 수십 년도 전에 인상주의와 추상화로 발을 내디딘 겁니다. 하지만 너무 일렀던 걸까요. 그림에는 병에 걸려서 앞을 제대로 못보는 노인이 본 장면 같다. 무미건조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p134 전 세계 언론들이 수백 개에 달하는 부고 기사를 썼고, 그 내용 대부분은 위인전에 가까운 칭찬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들을 읽다보면 “이렇게 착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을 떠났다고 너무 칭찬만 한 것 가니야?”라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지만, 어던 편지나 기록에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기록은 오직 칭찬뿐입니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

p140 초현실주의에 대한 사랑조차도 아내에 대한 사랑에는 못미쳤습니다. 초현실주의자 모임의 대표 격인 앙드로 브르통이 모임에서 조르제트의 십자가 목걸이에 대해 “낡은 질서와 부르주아의 상징이니 당장 치워달라”고 모욕적인 말투로 요구하자 마그리트는 조르제트의 손을 잡고 나와버렸고, 초현실주의자 모임에서도 탈퇴했습니다. 마그리트는 말했습니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한다”

p142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미지의 배반에는 담배 파이프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밑에 쓰여 있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일 뿐이다. 이런 뜻입니다.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숨겨진 뜻은 좀 더 심오합니다. 파이프를 아무리 잘 그려도 그건 파이르 그림일 뿐, 파이프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말은 말이고 그림은 그림일 뿐, 아무리 잘 쓰고 그려봤자 대상의 본질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p152 마네는 끊임없이 살롱의 문을 두드리며 정면 돌파를 고집했습니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 사회 주류의 인정을 갈구하는 성격 때문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시도는 마네가 필요 이상으로 미술계의 집중적인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p158 남들은 전설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아내 수잔과 아들 레옹에게 마네는 그저 형편없는 가장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옹은 마네의 성을 이어받지 않고 사생아 시절 성을 고수했거든요. 마네의 아내와 아들은 마네가 남긴 그림을 정리하고 기록을 남겼지만, 이는 그저 작품을 현금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p159 은퇴 뒤 그는 노르망디에서 말년을 보냈고, 1927년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레옹의 이런 평범하고 소박한 은둔자 같은 삶은, 화려하게 살다 죽어서 전설이 된 아버지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p166 하지만 묀스테드는 그러지 못했씁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장인이 만들어낸 공예품에 가까운 취급을 받습니다.

p169 이런 맥락에서 묀스테드의 작품에는 다른 위대한 명화들에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자연은 아름답고 나는 그걸 잘 그려놨잖아. 어때, 멋지지?”하는 듯한 친근함과 편안함이 있습니다.

p175 그의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움직임은 다소 가장돼 있고 원근법과 단축법도 독특하지만, 그래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빛을 비추는 실험을 직접하며 공부해서 그런지 명암 대비는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만, 강렬하고 신비롭습니다.

p176 티치아노는 서른 살이나 어린 틴토레토가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는지 틈만 나면 틴토레토의 욕을 하고 뒤로 손을 써서 일감 수주를 방해했습니다.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에 대해 항상 좋은 말만 했던 걸 감안하면 졸렬하지요.

p181 그들은 틴토레토가 그린 천국과 성서 속 장면들을 올려다봤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지금 삶이 힘들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언젠가 나도 복을 받을 거야’ 끊임없는 견제와 배척을 견디며 화가가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건 바로 이런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틴토레토라는 이름은 그렇게 전설이 됐습니다.

p184 대자연이야말로 세상의 섭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평범한 사물에서도 우주의 원리와 신의 존재를 떠올리던 그에게는 풍경화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여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속 여러 풍경을 섞어 재구성한 겁니다. 대자연이 품고 있는 위대함과 무한성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지요. 안개와 어둠, 빛에 대한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이런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p191 그의 삶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느루아르는 집요할 정도로 행복한 그림만을 그렸고, 행복의 화가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p193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르누아르는 1866년 일곱 살 연하의 그림 모델인 리즈 트레오와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담겨서였을까요. 르누아르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들은 르누아르의 젊은 시절 그림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p201 밥을 굶을 때도, 세상이 그의 작품에 돌을 던질 때도, 딸과 생이별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자신의 곁을 떠날 때도, 격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도 오직 행복만을 그렸습니다. 르누아르의 손이 붓을 건드리는 모든 순간마다 어김없이 캔버스에는 화사한 행복이 피어났습니다.

p202 르누아르의 사후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숨겨둔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인의 뜻과 명예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이 1958년 출판한 아버지의 전기에도 이 사실을 빠져 있습니다. 르누아르가 리즈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2002년 한 편지가 발견되면서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p214 지금도 앙소르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것들은 1880~1895년, 한창 어려웠던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 이후 앙소르의 작품 대부분은 초기 작품의 재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p237 부모님의 불화,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조금 뒤틀린 애정, 신체적인 장애, 그 속에서도 빛나는 눈과 섬세한 손, 비운의 천재 화가를 만들 재료는 이렇게 모두 갖춰졌습니다.

