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볼츠 Thunderbolts 1 : 악당을 믿다 시공그래픽노블
워런 엘리스 지음 / 시공사(만화)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블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사건이었던 '시빌 워'.

그것은 한 어리석은 슈퍼 히어로들에서부터 촉발된 사건이었다. 초능력을 지닌 '슈퍼 휴먼' 들이 공공연히 인정받던 마블 유니버스의 어느 지구.(우리 세계이다.) 한쪽에서는 '뮤턴트' 라 불리우는 인종들이 차별받고 있었고,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 맨, 스파이더맨 같은 초능력자들은 군.경에 속하지 않은 자경단원으로서 존경받고 있었다. 퍼니셔처럼 언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가 강했기에, 자신들의 능력으로 악당들을 사로잡아 법 테두리 안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 보통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슈퍼 휴먼' 들이 모두 그렇게 정의감 넘치고 애국심 넘치는 정의의 히어로가 될 리는 만무. 많은 능력자들은 악의 길로 빠져들어 '슈퍼 빌런' 이 되기도 했다.

 정부의 입장에서 슈퍼 히어로들과 슈퍼 빌런들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언제나 탐탁치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국가를, 정부를 제압할 수 있는 '슈퍼 휴먼' 들이었고, 평범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정부' 는 이들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일련의 슈퍼 히어로들과 슈퍼 빌런들이 뒤섞인 대결에서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사건이 발발했고, 이를 기화로 정부는 '초인등록법안' 을 통과시킨다. 흔히 우리가 '슈퍼 휴먼' 이라고 부르는 초인들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이런 양날의 검에 스스로가 베이지 않기 위해 그들 한명 한명을 정부가 파악하고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또한 잠재적으로 슈퍼 빌런이 될 수도 있는 슈퍼 휴먼들은 적확하게 파악해서 슈퍼 히어로로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조기 교육을 시키겠다는 포석도 깔려있는 방안이었다.

 

 아이언맨은 기꺼이 정부의 정책에 동의한다. 법안을 지지하는 일파의 수장으로서 다른 히어로들을 설득시켜서 자신의 정체를 정부에 등록하도록 한다. 많은 히어로들이 그에게 협력했지만, 그만큼 많은 히어로들은 그와 정부의 법안에 거세게 반대했다. 아이언맨을 아버지처럼, 큰 형처럼 따랐던 스파이더맨은 가장 먼저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고 정부에 등록하며 아이언맨의 수족이 된다. 한편, 미국의 전쟁영웅인 캡틴 아메리카는 그 법안에 격력하게 반대하며 아이언맨의 대척점에 서서 반대파들을 규합해 레지스탕스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시빌 워'.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들간의 내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시공사에서 출간했던 [시빌 워] 본편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전은 결국 반대파인 캡틴 아메리카가 스스로 아이언맨에게 굴복하고 반대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찬성파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아이언맨의 권력의 근간이기도 했던 정부산하 슈퍼 히어로 관리 독립부서인 'SHILD'(이하 '쉴드') 의 최고 책임자였던 아이언맨이 직위해제되고, 쉴드의 모든 권한과 기물들은 '썬더 볼츠' 라는 팀에 강제 종속 된다. 정부가 임명하는 '쉴드' 의 총 사령관이었던 '닉 퓨리' 가 [시빌 워] 의 전초전이기도 했던 [시크릿 워] 임무 이후 행방불명 된 뒤, 사실상 쉴드의 모든 권한은 아이언맨이 가지고 있었다. 아이언맨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슈퍼 히어로들을 규합하고 반 강제로 국가에 등록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쉴드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정보력이었다. 일찌감치부터 슈퍼 히어로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쉴드를 넘겨받은 아이언맨이었기에, 쉴드의 강제 종속은 사실상 아이언맨에 대한 정부의 불신임이나 다름없었다.

  

 정부는 초인등록법안의 활성화와 반대파 잔당의 일소를 위해 쉴드를 대신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 관리팀 '썬더볼츠' 를 창설하고, 그 수장에 '노먼 오스본' 을 임명한다. 노먼 오스본은 스파이더맨의 가장 큰 숙적. 영화 '스파이더맨' 을 보신 분도 아실 수 있을 '그린 고블린' 이라고 불리는 슈퍼 빌런이었다. 노먼 오스본은 자신의 능력으로 슈퍼 히어로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고, 정부에 의해 강제 구금되어있던 슈퍼 빌런들을 활용하기로 한다. 노먼 오스본은 악당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악당들의 몸 안에 엄청난 위력의 전기 충격을 줄 수 있는 칩 '나노 체인' 을 이식하고 악당들을 제어한다. 이 시도는 [시빌 워] 에서도 있었던는데, 당시엔 악당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 전례에 비추어 노먼 오스본은 우선적으로 활용 가치가 있는 슈퍼 빌런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몸에 나노체인을 이식함으로서 공포와 고통으로 그들을 제어하고자 한다.

