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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서메리 지음 / 티라미수 더북 / 2020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만나게 해준 문장들,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책을 즐겨 읽습니다, 라고 하면 한번쯤 들어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 중 '인생의 책'은 무엇인가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책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책들 중 딱 한 권을 도저히 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어느 순간에 만났을 때만 의미 있는 책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큰 의미가 되어준 책도 있었다. 책 자체는 별로였지만 문장 하나만큼은 반짝반짝 빛났던 책도 있었다. 어떤 기준을 세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책은 변할 수밖에 없다. 장르도, 주제도 다양한 책들은 각자의 의미를 내게 남기며 삶에 녹아들었다.
내가 '인생의 책'으로 그토록 다양한 책을 꼽아온데는 또 다른 중요한 까닭이 있다. 내 인생의 책은, 내 삶을 지탱해주고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안겨준 책은, 실제로 한 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p.6)
『오늘을 버텨내는 데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저자 서메리가 머릿말에 쓴 말에 공감했다. 인생의 책을 한 권만 고르기에, 매력적이고 의미있는 책은 너무 많으니까. 이 책에 실린 문장 73개를 고르는 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73개의 문장들은 좋았다. 몰랐던 책의 문장들도 있었는데, 그 문장들은 책까지 읽어보고 싶어진다. 뭐,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겪게 되는 일이다.
내용은 문장을 소개하고, 에세이가 이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나눠 읽기에 좋을 구성이다.
문장의 경우 담겨 있는 책을 소개하고, 한글이 있고, 영어로 쓰인 문장까지 있었다. 영어 문장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문장을 담은 페이지의 편집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꾸밈없이 간결하게 글들을 배치한 것이 좋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규정한다는 건 한계를 정한다는 거야.
To define is to limit. (p.26)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유명한 책이지만 내용 소개를 보니 끌리지 않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간간이 접하게 되는 문장들은 왜이리 매력적인지. 이번에도 그랬다. 문장 구성을 대비되게 한 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짧은 문장이지만, 좌우명으로 삼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 책도 읽어봐야하는 걸까.
로힌턴 미스트리 《적절한 균형》
사람 얼굴은 한정된 공간이고, 웃음을 채우면 슬픔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지지.
The human face has limited space.
If you fill it with laughter there will be no room for crying. (p.108)
이 문장도 좋았다. '공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단순히 웃는 얼굴을 하는 게 좋다는 말을 조금 다듬어 다르게 표현한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진짜 외로움이란, 네게 가짜 모습을 강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산다는 거야.
The real loneliness is living among all these kind people who only ask one to pretend! (p.110)
곱씹게 되는 문장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카멜레온처럼 주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숨긴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더라도 그 마음 속엔 외로움이 있을 수 있다. 같아보여도 사실은 다른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가끔은 가짜 모습에서 벗어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도 필요한거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자존심 강한 사람들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들어내니까.
Proud people breed sad sorrows for themselves. (p.116)
이 문장은 읽자마자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떠오르게 했다. 꽤 오래전 읽은 책인데도 등장인물들이 선명히 떠오르는 걸 보면 이 책의 인상이 강렬하긴 강렬했나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소설이니까. 소설 내용을 모르더라도, 이 문장 자체로도 공감하게 된다. 자존심을 세웠다가 긴 시간 후회하게 되는 일들은 의외로 꽤 있으니까.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자기 일이 되면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존심, 그게 뭐라고.
얀 마텔 《파이 이야기》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존재해요. 아닌가요?
The world isn't just the way it is. It is how we understand it, no? (p.128)
실제 읽지는 않았지만 대충 내용은 알고 있는 책이 꽤 있었다. 『파이 이야기』도 그렇다. 이 문장은 파이 이야기 내용과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존재하는 세상.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 다를수밖에 없음을 생각해본다.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가면을 너무 완벽하게 유지하다보면 때로 그 가면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Sometimes people carry to such perfection the mask they have assumed that in due course they actually become the person they seem. (p.178)
예전에 읽은 적 있는 책인데, 이 문장은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 '가면'에 대한 글들을 접한 적이 많아서인지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 옮겨 적어 보았다. 너무 완벽한 가면은 어느새 진짜 모습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건, 노력으로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일까, 아니면 가면을 쓰다보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잊게 된다는 부정적인 의미일까.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의 회상》
사소한 것들이 무한히 중요하다는 말은 내 오랜 좌우명이네.
It has long been an axiom of mine that the little things are infinitely the most important. (p.188)
셜록 홈즈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 문장은 꼭 옮겨적고 싶었다. 셜록 홈즈의 좌우명이라는 '사소한 것들이 무한히 중요하다'는 건 탐정인 그의 직업에 딱 맞는 좌우명이다. 작은 단서도 지나치지 않는 신중한 태도. 작은 것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고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태도. 삶에 충분히 적용하기 좋을 문장이다.
폴 오스터 《달의 궁전》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의 작가이다.
Every man is the author of his own life. (p.220)
폴 오스터의 문장을 만날 때마다,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몇 권 읽긴 했지만, 아직 마음만큼 많이 읽진 못했다. 특히 글에 대한 그의 문장들이 좋아서, 그의 책을 좀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소개한 문장들 외에도 좋은 문장들이 많다. 문장들과 함께한 에세이들도 좋았다. 그 문장들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었다. 간결한 편집 디자인처럼, 책 내용 자체도 차분한 느낌이 좋았던 책이다. 마음을 붙잡아줄 좋은 문장들을 갖고 있다면,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줄 수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