p243 그녀와 친했던 로트레크는 그 모습을 담은 그림과 포스터를 여러 장 그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예쁘게 그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충격을 받은 길베르가 애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발 그렇게 못생긴 모습으로 그리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당신이 보내준 스케치를 보고 많은 사람이 비명을 질렀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뒤 길베르는 자서전을 통해 로트레크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p259 형은 확실히 같이 살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빈센트의 재능과 예술적인 감성, 독창성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형은 천재야’ 그는 여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야. 몇 년만 더 있으면 형은 틀림없이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p274 페이메이르의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그림을 사 갈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어지러운 마음을 고용한 그림으로 승화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p280 평범한 일상 속에도 위대함은 숨어 있다. 생업과 열 명 넘는 아이들의 육아, 집안일 등이 뒤섞인 번잡한 일과 속에서 생활인 페이메이르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위대함의 본질을 포착해 자신의 그림에 완벽하게 담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일상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영원불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p284 초상화를 그리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앙투아네트와 르 브룅은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말도 잘 통했습니다. 둘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금새 가족처럼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르 브룅이 바닥에 실로 떨어뜨린 붓을 앙투아네트가 몸소 주워주는 일도 있었고 초상화를 그리다 쉬는 시간에 둘이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p299 아마도 루소의 이런 거짓말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비참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지어낸 말을 스스로 믿는 어린아이처럼 루소 역시 자신의 거짓말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루소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치 않았다는 겁니다.

p302 이를 통해 루소의 삶과 작품을 접한 예술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본다. 단순하다. 이국적이다. 어린아이 같다. 아무튼 이상하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이들은 그 이상한 매력의 비밀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p305 이 대책 없는 알코올중독자의 이름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의 삶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흥청망청 사는 게 미덕처럼 여겨졌던 20세기초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는 방종한 생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p317 정작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 그림은 농민을 그린 거야. 매일매일 땀 흘려 일하는, 초라하지만 위대한 사람들 말이야. 정치 싸움에 낄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마다 자기 멋대로 내린 결론에 그림을 꿰맞출 뿐이었죠. 1857년의 프랑스는 그렇게 좌우로 갈라져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곳이었습니다.

p327 밀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봄만 봐도 밀레의 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환한 빛과 무지개. 이를 통해 밀레는 “비 오는 날을 견디로 나면 언젠가 인생의 봄날이 온다”는 위로를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p333 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좋지 않아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슬레가 할 줄 아는 것은 이때까지 그려온 풍경화를 계속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최승자 시인은 썼습니다. 당시 서른 즈음이었던 시슬레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p337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접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동료 화가들보다는 명성이 뒤떨어지고 연구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강렬한 색채 대신 옅은 색을 쓴 화풍, 극적인 장관 대신 소박한 시골과 마을 풍경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임팩트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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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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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선택의 재검토

 : 말콤 글래드웰

 : 김영사

읽은기간 : 2024/04/14 -2024/04/20


글잘쓰는 말콤 글래드웰의 책..

그런데 이 양반이 쓴 책이 맞나싶다.. 

아무리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인 2차세계대전의 폭격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의 중심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워 하며 읽기는 처음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뜬금없는 비약은 좀 어이가 없다.

필력이 줄은 건지, 내용을 잘 몰라서 대충 얼버무린 건지, 아니면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별루다.

이름값이 있어서 한두권 더 보긴 하겠지만 다음번 책도 이러면 앞으로는 안볼 것 같다. 

2차세계대전에서 공군의 역할이 어땠고, 어떻게 발전해나갔는지는 좀 알게됐고, 재미있었다 


p19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꿈이 어떻게 빗나간 길을 가게 되는지, 그 사례를 연구한다. 새로운 빛나는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는 우리 무릎 위에 부드럽게 착지하지 못하고 땅에 세게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p35 그는 자신이 신의 위대한, 신의 창조물을 발겨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신은 기꺼이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머리를 신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할 것입니다.

p56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전쟁이나 트라팔가 해전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공군은 내일에 집착한다. 기술을 통해서 공군이 어떻게 내일에 대비할 것인가에 집착한다.

p75 역사학자 타미 비들은 지역폭격을 장기적 시각에서 본다. “저는 폭격의 역사에서 이런 것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표적,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고 있는 장기적인 대량 폭격의 표적이 된 국가들은 결국엔 심한 고통을 흡수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죠”

p82 린더만은 적의 의지를 꺾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이라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린더만에게는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그것이 스노의 강연 요지였다. 이 과학적인 사람, 이 지적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을 만들어내고 왜곡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그 강연의 요지였다.

p117 슈바인푸르트에서의 근본적 문제는 전투 계획의 잘못된 실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조짐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폭격기 마피아 이념의 기계적 초석, 바로 노든 폭격조준기와 관련이 있었다.

p120 그들은 별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에게만은 규칙이 다를 것이라고, 영국인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신들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전장으로 뛰어든 건방진 미국인이었습니다.

p128 이 모든 것을 보고 페스팅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련의 믿음에 많은 것을 투자할수록, 그러니까 그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몰두한다.

p192 핸셀은 본토로 돌아가 애리조나에서 훈련 학교를 운영했다. 그의 전쟁은 끝났다.

p199 나가보니 비행기 바닥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알았죠. 대부분이 그걸 자살 작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p204 헤이우드 핸셀이나 폭격기 마피아 다른 구성원들의 도덕적 비전은 이해하기 쉽다. 양심이 수긍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을까? 이처럼 그들은 그럴듯한 도덕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이 같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다

p222 한참 위에 있는 스팀슨이나 스틸웰 같은 사람들은 르메이가 하려는 일에 대해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르메이가 그해 여름 일본을 상대로 계획하고 실행한 파괴의 규모는 커녕 그 대담성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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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내 방에서 즐기는 이탈리아 미술 여행 Collect 13
김덕선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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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김덕선

 : 동양북스

읽은기간 : 2024/03/14 -2024/04/12


'90일 밤의 ...'는 시리즈인것 같다. 음악도 있고, 미술도 있다.

이 책은 그중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이야기다.

밤에 잠자기 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서 침대 옆에 두고 중간중간 읽었다.

제목의 의도대로라면 한장씩 읽어야겠지만 보통 2-3장씩 읽어갔다.