 

바야흐로 세상은 슈퍼 빌런들의 세상. 노먼 오스본의 세상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악당을 믿다' 라는 부제를 가진 '썬더 볼츠' 는 위에 줄거리를 통해 언급했듯 [시빌 워] 이벤트와 이어지는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각 타이틀롤을 가지고 있는 슈퍼 히어로들이 한 데 모여서 하나의 큰 이야기를 축으로 모이는 프로젝트) 이다. [썬더 볼츠] 이벤트가 진행되는 중간에 수많은 팬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던 [시크릿 인베이전] 같은 짧은 이벤트도 있었지만, [썬더 볼츠] 는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꽤 인기있는 이벤트이다. [시빌 워] 가 슈퍼 히어로들이 한 데 크로스 오버 된 이벤트였다면, [썬더 볼츠] 는 슈퍼 빌런들이 크로스 오버 된 이벤트이다. '본격 악당 주인공 만화' 인 셈이다. 아무리 사회를 리얼하게 그려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적인 메시지를 추구하는 미국 문화의 특성상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과거에도 악당들이 주인공인 이슈가 있긴 있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4~8회 정도의 짧은 단발성 이슈가 많았다.

(지난 해 출간되었던 '킬링 조크' 가 좋은 예. 조커가 주인공이긴 했지만, 결국 배트맨에게 붙잡히며 끝나고 불과 4회에 지나지 않는 60페이지의 짧은 원샷 이슈였다.)

 

 그래픽 노블에 대한 리뷰를 쓸 때 마다 언급하지만, 미국 문화에 있어 만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만화는 마치 미국 드라마처럼 많은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는 킬러 콘텐츠로 여겨지고 있고, 캐릭터는 대단히 유기적으로 문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간 개봉되고 있는 헐리웃 블록 버스터 영화들의 원소스가 모두 만화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그린랜턴(DC)' 과 '토르(마블)', '스파이더맨' 의 새로운 시리즈 등이 모두 만화 원작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큼직한 영화엔 언제나 만화가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혹은 영화 본편이 그대로 출간되기도 한다. 지난해 '인셉션' 의 경우에도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영화 내용의 프리뷰 격인 4편짜리 미니시리즈 만화가 발표되기도 했었고, 트랜스 포머나 배트맨의 경우도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스토리 라인을 가진 만화가 발표된다. 누구나 쉽게 어디서든 손에 들 수 있고, 펼쳐볼 수 있으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아도 읽어볼 수 있다는 강점때문에 만화는 엄청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시빌 워] 라는 초대형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는 미국 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이슈였다. 거대한 컨텐츠 회사인 마블사의 거의 모든 캐릭터가 등장하고, 마블사가 자랑하는 초일류의 스토리작가, 그림작가, 컬러작가들이 달라붙었다. 이 메인 이벤트 외에도 동시간대에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을 보다 디테일하게 조명하는 '스핀 오프' 격의 작품들도 수두룩하게 발표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는 [썬더 볼츠] 처럼 아직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지금까지는 썬더볼츠 외에 따로 진행되는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슈퍼 히어로들은 각자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 시빌워가 남긴 참상들을 뒷수습 하고 있는 중이다.)

 

 [썬더 볼츠] 는 그 노골적인 악당들이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슈퍼 히어로들은 수만명을 죽이겠다고 선포하는 악당 한 명 앞에 두고, 얠 죽여야 되나, 말아야되나 전전긍긍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이며 때려도 꼭 안죽을 것 같은 곳만 골라서 때리는 조금은 아쉬운 모습을 보인건 사실이다. 뻑하면 말로 해결하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 다 잃어도 복수할 생각도 안하는 등. 하지만, 썬더볼츠의 악당들은 참으로 못됐다.

언제나 동료라고 부를만한 썬더볼츠의 조직원들을 속여 넘기거나 뒷통수 치며 이용할 생각만 하고, 심지어 수장인 노먼 오스본은 브리핑때 팀원들에게 전자 수갑을 채워놓아야만 한다. 수많은 약을 먹는 노이로제 걸린 정신 분열증 환자이기도 하다!! 팀의 최고 실력자인 불스아이는 '데어 데블' 의 숙적이자 미치광이 싸이코 패스 살인마이기도 하고. 그의 머릿속엔 살인 이라는 단어로 가득하지 않은가.

 

 슈퍼 히어로들과 싸워온 슈퍼 빌런이라면 어쩔 수 없을터다.

애매하면 바로 잡혀갈테니. 게다가 아이언 맨 같은 놈에게 제대로 한 대 맞으면 그냥 머리 터져서 죽는거다. 그런 놈들을 피해 나쁜짓을 하려면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그렇다고 나쁜 짓을 안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더 머리를 써서 작전을 짜야하고, 장비를 개발해야 하고,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정신은 하나로 몰아서 밀 그대로 '미쳐야' 할 터다. 또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든, 싸이코 패스가 되든. (뭐 슈퍼 히어로들과 상관없이 원래 그런 놈들이기도 하지만..)

