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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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 마틴 푸크너

 : 어크로스

읽은기간 : 2024/05/20 -2024/06/02


세계사를 통사로 보여주는 책들은 많다.. 

최근들어는 옥스포드 세계사나 녹색세계사, 대세 세계사처럼 각론으로 가기보다는 컨셉을 잡아 세계사를 읽도록 하는 책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 같다. 

이 책은 컬처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써내려가는데 도서관이 중심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여러 문화의 혼합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문화의 원조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안니라고 주장한다. 

문화라는 것이 결국 혼합되고 개선되는 것이지 최초라는 것이 후대에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문화의 도서관과 문자에 대한 문화전파에 대해서 다양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에 BTS나 싸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베스트셀러에 한류문화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반갑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문화가 이정도로 연구대상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한 국가 지도자 빼고는 다 좋아지고 있다.. 


p18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굴 속 그림과 상징,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다른 관습으로 발전했다. 노하우가 늘어나면서 인간은 거주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중 일부는 피난처로 사용했지만 일부는 의식을 행하고(사원과 교회), 공연을 하고(극장과 공연장), 이야기를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방문했다

p55 다른 문화를 차용하는 방식의 중요성은 과거를 차용하는 방식, 즉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은 왕의 계보에서, 조각상에서, 다른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어 거의 잊혔다.

p57 수많은 유럽인 이집트 학자들은 식민국의 힘을 이용해 발굴한 유물을 도굴꾼처럼 유럽 박물관으로 보내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고, 보존을 위해서였노라고 정당화했다.

p84 미래와 대화하고 싶은 모든 이를 위한 교훈이 있으니 내구성이 좋은 재료로 관심을 끌만한 것을 만들어라. 그러면 미래의 통치자들이 그것을 보존할 테고 후대가 그 기원과 역사에 호기심을 가질 것이다.

p108 폼페이가 마치 타입캡슐처럼 제공하는 단면이 너무나 이례적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폼페이 선입관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서기 79년 로마의 일상에 대해서 아는 것 대부분이 이 지방 도시 하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폼페이만 보고 로마 제국 전체를 추론할 경우 오도의 가능성이 있다.

p121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를 선택함으로써 귀종한 것을 얻었다. 바로 그리스와의 거리감이었다. 그는 로마의 선사 시대를 그리스 선사 시대에 봉합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짜임에 새로운 실을, 그리스와 관계없이 트로이와 로마를 연결하는 실을 엮어 넣어 승자인 그리스를 로마 건국이라는 드라마의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p133 문화 이동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힘, 즉 수입된 문화의 머나먼 기원에 대한 유혹이 현장을 인도로 이끌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문화에 매료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아는 것이 진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단편적이고 걸러진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p142 오늘날에도 표지에서 번역가 이름이 빠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치 우리는 항상 원본에 접근할 수 있으며, 책은 개개인의 천재가 만드는 것이고, 문화 매개자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믿고 싶어하는듯하다. 우리는 번역가 덕분에 다양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때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가의 노고에 모든 문화가 의지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도는 더욱 놀랍다.

p151 무엇보다도 시는 사교의 일환이었다. 종종 사람을 통해 특정 상대에게 시를 보냈는데 이때 받은 사람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답해야 했다. 중국 고전 시를 교묘하게 암시하거나 인용한 다음 그 시를 살짝 비트는 짧은 구절을 덧붙여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하는 기술이었다

p160 엔닌으로서는 불교 예술 파괴가 가장 안타까웠다. 그들은 불상에서 금을 벗겨내고 동과 철로 만든 불상을 부수어 무게를 달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 땅의 청동불, 철불, 금불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p168 그런 주장은 편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차용되고 옮겨지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무언가 본래 어디에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울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p175 세계 최초의 도서관 중 하나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니네베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한 바그다드에 과거의 문서 기록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야신 찬 궁전 도서관 지혜의 창고가 포함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179 바그다드 학자들은 멀리서 온 지식을 추구하면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했다는 유명한 말을 따르고 있었다. “멀리 중국에서 왔을지라도 지식을 추구하라. 지식 추구는 모든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이다”

p214 에티오피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때로 잡탕이나 온갖 관슴이 섞인 잡동사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고대 에피오피아처럼 문화 전이와 융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로 보아야 한다.

