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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종으로 나누려고 할까? ㅣ 한 입 크기 철학 2
마갈리 베손느 지음, 알프레드 그림, 손윤지 옮김 / 돌배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아직 다소 낯설던 주제, 왜 인종으로 나누려고 할까?
『왜 인종으로 나누려고 할까?』. 한입 크기 철학 시리즈 두번째 책은 인종에 관한 사유를 다루고 있다.
2015년 6월 미국은 흑인민권단체장이었던 '레이첼 돌레잘'이 사실 백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인종 정체성을 위조하는 거짓된 인생을 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인지.
미국에서는 '어떤 인종'이느냐가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각기 다른 피부색을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결국 하나의 연속적인 '컬러 라인' 위에 놓여 있으며, 그 사이에 정확한 색의 경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27)
비교적 인종 논란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나오는 인종 관련 이슈들이 모두 낯설었고, 다소 충격을 주는 부분들이 많았다. 가장 놀랐던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0년에 진행한 미국의 인구조사에서도 가구원의 인종을 묻는 질문이 있었다는 것. 심지어 단순히 컬러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계통인지 세세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실제 제도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조사했을 것이다.
'인종'은 공간이나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피부색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p.28)
그런데 그 인종 구분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자신이 '어떤' 인종인지는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결정된다. 살고 있는 지역의 컬러라인을 쭉 나열했을 때,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인종은 다르게 구분될 수 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다수의 인식 의해 인종의 기준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종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지역에서 원하는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정치적 범주라고 할 수 있다. (p.29)
책을 읽으면서 인종을 나누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일수밖에 없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누가, 왜, 어떤 상황에서 정하게 되는가.
인종은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배척하고 차별하기 위해, 삶의 방식 혹은 외양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표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집단이나 문화의 다양성은 인종주의의 원인도, 구실도 될 수 없다. 인종주의를 탄생시킨 것은 인종이 아니다. 오히려 인종주의가 인종을 만들었다. (p.39)
외양적으로 확연히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확실한 구분이 아니다. 피부 색은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기준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준을 통해 다른 문제까지 판단해서는 안된다. 인종으로 하나의 집단, 문화의 특성을 규정해서는 안된다. 그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종주의는 과거의 골상학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까지 규정하고 설명하려는 점에서. 잘못된 판단의 근거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인종은 허구의 개념이 아니다. 인종은 실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직화하고 있다. 인종은 현실이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 (p.42)
그렇지만 주관적이라는 것은 장점도 있다. 더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어느 정도의 구분을 외면할 수는 없다. 현실이다. 받아들여야한다. 다만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직 인종 문제가 우리 나라에서는 다소 먼 문제 같지만,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는 만큼 인종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인종 구분을 통한 배척과 차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