그런 슈퍼 빌런들의 통쾌한 액션. 그리고, 치졸하고 쪼잔한 음모들. 얽히고 설킨 사건들

 

[썬더 볼츠] 는 비록 Vol1.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미국 만화의 특성대로 한 이야기가 한 권에서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4개의 주요한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대로 얽히다가 결국 하나로 맞아 떨어지는 구성과 연출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다른 슈퍼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빅 이슈들보다 못 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4개의 사건, 8명의 인물들. 초인등록법안을 피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서 몰래몰래 활동하고 있는 3명의 미등록 슈퍼 히어로들. 그리고, 그런 미등록 슈퍼 히어로들을 사냥하기 위해 조직된 [썬더 볼츠] 의 슈퍼 빌런들.

그들이 톱니바퀴처럼 하루의 일상 속에서 얽혀 들어가고 예상치 못했던 대치를 하면서 일은 꽤나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정말 미드처럼 짜임새있고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단순히 슈퍼 빌런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들의 얽힘과 설킴. 그리고 대결구도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수작이다.

 

다음권도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기대된다. 

 

 

잠시 작품을 감상해보자.

 




 

 

뭐, 전형적인 미국 만화.

하지만, 주인공들이 악당들이어서 내용도 좀 하드코어하고, 액션도 노골적이다.

 

 

 

 

 

 

 

 

 

P.S

 국내에 마블과 DC의 여러 판권을 가지고 있는 '시공사' 도 참 용자스럽다.

슈퍼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작품들도 낯선 판에, 슈퍼 빌런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을 떡하니 발간하고, 게다가 Vol1. 인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죽죽 내겠다는 심산인 듯 한데.... ㅎㄷㄷ

[시빌 워] 에 관련된 이슈들은 죄다 정식 발매할 생각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비싼 책들을 빠짐없이 모으고 있는 나도 참 용자스럽다.

 

 



[시크릿 워] 부터 [시크릿 인베이젼] 까지 책이 꽂혀있는 순서가 사건이 일어난 순서이다.

[시크릿 워] 에서 히어로들의 갈등이 생기고, 쉴드의 사령관이던 닉 퓨리가 마지막에 모습을 감춘다. 그 뒤부터 마리아 힐이 쉴드의 책임자가 된다.

[하우스 오브 엠] 에서 엑스맨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고, '뮤턴트'라는 종 자체의 멸종 위기를 맞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슈퍼 히어로들이 헐크를 우주로 날려버리면서 [헐크: 플래닛 헐크] 의 대 서사시가 시작된다.

[하우스 오브 엠] 이 마무리 되자 초인등록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슈퍼 히어로들이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멸종을 막기 위해 엑스맨들은 [메시아 컴플렉스] 에 목을 메고, 당연히 내전에는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엑스맨을 제외한 슈퍼 히어로들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치열한 [시빌 워] 를 벌이게 되고, 결국 찬성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아이언맨이 시빌워의 뒷수습을 하고 흩어진 반대파 출신 슈퍼 히어로들을 처리하고 다닐때, 우주로 쫓겨났던 헐크가 지구로 돌아와 [헐크: 월드 워 헐크] 라는 초호화 이벤트를 일으키고, 오래지 않아 무시무시한 외계인 '스크럴' 들이 지구를 공습하며 [시크릿 인베이전] 이 일어난다. 우주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슈퍼 찬성파와 반대파 히어로들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지만, 스크럴들을 무찌른 뒤에 토니와 쉴드는 결국 정부에 의해 축출되고, 쉴드의 모든 정부와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정부 재산들은 모조리 새로이 창설된 [썬더 볼츠] 와 그 수장인 노먼 오스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물론 다른 칸에는 세미콜론의 그래픽 노블도 가득하다.

 

아마, 두 출판사가 마블과 Dc 각 출판사에 캐릭터 위주로 저작권을 사 온 모양이다.

Dc 의 [슈퍼맨] 이라는 캐릭터와 마블의 주요 이슈에 대한 저작권은 시공사가 손에 넣은 모양이고,

역시 Dc 의 [배트맨] 과 관련된 캐릭터들은 세미콜론이 손에 넣은 모양이다.

덕분에 Dc 의 간판 스타인 슈퍼맨과 배트맨이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발행되는 모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슈퍼맨과 배트맨은 아주 긴밀한 사이로서, 함께 활약하는 작품이 꽤나 많다. 아예 '배트맨 & 슈퍼맨' 이라는 시리즈까지 있을 정도이다.

세미콜론의 배트맨 만화인 '배트맨: 허쉬 " 와 시공사의 슈퍼맨 만화인 '슈퍼맨: 포 투머로우' 같은 작품은 아예 같은 스토리작가와 같은 그림작가가 창조해 낸 쌍둥이 같은 작품들이다.

 

 

무튼, 이렇게 재미난 미국만화를 정식 발매본으로 접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기쁜일이다.

내일이면 그린랜턴 이슈중에서도 재밌기로 소문난 '시네스트로 코어 워' 도 도착할 예정.

 

조만간 그린랜턴: 리버스 의 리뷰와 함께 계속해서 리뷰를 올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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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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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 을 즐기는 방법은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소설을 즐기는 데에는 최소한 세가지의 방법이 있다.