p222 샤를마뉴가 추진했던 문화 부흥 프로그램에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너무나 중요한 움직임이었기에 지금도 종종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린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재탄생이라기보다 자신의 왕국을 로마 제국의 역사와 연관시키려는 샤를마뉴의 전략적 결정에 가깝다

p240 교황은 대대로 이 문서를 이용해서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로렌초 발라 사제 등문헌학에 통달한 사람들에게는 이 문서가 수상쩍어 보였다. 그래서 발라 사제는 증여 문서를 엄밀하게 분석했고, 그의 추론을 이해할 수있는 사람들에게 해당 문서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가 아니라 그 몇백 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p253 이야기를 두고 싸웠다는 것은 아즈텍족이 과거를 지울 뿐 아니라 다시 쓰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아즈텍족은 옛 문명의 책을 태우는 대신 새로운 책을, 그들의 역법(읽는다는 단어에 게산하는 뜻도 있다)과 그들의 신, 그들의 신화, 그들의 역사를 적은 책을 만들었다.

p263 뒤러가 문화적 맥락이 완전히 제거된 이 물건들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고도로 발달된 장인의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 자신의 무지에 대한 겸손함이었다. 따라서 그는 고귀한 야만인이니 피에 굶주린 식인종이니 하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진부한 표현에 휘둘리지 않고 이렇게 멋진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유럽의 일류 예술가가 드물게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메소아메리카의 고도로 발전된 예술과 상호적응하며 그 진가를 알아보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p269 이러한 설명은 아즈텍족이 몰락하기 전에 역법과 역사, 신화를 기록하던 복잡한 그림 부호로 쓴 책들과 전혀 달랐다. 복잡한 쓰기와 읽기 지식은 차츰 잊혔고, 아즈텍의 책은 대부분 불에 타거나 사라졌다. 테노치티틀란이 파괴되면서 극소수의 책만 남았다.

p272 우리는 아주 먼 과거의 물건이 아니더라도 원본을 도서관과 미술관에 보존하는 일에 계속해서 상당한 자원을 쓴다. 대량생산이 쉬워지고 널리 퍼질수록 원본은 더욱 귀중해지는 듯하다.

p291 우스 루지아다스는 수많은 선원이 앓다가 죽기도 하는 괴혈병을 포함해 긴 항해의 세세한 일상을 언급한 최초의 서사시다. 선원들은 몰랐지만 괴혈병의 원인은 비타민C 결핍으로,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항해하면서 신선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발병했다. 괴혈병은 피로, 메스꺼움, 설사, 발열로 시작해서 잇몸 부종으로 이어졌는데 카몽이스는 이 모든 과정을 서사시에 담았다.

p300 우스 루지아다스가 포르투갈 제국의 몰락에서 어떤 역할을 했든 이 작품은 의미 만들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와 폭력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학의 힘을 이용해 독자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인쇄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p314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상 역시 의도하지 않았거나 희미학만 인식하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자연권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서 자연권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여성과 노예에게 적용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p320 마담 조프랭은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보수적 견해를 가졌으나 당시의 가장 급진적 사상가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그녀의 살롱은 자유로운 사상의 요새로 알려졌다.

p325 노예 제도가 잔인한 것은, 노예 감독과 주인이 비인간적이라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가 한 집단의 착취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었다.

p327 신속한 군사적 해결이 불가능해지자 나폴레옹은 외교적 방법을 시도하며 루베르튀르에게 안전을 약속할테니 프랑스에 오라고 제안했다. 루베르튀르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나폴레옹은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체포했다. 루베르튀르는 1803년에 프랑스 동부 포르 드 주에 갇힌 채 사망했다.

p336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으므로 슐리만은 고고학자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곳곳을 파내느라 고대 유적지 대부분을 파괴했고,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여기에 슐리만 참호라는 씁쓸한 이름을 붙였다.

p371 두 항구를 통해 온갖 상품이 수출되어 일본 제품에 대한 서양이 관심을 충족시켰다. 그중에서도 다색판화가 무척 눈길을 끌었다. 우아한 구도와 눈에 띄는 색상, 독특한 주제가 서양인의 눈에는 전형적 일본 양식으로 보였다.

p376 페놀로사의 위치는 무척 모호했다. 일본 전통예술의 저평가를 초래하는 외국 사상 유입에 일조했고 밤에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그러한 저평가에서 이익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미술관을 지었으며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을 일본 예술에 적용하여 그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본에서 존경을 받았다.

p411 소잉카와 말을 들어라 이 둘은 문화가 순수할 때보다 혼합되었을 때, 혼자 갇혀 있기보다 문화적 형태를 차용할 때 번성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p421 우리는 국부 펀드가 뒷받침하는 가장 안정적 민주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멋진 도서관을 새로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환경 변화의 산물인 아주 작은 바이러스가 여행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중단시킬 수 있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고 문화란 기껏해야 세대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수선해야 하는 끊어진 사슬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p426 이 뮤직비디오는 천연덕스러움, 유쾌하게 활용한 저속함, 엉뚱한 장소에서 커피를 마시는 광경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흔드는 남성의 다리 사이에 엎드린 싸이의 모습 등 재미있는 세트 장면들 덕분에 유튜브 최초로 10억 뷰를 돌파했다.

p426 한류가 이토록 많은 청중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록, 재즈, 레게, 아프로비트 등이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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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 서울편 3 - 사대문 안동네 : 내 고향 서울 이야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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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4/21 -2024/05/27


11권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12권을 먼저 읽고 11권을 후에 읽었다

어떤 책을 먼저 읽는다 한들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11권은 서울 한복판 이야기다.. 