워낙 좋은 작품들이 많은 이탈리아여서 그런지 소개되는 작품의 수준이 높았고, 아는 작품도 많았다.

미술관에서 설명을 들으면 더 좋았겠지만 책으로나마 사진으로 보니 아쉬움이 좀 달래지기는 했다.

나중에 여행가면 꼭 가서 봐야지 하는 작품이 참 많았다.

이탈리아는 참 복받은 나라인 것 같다. 부럽다..


p41 나는 붓으로 그렸거나 청동으로 구운 라오콘 군상도 여럿 보았는데 그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작품이 제일 낫다. 한 덩어리의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과 ㅎ뱀들이 이들을 휘감아 조이는 놀라운 형상을 재현했다. 로도스 출신 세 족각가 아겐산데르, 폴리도루스, 아테노도루스가 작업한 것이다

p48 바티칸에서 볼 수 있는 마르수피니 대관식은 마사초의 원근법으로 공간의 깊이감이 완벽하게 표현되었고, 배경은 플랑드르 화풍을 따라 세밀학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필리포 리피는 세 패널 상단에 푸른 하늘을 그려 넣어 답답하고 막힌 공간이 아닌 천상의 하늘위에 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p58 이 작품은 벽면에 생석회를 바른 후 젖은 상태에서 스케치와 채색을 마무리하는 프레스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페루지노가 화가로서 돋보인 기술을 밝고 명료한 색감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출신 화가답게 청명한 파란 하늘을 통해 깊이와 평안함을 넣고 지상에는 건축물, 단아한 나무를 수평으로 배치애 좌우 대칭의 안정되고 통일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p6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문학가 로맹 롤랑은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말을 확인해보려면 500년 전의 한 작품 아래 서야 합니다. 왜 작품 앞이 아니라 아래일까요?

p73 이전 화가들은 명암과 원금감을 사용해 정적인 3차원 공간을 표현한 것이 최선이었다면, 그의 첫 프레스코화는 각각의 장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입체감과 현실감이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죠.

p79 헤라클레이토스 왼편에는 이 그림의 유일한 여성,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 히파티아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으로 불리며 신격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율리우스 2세의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림 왼편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맞추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라파엘로 애인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p83 라파엘로는 페루지노 공방에서 일하며 스승과 당대 예술가들의 모든 기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깊이 있는 색채 표현과 우아하고 서정적인 인물 묘사, 원근법을 이용한 균형 있는 공간 구성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죠. 가장 존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까지 연구하며 아테네 학당을 통해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습니다.

p85 이전에 추구하던 깊이 있는 색감을 뛰어넘어 빛과 어둠의 완벽한 대비를 통해 다가올 바로크 사조까지 암시하고 있죠. 즉, 이 그림은 구도, 색채, 운동감까지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모든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93 이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선보인 수학적 규칙을 이용한 웅장한 건축적 배경이나 플랑드르풍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시선을 옮기는 화려한 배경은 지워버리고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 사이로 드러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인물의 내면과 주제가 또렷하게 부각되는 강렬한 인상의 작품을 그려냅니다. 성화 속 인물들도 상상 속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그가 일상에서 만난 하층민들을 모델로 하여 현실적으로 그렸습니다.

p127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의 작품 분위기가 어느 정도 예상되지 않나요?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이라는 평을 받았고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현재 삶이 폭력적이지 그림은 폭력적이지 않다”

p132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고 후원도 끊길지 모르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르게리타는 결국 라파엘로 곁을 떠났죠. 뒤늦게 마르게리타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로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사과의 마음을 담아 라 포르나리나를 그렸습니다.

p139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의 모습에는 눈물이나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얀색 두건을 쓴 소녀에게서 정결함이 느겨집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가 생기가 도는 붉은 입술은 20대 초반 아름다운 여인의 생기를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죠. 억울하고 처연한 모습이 아니라 무력한 현실과 절망을 지나 내면의 자유를 얻어 온화해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더 측은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143 라파엘로는 이러한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안정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역동적인 그림을 표현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각 인물의 움직임과 근육의 표현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고 배운 것입니다.

p160 청년이 된 바쿠스는 술에 취해 각지를 떠돌아다녔고, 사람들에게 포도 농사와 포도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며 수확물을 통해 축제를 즐기고 자신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그를 섬기며 벌인 축제는 유명했습니다.

p191 마에스타는 금빛 배경 중앙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가 정면을 응시하며 옥좌에 앉아 있는 구성으로 그려졌습니다.

p193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가 피렌체를 누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도시를 성모에게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로 시에나는 마에스타를 주문했고 시에나의 성직자와 시민들은 그림을 들고 전쟁에서 승리한 도시를 행진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타가 처음 탄생한 곳을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로 보고 있습니다.

p203 필리포는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수도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늘 추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코시모가 메디치궁으로 그를 데려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조차 견디지 못하고 침대보를 잘라 밧줄로 만들어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속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창문으로 도망친 수도사라니, 상상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려지지 않나요?

p215 그림을 정면이 아닌 좌우로 이동하며 살펴보던 학자들은 몸을 숙여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다가 이내 무릎을 탁 쳤습니다. 다빈치는 그림이 성당 제의실 오른쪽 벽위에 걸릴 것을 고려해 그린 것입니다. 오른쪽 하단에서 그림을 올려다보면 마리아의 오른팔 길이가 현실적으로 보이고 사물의 비율이 한 시선으로 제자리를 찾아간 듯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p238 이 그림은 르네상스 최초의 나체화로 매번 회자되곤 합니다. 당시 보수적인 기독교 사회에서 나체의 비너스를 그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피렌체에서는 기독교를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결합하고자 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연구되던 중이었습니다. 보티첼리 또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던 인문학자들과 자주 교류했습니다.