즉, 한 편의 소설을 읽을때 최소한 세가지의 관점에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인데, 등장인물, 특히 화자나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읽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을 이러한 방법을 따르고 있고, 작가들 또한 독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곤 한다. 아주 평범해서 어떤 독자라도 거울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보편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이야기를 진행하게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엔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가 바라보는 제3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화자인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엔 서술시점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독자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화자에게 이입될 수 있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 혹은 화자의 실제 경험담을 듣는 듯한 착각을 경험할 수 있다.

 

 두번째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방법인데, 등장인물들 중 화자와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에게 집중해서 읽는 방법이다. 어느정도 볼륨이 있는 직품이라면 주인공이나 화자 외에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니, 그렇게 프로타고니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들 주변에는 흥미로운 조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 [배트맨]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는 '배트맨' 이다. 당연히 안타고스트는 '조커' 나 '펭귄' '캣우먼' 등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조연들이 있으니, 바로 고담시의 형사과장이자 배트맨의 조력자인 '짐 고든' 형사. 그리고 배트맨의 오랜 친구이자 웨인가의 집사인 '알프레드' 이다. 그 밖에 배트맨의 사이드킥인 '로빈' 이나 고든의 딸인 '오라클' 그리고 후에는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 변모하는 투페이스 '하비 덴트' 검사 등도 있다. 이런 주변 인물에 집중해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알프레도의 입장에서 '배트맨' 영화를 다시 보아도 아주 새로운 느낌일 것이다.

 

 세번째는 작가의 다른 작품군을 폭넓게 읽어봐야 가능한 방법인데,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며 읽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책을 정독해서 읽고, 읽은 뒤에 그 내용을 곱씹어 사색해보는 타입이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엔 '장 도미니크 보비' 의 [잠수복과 나비] 나 '키토 아야'의 [1리터의 눈물] 을 접한 뒤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본 방법이다. 고등학교 때 까지는 오로지 언어영억 문제풀이를 위한 독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속독법엔 몇가지 스킬이 있는데, 아마 왠만한 분들은 다 아실만한 방법들이다. 눈으로 읽는 단계를 거쳐, 대각선으로 읽기, 주어구와 서술구 나눠 읽기, 동사만 읽기, 명사만 읽기 등등 말이다. 20대 중반까지는 나 역시 이런 독학한 속독법에 익숙해져서 '정독' 을 하는 책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듯, 눈을 깜빡거려서 한권의 책을 완성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를 손에 들었을 때, 그렇게 쉽게 술렁술렁 읽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신이 마비된 장 도미니크 보비가 힙겹게 완성한 한 권의 얇은 책. 과연 그 안에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담았을까. 나비처럼 날고 싶은 영혼을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잠수복 같은 육체안에 갖혀서,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철자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나아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작품들엔 그와 같이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가지 방법만 이용하더라도 책 한 권 읽는데 한주일은 우습게 넘어간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동안 설렁설렁 읽은 책들도 다시 손에 들게 된다.

내가 놓친 인물들 한명 한명들이 다 사랑스러워 진다. 5번도 더 통독한 폭풍의 언덕에서도 새로운 인물들과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이후에 만난 작품들 중에 '루이스 사폰' 의 [천사의 게임] 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접하게 되었다.

유럽 특유의 모호함과 서양 특유의 뚜렷한 분할, 스페인 특유의 음울함과 유럽 특유의 낙천적임이 말도 안되게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지금 막 종장을 덮은 [한밤의 궁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선과 악 - 그리고, 그 중 악에 속한 부분은 한없이 잔인하고 끔찍한것으로 이분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점을 가지고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고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뚜렷한 인과관계 속에서 개연성 있는 스릴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며, 권선징악의 동화적인 결말 또한 너무 2차원적이다. 

 확실히 가장 최근작인 [천사의 게임] 에 비하면 여러 부분에서 아쉬움을 준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콱 박혀진 베이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 내내 평면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만, 루이스 사폰이라는 작가가 초기작부터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한밤의 궁전]의 이야기는 인도의 캘커타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캘커타의 한 보육원에 살고 있는 7명의 고아 소년들. 절친한 친구사이인 동갑내기 소년둘 중 리더인 '벤' 의 출생의 비밀과 무시무시한 악당인 '자와할' 과의 숙명적인 대결. 작가는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디테일하게 그리려는 의도를 완전히 배재하고, [대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벤과 소년들은 피할 수 없는 [대결] 을 인지하고 그것을 준비해 나간다. 등장인물들의 성장이 그려지는 부분은 이 부분에서 아주 잠깐이다. 단호하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에 맞설 수 밖에 없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 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된다.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대결] 그 자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벤' 이 아닌 평범하기 짝이없는 소년 '이언' 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중간 편지문을 등장시킴으로서 이야기의 화자가 '이언' 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주지시킨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캘커타] 라는 도시 또한 상징적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인도. 모든 유럽인들이 황금이 넘치는 낙원.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신화와 전설의 나라, 인도. 각종 도시 괴담들과 정령,악령, 불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트레이트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이미지를 훌륭하게 자리잡아 나간다.