11권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어릴 때 아빠따라 다니던 골목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겨우면서 그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한국사 검정시험을 볼 때 현대사 문제를 보면 '내가 이때 뭐하고 있었지?' 이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나는 이때 뭐했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나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는데 내가 어릴 때도 우리나라는 정말 다이나믹하게 변화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나도 이제 한국의 현대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후손들에게 어떤 선조로 기록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정겹기도, 두렵기도 하다.. 


p18 북악산 금단의 구역 경계선상에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들어온 건축은 서쪽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칠궁이다. 칠궁은 왕을 낳은 후궁 일곱 분의 사당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 출발은 육상궁에서 시작되었다. 윳은 잉태하다, 상은 상서롭다는 뜻으로 육상이란 상서로움(영조대왕)을 낳았다는 의미가 된다.

p23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은 하나의 사당에 합사되었기 대문에 사당 건물은 다섯 채만 있다. 이렇게 복잡하기 대문에 칠궁답사는 정신 차리지 않고는 뭐가 뭔지 모르기 십상이다.

p37 이 영빈관 건물은 박정희 시대 우리 관공서 건물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면정관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골조가 콘크리트든 석조든 전통 지붕을 얹어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겠다는 뜻이 들어 있는데 결과적으로 갓 쓰고 자전거 타는 어색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이 권위주의 시절의 자취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p43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선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으로서 부적합하고 풍수를 보아도 관저는 옮겨야 한다고 답했다. 이후 나는 청와대의 풍수 문제가 나올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풍수는 청와대 터가 아니라 관저 건물에 국한해 말한 것이었다. 청와대 자리야 예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칭송되는 길지인데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있겠는가

p60 나는 고향이란 장소에 사람이 더해질 때 비로소 고향심이 생기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 서촌이기에 이번 답사기는 내 어린 시절을 보낸 회상의 여로를 겸할 수밖에 없을것 같다.

p65 청와대 분수대 옆 바닥에는 4.19 혁명을 기념하느 ㄴ동판 하나가 누워있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오후 1시 40분경에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대가 해무청을 돌아 경무대 쪽을 향하자 경찰이 총을 발포해 이날 21명이 죽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추념해 2018년에 서울시가 첫 발포 현장을 표시한 것이다.

p80 나는 한국미술사 신령님만 믿을 뿐 종교를 따로 갖지 있지 않지만 1960년대 말에 이 교회에 부임해오신 마경일 목사의 아들 상렬이가 친구여서 몇 번 들어가보았는데 우리 동네에 이렇게 고풍스럽고 예쁜 교회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환상적으로 보였다. 마경일 목사는 온화한 분으로 이화여고 교목실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장을 지내셨는데 글도 많이 발표하셨다.

p96 조선 산후화를 진경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 완성한 겸재는 사실 천분이 뛰어난 화가는 아니었다. 올락했어도 양반출신이었기 대문에 도화서 화원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과 뛰어난 벗들이 있었다. 장동 김씨 농암 김창협과 삼연 감층흡 밑에는 겸재를 비롯해 사천 이병연, 담헌 이하곤, 이의현, 신정하 같은 제자들이 있었다.

p105 오거리의 길들은 하나같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적당한 비탈이다. 그래서 길 끝이 곧바로 뚫려 있지 않고 길을 걸어가면서 장면들이 서서히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직선이었다면 길은 사뭇 사무적이고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을 것이다. 오거리 길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도시계획 때문이 아니라 수성동, 옥류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p107 한국사신론이 20세기 후반 지성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대 우리 연대장이 장교들에게 세미나를 시켜 한국사신론을 차트로 만들어 작전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발표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았을 정도였다. 나만 해도 이 책처럼 학문적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반인도 알아들을 수 있는 통사로 한국미술사를 쓰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왔다.

p133 원조 자체는 무상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공짜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원조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은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있어 원조 물자 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산 무기와 제품을 사는 데 쓰였다. 게다가 1958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주요 원인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잉여 농산물이 들어와 곡물 가격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밀과 원면이 대량으로 들어온 후 농촌에서는 목화밭과 밀밭이 사라졌다.

p143 불우하기는 구본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급성폐렴으로 누하동 이 집에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벗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 푸른 머리의 여인, 여인이라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예술가 유전자는 후손에게 전해져 외손녀 강수진이 희대의 발레리나가 되었다.