p271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짐을 벗어 던지고 개인의 기교와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진정한 예술을 찾고자 노력한 파르미자니노. 300년이 지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품은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p281 신화 속 메두사는 여자인데 남자의 얼굴로 그린 것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표방한 것은 사실주의, 즉 그림 속 내용과 사건이 눈앞에서 일어난 듯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p287 아르테미시아의 초상화를 보면 유디트와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그녀를 능욕한 아고스티노 타시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p305 이전 조각가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마저 손대지 못한 대리석 토막을 그가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던 겁니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작업에 방해되어 혼자 작업하는 내내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칸막이를 쳐 구경꾼들이 볼 수 없게 했다고 합니다.

p322 어떤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조소라고 합니다. 조소는 조각과 소조로 나뉘는데,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깎아 만드는 반면, 소조는 찰흙과 같이 부드러운 재료를 안에서 밖으로 붙여가며 만듭니다.

p338 피렌체 화가들이 수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선명한 선을 스케치해 원근법을 표현했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선보다 색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p385 창작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는 사회가 변화했음을 알려주는 기준이 되기도 하죠. 성경에 등장하는 주제와 인물만 그리던 종교 중심 시대에 정물화는 대외무역으로 빠르게 부자가 된 새로운 사회 계층을 만족시킨 최고의 문화 상품이 되었습니다. 16-17세기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p391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눈앞에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피에타를 보며 성모 마리아에게 안긴 죽은 그리스도가 곧 부활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희망과 위로를 얻었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주제의 숭고함으로 많은 예술가의 손끝에서 피에타가 완성되었습니다.

p392 미켈란젤로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더 독실해지면서 창조의 영역은 곧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창조물은 한낱 베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강해집니다.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떠한 것도 완벽하게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여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긴 미켈란젤로는 가시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 의미보다는 미완성 작품을 통해 형체의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p407 당시 이러한 기법이 얼마나 혁신적이었을까요? 그가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캔버스를 찢어 구명을 뚫는 데도 10년이 걸렸다라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시도는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p432 그는 티치아노처럼 분위기 묘사, 질감, 색채가 뛰어났고, 특히 풍요롭고 화려한 잔치모습을 틴토레토처럼 극적으로 생생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규모가 큰 작품 주문을 많이 받았고 그 덕에 남겨놓은 작품도 많습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는 베네치아의 3대화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p473 당시 로마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 작품을 모각 혹은 복제해 로마의 도로, 광장, 목욕탕 등 다양한 곳에 전시했는데, 헬레니즘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한 로마의 정치가 포르키우스 카토는 그 모습을 보고 “로마에게 정복당한 그리스가 도리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리스 청동 조각의 진품은 볼 수 없어도 로마인들의 복제품 덕분에 현재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예술품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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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평전 - 음악, 사랑, 자유에 바치다
이채훈 지음 / 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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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차르트 평전

 : 이채훈

 : 혜다

읽은기간 : 2024/03/05 -2024/04/15


보통 이런 유명 작곡가 평전은 외국인이 쓴 번역된 책들이 많은데 특이하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다. 더구나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방송국PD다.

책이 벽돌책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다보니 읽는데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것 치고는 책은 괘 술술 넘어간다. 

방송국 PD답게 책의 짜임새가 꽤 탄탄하다. 

레퍼런스가 많지만 어느정도 취사선택을 해서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부분이 약간 아쉽다. 내가 모차르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을 더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아쉬움은 별로 없었을텐데... 알고 있는 지식이 짧은 내 탓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일생을 책으로 배운다는 건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꼭 해볼만한 작업이다. 

천재라고 해서 머리속에서 막 악상을 끄집어 낸 건 아니다. 모차르트도 바흐를 연구하고, 하이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점점 발전시켜 나갔다. 음악이 세련되어지고 깊이가 있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책은 여러번 읽고 다른 평전도 읽어가면서 더 배워야 한다. 

이런 천재와 천재의 음악을 모르고 죽는다는 건 인생에서 의미가 없다. 


p16 그는 “내가 쉽게 곡을 쓴다고 생각하면 오해”라며 “고금의 중요한 작곡가 중 내가 철저히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p17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페루초 부소니는 말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류 작곡가, 소수의 일류 작곡가, 극소수의 위대한 작곡가, 그리고 모차르트가 있다”

p27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태어났다.

p33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의 음악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는 점이다 1762년 3월 4일 작곡한 알레그로 B플렛 장조 K3, 5월 11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4, 7월 5일 작곡한 메뉴엣 F장조 K5등 하나하나가 이전 작품보다 뛰어나다.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정을 보는 듯하다

p35 이렇게 어렵게 완성된 네크롤로그는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1798년 프란츠 자버 니메첵은 이를 자신이 쓴 최초의 모차르트 전기에 통째로 인용했고 이 내용은 오늘날 거의 모든 모차르트 전기에 등장한다.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네크롤로그 집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거부했는지는 알 수 없다

p38 그는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기를 싫어한 반면, 마음으로 음악을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는 몇 시간이고 기꺼이 연주해 주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음악을 사랑한ㄷ”고 거짓말로라도 설득해야 그의 연주를 청해 들을 수 있었다