 

작품은 확실히 작가의 초기작답게 이야기를 간결하고 적확하게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적당히 독자들을 속이기도 하는데, 그 부분은 '자 이제부터 독자들을 속일겁니다' 라는 암시를 드러내 버려서 오히려 더 긴장하고 집중하게 만든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나를 속이는 걸까? 어느 부분을 어떻게 속이는 걸까?' 라고 의심하며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대결부분에 대한 정신없고 스펙타클한 묘사도 굉장하다. 아마 책의 클라이막스부분에서 책장을 덮은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오싹함과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 사폰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낯설지만 익숙하다.

흔히들 서양 문학의 정서 전달은 보다 직접적이고, 한국 문학은 보다 우회적이라고들 한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호러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면, 헐리웃 작품은 베고 썰고 죽이는 살인마들이 눈 앞에 불쑥 불쑥 등장하며 깜짝 깜짝 놀래킨다. 한편, 한국 영화는 뭔가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고, 나올락 말락 하다가,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며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루이스 사폰은 독자들의 감정을 그 두가지를 아주 잘 활용하며 쥐락 펴락 한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우며 대단히 능숙하다. 명확하지만 몽환적이고, 뚜렷하지만 음울한데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 역시 참 다들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벤의 이야기가 중심이기에 큰 비중 없이 배치되어 있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개성적이다.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더욱 길게, 많이, 오래 보고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주변에 멤돌게만 할 수 있었을지. 작가도 아주 아쉬웠을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에 악을 품고 있다.

위에도 언급했듯, 선과 악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지만, 누구나 양심이 가로지른 라인이 존재한다. 그 라인의 이쪽 편은 선이고, 저쪽편은 악이다. 때로는 선과 악이 혼합된 영역도 있으며, 그 두 가지가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삶의 대부분의 일에서 사실 선과 악을 구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너무나 완벽한 '악' 을 분별하는 방법은 있다. 바로 그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생각해내는 것이다. 때론 사랑에서 파생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증오에서 파생된 행위가 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없다. 증오는 언제나 악이다. 이분법적인 구분을 싫어한다고 몇번이나 언급했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안 한 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수 많은 것들 중에서 두 가지를 나눠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경우일 터다.

증오는 반드시 악을 파생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다면, 삶은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언제나 지글거리며 나의 살을 태워낼 뿐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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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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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무한한 욕망들 중 [권력] 에 대한 욕망을 가장 강렬한 것으로 보았다. 권력. 그것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만인지상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반장이나 회장, 학교의 '통' 이나 '짱'.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 나아가 대통령과 왕을 꿈꾸지 않는가. 권력은 남보다 뛰어나다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출나게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거나 특출나게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권력은 저절로 따라 들어온다.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나이는 권력과 비슷했다. 신분을 제한다면, 나이 든 사람은 언제나 어린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돈이고, 돈은 권력이다.
 

 작은 지방에 살던 장원두는 친구 재천으로부터 '마사오' 라는 인물의 부음을 듣는다.

마사오. 일제시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인물은 원두가 살던 지역을 주름잡던 최고의 건달이었다. 마사오가 지역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일단 그가 특출나게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터다. 남보다 큰 체격, 단련된 주먹, 켜켜히 쌓인 실전 경험. 그리고 주요 도로가 언덕과 안개로 둘러 있는 지리적 특성은 지역을 고립시켰고,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드나들 타지역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터라 마사오에 대한 소문은 좁은 지역 안에서 돌고 돌며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되며 [소문] 은 [신화] 가 되었다. 수컷들의 세계에서 폭력은 타인을 굴종시킬 수 있는 가장 쉽고 단순하며 직접적인 수단이다. 게다가 고립된 지방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젊은 축들은 모두 선후배 아니면, 옆학교에 그 옆학교 선후배들일테니, 폭력에 관한 한 누구보다 특출났던 마사오가 지역의 왕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버트란트 러셀의 저서 [권력Power] 을 기반으로 중국황조를 재조명했던 뤄위밍의 [권력 전쟁]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황위다툼이 소개되고 있다. 권력의 제 일 속성은 [시한부] 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아니, 그 전에 늙는다. 늙음이란 신체가 약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특출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도 늙는데는 예외가 없다. 특출난 신체 능력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는 신체 능력의 상실과 함께 권력을 잃는다. 중국 황조에서 가장 자주 일어났던 찬탈은 형제나 자식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것은 비단 중국 역사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왕이 스스로 자식들을 죽이거나, 자식이 아비를 폐위시키거나 죽이는 사례가 꽤 많다. 그와 비등하게, 개국공신이나 왕의 군사였던 자가 반역을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하다. 너무나 유명한 사례로 삼국지의 사마천은 결국 자신이 섬기던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3대에 걸쳐 무너뜨리고 '조' 씨 후손들을 남김없이 도륙하지 않는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가. 한나라 고조 유방도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한신을 믿지 못하고 그를 축출해 내며 그 유명한 고사인 토사구팽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2인자의 자리는 언제나 위태롭다. 하지만, 잘만 이용하면 1인자보다 더 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원두와 시냇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날 한시에 태어난 친구 '재천' 은 그렇게 쉽게 권력을 손에 넣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왕을 죽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도 없었다. 왕 옆에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왕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면, 왕의 오른팔은 만인지상 일인지하다. 만명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한명에게만 머리를 숙이면 된다. 이처럼 간단한 일이 어디 있을까? 재천은 일찌감치 2인자의 자리를 택한다. 시대의 흐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재천은 그것을 통해 능숙하게 자신의 권력을 튼튼하게 유지해 나간다. 마사오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누리고, 창용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누렸다. 그는 흐름을 읽는 본능이 있었으며,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소문' 이었다.