p155 근대의 지성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살명서 북촌에서는 개화사상이 일어나고, 갑신정변이 모의되었고 동학, 대종교, 불교의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3.1운동 준비가 이루어졌으며,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진단학회, 조선어학회, 조선민속학회 등이 창립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대표적인 정치인인 우익의 송진우, 중도좌파의 여운형이 살았으니 북촌은 우리 개화기와 근대 지성의 심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58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실학사상에 젖어 있어 16세 때 벌써 태양, 지구, 달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 있다. 18세 때 효명세자의 벗이 되어 1827년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에는 세자의 명으로 연암집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박규수는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18년간 은거에 들어갔다.

p175 이 가회동성당은 건축 자체로도 유명하고 북촌 답사에서 큰 볼거리인데 2017년에 가수 비와 배우 김태희가 여기에서 혼례식을 올려 더욱 큰 유명세를 타고 있다.

p181 조선귀족은 1910년에 강제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내린 조선귀족령에 의거해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와 한일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 봉작하고자 만들어낸 특수 계급이다.

p187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볼 때 왕족과 귀족이 누린 고급문화 자체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거의 독점적인 세련된 문화 형식을 나 같은 서민도 누릴 수 있게 확산되는 것이 사회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197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명망가들의 계몽운동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정세권의 참여로 실천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세권은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어 기증했고 재정을 담당했다. 또 이극로의 열정적인 국어운동에 감명받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관을 지어주고 역시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p219 1943년, 간송은 한남서림을 인수한 덕분에 마침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국보 중의 국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때 중개상은 값으로 1천 원을 요구했는데 당시 1천 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에 간송은 이 작품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며 내가 그 10배인 1만원과 자네 수고료로 1천 원을 얹어줌세라고 하고는 1만 1천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p228 여보게. 자네가 보다시피 여기 있는 책들은 수준이 낮아요. 그래서 손님이 잘 보이는 내 머리 위에 이 거룩한 책을 꽂아둔 거예용. 이게 있으면 고서점이고 이게 없으면 헌책방이 되는 거야. 뭘 좀 알고나 산다고 해. 윤팔병 형의 생애 마지막 직함은 아름다운 가게 이사였다.

p231 통문관은 해방을 맞은 기념으로 1946년에 류열 박사의 농가월령가를 펴낸 바 있었는데 산기 선생은 류열 박사가 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일행이 방문한다는 롯데월드 민속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류열 박사를 보고는 냅다 달려가 농가월령가 2부와 5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불쑥 건넸다.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원고료도 못 드렸수. 받아주슈”

p232 통문관에는 적서승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p241 이러한 민예품 가게들이 건재하고 여기를 드나드는 점잖고 멋을 아는 미술 애호가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기에 아직까지 인사동이 문화의 거리로서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270 영국사람이 가야토기를 사가면 영국 토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도 가야토기를 통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p282 내가 연구원들과 식당으로 들어서자 부인은 반가워하며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면서 “왜 그간 안 왔느냐”며 손을 놓지 못했다. 생태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드디어 밥이 나왔다. 연구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밥뚜껑을 여니 과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윤기 있는 흰밥 위에 콩이 다섯 알 얹혀 있었다. 그런데 내 밥뚜껑을 여니 콩이 열 알이나 수북이 들어 있었다. 옛정이 한없이 느껴지는 콩 열 알이었다.

p286 두 사람은 수락산 기슭에 사글셋방을 하나 얻고 사는데 출판사를 경영하던 시인 강태열이 막걸리 값이나 하고 돈은 천천히 갚으라며 300만 원을 내준 것으로 찻집 귀천을 열었다. 귀천에는 그의 친구 문인들이 드나들면서 인사동은 본격적으로 문인들의 거리가 되었다. 천상병 시인은 결국 1993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고 귀천이라는 시를 남겼다.

p291 평화만들기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으면 옆에도 뒤에도 아는 사람이라 술병을 들고 자리를 옮겨가며 마셨고, 또 새 손님이 들어오면 일어나서 인사 나누기 바빴다. 약속 없이 가도 어디엔가 끼어 앉아 함께 술 마실 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시골 노인 마실 나오듯 평화만들이게 오는 인생들이 적지 않았다.

p293 김지하는 내 글씨가 아니라 분단의 아픔을 우아한 서정으로 노래한 이용악의 글을 봐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이를 보면서 이용악의 시보다도 오랜 기간 감옥 독방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까지 드나들며 말년에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보여준 김지하가 아니라, 말술을 마시며 통음을 하고서도 이용악의 시를 외워 쓰던 그 시잘 지하형의 옹훈한 호연지기를 보게 된다.

p295 카페 소설에는 가수 김민기처럼 홀로 와서 술과 고독을 함께 마시는 인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영화제작자 이준동은 한쪽 기둥 옆자리에서 맥주 대여섯 병에 멸치 땅콩 안주만 놓고 몇 시간씩 말없이 앉았다 가곤 해 사람들은 그를 카페 소설의 실내장식 같다고 말하곤 했다.