p45 그는 1790년 형에게 황제 지위를 이어받은 뒤 모차르트를 싸늘하게 외면한다. 이 절대 권력자들은 모차르트의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모차르트 인생에 굴절을 일으키고 생존 조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p68 조지3세는 미국독립전쟁 내내 식민지 민중에게 폭군, 압제자 소리를 들었고,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으며 온갖 기행을 저지른 왕이다. 그의 독특한 행로를 묘사한 조지왕의 광기라는 코미디 영화도 있다. 왕은 훗날 요제프 하이든을 런던에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p79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는 절망에 빠졌다. 그들은 난네를에게 세상이 덧없음과 어려서 죽는 행복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그 시절, 부모들은 비참하게 고생하며 살기보다 일찍 죽는게 낫다며 자위하곤 했다. 난네를은 10월 21일 종부성사까지 받았지만, 카롤리네 공비가 보내준 의사 토마스 ㅅ퓨벵케가 처방한 약을 먹고 2주 만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p92 레오폴트는 올뮈츠 주임신부인 포트 슈타츠키 백작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볼프강이 천연두에 걸린 듯하니 제발 선처를 부탁합니다” 천만다행, 백작은 모차르트 가족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친절을 베푼 것이다.

p95 레오폴트 씨는 자식 교육을 참 잘했더군됴요. 특히 아들은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고, 활기 넘치면서도 예의가 바른, 한번 보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였어요. 잘 자라면 정말 뛰어난 음악가가 될 겁니다. 하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음악 교사로 나폴리와 베네치아, 드레스덴과 빈 궁정에서 일하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p104 이 오페라가 일으킨 소동은 큰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 모라츠트 가족에게 친절하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사건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 레오폴트가 빈 궁정음악가들과 충돌하고 탄원서까지 제출함으로써 궁정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본 게 분명하다.

p122 바이올린 신동으로 꼽히던 이 소년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고 키도 똑같았다. 두 소년은 만나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모차르트는 그때까지 또래 어린이와 사귀며 어울려 놀 기회가 없었다. 린리도 마찬가지였다. 음악 신동으로 화려하게 살았지만 평범한 어린 시절을 빼앗긴 두 소년의 우정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p123 토마스 린리는 20여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극음악 세익스피어 찬가, 오라토리오 모세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렸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스물두 살 되던 1778년 8월 5일 보트사고로 갑가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p145 11월 23일과 24일 밀라노에서 연주된 K.113은 모차르트의 관현악곡 중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한 곡이다 .그때까지 잘츠부르크 궁정 악단에는 클라리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클라리넷의 음색을 좋아했다.

p150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는 미사 중 크레도 다음에 대주교가 복음서의 한 대목을 읽으면 오케스트라가 교회 소나타를 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위해 작곡한 교회 소나타는 모두 열일곱 곡으로 교향곡을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p156 루치오 실라가 공연되는 동안 모차르트는 라우치니에게 부탁받은 모테트 F장조 기뻐하라, 환호하라 K165를 작곡했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가운데 레퀴엠 D단조, 대미사 C단조, 아베 베룸 코르푸스와 함께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p169 모차르트의 이 G단조 교향곡은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모차르트의 반항심이 자유를 추구하는 시대정신과 만나서 빚어낸 절규가 아닐까? 음악학자 헤르만 아베르트는 이 곡을 그동안 모차르트 안에서 몇번씩 불타오르던 정열적이고 염세적인 기분이 가장 격하게 표현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p176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는 어린이가 치기엔 너무 쉽지만 전문 피아니스트가 치기엔 너무 어렵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어색하게 연주하면 바로 표시가 날 뿐 아니라, 모차르트 특유의 단순한 진행을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의미다

p201 이 자리에서 모차르트는 루바토 기법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네테가 연주할 때 놓치는 것은, 아다지오의 루바토에서도 왼손은 템포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주할 때 왼손이 오른손을 엉거주춤 따라가선 안돼요. 모차르트는 오른손이 감정을 담아서 노래할 때도 왼손은 정확하게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원칙은 루바토 기법에 대한 쇼팽의 소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p204 모차르트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썼으나 고상한 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p219 포글러는 만하임에서 공연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루치오 실라를 혹평해서 모차르트를 화나게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평범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건방지게 구는 사람을 혐오했고, 그런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경멸을 드러내고 직설적으로 비판해서 본의 아니게 적을 만들곤 했다

p233 공작이 들어와 음악에 진지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 해프닝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상처가 됐다. 그러지 않아도 프랑스 사람들의 음악 취향과 언어에 거부감이 있던 모차르트는 이 일로 프랑스 혐오가 더 깊어졌다

p251 모차르트는 매우 품성이 착하고, 쉽게 사람들을 믿습니다. 커리어를 만드는 데는 너무 무관심하죠. 이곳에서 인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약삭빠르고, 주도면밀하고, 대담해야 합니다. 성공하려면 그의 재능 절반이면 충분하지만, 처세술은 지금보다 두 배가 필요해요

p264 265 놀라운 것은, E플렛 장조로 된 곡인데 비올라 솔로 파트가 D장조로 기보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올라를 반음 높게 조율해서 D장조로 연주하면 결국 E플렛 장조가 된다. 비올라의 음색은 은은하고 내성적이지만 이렇게 현을 팽팽하게 조율하면 더 선명하고 밝은 음색을 얻을 수 있다. 선율과 화음 뿐 아니라 음색까지 창조재 낸 모차르트의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p270 졸리만처럼 사후에 잔인하게 모욕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계몽군주 요제프 2세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나 1796년 그가 사망할 때는 황제 프란츠 2세가 지배하는 반동의 시대였다. 황제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공개 선언하기 위해 졸리만의 시신을 이용했다. 조각가 프란츠 탈러가 박제한 그의 시신은 희귀한 중남미 짐승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전시됐다. 유족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1848년 빈의 폭격으로 박물관이 불팠을 때 이 수치스런 인종차별의 증거도 사라졌다.