언론은 대중을 통제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민심이란 대중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대중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언론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들 중 하나인 연예계 스타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TV와 신문,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지는 수많은 '소문' 들이 대중들을 유혹하고,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재천은 바로 '언론 플레이' 를 깨달은 것이다.

 

 작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권력 다툼은 국가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마사오에게 '왕' 이라는 칭호가 어울리고, 그를 둘러싼 다툼들 또한 다르지 않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작전을 수정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힘있는 사람들과 만나 인맥을 쌓고,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향응을 제공하며 얼르고 달래며 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공포와 욕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끈끈한 공동체. 지역이 작으면 작을수록 유착의 유대는 단단해지고 끈끈해진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 를 보면 이장과 동네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물론 검찰, 지역의 유지들간에 이뤄져있는 단단한 끈. 작은 지역이면 지역일수록 그것은 권력을 보호하는 성채가 되고 보호막이 된다.

 

작품은 권력의 기본 속성을 꿰뚫고 있다. 필연적으로 권력은 정치와 연관된다. 재천은 타고난 정치 수완을 가지고 있었고, 경쟁자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것은 재천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이들보다 더욱 강렬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인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재천은 아마 점점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아름다움] 또한 권력이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물론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지만, '아름다움' 이란 생존이나 번식과는 다른 능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초능력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어디서나 그 시대에 맞는 아름다움을 타고난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굳이 '미녀는 괴로워' 같은 영화를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던 '연예계 스타' 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중심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모의 아름다움'이 기반하지 않던가. '예쁘면 모두 용서된다' 는 말도 있다. 아름다움 또한 시한부이다. 때문에, 현명한 미인들은 아름다움으로 잡아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자식도 죽였다. 현대엔 좀 다를 터다. 돈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의 한계점을 보다 멀리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그래서, 강한 남자들을 선택한다. 

 

 재천의 권력욕 뒤에는 한 여인이 있다.

세희. "대통령의 아내" 가 꿈인 세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면, 대통령의 아내가 되고 싶은 인물이었다. 세희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많지 않지만, 재천의 권력욕을 자극하는 사람은 바로 세희가 확실하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세희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작전은 세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수도 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정치가. 진정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측천무후 처럼. 세희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재천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아내가 되기 위해,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고 판단된 재천을 선택했고, 그를 정말로 대통령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마사오와 창용의 죽음 뒤에는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인 '원두' 는 욕심도 적당하고, 의욕도  적당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더 뛰어나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미움받지도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결단성이 미약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기회도 자주 놓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오래 살 것이기도 하다. 원두는 아마, 재천에게 끌려가기도 하고, 대경에게 끌려가기도 하며 모든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의 손끝에서 기록되는 법이니까.

 

 성석제 작가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는 변함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이 작품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6년이니, 그의 초기작이다. 독자들의 호흡을 빼앗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서사력은 그때부터 대단했구나, 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실 호흡이 가쁠 정도로 여백이 없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치달린다. 젊은 이야기, 젊은 문장. 화자인 원두의 인생을 훑어간 수많은 인물들의 명멸.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중간 중간 쉬어갈 만한 부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380여 페이지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원두가 품고있는 마사오에 대한 신화는 어렸을 적의 동경인 동시에, 광자에 대한 첫사랑의 순정이기도 하다. 원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인 세희를 재천에게 넘겨주듯, 마사오와 광자를 재천에게 넘기고 삶에 대한 모든 순수와 동경을 벗어낸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동경, 순수, 순정.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것을 모두 벗어낸 원두의 앞으로 삶은 무엇이 될까? 원두는 자신이 벗어냈던 동경이자 순수이자 순정인 마사오를 장례시키는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

 

누구나 마음속에 신화를 품고 산다.

어떤 인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꿈일 수도 있다.

원두에게 마사오는 신이었고, 영웅이었다. 신앙에 가까운 순수한 동경이자 우러름. 쫓을 수 없는 꿈이고, 이룰 수 없는 목표. 첫사랑인 세희와 첫 여자인 광자. 그리고 순정. 순수. 

한편, 재천에게는 현실적인 목표이자 한계이자 넘어야 할 벽이었고, 창용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세희에겐 무엇이었을까? 일단, 그녀에게는 형부였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마사오는 세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 야심이 넘쳤던 그녀에게 마사오는 밟고 올라서야 할 존재였을 터다. 

몸을 담 위로 일으킬 수 있는. 디딤돌.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권력의 손잡이를 쥐기 위해 바둥거리는 삶.

그리고, 냉소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삶.