p302 인사동길의 주인이 그렇게 완벽하게 바뀌게 되자 상권이 바뀌면서 전통으로 먹고 살아온 고서점, 고미술상, 민예품 가게, 표구점, 필방 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액세서리와 관광 기념품 가게가 들어섰고 호떡집, 실타래 엿, 쫀득이 아이스크림 가게가 길가를 차지했다.

p308 내가 지나가면서 눈인사를 보내면 언제나 편안한 미소로 답해주셨는데, 이분이 있기에 인사동에는 인간적 체취가 더욱 짙게 느껴졋고 이런 분이야말로 건강한 서민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씨 아저씨가 10여 년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글을 쓰기 위해 수소문해보았더니 그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p311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중심으로 북쪽에 인수봉, 남쪽에 만경대가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불려왔다.

p333 케네스 클라크는 문명에서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으니 첫째는 율령체계, 둘째는 종교, 셋째는 영토의 확장이다. 신라가 이 세가지를 확실히 갖춘 것은 법흥왕부터 진흥와에 이르는 시기였다

p347 공군에서는 추락한 비행기의 날개자락 잔편만 찾으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비석 머릿돌도 아주 작은 잔편 하나만 찾으면 완벽하게 복원할 자신이 있다. 나는 언젠가는 찾아낼 것으로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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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삶을 위한 성경 강독
한동일 지음 / 인티N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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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한동일

 : 인티N

읽은기간 : 2024/05/10 -2024/05/13


한동일님의 에세이?

사제를 내려놓고 일반인으로 돌아와 성서강독을 하듯 쓴 글들을 모았다. 

설교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큐티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카톨릭 교인이 아니라서 사제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몸담았던 공동체를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닐듯 싶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바라본다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인 종교인으로 이분의 글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결국 사제나 전문 종교인에게 바라는 기대수준이 있기에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신교가 박물관에 들어갈 날이 얼마 멀지 않은 시점에 이분의 글이 크게 와 닿는다.. 


p21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물은 ‘매일 매 순간 결심한 것들에 대한 반복된 실패’일 거라고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p32 저는 그와 같은 예수의 모습에서, 그가 인간처럼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 50)하고 탄식하는 모습에서 예수가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낱 인간인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도 나처럼 번뇌하고 방화하고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p4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 마음이 몸시 힘든 사람이 거룩함을 체험하게 되면, 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미는 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일 것입니다.

p64 키케로는 “다가올 일을 알아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얻는 것도 없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p70 생각이 결심히 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몰입도 몰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과 훈련이 요구됩니다. 다만 제자들도 그런 노력을 통해 나중에는 스승처럼 하게 되지요. 배움은 분명 힘들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p89 지금까지 나에게 걸림돌이었던 일이 디딤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p102 영혼의 독방,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 방의 문을 닫고 물리적으로 타인과 자신을 격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p131 우리의 마음 밭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느 ㄴ좋은 선택을 무수히 쌓아서 내 마음 밭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좋은 방향, 선한 방향으로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그ㅓㅅ은 대부분 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드러납니다.

p145 간음하다 걸린 여인에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처럼, 베드로의 나는 아니오라는 말에도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에 내가 없었을 뿐입니다.

p155 무엇이 허용되는지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존경받을 만한가도 고려되어야 한다.

p160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p195 만일 예수가 쓴 내용이 중요했다면 전승이 알려주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내용보다는 행위가 더 중요했음을 뜻합니다.

p202 교회에서 발행되는 수많은 교회 문헌을 보며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다가도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쓰기와 말하기 기술자가 쓴 글과 말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p218 독일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당신들은 왜 종교세를 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런 대답을 하더라고요.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교세를 낸다”

p225 신자들 주머니에 있는 것 말고 너희 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수도,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 각자는 가난할 수도 있지만 너희가 속한 교회와 교구는 부자가 아니더냐?” 하고요

p245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너 자신이 너에게 괴로움이 되는 때일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이 괴로움을 경감시켜줄 수 있는 약도 위로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때까지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p284 당신이 잘 있는(지내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저도 잘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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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 4 -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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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5 -2024/05/1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처음 책을 읽어가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감흥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이렇게 아름답고 좋구나...

그렇게 읽어가던 책이 어느덧 12권이 됐다. 그리고 종착지에 다달았다.

그러는 사이에 난 어느새 중년이 됐다.. 책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 이런 기분인가보다.

마지막 답사지는 서울의 강북과 강남이다.

강남은 내가 근무하는 선릉이어서 더 반가왔다.. 

선릉과 정릉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특별히 더 알게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꾼의 글로 풀어지는 내용이 재미있고 알찼다.