p308 신분사회를 비판한 그의 오페라는 황제의 계몽 정치와 잘 어울렸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황제의 개혁으로 기득권을 위협받은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황제의 푸들 정도로 여기며 미워했다. 요제프 2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못했지만, 1790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빈의 귀족들은 일제히 모차르트에게 등을 돌린다.

p313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IQ가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ㅇ낳고,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 기도를 하니 머릿속의 핏덩어리가 사라졌고” “천사가 자기를 도왔다”고 횡설수설했다. 돈 캠벨은 미국 전역은 물론 일본과 한국까지 찾아와 모차르트 효과에 대해 강연을 하고 책을 팔았다. 모차르트를 팔아서 잇속을 챙긴 사기나 다름없었다.

p320 클레멘티는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연주했고, 과거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기교를 선보였다. 그러나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준 것은 모차르트였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의 연주에 열광했다 “그때까지, 이렇게 영감에 가득찬 우아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특히 아다지오에 압도됐지요. 황제가 골라준 주제에 번갈아 변주를 붙여서 즉흥연주를 했는데, 그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모차르트의 반응은 까칠했다.

p351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사랑을 받았지만 음악사에서 가장 미움받은 여자”가 됐다. 전기 작가들은 대체로 콘스탄체를 인색하게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가난에 책임이 있고, 남편의 장례를 엉망으로 치러서 시신이 실종되게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p363 빈에서 쓴 첫 피아노 협주곡(F장도 K 413, A장조 K414, C장도 K415)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곡들은 너무 어렵지도 않고 너무 쉽지도 않게, 매우 화려해서 귀로 듣기에 즐겁지만, 그렇다고 공허하지 않게 작곡했어요. 전문가만 만족할 만한 대목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아마추어들도 이유를 모르면서 좋아할 곡입니다”

p368 왜 모차르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그의 위대한 재능과 다정다감한 성품을 그때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죠. 엄청나게 후회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레아 징어의 소설 벌거벗은 삶에는 “결혼한 뒤에도 모차르트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여전히 사랑하는 것 같다”고 콘스탄체가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연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이야기다

p377 하이든에게 바친 여섯 곡의 현악사중주곡 중 두 번째 곡 D단조 K421의 메뉴엣이다. 영국의 음악사가 빈센트 노벨로는 1829년 잘츠부르크에서 콘스탄체를 만난 뒤 이렇게 써다. “그녀는 자기가 첫아이를 낳으며 진통을 할 때 모차르트가 D단조 사중주곡을 쓰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특히 메뉴엣을 우리에게 노래까지 해주며, 이 대목이 바로 진통을 들으며 쓴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절규하는 메뉴엣의 주제는 고통스런 출산의 비명, 아니, 아내 콘스탄체의 고통을 함께 하는 모차르트의 마음이었다. 부드럽고 맑은 중간 부분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다

p384 11월 4일 화요일, 린츠 극장에서 예약 연주회가 열렸다. “교향곡을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새 교향곡을 써야 해요.” 닷새 만에 완성한 교향곡 C장조 린츠 K425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얘기할 때마다 늘 언급되는 바로 그 곡이다

p414 잘츠부르크에서 빈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새롭게 출발했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9시까지 작곡을 하고, 오후 1시까지 레슨을 했다. 식사 초대가 없는 날은 오후 2-3시경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작곡을 더 했다. 저녁에는 연주를 하거나 밤 9시까지 작곡을 했고, 급한 일거리가 생기면 새벽 1시까지 작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은 어김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났다

p418 모차르트의 연주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리히터가 한탄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아무리 열심히 땀흘려 연습해도 쩔쩔매는데, 당신은 애들 노래를 연주하듯 쉽게 하는군요!” 모차르트가 답했다. “저도 열심히 연습을 했지요. 더 연습을 않아도 될 만큼 열심히 했단 말입니다.” 모차르트가 누구보다 부지런히 연습한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p421 피아노 파트를 미처 쓰지 못했고, 리허설을 할 시간도 없었기 대문에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파트만 써주고 피아노는 악보 없이 즉흥으로 연주했다. 요제프 2세가 어리둥절해서 “자네 파트 악보는 어디 있는가?” 묻자 모차르트는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p427 난네를은 조넨부르크 남작과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1801년 남편이 사망한 뒤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p431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와 파파게노가 겪는 침묵과 죽음의 시련은 바로 이 프리메이슨 입문 의례를 묘사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권력자들은 메멘토 모리라는 말로 늘 죽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프리메이슨 의례는 모든 사라미 죽는다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덧없는 욕망과 집착으 버리고 순수한 자아를 찾는 방편이었다.

p434 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를 추적한 캐서린 톰슨은 열두 살 모차르트가 빈을 방문했을 때 메스머 박사를 통해 프리메이슨을 처음 접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프리메이슨 회원인 메스머 박사가 어린 모차르트에게 장 자크 루소의 사상과 프리메이슨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p443 모차르트는 그해 1월 14일 사중주곡 C장도 K465를 완성한 직후 “나는 현악사중주곡 쓰는 법을 하이든에게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모차르트는 공들여 쓴 이 곡들에 대해 선배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었고, 하이든은 익히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이든은 러시아 사중주곡을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양식으로 작곡했다.

p448 모차르트 음악은 하이든과 비교해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1786년 빈을 방문하고 있던 디터스도르프는 황제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다. 황제가 “하이든 음악은 한 번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반면 모차르트 음악은 여러 번 들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디터스도르프는 화답했다. “제 의견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p452 레오폴트는 이날 연주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을까? 비밀은 아름다운 안단테에 있다. 피아노 독주자가 연주하는 둘째 주제 마무리 대목의 왼손 파트가 아버지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의 느린 악장 왼손 파트와 똑같았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이 아름다운 안단테를 아버지에게 바치며 그의 작품 중 한 대목을 인용하여 오마주를 표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p463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을 간직하는 거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존업성이라는 사실.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우리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인 중세 신분사회의 벽. 그 어둠 속에서도 모차르트는 자유와 평등의 꿈을 잃지 않았고, 이에 따르는 대가를 마다하지 않았다.