 

고장난 망원경을 보며 불평을 내뱉는다.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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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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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 지나지 않던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정립한 것은 그다지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4대 문명이 발달된 것으로 추측되니, 사회와 국가라는 것이 원시적으로나마 체계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으로 보면 될 듯 하다. 그리고 수천년의 시간동안 인간사회는 거듭 발달해 왔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정신도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거대한 자연의 광포함 앞에서 인간 개개인은 먼지나 모래알. 혹은 개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필연적으로 인간들은 공동체를 이루었으나, 인간은 또한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문명이 발상한 그 무렵부터,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이 이기적인 동물들의 집단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공동체가 더 안전하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

그 결과 국가와 사회, 체제가 생겨났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집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공포' 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죽음' 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길래야 이길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태생적인 감정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이 근원적인 공포를 가장 잘 활용하는 인간이 인간사회를 통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종교' 였다. 죽음을 담보로 생을 손에 쥐고 있는 '신' 의 존재는 인간을 옴쭉달싹 할 수 없게 옭아맬 수 있었다. 고대 문명의 통치자는 제사장이었다. 중세 문명의 통치자 역시, 왕보다 높은 교황이었고, 그들의 권력은 현대문명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이르게 만드는 거대한 폭력이다. 폭력에 대한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있다. 폭력적인 사람에게는 권력이 있다. 종교와 폭력은, 그렇기에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공포와 함께 활용되는 또다른 수단은 바로 '욕망' 이다.

인간이 아무리 지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인간 또한 동물이기에 본능을 거스를 수 없다. 본능적인 욕망 중 가장 강렬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식욕과 성욕, 그리고 권력욕일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지배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권력욕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컷 원숭이들은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권력이 있어야만 안정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은 사회를 통치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식욕과 성욕을 제공하고, 권력욕을 억제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돈' 이다.

 

'1984' 의 세계는 철저하게 공포로 대중들을 통치하고 있는 사회이다.

'오세아니아' 국가 정부는 대중들을 조종하기 위해 온갖 것들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공포를 주입시킨다. 그리고 통치자인 '빅브라더' 를 신격화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한다. '신' 이 언제나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공포와 적들이 끊임없이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는 공포. 이 두가지의 거대한 공포가 대중들을 마비시킨다. 이 공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부는 끊임없이 언론을 조작하고, 역사를 날조한다. 대중들을 선동하고, 정보를 차단한다.

 

1984에 등장하는 세계는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뉘어 있다. 먼저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런던'. '영국 사회주의' 를 기반으로 성장한 '오세아니아'.

그리고 '동아시아' 와 '유라시아' 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두 나라 역시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로서 통치 방식은 오세아니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84가 그려내는 세계관은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소름이 쫙 끼칠 정도이다. 작품을 잘 읽어보면 동아시아는 중공 시절의 중국이 아시아를 통일했다면 가능했을 터고, 유라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를 확장하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내전이 공산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품속의 오세아니아 정부가 인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우리가 이곳 저곳을 통해 들어온 북한의 모습과 지나치게 닮아있지 않은가.

 

인간은 그다지 대단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에 약하고, 공포에 약하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 믿기 무서운 것은 믿지 못하고, 보고싶지 않은 것은 못 본 것으로 해버린다.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이중 사고' 는 실제로 우리도 우리 세상에서 똑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진실을 거짓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한 통로만을 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수백개의 통로를 낸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통로 한개만 있든,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있는 수백개의 통로가 있든, 예나 지금이나, 작품속의 세계나 현실 세계나 대중들은 기만당한다.

윈스턴 또한 희망과 의지, 사랑까지 포기하게 된다. 고통. 그리고 공포. 그 앞에서 인간의 신념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만도 못하다. 끊임없는 고통과 공포 앞에서 두개가 세개로 보이는 세뇌의 순간을 경험한다. 

 

'1984' 는 절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처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 이야기는 그야말로 너무나 현실적인 동시에, 너무나 끔찍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 무료함, 권태로움,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상실, 배신, 그리고 또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이런 것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와 자유, 시간들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작은 자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자유. 그것들은 우리가 누리고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들임을 알려준다.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1984의 빅브라더 체제의 오세아니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단순한 신상정보 뿐 아니라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투를 쓰는지, 어떤 친구들과 친한지 클릭 몇번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부나 해커들 뿐 아니라, 보이스 피싱으로 사기를 치고 물건을 팔고, 매춘을 하려는 무리들에게 까지 낱낱히 공개 되어있다.

게다가 우리는 실제로 북한과 전쟁중이지 않은가?? 정부는 보다 더 수월하게 대중을 조종하고 기만할 수 있다. 끊임없이 미국의 911 테러 조작설이나 천안함 피폭사건 조작설이 흘러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정 자유로운 국가라면 대중들이 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진상규명을 촉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에 최선을 다해 부응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결국 사회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이유는 촘스키 같은 살아있는 양심의 발언을 가로막지 않고, 그런 촘스키의 국외 추방을 주장하는 또다른 시민단체의 활동 또한 가로막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사법기관의 힘을 동원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1984' 의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빅브라더의 영국 사회주의나, 대한민국 MB민주주의의 본질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자유는, 바로 '비판' 의 자유이다.