강북은 성북동과 망우리였다. 

성북동은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고, 간송미술관은 고등학교때 종종 가서 청소했던 곳이다. 

미술관을 청소할 때는 그저 놀기 바빴는데 이렇게 대단한 곳인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역시 나이가 들고 정신연령이 올라가야 좋은 걸 좋다고 할 수 있나보다.. 

망우역사공원은 정말 새롭게 알았다. 유관순누나가 무연고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름 역사책 열심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구멍이 너무 많다. 

문화유산답사기가 끝나는 건 아쉽지만 박물관 순례가 있으니 기대가 된다..

유홍준 선생님이 오래오래 글쟁이로 있었으면 좋겠다.. 


p9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대문에 찾아가는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p29 조선시대에 별장, 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서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유득공의 붇둔초당을 비롯해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이곳에 있었다.

p38 의친왕은 독립투사들과 교류해 공의 지위가 박탈되기도 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색에 빠진 광인으로 가장하면서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p50 1930년대에 들어서면 도심과 가깝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성북동이 새로운 주택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p60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대문에 한동안 이태현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p63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 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p66 그런 문학적 취향으로 학예진 휘문의 학예부장을 맡으며 글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상급생으로 정지용과 박종화가 있엇고 교원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었다 이것이 이태준의 문학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p67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p78 백양당의 출판 활동은 1946년 7월경, 이태준, 이여성, 임화 등 조선문학가동맹의 주요 문인들이 다 월북하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공안기관은 백양당을 인공 지하의 심장적 기관으로서 좌익 지하출판을 했다고 지목하고 배정국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이에 백양당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 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복하여 학문적, 예술적 최선을 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p91 내가 어느날 동주 선생에게 근원이 왜 월북했느냐고 묻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던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p95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상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99 김용준은 양주 고든골 반야초당으로 이사했고, 김환기는 수화와 김향안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당호를 수향산방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노시산방을 사랑하는 후배 화가 김환기에게 넘겨준 김용준은 신혼부부가 이 집에 사는 것을 기념해 수향산방 전경을 그려주었다.

p105 이를 미술사적으로 논증하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이는 수화와 가까이 지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혜곡 최순우였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에 비로소 눈으 ㄹ뜨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국보, 보물로 새롭게 지정된 백자들을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백자달항아리 특별전이 열린 이후 마침내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었다.

p111 김향안은 수필집 파리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했지만 우리 근현대사 소설가 이상과 최고의 화가 김환기의 부인으로 살며 이들의 예술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그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다.

p120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22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 1천억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 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p147 북정마을은 아름다운 마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겨운 옛 동네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대에 머물던 1960년대 가난한 시절로 되돌아온 듯한 서민 동네로 그 옛날을 보여주는 고향 같은 곳이다.

p156 이제라도 존경하는 국회의원이나 고지식한 전문가의 소수의견보다도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어 이 안은 꼭 실현시키고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 성종대왕 선릉과 중종대왕 정릉을 안내한다

p162 왕릉의 진입 공간은 반드시 작은 냇물에 걸쳐 있는 금천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경우 금천교가 사라졌지만 원래 왕릉 앞에는 반드시 작은 내가 흘렀으며 이는 곧 현세와 죽음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였다. 금천교는 이 양자를 연결하는 다리로 기능한다. 금천교를 건너면 왕릉의 존재를 알려주는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p165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별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 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p174 왕릉 석인상의 이런 변화는 곧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문화사적 분위기와 일치한다. 대체로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되도록 규정에 충실하려고 했다가 조선 중기인 16-17세기에는 과장과 자신감이 들어갔고,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사도세자 융릉과 정조 건릉에서 보이듯 섬세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p198 가지런히 기와돌담을 쌓아 주차장과 차단하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게 해서 도심 속의 사찰답게 단정하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주려고 합니다. 그다음엔? 아직 생각중예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구려. 그러면 나무를 심으세요. 절집의 가장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했어요.

p212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전국의 사림들이 극렬하게 상소를 올렸다. 보우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반이성적 광풍이 몰아칠 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은 역시 합리적 지성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같은 엘리트를 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p230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p251 65세 되는 1740년 12월 겸재는 양천현령에 제수되어 70세 되는 1745년 1월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이 양천현령 시절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고 겸재 예술의 전성기였다. 이 시절 겸재는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한강을 소재로 한 많은 진경산수를 그렸고, 또 임진강에서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 등과 셋이서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받아 뱃놀이하며 연강임술첩이라는 대작도 남겼다.