p467 초견연주와 짝을 이루는 것이 즉흥연주라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청중의 갈채에 즉흥연주로 보답하곤 했다. 덴마크 배우 요아힘 다니엘 프라이저는 1787년 1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렇게 썼다. 이 자그마한 인간, 위대한 거장은 두 번의 즉흥연주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했다. 가장 어려운 패시지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한 멋진 연주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p478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였기에 피가로의 결혼을 승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절대군주였기에 이토록 파격적인 결정이 가능했다. 피가로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빈 궁정의 수많은 귀족 중 단 한사람도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p486 베토벤은 피아니스트 존 크라머가 연주한 이 곡을 듣고 나같은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곡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음악학자들이 “베토벤의 협주곡 3번 C단조는 모차르트의 이 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지적한다

p487 오페라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됐으니 피아노 협주곡은 대중들의 취향보다 자기 내면의 충동에 따라 작곡하게 됐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로서는 3-4년 동안이나 빈 청중의 비위를 맞췄으니 오래 참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496 스페인 작곡가 마르틴 이 솔레르는 러시아로 가는 길에 빈에 들러서 희귀한 일을 공연했는데, 1786년 11월 7일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이듬해 봄 시즌까지 무려 78회나 공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희귀한 일이 오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을 압도한 것이다.

p508 모차르트가 방문한 프라하는 여전히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차별받는 도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와 같은 도시가 바로 프라하였던 것이다.

p514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다소 구식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직접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연주한 반면, 베토벤은 소나타 월광의 피날레나 소나타 열정에서 보듯 피아노 줄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법을 구사했다. 피아노 음악은 빠르게 발전했고, 열네 살이라는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세대 차를 의미했다.

p526 빈에 도착한 뒤 거의 매일 저를 진료해줘요. 이렇게 충실했던 바리자니가 1787년 9월 3일,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모차르트 앨범에 짧은 글을 남겼다. “그대의 친구를 잊지 말아주오. 세상의 즐거움인 그대를 두 차례 치료해서 더 살 수 있게 해드린 것은 저의 자랑이자 행복이지요” 모차르트는 바리자니의 글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오늘 9월 3일, 내 목숨을 구해 준 이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바리자니가 오래 살았다면

모차르트도 좀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p534 19세기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한 챕터를 할애해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예찬했다. 돈 조반니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사랑의 천재이자 실존의 영웅이다. 그의 행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그의 에너지는 고갈될 줄 모르며, 그의 의지력은 평범한 인간의 한계 저편에 있다. 여주인공들은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책임으로 사랑과 실존을 직면했을 뿐이다.

p538 이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음악의 세계에 공포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기사장이 돈 조반니를 심판하려고 등장하는 순간 트럼본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모차르트는 이 트럼본을 합창석 높은 곳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빈에서는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다.

p548 그는 소탈했고, 때로 광대처럼 행동했기에 외모나 행동에서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은 “에로틱한 것에서, 비극적인 것에서 결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진정한 위대성의 조건으로 보았다. 모차르트는 위대성을 밖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은 그 시대에도, 그 자신에게도 감춰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그는 너무나 비밀스럽게 위대했기 대문에 그의 시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자신은 더 몰랐다”

p551 그는 제국이 잠자고 있을 때 황제는 깨어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면했다. 하지만 그는 귀족과 사제들의 기득권을 축소했기 대문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 불만 세력을 잘 다독이지 못했다. 개혁 과정에서 대중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특히 장례 제도 개혁처럼 전통과 관습을 거스르는 조치는 커다란 반발에 부딪쳤다

p565 그 해 여름 작곡한 마지막 세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기악곡 중 최고 걸작이다. 세상을 초월한 듯 행복으로 빛나는 39번 E플렛장조, 아름다움과 슬픔의 고귀한 결정체인 40번 G단조, 당당하고 위엄 있는 41번 C장조 주피터. 이 세 곡을 삼형제별처럼 나란히 빛나며 교향곡의 역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룬다.

p568 모차르트는 관습의 경계를 넘어서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그 법칙들을 완성하려 했지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의 독창적 어법과 개성 있는 예술이 그 시대의 기준이자 특징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모차르트는 한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서 있었기에 베토벤보다 더 먼 미래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p571 야상곡 창시자로 유명한 아일랜드 피아니스트 존 필드는 한 연주회에서 그의 즉흥연주를 듣고 “이건 악마 아니면 훔멜이야”라고 외치기도 했다. 훔멜은 전성기 때 베토벤과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고, 협주곡 여덟 곡과 소나타 열 곡 등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해서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1830년대에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낡은 음악가로 취급된다.

p584 모차르트는 이 노력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도움이 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796년, 콘스탄체는 라이프치히에 레퀴엠 악보를 갖고 와서 공연했다. 이때 라이프치히의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에게 후한 사례를 했고, 라이프치히의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는 모차르트 전집 출판을 그녀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p587 왕은 모차르트의 솔직한 태도가 맘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일해 보시지 않겠소? 그대 말대로 악단이 개선되는지 한번 보고 싶소. 1년에 3,000탈러를 드리겠소. 모차르트는 제가 모시고 있는 황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말에 감동한 왕은 한참 침묵한 뒤 덧붙였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시오. 나중에라도 약속은 지키겠소. 왕은 이 일화를 여러 사람에게 얘기했고, 모차르트 사후 베를린에 온 콘스탄체에게도 말해 주었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전남편도 똑같이 말했다.