옳고 그름을 신념에 따라 구분해서,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세상을 통찰하는 능력.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

 

눈을 뜨고, 귀를 열고. 거짓들 속에서 진실을 구분하는 능력. 정부와 언론에 기만당하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만가지의 정보들 중 진실은 1%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사회를.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바로 그것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아 그래 난 자유로워~ 난 그냥 이렇게 거짓은 거짓이라고 믿고, 하루는 하루대로 즐기며 살꺼야~' 라고 해도 된다.

그것 또한 당신과 나의 자유일테니.

하지만, 그런 자유를 선택한다면 빅 브라더에게 감시당하는 삶을 사는 윈스턴의 하루와 다를 것이 없을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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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세트 - 전2권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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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양에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면, 서양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있다.

동양 문화가 한자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듯, 서양 문화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 인문학에서 사마천의 사기가 필수 서적이듯, 서양에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필수 서적이다.

사마천의 사기 중, 역사의 흐름을 기술한 본기 말고 '열전' 부분은 언제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비견되곤 한다. 물론 플루타르코스가 1세기 늦었지만, 역사의 세계에서 1세기 정도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하다. 사마천의 천재성은 열전과 본기를 모두 아우르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열전만을 집필했다. 이 두 위대한 역사가들 중 누가 더 대단하냐를 논하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일 터. 동서양에서 탄생한 두명의 위대한 천재들은 태생에 연연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을 '위대한 인물' 이라고 여겼으며, 그들의 삶을 기술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비슷한 부분은 비단 '열전' 부분 만이 아니다.

이 두 역사서는 후대에 수없이 연구되며, 수많은 학자들이 한번쯤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사마천의 사기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모두 역자의 사관에 따라 내용이 많이 바뀐다. 한때는 그 때문에 너무나 다른 버전의 사마천의 사기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들이 판을 친 적도 있다. 역사서란 언제나 그런 법이다. 고대 한자어나 라틴어, 헬라어 모두 '문화와 역사 자체' 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후대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고, 가정조차 할 수 없는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완역' 이 아닌 이상, 저자의 시점과 관점을 벗어날 수 없고, 이 작품처럼 제목에 누군가의 이름 석자가 떡 하니 박혀있을 땐 더더욱 그렇다.

 

지난 해 작고하신 이윤기 선생님은 그야말로 '전문 번역가' 이다.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움베르트 에코, 니코스 카잔카스키, 카프카등의 작품을 주로 번역하셨던 이윤기 선생님은 다르게 표현하면 서양 문화 전문가라고도 일컬을 수 있을것이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 일 것이다. 풍부한 사진들과 함께 꼼꼼하게 해석된 그리스 로마의 신들과 신화들을 살펴보면 키득거리며 빠져들게 된다.

이 작품, '그리스 로마 영웅열전' 도 마찬가지이다.

책 서문에도 나와있듯 이 작품은 이윤기 선생님이 신문에 연재하셨던 글이 수정되고 추가되어 모인 책이다.

그래서인지, 문장들은 더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 특유의 인평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의 토대가 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말 그래도 '영웅 열전' 인평 모음집이나 다름없으니, 이윤기 선생님의 재기와 위트가 더욱 감칠나게 묻어난다. 비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인문고전들을 넘나들며 파악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폭넓게 인지하여 성격의 인과관계를 파악해 내는 통찰력 또한 뚝뚝 묻어난다.

 

이 책은 우리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소의 얼굴을 한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른 영웅 테세우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뒤이어 등장하는 통칭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의 일대기 또한 매혹적이며, 영화 '300' 의 주인공인 스파르트 군인들을 길러낸 정치가 '뤼쿠르고스' 의 이야기가 입맛을 자극한다. 책의 말미에는 위대한 현자 '솔론' 의 이야기가 그가 남긴 숱한 금언들과 함께 펼쳐지며, 마지막은 공정함의 대명사인 아리스테이데스가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데미스토클레스와 함께 등장하며 마치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주유에 버금가는 두뇌대결을 펼친다.

방금 내가 삼국지를 들먹였듯,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동서양의 직접적인 비교이다.

이윤기 선생님은 폭넓고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을 동서양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수많은 인물들과 비교, 대조시키며 인물을 평하는데, 정말 이해도 잘 되고 재미도 엄청나다.

 

단점을 하나 꼽자면 '짧다' 는 것일 터다.

평소 그분의 다른 저서였다면 1,2 권이 한권으로 나왔을텐데. 2권으로 분책되어 나온 것이 참 아쉽고, 막 트집잡고 싶을 정도이다!

두꺼운 책 붙들고 천천히 오랫동안 음미하고 싶은데, '어' 하니까 2권을 집어 들어야 한다.

이 부분 뿐 아니라, 이 책 자체가 위에 언급했듯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 모음이라 상당히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물론, 복잡함을 간결함으로 모으는 것이 삼라만상의 미덕이지만,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이 한 권에 테세우스의 이야기만 다 담았어도 페이지가 모자랐을텐데 말이다.

이윤기 선생님이 폭넓게 재해석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영영 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양 문화의 정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의 완역본을 읽기 전에 한번쯤 꼼꼼히 읽어보면 좋을 작품.

우리가 서양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좋은 교본이 될 작품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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