p262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흔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79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p290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p295 그때 나는 위창 선생의 묘소에 드리워진 소나무 그늘에 한참을 앉아 망우리 공원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 무게를 느꼈다. 어느덧 공동묘지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이 우리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p306 박인환은 짧은 인생에 몇 편의 시만 남겼고, 김수영 시인 같은 분에게서 낭만적 센티멘털리즙이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 가요로 크게 히트하면서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p311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 수많은 은지화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월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p333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위창에게 보여드렸을 때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뇨”라고 쓴 것을 보면서 박탈은 빼앗아간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빼앗긴 입장에서는 박상이라고 해야 한다며 글을 수정한 다음 “요새 애들은 한문을 몰라서 큰일이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p342 여기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이다. 다쿠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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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내 방에서 즐기는 이탈리아 미술 여행 Collect 13
김덕선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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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김덕선

 : 동양북스

읽은기간 : 2024/03/14 -2024/04/12


'90일 밤의 ...'는 시리즈인것 같다. 음악도 있고, 미술도 있다.

이 책은 그중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이야기다.

밤에 잠자기 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서 침대 옆에 두고 중간중간 읽었다.

제목의 의도대로라면 한장씩 읽어야겠지만 보통 2-3장씩 읽어갔다.

워낙 좋은 작품들이 많은 이탈리아여서 그런지 소개되는 작품의 수준이 높았고, 아는 작품도 많았다.

미술관에서 설명을 들으면 더 좋았겠지만 책으로나마 사진으로 보니 아쉬움이 좀 달래지기는 했다.

나중에 여행가면 꼭 가서 봐야지 하는 작품이 참 많았다.

이탈리아는 참 복받은 나라인 것 같다. 부럽다..


p41 나는 붓으로 그렸거나 청동으로 구운 라오콘 군상도 여럿 보았는데 그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작품이 제일 낫다. 한 덩어리의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과 ㅎ뱀들이 이들을 휘감아 조이는 놀라운 형상을 재현했다. 로도스 출신 세 족각가 아겐산데르, 폴리도루스, 아테노도루스가 작업한 것이다

p48 바티칸에서 볼 수 있는 마르수피니 대관식은 마사초의 원근법으로 공간의 깊이감이 완벽하게 표현되었고, 배경은 플랑드르 화풍을 따라 세밀학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필리포 리피는 세 패널 상단에 푸른 하늘을 그려 넣어 답답하고 막힌 공간이 아닌 천상의 하늘위에 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p58 이 작품은 벽면에 생석회를 바른 후 젖은 상태에서 스케치와 채색을 마무리하는 프레스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페루지노가 화가로서 돋보인 기술을 밝고 명료한 색감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출신 화가답게 청명한 파란 하늘을 통해 깊이와 평안함을 넣고 지상에는 건축물, 단아한 나무를 수평으로 배치애 좌우 대칭의 안정되고 통일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p6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문학가 로맹 롤랑은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말을 확인해보려면 500년 전의 한 작품 아래 서야 합니다. 왜 작품 앞이 아니라 아래일까요?

p73 이전 화가들은 명암과 원금감을 사용해 정적인 3차원 공간을 표현한 것이 최선이었다면, 그의 첫 프레스코화는 각각의 장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입체감과 현실감이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죠.

p79 헤라클레이토스 왼편에는 이 그림의 유일한 여성,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 히파티아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으로 불리며 신격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율리우스 2세의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림 왼편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맞추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라파엘로 애인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p83 라파엘로는 페루지노 공방에서 일하며 스승과 당대 예술가들의 모든 기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깊이 있는 색채 표현과 우아하고 서정적인 인물 묘사, 원근법을 이용한 균형 있는 공간 구성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죠. 가장 존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까지 연구하며 아테네 학당을 통해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습니다.

p85 이전에 추구하던 깊이 있는 색감을 뛰어넘어 빛과 어둠의 완벽한 대비를 통해 다가올 바로크 사조까지 암시하고 있죠. 즉, 이 그림은 구도, 색채, 운동감까지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모든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93 이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선보인 수학적 규칙을 이용한 웅장한 건축적 배경이나 플랑드르풍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시선을 옮기는 화려한 배경은 지워버리고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 사이로 드러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인물의 내면과 주제가 또렷하게 부각되는 강렬한 인상의 작품을 그려냅니다. 성화 속 인물들도 상상 속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그가 일상에서 만난 하층민들을 모델로 하여 현실적으로 그렸습니다.

p127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의 작품 분위기가 어느 정도 예상되지 않나요?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이라는 평을 받았고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현재 삶이 폭력적이지 그림은 폭력적이지 않다”

p132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고 후원도 끊길지 모르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르게리타는 결국 라파엘로 곁을 떠났죠. 뒤늦게 마르게리타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로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사과의 마음을 담아 라 포르나리나를 그렸습니다.