p598 그는 이 악기 소리를 듣자마자 매혹되어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아, 우리에게도 클라리넷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이 있는 오케스트라의 빛난느 효과를 아버지는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사랑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을 표현하는 클라리넷은 그 후 모차르트가 따뜻한 감정을 노래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 오중주곡은 균형잡힌 선율, 기품있는 형식, 우수에 찬 달콤한 울림이 가득한 주옥같은 작품이다.

p605 오페라의 주제는 여자는 정조 관념이 없다가 아니라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피와 살로 된 인간이라는 단순한 진리로 재조명되었다.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난 후에야 현실의 사랑이 시작되며, 끊임없이 나누고 존중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결혼 생황레서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613 모차르트는 황후 마리아 루이사가 자기에게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해 여름, 황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여자는 다 그래를 혼자 관람했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그녀에겐 두 편 모두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황후는 모차르트처럼 자유사상가이자 제멋대로인 음악가에게 자녀의 교육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p624 그가 영국에 갔다면 어쩌면 이듬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연 기획자 요한 페터 잘로몬에게 비슷한 제안을 받은 하이든은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아내와 별거중이라서 홀가분하게 영국행을 결단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늘 콘스탄체와 의논했고, 그녀의 반대에 부딪쳐서 주저앉은 것으로 보인다.

p633 모차르트는 춤곡을 판매하고 받은 영수증 위에 이렇게 썼다. “내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 큰 돈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일이다”

p647 모차르트는 아내 없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콘스탄체에게 보낸 편지는 보고 싶다는 말뿐이다. “내 유일한 소망은 일을 빨리 처리하고 당신 곁에 있는 거야. 이토록 오랜 시간 당신만을 그리워하며 지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p660 오페라를 준비할 때 늘 그러했듯 마술피리도 초연 이틀 전에야 완성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과로로 앓았던 게 분명하지만 마술피리 초연 무렵에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p669 카를은 그날 아버지의 오페라를 처음 보았다. “카를은 오페라에 가는 걸 아주 즐거워했어요. 참 멋지게 생긴 아이지!” 콘스탄체가 바덴에서 요양할 때 늘 그녀를 따라갔던 카를은 이제 일곱 살이 지나 학교에 가야 했기에 모차르트와 함께 빈에 남았다. 카를은 마술피리 작곡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새잡이 파파게노의 아리아 정도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를에게 이날 오페라 관람은 평생 추억이 됐을 것이다.

p672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자전적 오페라로 인식됐다. 첫 장면, 괴물에게 쫓기는 타미노의 모습부터 모차르트의 힘든 처지를 뜻하는 걸로 보였다. 벨기에의 작가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어린이로 돌아갔다고 보았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겨뤄야 했다. 그에겐 어린 시절이 없었다. 서른다섯 살의 짧은 삶을 마감할 즈음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모차르트는 목소리와 오케스트라로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p673 타미노처럼 고고한 것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자, 고귀한 인간성의 이상으로 넘치는 자였다. 동시에 그는 (파파게노처럼) 유쾌하고 천진한 젊은이, 세속적인 향락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젊은이였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거는 타미노, 음식과 와인과 사랑만 있으면 만족하는 파파게노, 두 사람을 합치면 모차르트가 된다는 것이다.

p687 1791년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쓴 과정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7월 하순(날짜 미상) <레퀴엠> 의뢰받음, <황제 티토의 자비> 작곡 및 프라하 여행. 9월 17일 프라하에서 빈으로 귀환, 9월 30일로 예정된 마술피리 초연에 집중 10월 중순(날짜 미상) 안톤 슈타틀러를 위한 클라리넷 협주곡 완성 10월 중순(날짜 미상) <레퀴엠> 본격 착수 11월 중순(날짜 미상) 프리메이슨 칸타타 작곡 위해 <레퀴엠> 잠시 중다 12월 5일 <레퀴엠>,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 작곡하고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망

p693 집에 도착한 그는 차가운 물수건을 달라고 하더니 모차르트의 펄펄 끓는 이마 위에 얹었어요. 하지만 열은 떵저지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사망할 때까지 그 상태로 있었어요. 레퀴엠의 팀파니 음률을 입으로 웅얼거린 게 형부의 마지막 동작이었어요. 지금도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p696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하며 쥐스마이어가 쓰기에 버거운 대목들을 아픈 몸으로 직접 썼다. 지금도 레뮈엠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라크리모사 8마디까지만 듣는 사람이 적지 않다.

p706 콘스탄체와 카를 토마스의 증언을 보면 모차르트 유족들은 독살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p723 영국 사람들은 독일 출신인 헨델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히 모셨다. 이 나라에서는 모차르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통탄할 일이다. 우리 스치스런 역사에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모차르트여! 그대가 아끼던 찌르레기가 죽었을 때 그대는 셋집 정원에 묘비를 세워주고 직접 애도의 시를 쓰셨지요. 그대가 새를 추모하듯 누군가 당신을 추모할 날은 언제일까요?

p727 모차르트 음악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슬픔의 흔적을 머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슬픈 대목은 일정한 희망의 빛을 담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모차르트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성의 단서가 된다

p734 모차르트는 한때 큰 도시의 궁정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모차르트 가족은 죽은 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 페터 수도원,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멀리 파리의 생 의스타슈 성당에 잠들어 있다. 콘스탄체의 묘는 장크트 제바스티안 성당, 시아버지 레오폴트의 묘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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