p139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의 모습에는 눈물이나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얀색 두건을 쓴 소녀에게서 정결함이 느겨집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가 생기가 도는 붉은 입술은 20대 초반 아름다운 여인의 생기를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죠. 억울하고 처연한 모습이 아니라 무력한 현실과 절망을 지나 내면의 자유를 얻어 온화해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더 측은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143 라파엘로는 이러한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안정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역동적인 그림을 표현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각 인물의 움직임과 근육의 표현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고 배운 것입니다.

p160 청년이 된 바쿠스는 술에 취해 각지를 떠돌아다녔고, 사람들에게 포도 농사와 포도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며 수확물을 통해 축제를 즐기고 자신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그를 섬기며 벌인 축제는 유명했습니다.

p191 마에스타는 금빛 배경 중앙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가 정면을 응시하며 옥좌에 앉아 있는 구성으로 그려졌습니다.

p193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가 피렌체를 누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도시를 성모에게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로 시에나는 마에스타를 주문했고 시에나의 성직자와 시민들은 그림을 들고 전쟁에서 승리한 도시를 행진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타가 처음 탄생한 곳을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로 보고 있습니다.

p203 필리포는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수도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늘 추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코시모가 메디치궁으로 그를 데려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조차 견디지 못하고 침대보를 잘라 밧줄로 만들어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속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창문으로 도망친 수도사라니, 상상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려지지 않나요?

p215 그림을 정면이 아닌 좌우로 이동하며 살펴보던 학자들은 몸을 숙여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다가 이내 무릎을 탁 쳤습니다. 다빈치는 그림이 성당 제의실 오른쪽 벽위에 걸릴 것을 고려해 그린 것입니다. 오른쪽 하단에서 그림을 올려다보면 마리아의 오른팔 길이가 현실적으로 보이고 사물의 비율이 한 시선으로 제자리를 찾아간 듯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p238 이 그림은 르네상스 최초의 나체화로 매번 회자되곤 합니다. 당시 보수적인 기독교 사회에서 나체의 비너스를 그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피렌체에서는 기독교를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결합하고자 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연구되던 중이었습니다. 보티첼리 또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던 인문학자들과 자주 교류했습니다.

p271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짐을 벗어 던지고 개인의 기교와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진정한 예술을 찾고자 노력한 파르미자니노. 300년이 지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품은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p281 신화 속 메두사는 여자인데 남자의 얼굴로 그린 것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표방한 것은 사실주의, 즉 그림 속 내용과 사건이 눈앞에서 일어난 듯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p287 아르테미시아의 초상화를 보면 유디트와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그녀를 능욕한 아고스티노 타시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p305 이전 조각가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마저 손대지 못한 대리석 토막을 그가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던 겁니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작업에 방해되어 혼자 작업하는 내내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칸막이를 쳐 구경꾼들이 볼 수 없게 했다고 합니다.

p322 어떤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조소라고 합니다. 조소는 조각과 소조로 나뉘는데,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깎아 만드는 반면, 소조는 찰흙과 같이 부드러운 재료를 안에서 밖으로 붙여가며 만듭니다.

p338 피렌체 화가들이 수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선명한 선을 스케치해 원근법을 표현했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선보다 색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p385 창작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는 사회가 변화했음을 알려주는 기준이 되기도 하죠. 성경에 등장하는 주제와 인물만 그리던 종교 중심 시대에 정물화는 대외무역으로 빠르게 부자가 된 새로운 사회 계층을 만족시킨 최고의 문화 상품이 되었습니다. 16-17세기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p391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눈앞에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피에타를 보며 성모 마리아에게 안긴 죽은 그리스도가 곧 부활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희망과 위로를 얻었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주제의 숭고함으로 많은 예술가의 손끝에서 피에타가 완성되었습니다.

p392 미켈란젤로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더 독실해지면서 창조의 영역은 곧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창조물은 한낱 베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강해집니다.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떠한 것도 완벽하게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여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긴 미켈란젤로는 가시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 의미보다는 미완성 작품을 통해 형체의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p407 당시 이러한 기법이 얼마나 혁신적이었을까요? 그가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캔버스를 찢어 구명을 뚫는 데도 10년이 걸렸다라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시도는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p432 그는 티치아노처럼 분위기 묘사, 질감, 색채가 뛰어났고, 특히 풍요롭고 화려한 잔치모습을 틴토레토처럼 극적으로 생생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규모가 큰 작품 주문을 많이 받았고 그 덕에 남겨놓은 작품도 많습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는 베네치아의 3대화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p473 당시 로마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 작품을 모각 혹은 복제해 로마의 도로, 광장, 목욕탕 등 다양한 곳에 전시했는데, 헬레니즘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한 로마의 정치가 포르키우스 카토는 그 모습을 보고 “로마에게 정복당한 그리스가 도리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리스 청동 조각의 진품은 볼 수 없어도 로마인들의 복제품 덕분에 현재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예술품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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